과신, 좌절, 봉헌! (히 11:23-26)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첫 주는 어린이 주일이고, 둘째 주는 어버이 주일이고, 셋째 주일인 오늘은 청년 주일입니다. 5월을 영어로 메이(May)라고 하는데, 이 말은 "청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5월을 젊은이의 달이라고 했습니다.
시인 노천명은 5월을 노래하기를 "젊은이여, 우리 모두 5월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거기에는 오염되지 않은 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5월 중 18일은 성년의 날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전통 의례에 의하면 이 날 만 20세가 되는 젊은이들에게 성년식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남자가 만 20세가 되면 땋고 다니던 머리를 올려서 상투를 틀고 그 위에 관을 씌워서 의관을 갖추어 줌으로써 어른 대우를 했습니다. 이를 일컬어서 관례라고 했습니다.
처녀가 만 15세가 되면 땋고 다니던 머리를 올려서 쪽을 찌워서 비녀를 꽂아 주고 어른으로 삼았습니다. 이를 비녀 계( )자를 써서 계례( 禮)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같은 의례들이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있다면 겨우 성년의 날을 만들어 놓기는 했는데 이 날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우리 교회를 보면 다른 교회에 비해서 청년 신자 층이 많은 편입니다. 심방을 해 보니까 20대, 30대가 무려 4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청년 주일을 맞이해서 청년 신자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해도 좋겠다고 생각이 되어서 준비를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 가운데 모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은 모세의 일생을 살펴보면서 특히 젊은 분들에게 성경 적인 교훈을 주려고 합니다.
모세는 출생부터 특이합니다. 그는 애굽의 지배 하에서 태어납니다. 아들을 낳으면 모두 죽음을 당할 때 그는 태어났습니다. 부모가 태어난 모세를 숨겨서 기르다가 커서 더 이상 숨겨 기를 수가 없게 되었을 때 모세는 갈대 상자에 넣어져 강에 버려집니다.
때마침 강 하류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바로의 딸이 구조해서 궁중에서 모세는 자라게 됩니다. 이때부터 모세는 파란 만장한 속에서 120년을 살아갑니다. 이 120년을 흔히 3기로 나누어 구분을 합니다.
첫째로 제 1기가 궁중생활 40년입니다. 이때를 가리켜서 자기 과신의 시대라고 합니다.
모세가 궁중에 들러간 후에 그는 궁중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먼저 학문 수련을 받습니다. 당시 애굽의 문명은 세계 제일입니다. 궁중 대학에서 세계 제일의 학문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무사로서의 소양을 쌓아 나갑니다. 그러다가 외침이 있을 때는 자신이 직접 나가서 싸워 이겨 승승장구합니다.
그리고 왕자 교육을 받습니다. 여러 명의 왕자들이 있었지만 모세는 그 중에서도 특출 났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당시 최상의 능력을 지닌 무사로서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이때 모세는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때를 자기 과신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보십시오. 모세는 젊습니다. 거기다 공주의 아들입니다. 기골이 장대했습니다. 스데반이 그를 평가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행7:20절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거기다 문무를 겸비했습니다. 어느 한 가지도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뭇사람의 동경의 대상입니다.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가능한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쯤 되면 자기 과신에 빠질 만도 합니다.
그에게는 과연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좌절, 실패, 포기 이런 것은 그의 사전에는 없습니다. 거기다 젊음, 용기, 꿈, 기개가 충천해 있습니다. 과연 하늘 아래 거치는 것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오늘날 젊은이들의 표상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이런 생각을 가졌고 불가능이 없습니다. 나포레옹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날 젊은이는 당돌하고 엉뚱하고 교만하기까지 합니다. 이때는 하나님도 별로 입니다.
자기 실력을 더 신뢰합니다. 아버지의 말씀도 별로 입니다. 저절로 큰 줄 압니다. 충고도 먹히지 않습니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안하 무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모세가 40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머리끝까지 자기 과신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불가능이란 그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때를 자기 과신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가 지나면 제2기로 들어갑니다.
둘째로 제2기는 미디안 생활 40년입니다. 이 때를 자포 가기의 시대라고 합니다. 또 좌절의 시기라고도 합니다.
비행기가 이륙을 해서 비상을 합니다. 신나게 하늘의 공기를 가르고 치솟아 올라갑니다. 그러면 이 비행기가 한없이 올라갑니까? 올라가다가 어느 궤도에 오르게 되면 수평을 유지하게 되고 또 시간이 다 되면 땅으로 내려옵니다. 독수리가 수직으로 비상을 하면서 창공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이 독수리도 한없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르다가 배가 고프면 이 땅으로 다시 내려옵니다. 하물며 사람의 이상과 꿈이라고 해서 한없이 올라가겠습니까? 올라가다가 어느 지점에 가서는 현실의 벽에 부디 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꿈과 이상은 산산조각이 나서 무너져 내립니다. 현실의 벽은 그 꿈이나 이상이나 용기를 곱게 놔두지 않습니다. 부수고 깨고 허물어뜨려서 다시 수정하게 만들어 줍니다.
모세가 하루는 목에 힘을 주고 공사장을 시찰하게 됩니다. 인부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보니까 하나는 애굽 인이고 또 하나는 히브리인입니다. 모세의 몸 속에는 지금 히브리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잠잠히 있던 피가 역류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애굽인을 붙잡아 한 번 친 것이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사 훈련을 받았으니 그 주먹이 얼마나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러고는 히브리인들이 칭찬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보기 좋게 자기를 과시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모세를 동조해준 것이 아니고 고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는 화가 났고 모세 체포령이 내려집니다. 모세는 그 즉시 애굽을 탈출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갔고, 40년 동안을 그곳 광야에서 철저하게 썩습니다. 궁중에서의 화려했던 모세는 하루아침에 초라한 인생으로 전락합니다.
생활은 마치 거지와 같이 되어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안락한 잠자리가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꿈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입니다.
드높기만 하던 이상과 기개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찬란하기만 하던 장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를 가리켜서 좌절의 시기, 자포 자기의 시기라고 합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성숙해집니다. 꿈도 많고 이상도 있고 용기도 가진 채 대학을 다니다가 졸업을 하고 직장에 들어갑니다. 가면 맨 먼저 부딪히는 것이 미디안의 광야입니다.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꿈도, 이상도, 용기도 누가 알아주지를 않습니다. 현실과 이상은 너무나 거리가 멀고 길은 험난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두터운 현실의 벽에 부딪힌 채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고는 모두 번민하고 고민하고 그럽니다.
처녀들이 20세, 23세 정도가 되면 참 꿈도 야무집니다. 이상도 높습니다. 이때는 세상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이 모두 내 것으로만 보입니다. 이때가 꿈을 먹고 살아가는 때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남자를 만나서 살다가 아이 하나를 낳게 되면 그때부터 꿈은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시장 가서는 100원을 깎느라고, 아기 낳아 기저귀 빨아 채우느라고, 머리를 빗었는지, 옷 모양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모르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그게 인간의 삶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공주의 아들로서 그는 한때 지나치리만큼 자신을 과신했습니다. 세상에 불가능이 없이 다 되는 줄로만 알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몹시도 교만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세상에 나와 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미디안의 광야 한복판에 내 팽개쳐져서 꿈도 깨지고, 이상도 부서지고, 희망이라고는 전무한 자리에서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채 푹 꺼진 자리에서 몸부림을 칩니다. 고뇌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실패의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내게 무엇이 잘못이 있었는가?" 낮은 자리에서, 초라하게 웅크리고 앉아서, 그는 자포 자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를 가리켜서 모세의 제2기. 미디안의 40년, 자포 자기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기가 지나면서 제3기가 시작됩니다.
셋째로 제3기는 마지막 40년, 자기 봉헌의 시기입니다.
모세가 광야 깊은 곳에서 초라하게 엎드려 깊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위대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구나"하는 깨달음이고, 또 하나는 "내가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안 되는 것도 있구나."하는 자기 성찰입니다.
그리고 그는 깊이 반성을 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입니까? 알고 보니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입니다." 이 얼마나 진지한 기도요 위대한 고백입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내가 제일이다." 하는 의식에 사로잡혀 살 때는 하나님은 그의 근처에도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냉정하리만큼 침묵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입에서 마침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무릎을 꿇고 자기 부정을 하니까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땅에 놓아 보라."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놓으니 뱀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도로 잡아라." 모세가 뱀을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네 손에서 지팡이를 놓으면 뱀이 되고 다시 집으면 지팡이가 된 것처럼 "너는 내 손에서 떨어지면 전과자요, 살인자요, 초라한 인생밖에 못되니 잔말말고 내 손에서 떠날 생각 말아라"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강한 메시지입니까?
두 번째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품에 넣어 보라."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다 내 보니 그 손은 문둥병이 발병해 있습니다. "너는 내 품을 떠나면 문둥병자 신세밖에 안 돼, 그리고 흉악한 살인자야, 그러니 너는 평생 내 품을 떠날 생각하지 말아라." 그런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암시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주저 말고 애굽으로 가라, 가서 고난받고 있는 내 백성을 구하라."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그제야 모세는 아무 소리 못하고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가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백성을 이끌고 나옵니다. 그래서 이때를 가리켜서 "자기 봉헌의 시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결국 하나의 성숙한 인간이 되어 자신의 노년의 삶을 하나님을 위하여 봉헌하고, 민족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기쁨으로 봉헌합니다. 이것이 모세의 인생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한때 젊기도 하고 뭔가 된다 싶었을 때 그때는 기고 만장했고 교만했었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도 별로 입니다.
교회에 가자고 하면 이 다음 늙거든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산으로, 강으로, 골프 치러 유유히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게 아니다 싶을 만큼 철저하게 부서지는 미디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침내 병원 침대에 누워보니 그게 아니구나 하고 깨달은 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실패를 하고 나서, 낮은 자리에 앉아 보니, 그때서야 비로소 그게 아니구나 하고 고백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 앞에 나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젊은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젊고 기회 있고 힘있고 용기 있을 때,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미디안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손에 잡혀 살아가도록 힘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품안에서 살아가도록 노력하십시오.
그것만이 여러분의 장래를 보장받는 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인생과 미래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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