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प्रवचन पूरा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by 【고동엽】 2022. 1. 19.

욥기42:1-10    

2006년 한 해의 마지막 날, 주일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도록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넬슨 만델라’(Mandela, Nelson Rohihlahla 1918~)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영국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백 인종 차별정책을 종식시킨 탁월한 인권운동가 이었습니다. 1963년 44세 때에 종신형을 선고받아 27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습니다. 1990년 2월 11일 72세에 석방이 될 때까지 감옥에서 은밀하게 민중을 이끌었습니다. 민주적 선거방식을 통하여 대통령이 되어 1994년 5월 4일 취임을 하게 되었을 때, 전 세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미래를 걱정했습니다. 오랫동안 극심한 인종차별정책에 시달려온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피의 보복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델라는 일체의 정치보복을 가하지 않고, 흑백의 화합을 위한 관용과 화해의 정치를 하였습니다. 혁명대신 백인 정권 지도자들과 대화와 협상을 통해 민주적인 통치 아래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공헌하였습니다.

그의 대통령 취임사의 한부분입니다.  
“우리 모두의 상처를 치료할 시간이 왔습니다. 우리를 갈라놓은 공간들을 채울 다리를 놓을 시간이 왔습니다. 새 시작을 할 시간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취임사는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정의가 있게 하소서. 우리 모두를 위한 평화가 있게 하소서. 우리 모두를 위한 일, 양식, 물 그리고 소금이 있게 하소서. 우리 모두가 우리 각자의 육체와 영혼이 이미 자유로워 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소서.”

350년 동안의 백인들의 인종차별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려 할 때, 분노와 보복대신에 용서와 화해, 화합을 위한 관용을 실천하였을 때,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욥과 그의 세 친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동방의 의인’이라고 칭찬받은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뜻밖에 다가온 재앙은 그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착하고 의좋던 열 명의 자녀들도 갑작스런 사고로 한꺼번에 세상을 떴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온 몸에 생긴 부스럼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고, 아내마저 등을 돌리고 그의 곁을 떠나 가버렸습니다.
그 때, 고통 받는 욥의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멀리에서 찾아온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었습니다. 이들은 너무나 처참한 욥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욥의 곁에서 소리 내어 울면서 옷을 찢고 가슴아파하며 일주일동안 한 마디도 말을 못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입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말은 위로라기보다 충고였고, 책망이었습니다. “죄 없이 망한 자가 있냐? 빨리 회개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세 친구가 번갈아가며 자신을 정죄하는 가운데 오랫동안 벌인 논쟁의 내용이 4장부터 31장까지 무려 27장의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논쟁의 분량입니다. 세 친구가 한 말을 모두 합하면 211절입니다. 그런데 욥의 반론은 457절이나 됩니다. 이 논쟁은 친구들의 침묵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렇게 변론이 끝난 다음, 욥은 비로소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을 만난 다음 욥의 변화입니다.    

1.회개였습니다.
고난의 과정에서 만난 하나님은 욥의 신앙에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고난당하기 전까지 경험했던 하나님과는 차원을 달랐습니다.  

42장5절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지금가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가 눈으로 본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42장2절입니다. “주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고난 중에 욥은 하나님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습니다. 친구들과 논쟁을 계속하는 동안 그 불만이 순간순간 튀어나왔습니다.  
욥기10:1-3입니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우니, 나는 이제 원통함을 참지 않고 다 틀어놓고, 내 영혼의 괴로움을 다 말하겠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겠다. ‘나를 죄인취급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로 나 같은 자와 다투시는지 알려 주십시오. 주께서 손수 만드신 이 몸은 학대하고 멸시하시면서도,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라도 됩니까?’”

욥기13:23-25에는 기도형식으로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내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피하십니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주께서는 줄곧 나를 위협하시렵니까? 나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을 뿐입니다. 주께서는 지금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나를 공격하고 계십니까?”

욥은 자신이 이토록 가혹한 고난을 받아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난을 겪으면서 만난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모든 오해가 풀렸습니다.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왜 자신을 고난으로 이끄셨는지!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섭리를 깨닫고 난 다음에야 이렇게 회개하였습니다.  

42장 3절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회개도 은혜 받은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고 하는 것은 곧 회개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짓는 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세상에서 내가 의로운 줄 알고 살수도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살아오면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시시각각으로 만나 주신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욥처럼 회개할 것입니다.

“주님, 우리의 생각으로, 말로 지은 죄악들을 회개합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였고, 부정적이고, 악의적인 말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많았습니다. 주님,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옵소서.”

2.용서입니다.  
욥기42:7,8입니다.“주께서는 욥에게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용서해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고, 어리석게 말하였지만 내가 그대로 갚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용서에 관한 교훈이 있습니다. 용서는 서로의 작용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대개 용서는 상처를 입은 사람이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내게 상처를 입히고서도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나만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경우에는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내 마음에서 그를 용서하지 않으면 문제는 그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의 죄는 엄밀하게 말하면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서 용서의 문제는 바로 나를 위한 나의 문제입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를 용서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내 몸에 병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미움, 분노, 증오, 저주하는 마음은 독과 같아서 내 마음에 품고 있으면 내가 피해를 받게 됩니다.
성경에는 용서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어느 날 주님께 물었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주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한다’하고 하면, 너는 용서해주어라.”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다가 죄를 짓는 것이 그 사람의 습관이 되게 해서 도리어 그 사람을 망치는 것 아닙니까? 나는 뭐 속도 없는 줄 아십니까?”
이렇게 말하면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어디 내가 하는  말대로 해보고서 그 결과를 보라니까! 그렇습니다. 용서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6:12에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욥의 친구들은 ‘진리’ ‘참’이라는 막대기로 욥을 치면서 괴롭혔습니다. 욥은 자기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회개를 독촉하는 친구들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그 많은 시간 논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그 친구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욥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고 용서하면 내 기도의 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3:7입니다, “남편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아내가 여성으로서 자기보다 약한 그릇임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사람으로 알고 존중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가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무지 기도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할 때입니다. 용서하면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하늘의문이 열립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잘못 되면 기도의 문이 닫힙니다. 부부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푸십시오.

열심 있는 한 남자 성도의 이야깁니다. 기도를 하고 싶으나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만 해도 입이 막히곤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다닌 것조차 고통스러웠고, 사회생활에서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유난히 공부를 잘 하지 못하였으므로 성적표를 가지고 가면 꼭 아버지께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것도 그 날 저녁 식사시간에 다른 식구들은 다 밤을 먹는데, 베개를 들고 서 있게 했던 것입니다. 4남매의 장남이었던 이 사람은 동생들 앞에서 자존심이 크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성적표를 받아오는 날마다 그렇게 벌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쌓여서 아버지와 관계된 모든 것이 싫어졌습니다. 직장의 상사도 아버지 같다는 이유로 아주 싫어졌고 어디서나 상사를 비난하고 욕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하여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른 것조차도 싫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힘들게 하고 미워하던 그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고는 기도도, 일도 잘할 수가 없었습니다.
최근에 키가 작은 것은 아빠를, 뚱뚱한 것은 엄마를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 머리가 나쁜 것은 아빠를, 얼굴이 예쁜 것은 엄마를 닮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을 나무라고 꾸짖을 것입니까? 기도할 것입니다,. 축복할 것입니다. 본인도 부모 탓하지 말고 기도하고 일어설 것입니다.  
어느 날 조용히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자기 마음의 방에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가 들고 있던 베개를 내려놓고 꼭 껴안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그 동안 얼마나 마음이 아팠니?” 그리고 아버지를 향하여 조용히 타이르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아들에게 그런 응어리를 심어줄 수 있단 말인가?” 이 분은 그 주님의 모습을 본 다음 대성통곡하며 울고 난 다음 얼굴이 천사처럼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35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수요 밤 예배에서 회중기도를 인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열기 위하여 기도의 열기 위하여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마당에 우리가 잊지 말고 하고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굳이 상대방을 찾아가지 않아도 먼저 마음으로 용서하십시오.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버리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그렇게 하십시오.  

3.회복과 축복의 시작입니다.
욥기42:10입니다.“욥이 주께 자기 친구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에, 주께서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는데, 욥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보다, 배나 더 돌려주셨다.”

이 말씀은 정말 귀합니다. 친구들을 용서하는 기도, 축복하는 기도를 드린 욥을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 그 바로 다음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욥의 삶에 회복과 축복의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 받기 전의 욥의 상태보다 갑절이나 더 주시는 은혜와 축복이 열렸습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1,2장에서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낳는 과정을 봅니다.
남편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고 하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을 잘만 낳는데, 한나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나의 마음에 브닌나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증오가 있었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자식을 주시고 자기에게는 주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불만과 불신이 있었습니다. 자식도 하나 낳지 못하는 자신이 한 없이 미웠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간절한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 기도 중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브닌나의 격분시킴 때문에, 울며, 괴로워서, 고통하며, 슬퍼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 후에 한나의 마음에 있던 모든 원통함과 격분됨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이스라엘 국부가 되었습니다.  
분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새 날이 밝았다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새 삶이 시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용서하고 나아갈 때에 새로운 하나님의 축복의 문은 열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주님 앞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새 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새해가 진정한 축복의 시작이 되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출처/최이우 목사 설교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प्रवचन पू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정교회의 비전  (0) 2022.01.20
영원을 준비하는 지혜  (0) 2022.01.20
너는 내 것이라!  (0) 2022.01.19
오병이어의 잔치  (0) 2022.01.19
비움과 채움.  (0) 2022.01.1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