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종말과 천국
막 4:30-32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땅에 심
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
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
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금년으로 49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종교개혁 주일에는 나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신앙이 얼마나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또 얼마나 탁해졌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메말라 가는 나의 신앙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 신앙의 순수함과 탁해짐의 영적 온도를 측정하는 기준은 나의 종말신앙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종말 신앙은 나의 신앙과 영적 수준을 측정하고 재어볼 수 있는 바로미터 입니다.
중세 기독교는 이 영적 온도계가 고장 난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신앙이 영적 수준이 형식적으로 흘러갔던 인본주의가 극성을 떨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중세기를 영적 암흑기라고 평가했습니다. 신앙이 그렇게 침체하고 형식화 되게 되면 먼저 감동이 사라집니다. 눈물이 말라 버립니다. 회개가 없어집니다. 그것이 탁한 신앙입니다. 공기가 탁해지면 별이 보이질 않습니다. 멀리 있는 산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탁해져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은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본질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중세에는 신앙의 본질에서 이탈하여 인본주의의 극치인 형식화에 사로잡히고 매관매직을 하고 면죄부를 팔아 구원을 사고파는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런 행위를 해도 두려움이 없어진 영적 궤도를 완전히 벗어난 행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말신앙을 한번 다시 점검하고 우리의 신앙의 영적 온도를 측정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 주일에는 나의 신앙을 점검해 보는 시간입니다. 나의 신앙에서 종말관이 희미해지고 탁해져 있으면 내 신앙이 그만큼 순수성을 잃은 신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천국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종말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대가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여러 비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 탕자의 비유, 잃은 동전의 비유, 양의 비유, 누룩의 비유 등 여러 비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소개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비유의 소재는 겨자씨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의 상징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는 겨자나무는 어디서나 자랐습니다. 그래서 흔히 보는 풀이고 나무였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습니다. 그러나 자라면 보통 3-4m 가 되고 크면 7m까지 자랍니다. 그래서 새들이 깃들고 짐승들이 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작은 씨 안에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하고자 하는 뜻은 시작은 아주 작음을 뜻하고 후에는 아주 큰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은 천국이 마치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천국을 믿지 않았습니다.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님은 지금은 무관심해서 천국이 보잘 것 없고 무시고 있지만 때가 되면 천국이 우리 앞에 강하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천국의 모습을 겨자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현재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씨이지만 미래에 자란 후에는 크게 자라듯 장차 천국이 임하게 될 때는 신비롭게 큰 권능을 가진 나라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사람도 태어나서는 아주 작은 존재로 나타나지만 크면 건장한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나무들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새싹에서 시작하지만 자라면 큰 나무로 성장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도 오늘은 세계화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아주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셔서 훈련해 놓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후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나가 전도한 것이 비로소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하더니 오늘에는 기독교가 세계화를 이룬 것입니다. 마치 겨자씨가 자라는 과정처럼 그렇게 커졌습니다. 천국도 오늘 사람들이 기대도 하지 않고 믿지도 않고 겨자씨 같이 무시하고 관심도 없지만 어느 날 우리 앞에 때가 되면 위력 있는 나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을 사모해야 합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그 나라는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종말은 모든 사람에게
사람은 모두 한번 죽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히 9:27)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죽음과 종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삶이고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으면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입니까. 그것이 참 궁금합니다. 그때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된다고 증언합니다. 그 심문은 하나님이 직접 하지 않고 아마 천사들이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천사들은 나에게 무슨 말을 물을 것인가 그것도 궁금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수험생들이 수능을 준비하고 면접을 준비하듯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 생각해 보면 그때 천사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당연한 말씀입니다”하고 대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또 물을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과 이유를 말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때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앙의 업적이나 공로를 내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직분이 무엇이고 얼마만큼 수고했고 헌신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천국에 들어가는 일과 직분과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천국에서 상을 받는다면 참고가 될는지 모르나 천국에 들어가는 데는 직분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고급직분일 수록 천국에 들어가는데 불리할 수도 있습니다. 고급 직분 자들일 수록 책임 있는 삶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까하고 물을 때는 이력이나 직분을 말하는 것 보다 더 현명한 대답은 겸손함입니다. “나는 죄인 중 괴수입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오히려 겸손한 대답이 더 인정받는 대답이 될 것입니다. 천국은 겸손한 사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더 보충 설명하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자격이 없지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 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아주 똑똑한 대답입니다. 이 정도면 베드로의 고백 이상의 대답이 됩니다. 그러면 천사들도 더 이상 물을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때 수많은 성도들이 한 줄로 서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여러 줄로 서서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치 입국 수속할 때처럼 여러 줄로 세워놓고 여러 천사들이 심문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저 혼자 상상해 보는 내용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때 줄을 잘 서야 합니다. 입국 수속할 때도 아무 줄이나 서지 말고 수속관의 인상을 보고서야 합니다. 나쁜 인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꼬치꼬치 묻습니다. 그리고 짐도 보지 않아도 될 것을 어떤 분은 자세하게 뒤져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훈련소에서 주일날 교회 갈사람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 나와 줄을 섰습니다. 그때 고참이 생각했습니다. 이 훈련병들이 다 교회가면 청소는 자칫하면 자기가 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인가 조사해 보려고 줄을 세워놓고 한 사람씩 주기도를 외워보라고 했습니다. 오래 다닌 사람들은 척척 외우고 교회에 갔는데 농땡이 친 사람들은 어렸을 때 교회에 몇 번 가서 외웠던 것을 간신히 기억을 되살려 외우느라 애썼습니다. 그때 맨 뒷줄에 서서 어렸을 때 기억을 되살려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던 녀석 차례가 되었습니다. 주기도를 외우려고 하는데 고참이 갑자기 “너는 사도신경을 외워보라”고 했습니다. 낭패는 그렇게 해서 찾아옵니다.
상상해 보면 천국에도 좀 까다로운 천사가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른 천사들은 대답을 듣고 그냥 통과시키는데 내 앞에 있는 천사는 대답을 듣더니 추가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설명해 보라”고 말입니다. 이런 천사를 만나면 진땀을 빼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때 그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누구나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때는 당황하지 말고 사도신경을 외우듯이 자신 있게 이렇게 대답하면 좋을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천사라고 하지만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모독하는 거요, 주님이 나와 상관있다고 했는데 왜 당신은 말이 많소” 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우리는 천사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들이 구원받아 올라오는 것을 보고 천사들이 흠모한다고 했습니다. 천사들은 구원받는 영광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그리고 한마디 더 할 수 있다면 “당신이 아무리 천사일 지라도 나와 주님과 맺어져 있는 그 사랑의 줄에서 끊을 수 없을 거요, 나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믿고 살다 왔소”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천사인들 더 말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멋과 진가는 용기와 확신과 자신감 있는 태도입니다. 그런 모습 앞에서는 사탄도 오금을 피지 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멋은 그런 자신감과 확신 있는 삶의 태도에서 나옵니다.
젊은이들에게서 가장 추하게 보이는 것은 용기도 없고 자신감도 없는 모습입니다. 젊은이는 모험하는데 있고 도전하는데 젊은이의 기상과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가장 보기 싫은 모습도 그 태도가 불확실하고 용기가 없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도, 부활에 대해서도, 천국에 대해서도, 문제 앞에서도 당당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말
이 세상은 돌고 도는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불교의 세계관은 돌고 도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는 천지창조의 시작이 있었듯이 언젠가 반드시 종말이 온다고 예고했습니다. 나에게도 그 종말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과 이 세상과 우주에도 종말의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사라지거나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두 가지 면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
하나는 현실의 삶에 충실한 것입니다. 천국은 미래에나 그리고 죽어서나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천국은 오늘을 충실하게 살지 않은 사람은 가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미래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오늘 현실의 삶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은 오늘의 삶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즐긴다는 말은 타락된 즐김이 아니고 기쁨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앞으로 갈 천국의 삶을 오늘에 먼저 앞당겨서 누리는 삶이 즐기는 삶입니다. 천국의 삶은 먼 훗날 살아가는 삶이 아니고 오늘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 훗날 천국의 삶을 위해서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다가올 천국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심판, 천국, 부활에 대해서 별로 설교도 안하고 말도 안하고 관심도 없는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 까지 천국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중세기의 기독교 신앙은 오늘처럼 인본주의로 너무 치우쳤습니다. 너무 오늘 현실의 삶에 집착했습니다. 영적분야에는 관심 밖으로 하고 오직 세속화의 길을 걸어가는데 일반인이나 교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두려움을 잊은 채 성직을 팔고 면죄부를 팔아 교회를 짓는 두려운 일을 자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시대에 천국을 말하고 종말신앙을 기억이나 했겠습니까. 인본주의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현상을 종말신앙의 약화와 천국개념이 희박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말하면 사람들이 “누가 가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거든 정색하고 “그러면 당신은 천국이 없는가 가서 보았느냐” 하고 물어야 합니다. 다가올 천국을 위해서 오늘을 소홀히 하는 삶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건강하지 못한 기독교나 교회 신자는 자꾸만 내세만 강조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오늘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이다음 죽어서 가는 천국을 강조합니다. 종말을 대비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천국에 갈 준비를 잘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올바른 천국 가는 준비는 앞으로 주어질 천국만이 아니고 이 지상에서 현재에 주님과 함께 천국의 삶을 누리고 황홀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현재가 없는 천국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현재의 삶을 부정하고 천국의 삶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옥은 왜 지옥인가 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주님이 안계시기에 그곳이 지옥”입니다. 만일 지옥에 주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천국을 포기하고 지옥을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지옥입니다. 또 하나는 “지옥은 불행한 곳”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곳이면 그곳을 지옥이라고 했겠습니까. 지옥은 어느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지역의 문제도 아닙니다. 지옥은 내가 가지 말아야 할 곳이고 내가 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그러면 그 지옥을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나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면 결국에는 아주 목말라 죽어가는 지옥의 운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천국의 삶
그러면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천국은 지옥의 반대개념입니다. 안식과 휴식의 세상이 천국입니다. 성경은 천국을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아픔도 눈물도 수고도 없는 안식의 세계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완벽한 안식과 휴식이 있는 곳이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찬양이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 나라 천국을 이루는 출발점은 무엇입니까. 천국의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심겨지기 전에는 아주 작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에서 천국을 소개하면서 겨자씨를 소개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개개인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종말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날을 우리는 예약 받아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입니까. 그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내용이고 이유입니다. 종교개혁주일에 우리는 진정 종말신앙을 준비하며 천국 관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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