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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불신의 이유(요한복음 5장 37절~47절)

by 【고동엽】 2023.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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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이유(요한복음 5장 37절~47절)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한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등에 업고 광야를 건너갑니다.

이 아버지는 광야길에서 우연히 친구와 마주쳤습니다. 인사를 나눈 친구가 묻습니다. "등에 업은 아이가 누군가?" "내 아들일세." 이 친구는 짓궂게도 등에 업힌 아이에게 또 묻습니다. "너를 업은 이 사람이 네 아버지냐?" 아이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아니예요. 우리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기가 차서 아이를 내려놓고 정색을 합니다. "내가 네 아버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당신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어떻게 믿어요?" "내가 너를 이렇게 업고 가지 않느냐?" "종도 나를 업을 수 있고 노예도 나를 업고 갑니다. 나를 업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내 아버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너를 먹여 살리지 않느냐?" "반드시 아버지만 먹여살립니까? 삼촌도 먹여주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먹고살 수 있지요." 아버지는 너무나 답답해서 누누이 설명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아이는 아버지라는 확실한 증거를 대라고 우깁니다-이스라엘사람들의 민담(民譚)한 도막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인도해낸 여호와 하나님, 너희 아버지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버지됨을 불신하는 것은 나의 자녀됨을 불신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아버지를 부정하고 있는 한 나는 사생아가 되고 고아가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일을 믿습니까? 혹시 앞의 아이처럼 부모를 의심해본 적은 없습니까? 이런 것은 누구에게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은 불신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행복의 조건이 충족되지 못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행복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거나 누구에게나 자신을 설명할 때에는 충분히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나 자신은 그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불신이 불행을 낳습니다. 종종 "아이고, 저는 몹시 불행합니다"라고 하소연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가만히 그 사람의 처지를 살펴보면 절대로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당신처럼 되어보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도 많고 당신을 우러러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행하다고 하십니까?" "아니요, 저는 누구보다도 더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왜 불행해집니까?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소유보다 지식입니다. 소유한 것의 가치와 그 목적과 용도와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아는 데서 행복이 옵니다. 그러나 알고도 믿음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믿는 만큼만 지식이 지혜로 통합니다. 믿을 때에 비로소 그 아는 것이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됩니다.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이치를 다 깨닫고 망망대해(茫茫大海)와 같은 지식을 품었다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믿지 않으면 무용지물(無用之物)입니다.

지식과 믿음은 결코 하나가 아닙니다. 별개입니다. 안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성경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암송합니다. 깊은 진리를 깨달은 바도 많습니다. 그러나 믿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아무런 능력도 나타남이 없습니다. 아무런 유익도 누리지 못합니다. 결국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는 간혹 제게 와서 "하나님이 정말 계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믿습니까?"하고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잖은 질문이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반문합니다. "자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는데, 얼마나 많이 읽었나?" 대답은 거의가 천편일률적입니다. "예, 조금 읽었습니다." "그래, 몇 번이나 읽었나?" "마태복음을 좀 읽었습니다."하도 기가 막혀서 따끔하게 이야기해줍니다. "자네, 영어 공부를 얼마나 했는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한 십삼사 년 했습니다." "영어 잘 하는가?" "잘 못합니다." "13년이나 공부하고도 영어가 시원치 않은데, 단 한번도 통독하지 않았으면서 어찌 이 생명의 말씀, 이 영생의 진리가 믿어지기를 바라는가? 자네는 참 교만하구먼.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을 단 한번도 통독해 보지 않고 믿어진다, 안 믿어진다 하는가? 자네 정도라면 적어도 열 번은 읽었어야지. 그리고 나서 나하고 다시 이야기해보세." 이렇게 말해줍니다. 여러분, 그 얼마나 진리에 대한 모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아는 것이 다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었습니까? 아니, 그것을 믿고 있습니까?

헬렌 켈러의 일생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장님이요 귀머거리요 벙어리의 삼중고(三重苦)를 겪어야 했던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는 훌륭한 스승의 도움으로 고난을 딛고 일어선 사람입니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큰 일을 많이 했는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사흘 동안만 눈을 뜨게 해준다면 나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첫날은 나에게 친절과 우정으로써 삶의 가치를 알게 해주신 귀한 분들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두루 다니면서 예술을 통하여 사람의 영혼을 탐색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셋째 날은 하루종일 길거리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일상생활을 살펴보고 싶습니다"-사흘 아니라 일생을 밝히 눈뜨고 살면서 우리들은 정말 행복합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래, 옳다'고 수긍은 하지만 감격하지는 않습니다. 왜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감사하지 못합니까? 왜 하나님의 전(殿)에 모일 때마다 벅찬 감격이 넘치지 않습니까? 식탁을 앞에 두고 왜 눈물겹게 감사하지 못합니까? 왜 행복하지 못합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으로야 이치가 분명합니다. 논리적으로야 행복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습니다. 알면서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존재의 뜻, 존재의 가치를 믿어야 합니다. 진리의 능력, 의와 선의 최종 승리를 믿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제를 믿어야 하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섭리를 믿어야 하고, 그 안에 있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믿어야 합니다. 모든 진리 모든 사건이 추상적인 것이지만 믿음으로써 실제가 되고, 모든 이치가 다 객관적인 것이로되 믿는 정도만큼 주관화되어 내 것이 됩니다. 사회학자들은, 건강한 사회와 병든 사회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건강한 사회는 믿을 수 있는 사회, 믿는 사회이다. 건강치 못한 사회는 적대감과 의심과 불신의 사회이다'-병든 사회는 단적으로 말해서 불신사회라는 것입니다. 인격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은 만사를 의심합니다. 단 한 가지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끝내는 자신까지도 못 믿을 정도에 이르고 맙니다. 세상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병든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속을 때 속더라도 믿습니다. 끝까지 믿습니다. 이것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것을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 믿으려는 사람을 믿게 할 도리는 없습니다. 안 믿는다는 것 자체가 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안 믿는 사람, 그래서 결국 믿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불신(不信) 자체가 이미 심판입니다.

불행이 지불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격의 파멸이며 자기 존재의 상실입니다. 마가복음 9장 19절을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변화산 위에 계실 때, 산밑에서는 아홉 제자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데려와 귀신을 쫓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제자들은 일전에도 이런 능력을 행하였던 경험이 있습니다마는, 아무리해도 귀신을 내쫓지 못합니다. 크게 망신을 당합니다. 제자들이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산을 내려오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어찌 이리 무능하냐? 어찌 이렇게 비참하냐?" 책망하셨습니까?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믿음이 없는 세대여!" 탄식하셨습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을 힘입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힘입을 수 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개탄하십니다.

믿음이 능력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고백도 제자들의 고백과 같아야 합니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요한복음 9장 3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신 소경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한복음 20장 31절은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믿음의 문제는 곧 생명의 문제입니다. 믿을 때에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을 주시고 이적(異蹟)과 권능을 행하시고 표적을 보이시고 비유로 가르치신 모든 사역의 목적은 오직 하나, 믿음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나의 이적을 보고서 나를 믿으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으라'-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얻은 지식으로 충분합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곧 이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내가 모세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나 너희가 믿지 아니하였다. 그러니 나를 못 믿는 것은 당연하다. 모세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영적 사례(事例)를 보여주는 케이스북(casebook)입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귀한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많은 역사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친히 보내셨습니다. 믿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감동하시나 그 역사를 거절합니다. 결국, 믿음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증거 한다'고 말씀합니다. 증거란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말씀의 사건화(事件化)요, 약속의 현실화(現實化)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증거한다'라는 표현은 136회가 사용되었는데 그중 77회가 요한의 기록에 나타납니다.

요한은 증거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내가 보았다, 만졌다, 그러니 내 말을 받아들이고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이것이 너의 경험이 되고 너의 사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달나라 여행을 하고 온 어윈 대령을 만날 흔치않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1시간 가까이 사담(私談)을 나누며 달나라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보라고 청했더니 신이 나서 설명합니다.

듣고 있는 내가 마치 달나라를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의 감격이 내 것처럼 전해집니다. 달에서 지구를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답니다. 총천연색으로 영롱하게 빛난답니다.

우주전체가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느라니 나도 죽기 전에 한번 가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는 고공(高空) 비행사 중에서도 최장시간을 비행한 축에 드는데도 달나라 여행을 위해서 3년 간 특별훈련을 받았답니다. 자는 것, 먹는 것, 심지어는 감정 상태까지도 철저하게 훈련을 받고야 비로소 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달라졌습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안가고 말겠다. 당신의 경험을 믿고 내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내가 가보아야 합니까? 그의 증거를 듣는 동안 그의 경험이 나의 경험이 되고 그가 체험한 모든 사건들이 내가 겪은 사건이 됩니다. 안 믿고 못 믿을 까닭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불신에 대하여 세 가지 진단을 내리십니다. 첫째는 믿지 않으려고 하는 악한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신의 죄요, 악령의 역사요, 마귀의 조종입니다. 마귀는 본래적으로 불신이니까요. 안 믿으려는 사람을 믿게 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처음부터 마음을 비뚤게 먹은 사람을 어떻게 돌려놓습니까? 어떠한 증거를 갖다대더라도 여전히 막무가내입니다. 증거 불충분이 아닙니다.

어떤 부부가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고아원에서 아이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았습니다. 아이에게 남아 있는 나쁜 버릇을 고쳐주느라 정성을 다해 애를 씁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부모가 먹다가 침대맡에 둔 과자가 없어졌습니다. 부모는 필시 아이의 소행이겠거니 여기고 묻습니다. "여기 둔 과자 네가 먹었느냐?" "아니요." 부모는 아이가 거짓말까지 한다고 생각되어 몹시도 언짢았습니다.

"네가 먹었어도 괜찮다.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사줄 수 있다마는 속이는 것은 용서 못한다!" 부모는 아이가 고아원에서 자라 되지 못한 것을 배워 체질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저히 사람 만들 수 없겠다고 포기하고 도로 고아원으로 쫓아보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의 일입니다. 밤중에 옷장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살펴보니 옷장 뒤에 과자 봉지가 있었습니다. 쥐가 물어다놓은 것입니다. 부모는 너무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이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고 다시 데려다가 훌륭한 사람으로 키웠다는 것입니다. 이 부모가 아이를 믿지 못한 것이 아이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마음 깊은 곳에 불신이라는 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불신이 잠재의식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편견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못을 박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불신의 원인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믿음이 없는 원인이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마음속에 있는 불신은 근본적으로 죄를 회개할 때에 사라집니다. 죄를 회개할 때에 믿는 사람이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랑할 때에 믿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저절로 믿어집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네 옛 어머니들은 학교라고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운 예가 많습니다.

요즘의 어머니들은 어떻습니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문제가 많습니다. 똑똑하니까 아이들이 무슨 얘기를 해도 쉽사리 믿지를 않습니다. "내가 속을 줄 아니? 다 안다" 하며 끝까지 믿어주지 않습니다. 그런 때에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고아가 됩니다.

이것만은 사실인데, 그 동안은 거짓말이었지만 이번만은 정말인데도 어머니는 믿지 않습니다. 옛날의 우리 어머니들은 어땠습니까? 아흔 아홉 번을 속였어도 백 번째에 와서 "어머니, 지난날은 잘못했습니다. 이번 한번만 더 용서해주십시오" 하면 "오냐, 내 아들아"하시며 다 믿어주었습니다. 세상에 어머니처럼 잘 속아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이 자녀를 훌륭한 인격자로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웃지 못할 소리가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은 실수를 해야 결혼을 할 수 있다"-무슨 말입니까? '세상에 나도 믿을 수 없는데 누구를 믿습니까? 어느 남자를 믿고 그 사람에게 일생을 맡깁니까?' 이렇게 따지고 들면 결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만큼은 믿고 자기 일생을 맡겨야 합니다. 그 순간의 실수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저 사람에게는 내 일생을 맡겨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실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믿게 됩니다. 의심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자가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세 번째로, 자기사랑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 자기중심적 사고, 독선, 자기 연민, 자기 도피, 자기 교만…… 이러한 것들 때문에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자기 교만이 깨어져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연후에 자기를 부인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상대방을 믿게 됩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자기 교만을 버리고 나서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때에 믿는 사람이 됩니다.

지식이 없어서 믿지 못합니까? 증거가 부족하여 믿음을 가지지 못합니까? 불신은 불신 자체에 원인이 있습니다. 불신은 자기 교만과 이기심에 대한 벌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엡 2:8). 믿어지는 그 순간, 그 사실은 내 사실이 되고, 그 사건은 내 사건이 됩니다. 그것이 사건화(事件化)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한 그 사랑이 내 사랑이 됩니다.

십자가를 믿는 한 그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고 그의 의롭다하심이 내 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사와 축복을 믿는 한 나에게 큰 지혜가 있으며 큰 능력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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