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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의 신비(마태복음 16장 24절~28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차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하다 순교한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Bon'haeffer, D.)는 말했습니다. '값싼 은총은 교회의 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귀한 은총을 위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여기서 '값싼 은총'이라 함은 참회 없는 자격, 교회 없는 세례, 토의 고백이 없는 성찬, 개인적 신앙고백이 없는 사죄---이러한 은총을 가리킵니다. 훈련 없는 은총, 십자가 없는 은총, 성육신 하시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없는 은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원합니다.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길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내가 잘되고 내가 성공하고 내가 명예로워지고, 내가 안일해지기 위하여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명쾌하고 선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나의 영생을 얻으려 하거든, 나의 평화를 얻으려 하거든, 나의 능력을 함께 얻으려 하거든, 그리고 나와 같은 영생의 길을 가려고 하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절) 하십니다. 첫째,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여 비워버리고 둘째, 자기 십자가를 그대로 지고 셋째,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우선하며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바로 그 자세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그리함으로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능력, 그리스도의 영생이라는 엄청난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은총입니다. 은혜는 은혜요 은총은 은총입니다 마는, 그것을 얻는 길은 모두 십자가에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 안에 살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평생토록 은혜 안에 살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은혜의 은혜 됨을 깨닫는 것은 거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은혜가 거저 은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동안 복된 생을 살수도 있습니다. 가령 부잣집에 태어나서 평생토록 돈걱정 한번 없이 살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함으로 인한 행복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유(富裕)하다고 행복이 당연히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돈으로 인해서 오는 기쁨과 행복은 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富)를 위하여 스스로 땀흘려 수고한 자만이 그 부로 인한 행복을 참으로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는 거저 얻을 수 있다 해도 부로 인한 행복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사람들을 가나안으로 보내실 때에 그들을 쉽게 이끄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의 영광과 행복은 광야 40년의 고통을 거친 사람만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이라고 하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미국의 관광 명소입니다. 저도 미국에 있을 때에 공부를 마치고 시간을 내어서 그곳을 가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가본 사람들이 일러주기를, 그냥 쉽게 가서 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차를 몰고 가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랜드캐니언까지는 자동차를 이용하면 아무리 빨리 가도 12시간은 걸리는데, 뜨거운 사막 길로 그렇게 내쳐 12시간을 달려간 다음에야 그 장엄한 참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리가 있다 싶어서 스스로 차를 몰고 길을 나섰습니다. 생전처음 가보는 길인지라 지도를 보면서, 물어가면서 정말 12시간 넘게 달려갔습니다. 이윽고 도착해보니 아니나다를까 눈앞으로 그 경이로운 장관이 일시에 확 트이는데, 참으로 굉장합니다. 장엄한 그 자연의 모습에 취해서 다섯 시간이나 두루 구경을 하고 돌아왔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다시 기회가 닿아서 그랜드캐니언을 한번 더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꾀가 나서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전과는 딴판입니다. 굉장하지도 신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삼십 분쯤 돌아보고는 그냥 돌아왔습니다. 같은 그랜드캐니언인데 느낌은 왜 이렇게 다른 것입니까? 열두 시간이나 차를 모는 수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입맛이 병든 것은 모르고 좋은 음식을 앞에 놓고는 맛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 안하고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까? 땀흘려 일해야만 입맛이 나는 것입니다. 잠만 자고 빈둥거리다가 먹으려니 맛이 있습니까, 소화가 됩니까? 수고한 자만이 입맛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음식은 줄 수 있어도 좋은 입맛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수고한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영생도 구원도 속죄도 하늘나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절)"---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만 참으로 기쁨과 감격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이 말씀은 역설적이면서 신비로운 진리입니다. 나무 십자가는 무덤을 상징합니다. 푸른 십자가는 병원을 상징합니다. 붉은 십자가는 적십자사의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루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 신앙의 표적이며, 그리스도 교회의 표적이며 하나님의 계시의 표적이다.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종교개혁의 주제도 실은 그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하자는 데에 있다.'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 '십자가 중심의 신학'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고통이라고 해서 다 십자가인 것은 아닙니다. 소는 뿔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뿔이 있다고 해서 모두 소는 아니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엄청난 고통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고통을 당한다고 모두 십자가를 졌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기 잘못으로 고생하기도 하고, 잘못 결혼해서 고생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기가 낳은 자식 때문에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사업을 잘못해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경우에 쉽사리도 "내가 십자가 졌다"라고 말합니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가 있으면서도 십자가를 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십자가에 대한 모독입니다. 고통이라고 해서 다 십자가라고 부르지 말 것입니다. 저주받은 고난, 심판 받은 고난, 내가 심어 내가 거두는 고난을 십자가라고 부를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란 참 고통이요, 죽음이요, 수치요, 우리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고난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전제조건이 따릅니다. 첫째, 자원적이어야 합니다. 억지로 당하는 것, 불가피하게 당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고 안질 수도 있는데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질 때,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책도 아니요, 무슨 저주 의식도 아닙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불평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면서 지는 그런 고통을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원흉은 가야바입니다. 하수인은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도록 재판한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군중 사이에서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우라고 고함을 지른 몇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로마군인입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건을 놓고 그런 저런 것을 예수님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위탁하면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입니다.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기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를 잘 알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비서가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이 사고로 장님이 되었으며, 그 비서 또한 장기간 치료를 요할 정도로 많이 다쳤습니다. 목사님은 그 참혹한 상황 앞에서 뭐라 위로할 말이 없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다는 약속 말고는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비서가 "목사님, 죄송하지만 뭐라고 기도해주실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신이 빨리 회복되고, 당신의 남편도 눈을 뜨게 해주십사 하고 기도 드리지요"라고 대답하자, 비서가 빙긋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죄송하지만 한마디만 추가해주세요. 내가 당한 이 시련과 고난이 헛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여러분, 고난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한 이 시련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해달라고, 높은 값의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그 final goal---마지막 목표를 알고 있습니까?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이루려 하시는지, 무엇을 준비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먼저 그 고난에 담긴 의미를 바로 알고, 그 고난을 참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이 고난을 당함으로 다른 사람이 살고, 내가 손해를 봄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내가 죄인이 됨으로 다른 사람이 의인되고, 내가 불행해짐으로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내가 십자가를 졌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랑을 위하여 고난을 대신 당할 때에 그 고난을 십자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가장 형식적인 특징은 침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비난을 받으시고 다시없이 모순되고 억울한 고난을 겪으시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한마디의 변명도 없이 침묵하셨을 뿐입니다. 침묵하는 고난에만 십자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리 불평하고 저리 원망하며 할말을 다하고 나서 무슨 십자가를 진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십자가가 아니므로 여기에는 영광도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말없이 묵묵히 믿음으로 저 앞을 바라보며 참고 견디는 것이 십자가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잃음으로써 구원하고, 줌으로써 얻고, 죽음으로써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며, 또한 어떻게 져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고난 당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 변명이나 원망도 없이 침묵과 믿음으로 지는 십자가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알고, 주님의 역사가 분명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참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십자가를 피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너무나도 크고 무겁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늘상 이를 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 예수님께서 나타나 그에게 묻습니다. "너의 십자가가 그렇게 무거우냐?" 그는 대답합니다. "예, 너무 크고 무겁습니다." "그럼, 여기 이렇게 많은 십자가들 가운데서 네가 질 수 있는 것을 하나 골라보거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살펴보았습니다. 큰 것 작은 것, 무거운 것 가벼운 것 해서 많은 십자가가 즐비해 있습니다.
그는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만져보고 한 다음에 그 중 제일 작아 보이는 것으로 골라서 그것을 지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자신이 고른 십자가를 살펴보니 거기에 자신의 이름이 씌어 있지 않습니까? 그 십자가는 자신이 지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볼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우리들 각자에게 적당한 십자가인 것입니다. 내 몫의 십자가는 나에게 합당한 것입니다. 내가 마땅히 져야 할 모든 십자가 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이요, 내게 적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지는 것이 바로 내 몫에 태인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결코 무거운 것도 무리한 것도 아닙니다. 내가 질 수 있는 것으로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벗으려고 하지 말 것입니다. 내 몫의 십자가를 이대로 지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내 죄로 인하여 당하는 것인가 하는 반성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몫의 십자가를 지면서 악은 잠깐이고, 선은 궁극적인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악과 모순과 고통은 잠깐 사이에 지나갈 뿐입니다. 궁극적인 것은 선이요 의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것을 믿고 지는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이것을 믿고 십자가를 질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믿음 속에 부활신앙이 있음은 이 때문입니다. 저 부활의 아침을 바라봅니다. 부활신앙이 기초가 되어 이것을 바라보면서 지는 고통이어야만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용서와 사랑의 승리를 믿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나는 나에게 고통을 주는 자를 용서합니다. 나는 원수를 사랑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용서와 사랑의 승리를 믿고 십자가를 질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언쟁으로 화가 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참고 견디세요. 그저 사랑하고 내가 잘못했다고 먼저 용서를 빌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에 가장 위대한 능력을 지닌 말은 '미안합니다'와 '감사합니다'입니다. 이런 말을 해서 비난받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먼저 말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 하는 말이, 그럴 생각은 있지만 내 편에서 먼저 사과를 하면 내가 정말로 잘못해서 사과하는 것으로 오인할까봐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고스란히 누명을 쓴 그대로, 억울함을 당하는 그대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영광도 바라지 않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죽어버립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엄청난 믿음이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승리를 믿습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능력을 믿습니다. 쓰러지는 밀 알 하나가 싹이 나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하여 저 아침을 바라보면서 믿음 가운데서 고난을 당합니다.
한 걸음 나아가, 우리는 감사함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내가 쓰임 받는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는 베드로와 함께 십자가에 순교했습니다. 순교할 때에 베드로는 나는 감히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똑바로 질 수 없다고 하면서 거꾸로 매달아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베드로는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안드레는 옆으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틀을 가져다놓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겠다고 하는 그 순간, 베드로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읊었다고 합니다. "내가 지극히 원했고 오래도록 구하여 마지않던 오 나의 십자가, 그대에게 매달려 죽은 주님의 제자로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대를 맞노라. 내 얼마나 오래도록 그대를 사랑하여왔던가." 이렇듯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달게 진 것입니다. 고난당하고 그대로 끝나는 것을 고맙게 여기는 마음, 바로 그런 마음으로 지는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사랑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서로 뜨겁게 사랑할 때에는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내 돈으로 음식을 사줄 때에도 좋은 것 비싼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어쩌다보면, 어느 때가 되면 그만 '주는 것'이 아까워지기 시작합니다. 사랑이 식었을 때에 그렇습니다. 사랑이 열렬할 때에는 상대를 위해 주는 것이 즐겁고, 상대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보람스럽습니다.
상대를 위해서는 사서 희생을 하고, 사서 고통을 당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고보면 계약만 남습니다.
여러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그의 제자된 모습으로 주님의 길을 따라가면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 자체가 감격스런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근본입니다. 이 십자가를 잃어버릴 때에 우리는 스스로 악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의 모든 거룩한 생활의 뜻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떠날 때에 우리는 자기 방종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의 모든 증거의 주제가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는 자기 자랑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의 모든 자랑의 대상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을 잠시라도 잊어버리면 자기 영광에 도취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 몫에 태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주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능력이 나와 함께 할 것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자는 두고두고 고생만 합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달게 지는 사람은 가볍게 져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 11)"---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알려 하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받겠으나, 구원의 능력을 아는 길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어찌하든지 죽음을 통하여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생의 철학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그대로 살았습니다. 저 유명한 독일의 성인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말했습니다. '십자가에는 구원이 있고, 십자가에는 생명이 있고, 십자가에는 원수를 이기는 힘이 있고, 하늘의 행복이 있고, 영혼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영혼의 즐거움이 있고, 덕의 극치가 있고, 영원한 완성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어떤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고, 십자가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자유할 수 없고, 생명도 희망도 십자가를 떠나서는 없습니다. 그대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밖에는 생명의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떠나서는 능력과 지혜를 알 길도 없고 받을 길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권능이 있고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에 신비가 있습니다. 이 크신 능력과 영광이 여러분 모두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십자가의 신비(마태복음 16장 24절~28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차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하다 순교한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Bon'haeffer, D.)는 말했습니다. '값싼 은총은 교회의 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귀한 은총을 위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여기서 '값싼 은총'이라 함은 참회 없는 자격, 교회 없는 세례, 토의 고백이 없는 성찬, 개인적 신앙고백이 없는 사죄---이러한 은총을 가리킵니다. 훈련 없는 은총, 십자가 없는 은총, 성육신 하시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없는 은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원합니다.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길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내가 잘되고 내가 성공하고 내가 명예로워지고, 내가 안일해지기 위하여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명쾌하고 선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나의 영생을 얻으려 하거든, 나의 평화를 얻으려 하거든, 나의 능력을 함께 얻으려 하거든, 그리고 나와 같은 영생의 길을 가려고 하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절) 하십니다. 첫째,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여 비워버리고 둘째, 자기 십자가를 그대로 지고 셋째,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우선하며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바로 그 자세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그리함으로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능력, 그리스도의 영생이라는 엄청난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은총입니다. 은혜는 은혜요 은총은 은총입니다 마는, 그것을 얻는 길은 모두 십자가에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 안에 살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평생토록 은혜 안에 살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은혜의 은혜 됨을 깨닫는 것은 거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은혜가 거저 은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동안 복된 생을 살수도 있습니다. 가령 부잣집에 태어나서 평생토록 돈걱정 한번 없이 살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함으로 인한 행복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유(富裕)하다고 행복이 당연히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돈으로 인해서 오는 기쁨과 행복은 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富)를 위하여 스스로 땀흘려 수고한 자만이 그 부로 인한 행복을 참으로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는 거저 얻을 수 있다 해도 부로 인한 행복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사람들을 가나안으로 보내실 때에 그들을 쉽게 이끄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의 영광과 행복은 광야 40년의 고통을 거친 사람만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이라고 하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미국의 관광 명소입니다. 저도 미국에 있을 때에 공부를 마치고 시간을 내어서 그곳을 가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가본 사람들이 일러주기를, 그냥 쉽게 가서 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차를 몰고 가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랜드캐니언까지는 자동차를 이용하면 아무리 빨리 가도 12시간은 걸리는데, 뜨거운 사막 길로 그렇게 내쳐 12시간을 달려간 다음에야 그 장엄한 참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리가 있다 싶어서 스스로 차를 몰고 길을 나섰습니다. 생전처음 가보는 길인지라 지도를 보면서, 물어가면서 정말 12시간 넘게 달려갔습니다. 이윽고 도착해보니 아니나다를까 눈앞으로 그 경이로운 장관이 일시에 확 트이는데, 참으로 굉장합니다. 장엄한 그 자연의 모습에 취해서 다섯 시간이나 두루 구경을 하고 돌아왔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다시 기회가 닿아서 그랜드캐니언을 한번 더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꾀가 나서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전과는 딴판입니다. 굉장하지도 신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삼십 분쯤 돌아보고는 그냥 돌아왔습니다. 같은 그랜드캐니언인데 느낌은 왜 이렇게 다른 것입니까? 열두 시간이나 차를 모는 수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입맛이 병든 것은 모르고 좋은 음식을 앞에 놓고는 맛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 안하고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까? 땀흘려 일해야만 입맛이 나는 것입니다. 잠만 자고 빈둥거리다가 먹으려니 맛이 있습니까, 소화가 됩니까? 수고한 자만이 입맛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음식은 줄 수 있어도 좋은 입맛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수고한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영생도 구원도 속죄도 하늘나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절)"---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만 참으로 기쁨과 감격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이 말씀은 역설적이면서 신비로운 진리입니다. 나무 십자가는 무덤을 상징합니다. 푸른 십자가는 병원을 상징합니다. 붉은 십자가는 적십자사의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루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 신앙의 표적이며, 그리스도 교회의 표적이며 하나님의 계시의 표적이다.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종교개혁의 주제도 실은 그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하자는 데에 있다.'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 '십자가 중심의 신학'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고통이라고 해서 다 십자가인 것은 아닙니다. 소는 뿔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뿔이 있다고 해서 모두 소는 아니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엄청난 고통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고통을 당한다고 모두 십자가를 졌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기 잘못으로 고생하기도 하고, 잘못 결혼해서 고생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기가 낳은 자식 때문에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사업을 잘못해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경우에 쉽사리도 "내가 십자가 졌다"라고 말합니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가 있으면서도 십자가를 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십자가에 대한 모독입니다. 고통이라고 해서 다 십자가라고 부르지 말 것입니다. 저주받은 고난, 심판 받은 고난, 내가 심어 내가 거두는 고난을 십자가라고 부를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란 참 고통이요, 죽음이요, 수치요, 우리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고난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전제조건이 따릅니다. 첫째, 자원적이어야 합니다. 억지로 당하는 것, 불가피하게 당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고 안질 수도 있는데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질 때,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책도 아니요, 무슨 저주 의식도 아닙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불평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면서 지는 그런 고통을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원흉은 가야바입니다. 하수인은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도록 재판한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군중 사이에서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우라고 고함을 지른 몇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로마군인입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건을 놓고 그런 저런 것을 예수님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위탁하면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입니다.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기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를 잘 알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비서가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이 사고로 장님이 되었으며, 그 비서 또한 장기간 치료를 요할 정도로 많이 다쳤습니다. 목사님은 그 참혹한 상황 앞에서 뭐라 위로할 말이 없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다는 약속 말고는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비서가 "목사님, 죄송하지만 뭐라고 기도해주실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신이 빨리 회복되고, 당신의 남편도 눈을 뜨게 해주십사 하고 기도 드리지요"라고 대답하자, 비서가 빙긋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죄송하지만 한마디만 추가해주세요. 내가 당한 이 시련과 고난이 헛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여러분, 고난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한 이 시련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해달라고, 높은 값의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그 final goal---마지막 목표를 알고 있습니까?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이루려 하시는지, 무엇을 준비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먼저 그 고난에 담긴 의미를 바로 알고, 그 고난을 참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이 고난을 당함으로 다른 사람이 살고, 내가 손해를 봄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내가 죄인이 됨으로 다른 사람이 의인되고, 내가 불행해짐으로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내가 십자가를 졌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랑을 위하여 고난을 대신 당할 때에 그 고난을 십자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가장 형식적인 특징은 침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비난을 받으시고 다시없이 모순되고 억울한 고난을 겪으시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한마디의 변명도 없이 침묵하셨을 뿐입니다. 침묵하는 고난에만 십자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리 불평하고 저리 원망하며 할말을 다하고 나서 무슨 십자가를 진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십자가가 아니므로 여기에는 영광도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말없이 묵묵히 믿음으로 저 앞을 바라보며 참고 견디는 것이 십자가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잃음으로써 구원하고, 줌으로써 얻고, 죽음으로써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며, 또한 어떻게 져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고난 당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 변명이나 원망도 없이 침묵과 믿음으로 지는 십자가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알고, 주님의 역사가 분명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참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십자가를 피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너무나도 크고 무겁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늘상 이를 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 예수님께서 나타나 그에게 묻습니다. "너의 십자가가 그렇게 무거우냐?" 그는 대답합니다. "예, 너무 크고 무겁습니다." "그럼, 여기 이렇게 많은 십자가들 가운데서 네가 질 수 있는 것을 하나 골라보거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살펴보았습니다. 큰 것 작은 것, 무거운 것 가벼운 것 해서 많은 십자가가 즐비해 있습니다.
그는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만져보고 한 다음에 그 중 제일 작아 보이는 것으로 골라서 그것을 지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자신이 고른 십자가를 살펴보니 거기에 자신의 이름이 씌어 있지 않습니까? 그 십자가는 자신이 지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볼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우리들 각자에게 적당한 십자가인 것입니다. 내 몫의 십자가는 나에게 합당한 것입니다. 내가 마땅히 져야 할 모든 십자가 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이요, 내게 적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지는 것이 바로 내 몫에 태인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결코 무거운 것도 무리한 것도 아닙니다. 내가 질 수 있는 것으로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벗으려고 하지 말 것입니다. 내 몫의 십자가를 이대로 지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내 죄로 인하여 당하는 것인가 하는 반성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몫의 십자가를 지면서 악은 잠깐이고, 선은 궁극적인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악과 모순과 고통은 잠깐 사이에 지나갈 뿐입니다. 궁극적인 것은 선이요 의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것을 믿고 지는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이것을 믿고 십자가를 질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믿음 속에 부활신앙이 있음은 이 때문입니다. 저 부활의 아침을 바라봅니다. 부활신앙이 기초가 되어 이것을 바라보면서 지는 고통이어야만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용서와 사랑의 승리를 믿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나는 나에게 고통을 주는 자를 용서합니다. 나는 원수를 사랑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용서와 사랑의 승리를 믿고 십자가를 질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언쟁으로 화가 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참고 견디세요. 그저 사랑하고 내가 잘못했다고 먼저 용서를 빌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에 가장 위대한 능력을 지닌 말은 '미안합니다'와 '감사합니다'입니다. 이런 말을 해서 비난받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먼저 말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 하는 말이, 그럴 생각은 있지만 내 편에서 먼저 사과를 하면 내가 정말로 잘못해서 사과하는 것으로 오인할까봐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고스란히 누명을 쓴 그대로, 억울함을 당하는 그대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영광도 바라지 않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죽어버립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엄청난 믿음이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승리를 믿습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능력을 믿습니다. 쓰러지는 밀 알 하나가 싹이 나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하여 저 아침을 바라보면서 믿음 가운데서 고난을 당합니다.
한 걸음 나아가, 우리는 감사함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내가 쓰임 받는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는 베드로와 함께 십자가에 순교했습니다. 순교할 때에 베드로는 나는 감히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똑바로 질 수 없다고 하면서 거꾸로 매달아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베드로는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안드레는 옆으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틀을 가져다놓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겠다고 하는 그 순간, 베드로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읊었다고 합니다. "내가 지극히 원했고 오래도록 구하여 마지않던 오 나의 십자가, 그대에게 매달려 죽은 주님의 제자로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대를 맞노라. 내 얼마나 오래도록 그대를 사랑하여왔던가." 이렇듯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달게 진 것입니다. 고난당하고 그대로 끝나는 것을 고맙게 여기는 마음, 바로 그런 마음으로 지는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사랑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서로 뜨겁게 사랑할 때에는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내 돈으로 음식을 사줄 때에도 좋은 것 비싼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어쩌다보면, 어느 때가 되면 그만 '주는 것'이 아까워지기 시작합니다. 사랑이 식었을 때에 그렇습니다. 사랑이 열렬할 때에는 상대를 위해 주는 것이 즐겁고, 상대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보람스럽습니다.
상대를 위해서는 사서 희생을 하고, 사서 고통을 당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고보면 계약만 남습니다.
여러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그의 제자된 모습으로 주님의 길을 따라가면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 자체가 감격스런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근본입니다. 이 십자가를 잃어버릴 때에 우리는 스스로 악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의 모든 거룩한 생활의 뜻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떠날 때에 우리는 자기 방종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의 모든 증거의 주제가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는 자기 자랑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의 모든 자랑의 대상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을 잠시라도 잊어버리면 자기 영광에 도취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 몫에 태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주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능력이 나와 함께 할 것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자는 두고두고 고생만 합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달게 지는 사람은 가볍게 져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 11)"---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알려 하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받겠으나, 구원의 능력을 아는 길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어찌하든지 죽음을 통하여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생의 철학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그대로 살았습니다. 저 유명한 독일의 성인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말했습니다. '십자가에는 구원이 있고, 십자가에는 생명이 있고, 십자가에는 원수를 이기는 힘이 있고, 하늘의 행복이 있고, 영혼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영혼의 즐거움이 있고, 덕의 극치가 있고, 영원한 완성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어떤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고, 십자가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자유할 수 없고, 생명도 희망도 십자가를 떠나서는 없습니다. 그대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밖에는 생명의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떠나서는 능력과 지혜를 알 길도 없고 받을 길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권능이 있고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에 신비가 있습니다. 이 크신 능력과 영광이 여러분 모두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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