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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고린도전서 16장 13절~18절)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
요사이 화장품 광고하는 C.F모델 중의 한 여자를 가리켜서 "산소 같은 여자"라고 말합니다. 산소 같은 여자---도대체 그 뜻이 무엇입니까? 시원한 느낌을 주는 여자, 보아서 시원하고, 만나서 시원하고, 사귀어서 시원한 여자라고 하는 희망사항이겠지요. 실제로 그런 여자가 있을까 싶습니다마는 '산소 같은 여자'라니, 아무튼 좋은 말입니다. 무릇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내가 받는 느낌이라는 것은 정직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강아지도 나름대로 느낌이 있으니까요. 일단 느끼고 나서 참느냐 이해하느냐는 그 다음 얘기이고, 만나자마자 일단 느끼는 것만은 틀림이 없지 않습니까? 이 느낌은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것입니다. 일단 느낀 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소화하느냐 하는 것은 자기 교양의 문제입니다. 때로는 신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느껴지느냐 하는 것은 정직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만나면 어떻습니까? 그와 함께 있으면 마냥 즐겁다고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있어요. 만나도 또 만나고 싶고, 헤어지면 아쉽고, 얼마든지 함께 있고 싶고, 잠깐 만난 것 같은데 벌써 여러 시간이 지나간 것 같은, 말하자면 산소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확실히 이런 좋은 느낌을 주는 좋은 분위기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 없으면 아쉽고, 있어도 별것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남자들의 양복 소매에 달린 단추 같은 사람입니다. 그 단추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있으나 없으나 별볼일 없는 것입니다.
또, 함께 있으면 따분하고, 지겹고, 답답하고, 그저 가능하면 안 만났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부부싸움 잘했다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쨌든 일평생 같이 살아야 될 사람과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싸우고 찝찝한 마음으로 출근을 한 남편은 퍽이나 괴로웠습니다. 그래, 점심때쯤 되어서 아내에게 전화를 겁니다. 요샛말로 '그냥' 전화를 건 것입니다.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저 미안하니까 전화를 걸어서 "여보, 별일 없소?"라고 합니다. 이럴 때에 아내가 '미안해서 그런가보다' 눈치채고는 "아, 무슨 일이 있겠어요? 저녁에 일찍 돌아오세요"라고 말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대답하는 말이 "별일 있어야 좋겠소?" 한다면, 이런 여자하고 살기란 고달픈 일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모처럼 화해의 손길을 펴면 그것 좀 모른 척하고 받아들이면 다 편안해지는 것을, 딱 걸고넘어지는 것입니다. 피곤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하고 살기 힘듭니다. 지겹지요.
니코마코스라고 하는 윤리학 교수는 우정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쾌락을 위한 우정이 있다고 합니다. 사귀는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그저 같이 만나서 얘기하고, 얼굴보고…… 그런 것 자체가 좋아서 만날 뿐이지 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유용성을 위한 우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유익한 것이 많습니다. 이득이 많고 배우는 것도 많고, 또 사귀어두면 이모저모로 유익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만나는, 그런 의미의 우정입니다. 세 번째는 덕성을 위한 우정이 있다고 합니다. 서로가 존경하기 때문에, 그 인격을 존경하기 때문에 만나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다 함께 얻을 수 있는 상대라면 가히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만나고 싶고 언제든지 함께 있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우정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시원함'이라는 것은 무거운 마음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마치 오랫동안 진 빚을 갚아주는 것 같고, 혹은 거침과 막힘이 있고 뭔가 어색해 있었는데 이것이 확 열리고 확 트이면서 해결사를 만난 것 같이 마음을 열어주는 그런 관계입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시원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궁금한 게 많을 때에 소식을 통해서 궁금증을 꺼주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에 잘 안되고 있구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아니다, 잘 되는 일이다, 라고 설명해줄 때, 깨끗한 마음으로 내 마음을 열어줄 때, 이런 관계가 마음을 시원케 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헤밍웨이의 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이란 무엇인가? 뒷맛이 좋은 것이다.' 선한 말, 선한 행위는 언제나 뒷맛이 좋습니다.
'악이란 무엇인가? 뒷맛이 나쁜 것이다.' 뒷맛이 좋을 리 없지요. 그런고로 다같이 느낌에 시원함을 주는 것이 바로 선한 것이다, 또 선한 것이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C.S. 루이스 교수는 말합니다. '인간은 에로스에 의하여 태어나고, 스톨게에 의하여 양육되고, 필로스에 의하여 성장하고, 아가페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헬라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말을 네 가지 의미로 나눕니다. 에로스라는 것은 이성간의 사랑, 스톨게라는 것은 부모 자식간의 사랑, 필리아라는 것은 친구간의 사랑, 아가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사랑 같은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인간은 확실히 사랑함으로 태어나고, 사랑을 위해서 살고, 사랑을 먹고살고, 사랑이 있는 한 살고, 사랑이 살아 있는 한 삶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실은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삶의 의미와, 이유 삶의 행복이라는 것이 어디서 오는가를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에밀 다킨스의 재미있는 시가 있기에 한 구절 소개합니다. "만일 내가 한 사람의 상심을 건질 수 있다면 내가 사는 것은 헛되지 않으리. 만일 내가 한 사람의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다면, 그 고통은 시원하게 해줄 수 있다면, 한 마리의 허덕이는 안락새를 구하여 그 둥지 속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다면 내가 사는 삶은 헛되지 않으리." 조금이라도 좋습니다. 사랑할 수 있고, 또한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시원함이 주어질 수 있다면 마침내 내 삶은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로 인해서 마음이 상한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쟁하는 교회였습니다. 불륜관계도 있고,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자도 있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복잡한 교회입니다. 그 많은 문제로 인해서 바울은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나깨나 그 마음이 무겁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당장에 달려가서 모든 것을 수습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몇 사람을 책벌해야 될 것 같고, 심판해야 될 것 같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야 될 것 같습니다. 문제가 어렵습니다. 또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금 더 기다리면서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다 해결된 맨 마지막에, 평안할 때에 가서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찾아갈까, 아니면 편지를 써보낼까'하며 아무튼 좀더 기도하면서 기다리려고 합니다. 기다리는 그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러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간다, 간다 하면서도 이런 이유로 인해서 가지 않고 있을 때에 주위의 비난도 많았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는 담대하지만, 만나면 졸렬하고, 큰소리는 펑펑 치지만 만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별로 좋지 못한 말이 들려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위하여 지금 그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 참고 견디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바로 그런 중에 세 사람이 고린도교회로부터 왔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세 사람입니다. 스데바나, 이 사람은 유일하게도 사도 바울이 세례를 베푼 사람입니다. 스데바나라는 말은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브드나도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행운'입니다마는 그는 아무래도 종의 신분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또 한 사람, 아가이고가 있습니다. 아가이고는 '아가야 사람'이라는 뜻인데 노예의 신분에 해당하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스데바나가 두 노예를 데리고 여기에 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18절)"--정말로 산소 같은 사람들입니다. 시원하게 했다,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바울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느냐, 또 무엇을 행했기에 시원하게 했느냐를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 누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느냐, 오늘의 본문을 보면 저는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15절)"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작정한 사람---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아무 때나 만나도 불쾌합니다.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어떤 사귐에 있어서도 '저 사람,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구나'하고 느껴지는 순간부터 우리의 기분은 좋지 않습니다. 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사람---섬기기로 작정한 사람 또한 중요합니다. 여기에 second decision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충성할 뿐더러 성도 섬기기로 작정했습니다.
또, 세상에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뭐냐하면 변덕입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 오늘은 좀 좋았다가 내일은 일기 변하는 것처럼 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다. 한번 섬기기로 했으면 꾸준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한번 봉사하기로 맹세했으면 죽는 날까지 봉사해야지 무엇을 그렇게 이랬다저랬다합니까? 저 사람은 틀림이 없다, 남은 생애를 성도 섬기면서 살기로 결심하고 작성한 사람이다--이런 사람을 만나면 편안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 교회에서도 보면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이 이 소망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바치기로 작성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편안하겠습니까? 걸핏하면 다른 교회로 갈까요, 이런 소리나 하고, 마음에 안 든다고 자꾸만 어떻게 하려는 변덕쟁이를 만나면 아주 힘들어요. 여러분, 성도 섬기기로 작정했습니까? 변함없이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메리히 교수의 말 가운데 '인간자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자본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사회에 있어서 인간자본이 될 수 있느냐, 아주 유익한 자본이 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돈 있는 사람, 지식 있는 사람, 학력 있는 사람, 경력 있는 사람이냐,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보다는 의욕이 있는 사람, 그 다음에는 책임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른 판단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사회에는 이런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사람에 의해서 사회가 바로 세워지는 것이다, 하는 얘기입니다. 정말로 섬길 줄 알고, 섬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봉사자가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마음을 시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복이 없는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없는 사람은 창의력이 없습니다. 내 마음에 충분한 감사함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섬김은 짜증스러운 것입니다. 반갑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고로 성도 섬기는 일, 이것을 즐겁게 여기고, 이것을 자기의 생애 목적으로 삼기로 결심한 사람---이런 사람을 만날 때에 시원합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을 보니 이 세 사람은 바울에게 좋은 기별을 주었습니다. 고린도교회 때문에 답답해하고 있는데, 이 세 사람이 와서 바울에게 얘기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지금 형편이 이렇고 저렇습니다---이 소리를 들으면서 바울의 마음이 시원해졌어요. 걱정하던 것이 사라졌어요. 때때로 만나면 참 편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안 만나면 괴롭습니다. 그런데 만나면 '큰일났습니다, 큰일났습니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큰일난 지가 언제인데 밤낮 큰일났다는 것입니까? 이런 사람을 만나면 괴롭습니다. 좋은 기별이 중요합니다. 잠언 15장 30절에 보면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좋은 소식을 들을 때에 척추가 윤택해진다, 건강해진다는 얘기입니다. 또 잠언 16장 24절에 보면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병들었던 사람도 좋은 기별을 들으면 윤택해진다, 병도 치유가 될 수 있다, 양약이 된다 하심입니다. 또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25장 13절에 보면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정말 이런 충성된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일을 시켜도 마음이 든든합니다. 또 그 결과가 그의 마음을 시원케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소식이 필요합니다.
저는 본 교회에서는 얘기를 잘 안 합니다마는 오히려 다른 교회에 갔을 때에 이것을 자랑합니다. 저도 아직도 그 분의 이름을 모릅니다.
실로암이라는 안과 병원이 있습니다. 이 병원에서는 개안(開眼)수술을 주로 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수술만 받으면 눈을 뜰 수 있는 사람이 오만 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수술을 받지 못하고 그래도 어둡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어떤 분이 자기 처지도 아주 어려운데 3년 동안 꼬박꼬박 적금을 부어서 두 사람이 수술할만한 돈을 장만해 가지고 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이것으로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원장 선생님이 너무도 고마워서 "이름이 뭡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왜 물어봅니까? 이름은 아실 것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도 알아야 되는데요. 기록도 해야 되겠고 하니 말입니다"라며 자꾸 물어보니까 딱 한마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소망교회 권사라는 것만 아세요." 그래, 그 원장 선생님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목사님, 소망교회 교인 참 훌륭합니다." 그리고 한마디 더합니다. "목사님 목회 참 잘하십니다. 그렇게 천사 같은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어려운 돈을 주고 가면서 절대로 자기 이름은 말을 안하고 그저 싱글싱글 웃으면서 가는 그 모습이 너무너무 좋아서 저에게 전화를 건 것입니다.
제가 이 전화를 받았을 때에 어떠했겠습니까? 자, 어떤 소식을 듣고 사십니까? 우리가 좋은 소식을 들을 때에 정말 뼈가 윤택해지고, 양약이 되고, 시원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나를 시원케 하지 않나 기다리지 말고, 내가 누구를 시원하게 하고 있나 아니면 답답하게 만들고 있나, 이 점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깊이 상고해보면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17절)"라고 말씀합니다. 이 보충적이고 협력적인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보충했다---가만히 보면 모두가 독자적인 일들은 많이 합니다마는 남의 일에 협력할 줄은 몰라요. 저 잘났다는 사람이 혼자서 떠들고 일하는 것, 반갑지 않아요. 사실은 behind man---뒤에서 조용히 협력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테레사 수녀는 한평생을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살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시기, 질투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유명합니다. 평생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 많고, 문둥병자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마음가짐입니다. 어떤 사람이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보다 잘사는 사람도 많고, 당신보다 높은 사람도 많고, 당신보다 칭찬 받는 사람들도 많은데, 혹 그들을 질투하는 마음이 생길 때는 없습니까?" 수녀는 어린아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사는 사람은 위를 쳐다볼 겨를이 없으니까요." 그렇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사는 사람은 위를 쳐다보지 않으니까 남이 어떻고, 저가 어떻고 하며 시기 질투할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그럴 마음도 없고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너무나도 어이없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여러분도 잘 아시는 얘기니 한번 소개하고자 합니다. 미국의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어느 유대사람이 생선가게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옆자리에 한국사람이 생선가게를 열었습니다. 그러면 유대사람이 깜짝 놀랍니다. '아이쿠, 큰일났구나! 저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새벽부터 일을 하니까 손님 다 뺏기겠구나'하고 걱정을 합니다. 그런데 다시 그 옆에 한국사람의 생선가게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그러면 유대사람이 '이제는 됐다!'라고 생각합니다. 왜요? 저희들끼리 서로 시기를 하니까요.
자기네들이 죽는지 사는지 모르고, 경쟁하고 시기합니다. 결국에는 둘 다 망할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가슴아픈 노릇이지마는 이게 한국사람입니다. 혼자 앞에서 큰소리치는 것은 잘해도 뒤에서 이름 없이 섬기고, 받들고, 봉사할 줄은 모릅니다. 그래서 둘만 모이면 싸우고, 셋이 모이면 망하고 맙니다. 도무지 협력할 줄을 몰라요.
어느 재벌의 말입니다. 한국에서 기술자를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일본의 어느 회사에 처음에는 한 열 명 정도 공부하라고 보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다른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세 번째로 기술자들을 보낸 후에 일본의 회사 직원을 만났는데 이렇게 물어보더랍니다. "왜 자꾸만 사람들을 보냅니까? 전에 왔던 사람들은 어디에 갔습니까?" "다 다른 회사로 가버렸지요." 그랬더니 "그런데 왜 또 보내십니까? 그래가지고 되겠습니까? 이게 한국이 못사는 이유입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자기네는 어느 나라에 가서 기술을 배워 가지고 왔으면 오자마자 다른 회사 사람들까지도 다 모아서 가르친다고,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배우게 되고 그러다 보면 더 좋은 것을 만들 수가 있다고, 이렇게 서로 협력해서 일본을 세워나가는 것이라고 한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술 배워가지고 자기만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 안 내어놓습니다. 그러다가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회사로 가버립니다. 회사도 망하고 저도 망합니다. 나라도 망합니다. 협력할 줄을 모릅니다. 도대체가 이것을 못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아내가 남편 협력하고, 남편이 아내 협력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보충적인 협력,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보충했다는 말은 행동으로 옮긴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멀리서 걱정했지만 스데바나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염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소식을 전합니다.
그 소식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희망적이었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문제를 다 알면서도 이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혹 내가 피곤합니까? 내가 남을 피곤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답답한 중에 더 답답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시원한 사람, 시원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섬김을 기쁨으로 알고, 봉사하기로 결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썩어지는 밀알로, 나로 인해서 생명이 있고 시원함이 있다면 내가 무엇을 못하고, 무엇을 주저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그런 인격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시원하게 할 뿐더러, 자기도 시원한 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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