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을 따라 영성 제대로 이해하기
한 실용적 영어사전(BBC English Dictionary)에 따르면 영성을 ‘사람의 가장 깊은 생각이나 신념에 관계된 일로 육신이나 물리적 환경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의는 이 시대에 영성이란 말이 일상적으로 어떤 통용의미를 가지는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우선 우리는 이 정의가 영성을 매우 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이 정의대로 하자면 사람이 깊은 영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외면적 활동을 다 중지하고 깊은 정신적 명상 속으로 몰입해야만 할 것이다. 영성이란 말이 명상수행이나 내면성찰 등을 얼른 연상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정의는 영성을 지적, 정신적 활동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있다. 영성을 생각이나 신념과 결부시키고 있는 것은 지식이나 이해를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객관적이며 비대상적이요 비지향적 차원에서 보려고 하는 오랜 서구적 지식이나 진리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정적이고 주지적 영성 이해로는 성경이 말하는 역동적이고 총체적인 영성 이해를 충분히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러한지를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성령의 생각’(롬8:6)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영성’이라는 말을 별도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에 근접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로 우리는 바울이 롬8:6에서 사용하고 있는 ‘영[성령]의 생각’(phronema tou pneumatos)이라는 표현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신약에서 ‘프로네마’라는 명사형 표현은 총 4회 나오는데 그것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만 4번을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고(롬8:6, 7, 27), 동사형으로는 신약 전체의 26번 가운데 바울이 압도적으로 23회를 사용하고 있다(The New Intl. Dic. of New Testament Theology, II, pp. 616-617). 빌2:5의 경우 한글 번역에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같이 명사형으로 번역이 되어 있으나, 원어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것과 같이 그렇게 너희도 생각하라”는 방식으로 동사형이 사용되고 있다. 골3:2도 위에 것과 땅에 것을 대조하는 가운데 ‘생각하라’는 동사형을 쓰고 있다. 이 밖에도 롬12:3은 우리가 품어야 할 생각 이상을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으며, 빌3:19은 십자가의 원수 된 자들이 그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들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지적한다. 사도 바울이 사용하는 ‘프로네마’의 우리말 번역인 ‘마음’이나 ‘생각’ 모두는 이 단어의 뜻을 옮기기에 충분치 못한 말들이다. ‘프로네마’는 단순히 ‘생각’이라는 지적 활동이나 그 결과인 ‘사상’ 또는 ‘지식’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기초한 일관된 성향(disposition)과 애착(affections), 헌신(commitment), 편을 취함(taking side with) 등의 삶의 자세들을 다 포함한다. 이 말은 그 아는 내용이나 대상과의 관계성 속에서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독립적이기 보다 관계적이며, 무지향적이기 보다 지향적이고, 또한 정적이기 보다 역동적 성격을 가진다. 오늘날 서구식 교육을 받고 자라난 현대인들은 생각이나 지식을 가치중립적이요 객관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아는 것에 자신의 삶을 결부시키려 하지도 않으며, 아는 것 따로 사는 것 따로의 편리한 이원주의에 빠져 있다. 이런 태도는 결코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이성적 기능에 과도한 신뢰를 두었던 특정 시대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이런 관점 위에서 본다면 영성은 비이성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양자가 조화될 수 있는 길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프로네마’의 의미를 잘 되새겨본다면 우리는 근대적 이성주의가 얼마나 빈약한 그릇이며 오도된 환상인지를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지식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지향적 성격을 가지며, 자기 색깔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색깔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프로네마’와 동일한 어근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 말로 신약에서 ‘슬기’(눅1:17) 또는 ‘총명’(엡1:8)으로 번역된 ‘프로네시스’(phronesis)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사용되었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말을 기교적 지식을 가리키는 ‘테크네’(techne = 테크닉, 테크놀로지 등의 어원)나 이론적 지식에 국한된 ‘에피스테메’(episteme = 에피스테몰로지/인식론의 어원)와 구분하여 삶의 자세와 관련된 실천적, 포괄적 지식의 개념으로 일반화시켰다. 해석학의 대가인 가다머(H.-G. Gadamer) 같은 현대 철학자들이 20세기의 철학적 맥락 속에서 이 용어의 의미를 되살려 지식이 단순히 객관성의 추구를 넘어 삶의 형성 및 포괄적 삶의 자세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런 노력도 부분적이나마 ‘프로네마’나 ‘프로네시스’의 본래적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지식이나 마음의 활동이 단순히 객관성의 추구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전반적 전제요 출발점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알고 분석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다. 그를 아는 것은 아는 그대로 그를 높이는 것을 말하며, 또한 그를 따라 우리의 순종과 헌신을 드리며 사는 것을 말한다. 역으로 그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어떠하심에 합당한 삶의 자세를 취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하여 날 때부터 열심히 배운 이스라엘 안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숱하게 있었기에 ‘하나님을 힘써 알라’는 명령이 주어지기도 한다. 더 이상의 교리공부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마음의 기능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롬8:6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밝힌다. ‘육신의 프로네마’(phronema tes sarkos)를 ‘성령의 프로네마’(phronema tou pneumatos)와 대비시키고 있다. 바로 앞의 5절에서 바울은 육신에 속하여 ‘육신을 좇는 자들’(hoi kata sarka ontes)과 성령에 속하여 ‘성령을 좇는 자들’(hoi kata pneuma [ontes])의 추구가 각각 무엇인지를 대비시키고 있는데, 6절에서는 이에 이어 그 각각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육신을 좇는 자들’의 속에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속에는 육신의 성향이 있고 육신의 애착이 있다. 육신의 일들에 대한 강한 끌림이 있고 몰입이 있고 추구가 있다. 우리는 불의한 쾌락이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이 얼마나 그 지능과 꾀를 잘 사용하며, 자신에게 가용한 모든 수단들을 다 동원하여 그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사도 바울이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몸의 사욕을 기꺼이 순종하는 삶이고, 그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기꺼이 바치던 삶이다(롬6:12-13, 19). 오늘날 그 훌륭한 지적 재능을 각종 최첨단 범죄에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라. 사람들을 호리기 위하여 기가 막힌 꾀들을 생각해내는 사람들을 보라. 육신의 추구와 죄를 위하여 그 지식과 재능이 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놀라운 집중력과 강한 애착이 동반되고 있음을 본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령을 좇는 자들’은 성령의 일에 그 마음이 온통 향한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켜 바울은 ‘성령의 프로네마’라는 말을 쓰고 있다. ‘육신의 프로네마’가 육신적 원리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받는 마음이라면, ‘성령의 프로네마’는 성령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받는 마음을 가리킨다. 신약학자 케제만이 잘 지적하듯이 이는 단순히 생각이나 사상의 측면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전 존재’(total existence)가 한 목표를 향하여 지향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Käsemann, Commentary on Romans, p. 219). 또한 이는 단순히 인간론적 차원의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된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묘사한다. 당대의 사람들에게 익숙하던 영육간의 인간론적 이원론이 바울의 손에 의해 ‘종말론적 변형’(an eschatological modification)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Käsemann, 앞의 책 p. 222). ‘성령의 프로네마’를 가진 사람은 그 생각과 애정과 뜻이 온전히 성령과 함께 하며 성령께서 보여주시는 일들에 그 마음이 전적으로 사로잡힌 사람이다. ‘육신의 프로네마’를 가진 사람이 육신의 일을 객관적 지식으로 대하지 않듯이, ‘성령의 프로네마’를 가진 사람 역시 성령의 일을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성령의 일에 대한 강한 애착과 끌림이 있고, 그것에 대한 집중적인 추구와 선택과 헌신이 있고, 또한 그에 따른 만족과 순전한 기쁨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생명과 평안이 있다. ‘성령의 프로네마’가 가져오는 결과인 ‘생명과 평안’ 역시 케제만이 잘 지적하듯이 단순히 인간론적 차원의 내적 조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basileia) 아래서의 삶을 가리킨다(Käsemann, 앞의 책 p. 219). 자연히 그 안에는 생명의 열매들이 맺히게 되며 이것은 또한 성령의 열매들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육신의 프로네마’와 ‘성령의 프로네마’에 대한 대조는 갈5:17 이하에 나타나고 있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대조 속에서 또 다른 표현을 만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바울의 ‘프로네마’ 개념은 영성에 대한 우리의 정적, 주지적 개념을 철저히 버려야 할 것을 잘 보여준다. 서구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이후의 사조의 강물을 마신 사람들로서 이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가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영성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알기에 합당하지 못한 매우 그릇된 방식으로 하나님께 다가가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서지도 자라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영적인 일들에 대해 나의 정서나 나의 헌신과는 상관없는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고 거기에 안주하려 드는 매우 비성경적이요 비정상적인 태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이는 영성을 이성주의의 제단 앞에 제물로 바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참 영성은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아는 것과, 아는 만큼 그를 바르게 사랑하는 것과, 또 아는 만큼 그를 섬겨 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다 포함한다. ‘성령의 생각’이라는 바울의 표현에 근거해서 볼 때, 우리는 바울에게 있어서 영성이란 하나의 완비된 실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며 무엇에 이끌리느냐와 관련 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일들, 땅의 것이 아닌 위의 것에 강하게 이끌리며 또 애착을 가지고 그것들을 사랑함이 없다면, 우리 안에 ‘영성’이라는 어떤 독립 공간을 세우려는 그 어떤 시도도 부적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생각’에 방해되는 것들 영성을 하나의 독립적 영역으로 추구하는 것이 왜 부적절한가 하는 것을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의 경우를 통해 점검해볼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영적인 사람들’(hoi pneumatikoi)이라고 부르며 자신들의 높은 영성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들은 ‘신령한 자’(ho pneumatikos, 고전3:1)의 자격이 없고 오히려 ‘육신에 속한 자’(ho sarkinos, 고전3:1, 3)이었다. 비록 그들이 교회 밖의 ‘육에 속한 사람’(ho psychikos, 고전2:14)과는 구분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추구가 여전히 ‘육신의 프로네마’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며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 급급한 사람들이다.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 관점에서 볼 줄 모르고 오히려 정치집단화 하고 있다. 그래서 속으로는 시기와 갈등이 있고 밖으로는 편당과 분열이 생겨나는 것이다. 영성의 일부 표시들을 그들이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여전히 그들은 ‘성령의 프로네마’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우상제물 먹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이 ‘성령의 프로네마’에 따라 행하지 않고 오히려 ‘육신의 프로네마’에 따라 행하고 있다는 구체적 증표를 볼 수 있다. 높은 영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의 ‘강한 자들’은 우상의 신전에 앉아서 제물로 바쳐진 음식 먹는 자리에 동참하는 것을 자신들의 ‘권리’(eksousia, 한역에는 ‘자유함’)로 내세우고 있다(고전8:9-10). 이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님은 한 분뿐이며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은 없다는 전통적 신앙고백을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들의 입지나 이익, 그 행위의 정당화를 위해 고백 또는 지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고백이 그 내용에 있어서는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 사용이 문제이다. 고백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그들의 ‘마음 틀’이 문제인 것이다. 이 변화되지 못한 ‘마음 틀’ 때문에 생겨나는 교회 안의 문제들은 고린도교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 다들 진리와 바른 신앙고백을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치지 아니하는 교회 안의 싸움과 갈등들을 보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왜 항상 이런 방식으로 문제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일까? 다름 아닌 영성의 문제이다. 바른 영성이 필요하다. 아니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영성조차도 자신을 위한 무기로 사용하려 드는 변화되지 못한 ‘마음 틀’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육신의 프로네마’를 버리고 ‘성령의 프로네마’로 그 마음이 변화되어야 한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 이해에 있어서도 동일한 문제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린도교회는 말이나 지식에서 뿐만 아니라 은사에도 풍성한 교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은사의 추구에 있어서 여전히 자기중심성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와 신앙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한 목적에서 은사를 구하기보다 자신들의 개인적 유익을 앞세우는 차원에서 은사를 구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다양한 은사들을 주시는 한 주체이신 성령에 대해 지나칠 만큼 강조를 하고 있으며, ‘한 성령’, ‘같은 성령’이라는 표현을 지치지 않고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2장). 바울은 은사의 추구에 있어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고전13:5) 사랑의 원리에 따라 행하는 것이 필요하며, 사랑을 따라 구하는 것(고전14:1)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방언은 그 성격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는 것인데 반해 예언은 하나님 편에서 그 백성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방언은 방언하는 자의 개인적 유익을 위하지만, 예언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적 유익을 위한다. 방언이 공동체적 유익을 위해 사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역될 필요가 있다. 통역이 없다면 방언은 개인적으로만 하는 것이 좋다. 바울의 원칙은 분명하다. ‘신령한 것’의 추구가 ‘교회의 덕 세우기 위함’이라는 원칙에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고전14:12). 아무리 방언이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할 때는 마치 그 소리가 기상을 하라는 것인지 취침을 하라는 것인지, 비상경계를 하라는 것인지 비상해제를 하라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나팔소리와 다를 바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비교할 때 어떤 것이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더 큰 유익을 끼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방언이 그 본래 의도에 있어서는 하나님 백성을 위하기보다 외인들을 위한 것이며, 역으로 예언은 외인들을 위하기보다 하나님 백성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방언이 외인들을 향한 용도를 가지는 것은 ‘표적상’(eis semeion, 고전14:22) 그러할 뿐이다. 실질상의 효력을 두고 볼 때는 오히려 일차적으로 하나님 백성을 위해 주어진 예언이 외인들을 위한 실질적 효력을 가져온다. 방언하는 사람들의 모임 가운데 외인들이 왔을 때 그들은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눈과 귀로 접하기는 하지만 그 내용과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저들이 미쳤다”는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임 가운데 외인들이 왔을 때는 다르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응하는 것을 볼 때, 그 의미에 그들도 동참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들 속에 숨은 죄악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돌이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와 같이 ‘표적상’ 외인을 위한 방언이 그 실질 효력에 있어서는 교인들의 세계 안에만 국한될 뿐 외인들을 위해서는 아무 결실도 거두지 못하는 데 비해, 원래는 하나님 백성을 위해 주어진 예언이 실질상의 효력에 있어서는 교인들뿐만 아니라 외인들 가운데서도 그 결실을 거두고 있는 것을 본다. 그렇다면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 가운데 어떤 것을 더 사모하는 것이 사랑을 따라 행하는 일이 되겠는가? 바울은 이런 예시를 통해 은사의 추구에 있어서도 개개인의 사적 유익을 앞세우기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앞세우고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하며 살 줄 아는 것이 ‘성령의 프로네마’로 사는 사람들의 자세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참된 영성이다. 바울의 이와 같은 논증은 오늘의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대단히 큰 도전을 던져준다. 한국교회 안의 난무하는 은사운동은 그 원칙이 말씀에 따라 점검되지 않으면 과거의 고린도교회처럼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값진 무기를 세상의 우스갯거리로 전락시키는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적 동기와 사적 목적에서 은사들을 추구하고 있고, 따라서 그 결과가 자신의 만족에 그칠 뿐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부요하심의 확증과 공동체 유익의 증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우리는 바울의 외침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어찌하여 ‘지혜롭다’(phronimos, 고전4:10)는 너희가 성령의 뜻을 분별할 줄 모르고 하나님 나라야 어찌되든 자기만족과 자기유익이나 추구하며 공동체적 영성에 있어서는 빵점인 자들이 되고 있는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신랄한 말 펀치를 날리고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신비한 체험들과 신령한 은사들이 차고 넘친다는 한국교회이지만, 도무지 성령의 뜻을 따라 행하지 못하고 ‘성령의 프로네마’보다 ‘육신의 프로네마’가 더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이 기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껍데기만 치장하면서 그 근본 ‘마음 틀’의 변화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두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살아계신 성령의 강력한 ‘자기증시’(apodeiksis, 고전2:4)를 구하며 그와 함께 새롭게 일어 설 따름이다. ‘성령의 프로네마’가 온전히 이룰 때까지! ‘성령의 생각’으로 그리스도와 통하기 우리가 ‘성령의 프로네마’로 행한다는 것의 증거는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세우신 목표인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통해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영성 또는 영적 성숙도는 바로 이것을 통하여 측정되지 않겠는가?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영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며, 성경 지식이 뛰어나다고 해서 영성이 탁월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도는 우리 스스로가 신앙의 성장을 위해 어떤 목표를 세우고 또 어떻게 이를 달성했느냐 하는 것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우신 그분의 목표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느냐 하는 것으로 판가름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에 대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롬8:29)고 밝힌다. 보다 역동적인 차원에서 이를 적용해볼 수 있게 하는 본문이 빌2:5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바울의 권면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여기에 사용된 마음이라는 말은 명사형 ‘프로네마’가 아니라 동사(‘프로네오’의 명령형)이다. 이 구절의 의미는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것과 같은 그런 방식(또는 ‘프로네마’)을 따라 생각하라’는 것이다(Moule, Peter O'Brien). 또는 다르게 해석하여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다운 방식으로 너희 가운데서도 생각하라’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Käsemann, Dodd, Martin). 그리스도를 생각과 실천의 모델로 삼으라는 권면으로 볼 것인지(우리는 이것이 본문의 맥락에 더 적합하다고 본다),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자의 생각과 삶의 마땅한 자세대로 행하라는 것으로 볼 것인지를 두고 팽팽한 해석상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해석을 취하든 바울이 핵심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생각과 삶의 자세 또는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자세 또는 그의 성향(disposition)은 자기 추구가 아닌 자기 비움과 순종으로 특징된다. 대가나 상급을 바라서 그와 같이 행하는 것도 아니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서 그와 같이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분의 삶 자체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순종으로 점철되고,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두 마음 없이 한결같이 그 길을 걸으신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동일하게 나타나야 할 특징이요 성향이다. 그래서 바울은 2:6-11에 이어서 2:12-18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두 본문은 반드시 한 쌍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보통의 경우 11절까지 설교하는 데서 그치고 그것만으로 만족하든지, 아니면 12절 이하를 앞의 부분과 한 짝으로 엮어서 다루지를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2:5에서 그리스도처럼(또는 그리스도의 ‘프로네마’를 따라) 생각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뿐만 아니라 그 생각과 삶의 주체가 되는 그리스도인 자신들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택을 누리게 된다는 것만이 기독교적 선포의 전부가 아니라, 그렇게 구원 은택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부합하는 마음자세(프로네마)를 가져 내 뜻이나 욕망보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앞세우고 기꺼이 이에 순종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지를 동시에 기독교적 복음으로 선포하여야 한다. 그러할 때에 빛나게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요 동시에 그 안에서 구원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이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불순종의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빛들로, 말씀의 자녀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 어른들은 정치적, 이념적 ‘코드’ 맞추기에 열심이요, 젊은이들은 “너희가 통하였느냐”라는 유행문구에서 보는 것처럼 통정, 통심, 통접을 위해 혈안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통해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통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구원의 통로로만 여길 뿐 그 구원의 총체성이 펼쳐져야 할 자신들의 삶 속에서는 그리스도와 통하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다. 얼마나 피상적인 구원의 이해 속에 빠져 있는가? 얼마나 천박한 영성을 드러내고 있는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을 자신의 삶과 철저히 분리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 뿌리 깊은 세상적 인식 틀이 바뀌지 않는 채, 교회에서 배우는 지식 또한 자신의 실제적 삶과 철저히 분리시켜서 받아들이고 있는 이 잘못된 연결고리를 끊지 않는 한, 우리는 바울이 보여주는 제대로 된 영성에 결코 다가갈 수 없다. 우리가 교회에서 배우는 것들은 결코 ‘교회생활용’ 지식이 아니다. ‘어떻게 교회 안에서 교인 행세 제대로 할 것인가’의 차원이 아니라,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삶 전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로서, 그 ‘마음 틀’이 ‘육신의 프로네마’를 벗고 ‘성령의 프로네마’로 온전히 바뀐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갈망이요 추구요 애착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이것을 또 다른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닮은 꼴’(mimetes)이라 칭하고 있다. 고전11:1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명한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닮은 꼴’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10장 말미에 밝히고 있는 자신의 삶의 방식들과 연관된다. 고린도교회의 소위 ‘신령한 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그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고백과 지식을 자기유익 추구의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에 비해 바울은 자신의 모든 권리들을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다. 너희가 권리를 말하느냐? 그렇다면 나의 권리가 어떤 것들인지 너희 앞에 말해보랴? 그래서 바울은 9장 초반에 “우리에게 권이 없으며 ... 권이 없으며 ... 권이 없겠느냐”고 숨이 가쁠 정도로 몰아붙이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권리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소중하며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영혼들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두 가지 원칙에 철저히 묶어서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다른 하나는 타인의 유익이다(고전10:31-33). 이를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비우는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닮은 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담대히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동일한 것을 요청한다. 너희가 나의 ‘닮은 꼴’이 되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바울은 자신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생각과 삶의 길이 그들 속에도 서로 통함을 이루어내는 ‘공통 닮은 꼴들’(sym-mimetai, 빌3:17)이 형성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담대한 제자도가 있는가? ‘너희가 나의 닮은 꼴이 되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을 이루어내는 삶이 ‘성령의 프로네마’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진정한 영성의 소유자들의 모습이다. 우리의 영성은 이것을 목표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닮은 자 되기! 예수 그리스도와 통하기!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프로네마’를 온전히 이루기! 이를 위하여 우리가 서로서로 살아 있는 본이 되기! 맺는 말 이제 우리는 좀더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영성은 세상의 다른 일상사들과 분리된 종교적 영역에 속한 일에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삶의 많은 부분 가운데서 한 특정 부분을 지칭하는 개념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영성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산 연합으로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이 그 새창조적 존재에 온전히 이르는 전인개조의 과정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제 이를 이루어감에 있어서 ‘성령의 프로네마’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진리의 기준과 틀을 철저히 말씀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단순히 성경 지식이 탁월한 그리스도인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그 생각과 비전과 목표와 동기가 말씀에 따라 철저히 재구성되고 지속적으로 말씀의 영인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사람 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 개개인의 성품, 이 시대의 보물단지처럼 떠받들림을 받는 개성(個性)이 바뀌어서 성령의 성품으로 화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사람은 그 애정과 애착이 바뀌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찬송가들이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라는 산 고백이 그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이작 와츠(Isaac Watts)의 위대한 찬송시(147장)처럼 “나의 모든 자랑에 경멸을 퍼붓네. 이제 내게 그리스도의 죽음 밖에는 다른 어떤 자랑도 있게 마소서” 마음 깊이 외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성령의 프로네마’로 사는 사람에게는 공동체 세움과 하나님 나라가 우선되는 차원에서 개인주의적 삶이 철저히 극복되어야 한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아니하고 내게 맡기신 모든 영육간 은사들을 공동체 세움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부요를 드러내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사고, 그 애착, 그 추구, 그 선택, 그 우선순위, 그 공동체성 등의 면에서 ‘성령의 프로네마’에 따른 총체적 전인개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차원에서의 영성 추구는 가장 놀라운 성령의 새창조 사역을 한갓 인간론적 자기개발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종말론적 창조미와 영광이 빛나지 않는 희한한 영성운동이 판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말씀을 따라 새로운 물줄기를 잡아가야 할 책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바울의 ‘성령의 프로네마’ 사상을 통해 배우게 되는 참 영성은 성령에 붙들린 산 영혼의 총체적 활동이요 개조이며, 죽음의 세상에 대해서는 창조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힘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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