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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의 기본 이해

by 【고동엽】 2022. 1. 11.

야고보서의 기본 이해

 

 

야고보서는 모든 서신서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윤리적 실천 의무를 가장 강력하게 강조한다. 서신서 들이 각 개별적 덕목 등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면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윤리를 실천 할 의무를 갖고 있는 사실 자체를 강조한다. 심지어 야고보서는 이 기독교 윤리의 실천을 행한 성도의 믿음이 살았는가, 죽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까지 제시한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잠언’혹은 ‘신약의 아모스’로 불리기도 하는데, 전체 108절 중 54절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한편 신약 성경의 모든 서신들은 일차적으로 각 서신서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각 서신이 누구에 의해 어떤 수신자에게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쓰여 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그 서신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작업이다. 야고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지 불과 20년이 채 되지 않은 때에 기록하였고 당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지도자 중의 하나였던 야고보가 로마제국 내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이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 비록 주의 생전에는 불신자였으나(요 7:5)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하였으며(고전 15:7) 이후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 역할을 하는 등(행 15:13-22) 베드로 및 요한과 더불어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인물이 되었다.(갈 2:9)

유다서의 저자 유다가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할 정도로 (유 1:1) 야고보는 초대 교회 당시 널리 알려진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한편 본서가 암시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본서의 수신자들은 A.D 30년 후반 경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유대교의 대대적인 박해(행 8:1)를 피하여 로마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 곧 디아스포라에 정착하였거나 아니면 이미 오래전부터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있었던 유대인들 가운데 복음이 전파됨으로 인해 개종하게 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흩어진 성도들의 삶은 한 마디로 ‘시련’그 자체였으나, 초기에 그들의 삶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고귀한 삶이었다. 그들은 외적으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차이점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던 까닭에 비록 로마 정부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단행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교를 신봉하는 동족들의 핍박이 시작 되었으며 거기다가 타 종교 이방인들의 박해까지 가중되었다. 이로 인하여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또 내적으로는 서로 사랑하며 유무상통하던 예루살렘 초대 교회 공동체 모습과는 달리 서로에게 비방과 판단을 일삼으며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차별하였다. 그리고 계속되는 시련에 지쳐서인지 세상과 타협하여 급속히 세속화 되어가는 조짐들이 나타났다. 즉 성도들은 다툼과 분쟁을 일삼고 세상의 악한 지혜를 따라 살며 자기 뜻과 계획대로 세속의 부를 축적하는 데에 관심을 집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본 서신이 기록된 A.D 40년 후반은 유대 율법주의에 대항하여 이신득의 교리를 강조한 바울의 가르침이 로마제국 내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을 즈음이다. 그렇다면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거나 혹은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여 믿음에 합당한 실천 없이 세속화 되어 가던 자신들의 신앙을 합리화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야고보는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실천을 철저하게 강조하는 본 서신을 보내게 된 것이다. 야고보가 보기에 당시 수신자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는 하였으나 그에 합당한 신앙의 열매들을 전혀 맺지 못하고 있었다. 행위가 결여된 그들의 믿음이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 야고보는 신랄하고도 직설적인 어조로 수신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2:17, 26)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24)고 하여 바울의 이신득의 교리(롬 3:28, 갈 2:16)와 상충되는 듯한 선언까지 한다. 하지만 야고보의 선언은 혹자들이 주장하듯이 이신득의 교리와 충돌이 아니다.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야고보의 진술은 하나의 역설이다. 야고보는 이신득의 구원 원리를 부인하고 ‘이행득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천이 따르지 않는 기만 적인 믿음을 공격하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단어 ‘피스티스’가 전치사 ‘엔’과 함께 사용될 때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나타내며, 전치사 ‘에이스’와 함께 사용 될 때는 믿음의 대상인 ‘예수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전폭적으로 맡김을 의미한다. 참된 믿음이란 입술의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교훈은 바울의 이신득의 교리와 상호 보완적 관계라 할 수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듯 야고보 또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믿음과 행위는 마치 나무와 열매의 관계처럼 밀접히 연관된 하나이며 각각 분리될 때 이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질 때 다른 한 쪽을 강조함으로써 양자는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 예컨대 종교 개혁의 시대에는 이신득의 교리가 강조될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 한국에는 그리스도인은 많으나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부재하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신앙 고백하는 인구는 많으나 삶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전폭적으로 맡기며 그 신앙을 실천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처럼 통탄스러운 한국적 상황에서 야고보서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고 믿음과 행함의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데 유익한 교훈을 가져다준다.

 

1장(1-12) 문안인사및 시험중의 성도의 신앙자세

QA 야고보가 제시하는 시험의 때에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 ?

1.기쁨으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다.(2-4절)

2.믿음으로 하나님께 시험을 극복 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5-8절)

3.가난한 자는 당당하고 부한 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9-11절)

1절

QA 야고보가 ‘12지파라고 한 대상은?

박해로 인해 각지로 흩어져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12지파’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각지에 있는 이방인도 포함되어 있으며 본 서신을 읽고 있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곧 그는 주를 믿는 모든 자들을 향해 열두 지파라고 부르는 것이다. 모든 믿는 성도들을 숫자 열둘로 상징화 하는 것은 구약 예언의 성취로 오신 주님께서는 이미 하나님나라 건설을 위해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막3:13) 그들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다스릴 것이라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눅 22:30)

*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강조하는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특징도 지닌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이신득의 사상으로 종교개혁을 성공리에 단행한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믿음이라고 평 하였으며 정경에서 제외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고보의 진술 목적과 그 본질이 무엇인지 안다면 본서의 메시지가 신약 성경의 다른 책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고보가 본서를 기록하던 당시 상황은 사도 바울의 이신득의 복음이 교회 내에 편만한 상태였으며 적지 않은 성도들이 그 이신득의 복음을 삶에서 드러나야 하는 신앙 행위와 분리시켜 버렸다. 본래 바울이 구원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을 때 행함은 할례 등 율법으로 규정된 행위를 가리켰다.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고 각종 음식과 정 결례 등과 같은 규례를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행위 구원론 자들을 향해 바울은 오직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바울의 전도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많은 성도들이 그 복음을 왜곡하여 행함이 빠져버린 실체가 없는 관념적 믿음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변질되어 버린 그런 신앙을 바로 잡기 위해 언뜻 보기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 사상에 어긋나 보이는 듯한 행위를 강조하는 메시지를 그들에게 써 보내 참된 믿음을 가르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야고보가 본서에서 말하는 행위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자연스런 외적 표출이다. 즉 믿음이 있는 자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신앙의 행위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다.

* 시험(페이라스모스)은 ‘시험(test)' '시련(trial)' '유혹(temptation)'이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살펴 본다’라는 긍정적 의미와 ‘유혹하여 넘어지게 한다.’라는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2절

QA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진의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시련을 받은 성도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3,4절에 나와 있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 인내가 생기고 그 인내를 온전히 이룰 때 모든 것이 구비된 완전한 성도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과 시련은 성도에게 무익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온전한 성도가 되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여러 시험과 고난들은 모나고 부족함이 많은 성도들을 원만하고 온전한 성도로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닥쳐오는 모든 시험과 환난은 인내, 연단, 소망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쳐 온전한 성도가 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성화 과정이다.

3절

* ‘시련(도키미온)’은 마치 금, 은을 뜨거운 불 속에 넣고 녹여 그 진위를 시험하듯이 믿음의 진위를 입증하거나 시험하는 연단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연단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진위를 테스트하는 과정임을 보여 준다.

* 본 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을 당할 때 왜 그것을 전적으로 기쁘게 생각해야 하는지 그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QA 여러 가지 시험을 기쁨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 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자세를 온전히 구비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시험을 당하는 그 당시는 비록 그것이 힘겨울지라도 결국 믿음으로 잘 인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의 시험 없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영적 기쁨이 존재할 수 없다.

4절

* 본 절은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것이기는 하나 성도는 그 환경에 자신을 내 맡기고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인내의 열매를 맺기 위해 부단히 힘써야 함을 강조한다.

QA 이 인내는 언제 어느 때 발휘해야 되는 것인가?

야고보는 수신자들의 현재 임한 힘겨운 삶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그들에게 다가올 여러 가지 시험들을 내다보며 그 가운데서 인내를 온전히 발휘하라고 명령한다. 결국 고난 가운데서 인내하는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성도가 성숙하게 된다는 것이다.

5절

QA1 우리가 여러 시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지혜를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절 속에는 이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있다. 곧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이겨낸 시험만이 성도를 온전히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유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이 없는 시험과 고난은 오히려 상처와 피해만을 남길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시험과 고난은 양면적 성격을 갖고 있다. 곧 믿음과 기도를 통해 그 목적과 의미를 알고 이겨낸 시험은 성도로 하여금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게 하지만 오직 사람의 힘만을 의지하여 맹목적으로 겪는 시험은 오히려 그 사람을 더 악화된 상태로 몰고 가는 것이다.

Ex) 똑같은 햇빛을 받아도 생명 있는 과일은 점점 향기를 더해가며 익어가지만 죽은 과일은 갈수록 심하게 썩어간다.

QA2 우리는 어떤 종류의 지혜를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인내하여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믿음의 성숙함을 이루는 그런 지혜이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분이 우리 삶 속의 시련을 통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똑바로 깨닫는 지혜이다.(2-4절) 이런 지혜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고 오직 간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정에 통달한 성령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전 2:01-11)

6절

QA1 오직 순수한 믿음으로 구하는 자들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아마 이에 대한 가장 가까운 예는 바로 우리 주변의 어린 아이들일 것이다. 아이들은 순수한 마음을 가졌기에 무엇을 구할 때에 조금도 의심 없이 구한다. 그렇기에 이들의 요구를 거절 할 수 있는 부모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QA2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는 의미는?

의심은 외부 요인인 바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를 보다 부정적인 면에서 강조하고 있다. 바람의 변덕에 의해 바다 물결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이리저리 밀려다닌다는 것이다. 상하좌우 바람이 부는 대로 바다 물결은 출렁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의심하는 사람의 마음의 태도가 불안정하게 요동침을 나타낸다. 따라서 야고보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은 더욱 더 외부적인 세력에 대해 경계를 취해야 하는 동시에 오직 하나님만을 지향하여야 한다는 의미까지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7절

QA 왜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아야 하는가?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스스로의 불신앙으로 거부하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무언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 자체가 잘 못 된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구하는 자가 응답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8절

QA1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오가며 두 주인을 섬김으로(마 6:24) ‘정함이 없는 자’이다. 이런 자는 잠시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기도 하는 것 같지만 곧 마음이 변하여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하는 등 변덕을 부리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비록 후히 주시는 분이지만 이런 자에게는 어떠한 응답도 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QA2 의심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해 마음속에서 회의하고 갈등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믿을 만한 것인지를 의심하는 것은 죄가 된다.

9절

QA 낮은 형제가 자기의 높음을 자랑한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

본 절의 말씀은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한 말씀이다. 곧 땅의 관점에서 보면 그 어떤 것도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없는 성도 일지라도 영적이고 종말론적 차원에서 보면 자랑할 것이 무궁 무진 하므로 그것을 보며 자랑하라는 것이다.

Ex)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모델이 되시는 분이 예수그리스도이시다.

10절

QA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부한 형제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가 자랑할 것은 바로 ‘자기의 낮춤’에 있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부귀영화는 실로 들풀과 같이 쉬이 사라질 것들이므로 그것들로 인해 교만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이제 더 이상 그들 자신의 도덕적 하찮음과 죄악성을 인식케 함으로 자신을 과시할 수 없도록 만든다. 따라서 현재 부한 자라도 그의 부요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천한 영적 실체를 바로 인식함으로 영원하고 거룩하시며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자세를 통해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않는 지혜가 생긴다.

11절

QA 본 절의 내용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소유한 재산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국에는 점점 쇠잔해지고 마는 것이다. 가식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아름다움은 언젠가는 다 사라지고 마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야고보는 풀과 꽃으로 비유되는 인생의 무상함을 특히 부자들의 삶을 적용시켜 교훈하고 있다.

12절

QA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여 생명과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길은 무엇 인가?

1. 하나님께서 시험하실 때 불평하거나 낙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험을 받는 태도에 따라 그 사람의 본 모습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Ex) 재산 상속을 위해 아버지가 자식을 시험 할 때 그 시험이 기분 나쁘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자식과 기쁘게 여기며 달게 받아들이는 자식이 있다면 누구에게 재산을 물려줄까?

2. 시험을 받을 때 자기의 생각이나 능력만으로 대처하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시험은 결국 하나님의 허락 하에 주어지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할 때에만 시험들을 담대하게 대처하여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시험을 통해 거룩한 성도로 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시험을 이기는 최고의 길은 무엇보다 인내임을 알아 오래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험이 올 때 어떤 인간적 생각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우직하고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오직 기도하는 가운데 인내함으로 그 모든 시험을 이겨 나가야 할 것이다.

4. 이 모든 과정을 온전한 마음으로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험이 올 때 피상적으로 기뻐하고 기도하며 인내함으로써 부분적으로만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기쁨과 인내,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로 모든 시험을 완전히 통과한 모습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도 온전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1장(13-18) 시험의 원천인 욕심의 경계 및 하나님의 선한 은사와 선물

13절

QA 야고보는 우리가 시험을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시험하셨다는 말씀이 나온다. 그렇다면 본 절의 말씀은 어떻게 된 것일까?

‘시험’이라는 말을 바로 이해할 때 의문을 해소 할 수 있다. 다같이 ‘시험’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시험(연단), 사단의 시험(유혹)은 엄밀히 구분된다. 때문에 질적으로 다르다.

1.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고 연단시켜 성숙한 신앙인으로 만들기 위한 테스트로서의 시험이다. 그리고 이 시험은 때때로 시련으로 올 수도 있다. - Ex)욥에게 임한 시련

2. 사단의 시험은 성도들을 멸망으로 이끌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시험이다. - Ex)공생애를 계시하기 전 예수님에 대한 사단의 시험

물론 사단의 시험도 시련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 역시 성도로 하여금 믿음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유혹에 포함 시킬 수 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 대하여 바로 이러한 시험을 하시지 않는다.

14절

QA1 ‘끌려 미혹됨이란 묘사를 통해 교훈 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바로 각 사람이 시험에 빠져 멸망케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욕심과 어리석음 때문이지 외부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험을 받는 근본 원인은 바로 ‘자기 자신의 욕심’에 있다는 것이다.

15절

* 본 절은 시험에 빠지는 과정과 결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단지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다가 점차 머리로 생생하게 그리게 되고 마침내 더 참을 수 없을 만큼 상당히 무르익으면 결국 행동으로 구체화 되어 파멸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이다.

QA 이러한 죄의 속성과 관련한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주는가?

그것은 죄에 대한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그것을 방치하면 안 된다. 죄악의 열매를 보며 그것을 잘라내고, 회개하기 전에 죄의 싹부터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정직한 인간적 욕구를 절제해야 한다.

16절

인간이 유혹에 빠질 때 자신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며 자신 스스로가 자신 스스로에게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강하게 권면하는 것이다.

17절

QA1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다는 증거를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이러한 의구심을 속 시원하게 답을 주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애틋한 사랑,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신실한 언약, 야곱과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섭리, 끝까지 패역하고 돌아서서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오히려‘내가 여기 있노라( 시65:1)’라고 외치며 손을 내미셨다. 이를 통해 실로 우리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당신의 모든 자존심까지 버리신 분이시다. 이러한 사랑은 마침내 죄인 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시고 부활의 주님으로 오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완전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롬 5:8)

QA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이러한 사랑을 의심하는 이유는 무엇 인가?

이는 우리들의 변덕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어보기 때문이다. 철없는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듯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다. 충분한 성경의 증거를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이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믿는 성숙한 신앙을 갖추어야 한다.

* ‘변함’이란 행성들의 공전과 자전으로 인하여 생기는 변화를 말하며, ‘회전하는 그림자’란 지구의 자전으로 인하여 태양이나 달의 위치가 변함으로써 사물의 그림자들이 길고 짧게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

18절

QA1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첫 열매가 되는가?

본래 ‘첫 열매’는 추수 시에 처음 수확한 소산물로서, 이는 추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특별히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져야만 했다.(레 23:9-14)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회개함으로써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신자들을 모두

피조물을 대표하는 ‘첫 열매’에 비유했다. 그들은 특별히 하나님께 먼저 바쳐진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QA2 종말론적 새 창조의 첫 열매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낳았다면 무엇으로 인하여 낳았다는 것인가?

본 문에 의하면 그는 자기의 뜻을 좇아서 ‘진리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낳았다고 한다. ‘진리의 말씀’이란 창 1:3에서 말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첫 열매를 낳은 것이 종말론적인 새 창조 혹은 구속 사건을 의미하기 때문에 복음을 가리킨다.(고후 6:7, 엡 1:8, 골 1:5, 딤후 2:15)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한 복음의 선포로 중생의 사역을 행하셨다. 시도 바울은 이 사실을 롬 10:13-17에서 매우 논리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이다.

 

1장(19-27) 말씀의 들음과 실천 및 오직 실천으로 입증되는 참된 경건

19절

QA1 당시 교회에서 서로를 향해 형제라 부르는 풍토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가?

형제라는 말 자체가 처음엔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이것이 가족애를 상기시키는 호칭이기에 ‘성도’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욱 따뜻하고 정감 있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 호칭은 어디에서도 경직되고, 계급적이며, 권위주의적인 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야고보를 비롯한 성경의 여러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범 속에서 권위는 있되 권위의식은 없으며 섬기되 군림하지 않는 모습을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QA2 야고보는 말씀을 듣거나 토론하는 자세에 대해 바른 지침을 주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1. 설교를 들을 때나 토론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경청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주장만을 말하려는 경향에 대해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명령한다. 즉 상대방의 말은 빨리 듣되 그것에 대한 생각은 충분히 한 후에 서서히 말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을 가지고 귀 기울려 경청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잘 듣지 못하면 잘 말할 수 없다. 잘 듣지 않는 사람은 자기 의사만 드러내기에 급급한 사람이다. (잠 18:2)

2.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것이다. 분노를 폭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므로 말하기와 동일하게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사람이 화를 안 낼 수 없겠지만 성내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하며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므로 할 수만 있으면 화내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

20절

QA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이다. 이것이 곧 공의이다. 공의는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하며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시 89:14) 화를 내는 사람은 마음의 판단력이 흔들리고 평정심이 무너져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데 실패한다.

2.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3. ‘인간 행동 규범으로서의 하나님의 기준’이다. 이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낸다.

21절

* 마음에 심긴 도, 마음에 심긴 말씀, 에서‘도’에 해당하는 ‘로곤’은 말씀이라는 의미이며, ‘마음에 심긴’으로 번역된 ‘엠뤼토스’는 ‘가르침을 통해 심기 워 진’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곧 18절에 나오는‘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QA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를 기록한 것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마음에 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서로 깊게 관련이 있는 두 가지 행동을 요구하는데 버리는 것과 채우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 가운데 있는 일체의 더러운 것들과 죄악을 다 쏟아버리고 대신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도, 곧 복음의 진리로 자신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의 말을 듣기도 전에 먼저 말하는 성급함과 경솔함, 분노 더 나아가 육신의 정욕 등을 과감하게 버리고 ‘복음의 진리’로 채우는 일종의 ‘영혼의 대청소’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22절

QA 본 절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무엇인가?

1. 본 절의 ‘도를 행 한다’는 것은 복음이나 그리스도를 앞세운 종교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정한 마음으로 복음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Ex) 주님께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능력을 행했다고 자부하는 자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 7:22-23)

2. 단지 말씀을 듣기만 할 뿐 그 후에 아무런 변화도 행함도 없는 자들을 향한 것이다.

Ex) 세미나와 성경공부, 예배와 부흥회를 통하여 말씀을 많이 듣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떤 놀라운 능력을 나타낸다 할지라도 그자체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칭찬 받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해요 착각이다. 주님은 오직 말씀을 듣고 그것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행하였는가를 보실 뿐이다.

23절-24절

* 거울을 보는 자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흔히 거울을 보고 돌아서면 금방 자기가 본 것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가 이와 같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행함이 없는 성경 지식, 성경 공부, 생각 없이 말씀을 듣고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말씀을 들을 때는 말씀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뒤틀리고 헝클어진 모습을 보지만, 돌아서서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흐트러진 매무새 그대로 두는 것을 의미한다. ‘연습을 통해 완전해진다’라는 서양 격언처럼 말씀의 실천을 통해 은혜와 능력을 체험 할 때 온전한 성도로 변화되는 것이다. 식당에서 메뉴를 읽음으로 배가 부른 것이 아니며, 의사의 처방을 받았다고 병이 낫는 것이 아니듯이 단지 말씀만 듣고 그 은혜가 내게 미치는 것이 절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25절

*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믿음의 법(롬 3:27), 생명과 성령의 법(롬 8:2) 등으로 불리는 복음(고전 9:12)을 가리킨다. 복음을 자세히 듣고 살피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행하는 자라는 의미가 된다. 역으로 말하면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말씀을 전혀 듣지 않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본 절은 듣고도 행치 않은 자나 전혀 듣지 않은 자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면서 바른 신앙 태도를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QA 이 영적 원리를 교훈해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말씀에 대한 실행이 주는 결과 때문이다. 즉 야고보는 복음을 들었다면 반드시 행할 것을 권면함과 동시에 이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열쇠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받는 자는 그 어떤 특별한 자가 아니라 복음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연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26절

* 경건(드레스케이아)은 ‘떨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트레오’라는 어근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떠는’,‘신들에 대한 경외’,‘종교적’이라는 의미이다(행 26:5, 골 2:18) 형용사 ‘드레스코스’는 ‘종교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명사‘드레스케이아’는 1세기 당시 기도나 금식 등으로 표현되는 종교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신 앞에 두려워 떨며 제사 의식의 세심한 부분까지 조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이 용어가 영어에서 예배란 의미의 ‘worship'과 거의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 이에 따라 본 절을 다시 해석하면 누구든지 자기가 올바로 예배드린다고 생각하면서 혀를 제어하지 않고 마음대로 말하게 되면 그의 예배는 ‘헛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인정받으리라고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27절

* 본 절에서 야고보는 참된 경건의 모습으로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1.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고

2.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의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과 하나님께 대한 경건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서 전체의 맥락이 그러하듯 이 구절 역시 믿음보다 행위를 앞세우는 것이 아닌가 하여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를 생각한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본 절은 이웃에 대한 선한 행위만이 경건의 모든 것임을 말씀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 믿음 보다 행위가 앞서야 한다는 말씀도 아니다. 본 절에서 의도하는 바는 단지 하나님에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은 결코 분리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 라는 것이다. 경건하다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경건이 아니며 반대로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이다.

QA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올바른 경건은 어떤 것인가?

내적으로는 세속의 죄악에서 자신을 잘 지켜내는 것이고 외적으로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이다.

 

 

2장(1-13)빈부에 따른 차별행위책망 및 이웃사랑의 계명 실천 촉구

QA1 성도가 형제를 차별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1.성도는 누구나 영광의 주 예수그리스도를 한 믿음으로 받았기 때문

이다.(1절)

2.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에 부요함을 주시고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5절)

3.하나님의 말씀이 형제차별을 금하고 이웃사랑을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8절)

4.형제를 차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2,13절)

QA2 왜 차별에 대해 강력히 문제 삼고 있는가?

주후 1세기의 초대교회는 당시사회의 경향과는 달리 다른 문화를 가졌다. 즉 교회 내에서 계층과 신분을 초월 하려고 노력했다.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일지라도 교회에서는 노예와 함께 어울려야 했다. 심지어 노예가 모임의 인도자가 되기도 했고 성만찬시 노예 주인이 노예에게 봉사 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어떤 이 들은 여전히 부자나 권세 자를 특별히 대우하려 하기도 했다. 야고보는 그러한 차별적 경향과 태도를 경고했다.

1절

QA1 ‘외모로 취하다’(프로소폴렘프시야시스)란 말의 의미는?

얼굴, 외모, 용모란 뜻의 프로소폰과 취하다라는 동사 랍바노의 합성어로 사람의 외적인 모습을 보고 그것만을 중시하여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람의 본질적인 면보다 신분이나 직업, 빈부, 성별 등을 따라 차별하는 편파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QA2 사람의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권면이 온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들이 영광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구속 사역을 담당하셨다. 즉 그 분의 희생은 유대인이나 부자나 고위관리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방인이나 가난한 자들이나 소외 된 계층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를 믿는 자가 사람을 외적조건으로 평가하고 대우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 야고보의 논지이다.

2절~4절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이해득실을 꼼꼼히 따져보고 부자와 빈자를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를 판단해서 다르게 대우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사악한 행위임이 분명하다. 어떤 위치에 있는 자든지 간에 동일하게 대우를 해주는 것이 스스로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

들이 행할 태도이다.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가시적으로 보이는 어떠한 높음과 낮음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영혼은 소중하고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외모를 취하시지 않는 분이시다.(삼상 16:7,

사 22:16)

QA1 본 서신을 받은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에서 이뤄지는 차별 대우의 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재물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인 이익의 득실을 따져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부자에게는 아부를 하며 가난한 자는 괄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인생을 사는 지혜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나에게 상대가 유익한가?’하는 물음이 차별 대우를 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곧 계산적 사고가 차별 대우라는 결정과 선택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QA2 계산적 사고, 곧 차별 대우를 하게끔 한 우리의 사고를 악한 생각 이라고 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차별 대우란 인간의 죄악 된 본성에서 기인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계산적 사고 하에서 나온 모든 행동과 결정은 죄라는 것이다.

5절

QA1 성도들이 가난한 자를 차별하고 멸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 ?

하나님 편에서의 가난한 자에 대한 옹호 및 부자에 대한 경계를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QA2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선택하사 믿음에 부요

함을 주신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믿음 안에서 부요해지기 위해서는 심령으로 가난 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은 자신에게 의지 할 것이 전혀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깨닫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쉬우며, 또한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는데 보다 좋은 여건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여 야고보는 ‘가난한 자’를 신앙심이 깊고 경건한 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은 물질이나 사회적 지위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

QA3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한다는 사실 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본 절에 언급된 가난한 자들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임을 나타낸다. 야고보는 시련에 대해 다루는 문맥에서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이라고 표현을 쓰면서 하나님은 바로 그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하였다. 그들은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한 자들이며, 본 문의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된다. 물질적으로는 비록 가난해도 믿음에 부요한 자들 역시 교회 내에서 벌어지는 차별 대우라는 시련을 믿음으로 잘 극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기업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조차 설 자리가 없다. 그 시련을 믿음으로 이길 때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준비해 두신 영적 기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복된 자들인 것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6절

*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를 이용하여 재판을 통해 약한 자들의 인권을 철저히 유린해 버리는 자들이다. 야고보는 여기서 이러한 자들의 행태를 비판하며 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와 같은 자들에게 좋은 대우를 하고, 오히려 억압받은 가난한 자들을 더욱더 괄시하는 것은 분명코 바람직하지 못한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7절

QA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다.’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종교적인 핍박과 탄압 등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6절과 7절 말씀을 종합하면 부자들은 오히려 너희들을 탄압하고 하나님의 영광마저 짓밟았는데 너희는 어째서 그러한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선대하느냐라는 책망이 담긴 말씀인 것이다. 물론 이 권면을 이해할 때 오해하지 말 것은 가난한 자는 무조건 선하고 부자들은 모두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 본 절에서 야고보가 부자들을 예수의 아름다운 이름을 모독하는 자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불신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참석한 것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모임에는 참석 하나 구원에 이르지 못한 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8절

QA 이웃 사랑이 왜 최고의 법인가?

예수 생전에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두 계명으로 요약하였다.

1. 하나님에 대한 계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2. 사람에 대한 계명으로 ‘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마 22:35-40)

따라서 외모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이웃 사랑은 사람에 대한 최고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

9절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고 차별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범죄 행위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라는 출 23:6 말씀과 잠 14:21 상반절의 말씀인 ‘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라는 구절을 염두에 두면서 그들의 행동이 율법에 비추어 범죄임을 강조하고 있다.

QA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다는 말의 의미는?

인간적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면 단지 윤리적 비난에 그치지 않고 율법을 어긴 것이 되어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람을 차별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범법자가 되는 것이다.

10절

QA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프타이오-과오를 범하다. 죄를 짓다.) 모두 범한 자가 된다.’라는 말씀은 어떤 근거로 말씀 하신 것일까?

그것은 모든 율법은 동일하신 한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진 것으로 이를 각각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중에 하나만 범해도 전체를 범한 것으로 간주 되는 것이다.

Ex) 다윗의 밧세바 간음 사건

 

11절

* 하나님이 모든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는 지키고 다른 하나를 어긴다면 곧 그것은 하나님의 전체 뜻을 거스르는 행동이 되는 것이다.

12절

QA1 ‘자유의 율법 이란 무엇인가?

1:25절에서 언급 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과 같은 것으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야고보는 지금 성도들에게 장차 심판 때에는 복음이 기준이 될 것이니 이를 염두에 두고 항상 복음대로 살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QA2 복음대로 사는 삶이란 도대체 어떠한 삶인가?

비록 몸으로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이 땅을 살아가더라도 천국 시민답게 삶의 기준과 원칙만은 언제나 복음과 성령에 둠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차원 높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복음 (십자가의 도=죄의 해결책) -‘유 앙겔리온’은 원래 황제의 즉위나 전쟁에서의 승리를 알리는 일과 관련하여 사용 된 단어로 ‘좋다’라는 뜻의 ‘유’와 ‘소식’이라는 뜻의 ‘앙겔리온’의 합성어로 좋은 소식이란 의미를 지닌다.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 받을 비참한 운명을 지닌 인간에게 메시야인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대속하심으로 그 은혜를 믿기만 하면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구든지 영원한 구원에 동참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핵심 진리이다.

*복음을 전 한다는 말은 구원한다. 즉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일에 동참 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Ex)마라톤의 역사

QA3 항상 율법과 그에 근거한 심판을 생각 하고서 말도 하고 행위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들이 ‘자유의 율법대로’심판을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심판을 받을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그들은 그들의 한 말과 행한 것에 대해 분명히 심판을 받을 것이다.(고전 3:11-15, 고후 5:10) 그리고 다가 올 심판을 ‘자유의 율법’을 근거로 해서 받게 될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믿을 자들이 ‘자유의 율법’인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날마다 생활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13절

*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심판이다. 따라서 지상에 있을 때 손을 펴 긍휼과 사랑을 풍성히 베푼 사람은 심판 주되시는 주님 앞에 거리낄만한 것이 없으므로 심판대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떨 이유가 없다. 오히려 ‘긍휼을 베푼 자’는 칭찬과 상급이 보장되어 있기에 기뻐하고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장(14-26) 행함 없는 죽은 믿음과 행함으로 입증되는 참된 믿음

14절

* 본 절은 두 개의 질문으로 되어있다.

1.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에 따르는 행함을 갖지 못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행함’에 해당하는 단어‘에르곤’은 사도 바울의 저서 살1:3에서 ‘역사’로 번역된 단어이다. 이는 행함이라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움직이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즉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 역시 강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이미 예수님도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 7:21, 25:41-46, 눅 6:46)

2. 만약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때에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을 지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인 이들의 잘못된 이해를 지적하며, 삶으로 나타나는 참된 믿음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믿음과 행함은 일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설의법을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다.

15절-16절

* 야고보는 초대교회내의 극도로 비참한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15절) 이들은 실제적으로 돕지 않고 그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 아무 유익도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16절)

17절

* 사도 바울은 갈 5:6에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인정받는 것이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본 절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8절

* 너는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내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면 정말 너의 믿음이 확실히 있는지 알 수 있겠고 그런 연후에 나도 내 행함을 통해 나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면서도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딛 1:16)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구체적인 행위의 삶으로 그 진정성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19절 QA1 귀신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는가?

귀신들은 타락한 천사들로서 곧 영물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 잘 안다. 잘 알기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QA2 이러한 귀신들에 대해 주님은 어떤 태도를 보이셨는가?

엄중하게 꾸짖으시며 자신 앞에서 물러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언가 알기는 했지만 진정한 믿음과 순종 없이 오히려 성경 지식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통해 단지 지식으로만 아는 믿음, 순종의 행위가 없는 믿음은 알지 못해서 순종치 않는 것보다 오히려 더 위험하다. 따라서 더 큰 책망의 대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21절

* 본 절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전에는 의롭지 않았는데 이삭을 바친 후에 비로소 의로워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들을 바치는 순종을 통해 더 이상 그의 믿음이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분명하게 됨으로써 그의 ‘의’ 역시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2절

* 믿음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 추상적인 것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참된 믿음이다. 아브라함의 믿음 역시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 참된 믿음이 입증되고 구체화되었다. 야고보는 바울처럼 성도에게 주워지는 최초의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난 후에 그 믿음의 성장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자연스럽게 행위가 강조되는 것이다.

23절

QA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는가?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까지 바치는 순종을 보임으로써 더 이상 그의 믿음이 의문의 여지도 없을 만큼 분명해지자 하나님께서도 그를 친구로 삼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의 철저한 믿음과 순종으로 일약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24절

QA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주장하는 야고보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주장하는 바울과 서로 상충되는가?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 다만 강조점의 차이일 뿐이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써 의롭게 된다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대해 ‘오직 믿음으로써’의롭게 됨을 강조해서 설파했던 것이고, 야고보는 믿음만 강조 할 뿐 믿음에 따른 행함을 도외시하는 신자들에게 행함 있는 믿음을 힘주어 가르쳤을 뿐이다.

25절

QA 어떻게 기생 라합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었나?

야고보는 단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도운 기생 라합의 영웅적인 행위가 그녀를 의롭게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그녀의 행위는 그녀가 우상을 배격하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분명한 ‘믿음의 행위’였기에 그로 인해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했다.(히 11:31)

 

3장(1-12) 바른 신앙생활에 필수적인 혀의 올바른 사용

1절

QA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경고한 이유는 무엇인가?

교사의 위치, 특히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영적 교사의 위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잘 알고 있는 그로써 이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당시는 선생이라 불리는 랍비 계층이 사회적으로 대단한 존경과 특권을 누렸다.(마 23:2-7) 그렇기에 당시 사람들은 랍비가 되고자 했으며 많은 노력을 했다. 곧 책임과 사명에 의한 것이 아닌 특권이나 다른 사람의 갈채를 받기 위해 랍비 자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일깨우려 했던 것이다.

2절

QA 어떻게 우리가 온전함을 얻을 수 있는가?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사람에게 있어 말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말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마 12:34)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온전함은 ‘성숙함’이다.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 점차 성숙해져서 마침내 주님의 온전함에 이르기까지 힘써야 한다.

* 말이나 소와 같이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동물을 제어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입에 물린 재갈이나 굴레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말의 실수를 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은 자신의 온몸, 즉 모든 행동을 스스로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가축의 비유를 들어 혀의 영향력과 그 혀가 잘못 사용 될 때의 심각한 결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3절

* 본 절의 비유는 말의 재갈처럼 혀를 통제하는 사람이 허물을 감출 수 있으며 (잠 10:19) 성숙한 인격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4절

*키는 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적다. 그렇지만 그 큰 배를 작은 키 하나로 사공은 마음대로 조정 할 수 있다. 키는 바로 그런 기능을 지니고 있다. 야고보가 본 절에서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이라는 외부환경과 관련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독자들에게 배의 키와 인간의 혀는 외부적인 환경도 극복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만약 성도들이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혀를 지혜롭게 잘 조절하여 사용한다면 비록 환경적인 어려움은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 자리에서 책망과 형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5절

수십만 헥타르(ha) 의 광대한 숲이 작은 성냥불 하나로 다 타버린 일이 있다. 처음에는 아주 작게 시작된 불이 바람을 타고 번지면서 삽시간에 산 전체를 다 삼켜 버리는 것이다. 야고보는 일상적 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화를 가지고 작은 혀의 엄청난 파괴력을 극적으로 제시한다. 이는 혀를 잘못 사용 할 때 발생되는 엄청난 결과로써 많은 것을 시사한다.

6절

QA1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언어생활의 위험성을 경고 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수레바퀴는 ‘인간존재의 과정’또는 ‘우리 삶의 과정’이란 의미이다. 이는 더 구체적으로 길흉화복이 교차하는 과정 흥망성쇠와 반복되는 변화무쌍한 인생노정을 가리키는 표현이며 당시 관용적으로 사용되었다. 혀는 이러한 인생에 불을 질러 그 삶 전체를 망쳐버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QA2 혀가 왜 우리의 몸을 불사르는 불의의 세계인가?

혀를 잘못 사용하게 될 경우, 그것은 불의한 세계의 특징을 고스란히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저주, 탐욕, 불경, 육욕, 우상숭배, 이간질, 비방, 시기. 다툼 등이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모두 혀를 통해 발설되기 때문이다.

7절

* 짐승이나. 새. 벌레와 같은 이 땅의 피조물들은 모두 사람의 손에 길들여지지만, 막상 인간의 혀만큼은 누구도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8절

QA 만일 혀가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길들이기 위해 노력 할 필요가 있는가?

인간의 본질적인 나약함과 죄 된 성향 때문에 우리 삶에서 혀는 결코 온전하게 길들여지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자라갈 때 우리는 혀를 잘 다룰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혀를 저주하고 파괴하는 데 사용치 않고, 축복하고 세우는 데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혀 자체보다 그것의 근본인 내적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다스릴 때(마 12:34), 더욱 혀를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말 한마디로 사람에게 용기를 불어 넣고 새 희망을 줄 수도 있는 반면, 독기 가득한 혀로 내뱉는 말에 얻어맞은 사람은 마음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따라서 바른 신앙을 가진 자는‘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 141:3)하고 늘 기도하며 경계해야 한다.

9~10절

** 야고보는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곧 이 우주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창 1:26) 이러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곧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관계와 인간에 대한 관계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긴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요일 4:20)

11절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라고 하였다. 여기서 샘이란 물론 사람의 입을 비유한 것이며, 단물이란 선하고 아름다운 말을 의미하고 쓴물이란 악하고 패려한 말을 가리킨다. 즉 샘이 한 구멍을 통해 단 물과 쓴 물을 함께 낼 수 없듯이 사람 또한 한 입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말과 악하고 패려한 말을 함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2절

** 혀 역시 제 나무의 열매를 맺는 자연법칙과 마찬가지이다.

혀도 그 마음의 본성이 선하면 선한 말을 내뱉고, 그 마음의 본성이 악하면 악한 말을 내뱉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짠물이 단 맛을 낼 수 없는 것처럼 악한 마음을 지닌 자가 선한 말을 할 수 없고, 혀를 통제하지 못한 자가 선한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해야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엡 5:18)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자들이며,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악한 열매가 아니라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 5:22~23)

3장(13-18) 세상의 악한 지혜와 하늘의 선한 지혜의 대조

13절

QA1

하늘에 속한 지혜와 세상에 속한 지혜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겠는가?

야고보는 세상에 속한 지혜는 시기와 다툼을 동반하며 소란과 악행으로 끝난다고 말씀하고 있다. 선을 이루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인지 이기적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그 지혜의 출발점을 보면, 그것이 세상에 속한 지혜인지 하나님께 속한 지혜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

QA2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란?

단지 머리가 좋거나 아이큐가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당시 지혜와 총명은 선생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임을 힌트로 삼으면 이는 선생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질 이하의 말씀은 선생, 더 나아가 지도자에 대한 교훈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하는 것처럼 지혜에도 반드시 그 열매가 있는 법이므로, 만일 누군가 지혜와 총명이 있어 선생으로 나서기 원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선한 삶의 열매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4절

** 열매가 없고 시기와 다툼만 있다면, 이는 참된 지혜와 총명이 없다는 증거니 스스로 선생이라고 자랑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QA ‘진리를 거슬려 거짓하지 말라는 구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1. 단지 교사된 자는 교회 안에서 진리를 거슬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는 말이다.

2. 마음속에 시기와 다툼을 품고 있다면 그가 가르치고 있는 진리에 역행 하여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된다는 의미이다.

15절

** 야고보는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그러한 지혜가 하나님께 기원을 둔 지혜가 아니라고 본 절에서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면서 이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 지혜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명시적으로 조목조목 열거한다.

1. 세상적(에피게 이오스)-세상의 시각만을 기준으로 삼아 적용하는 불완전 한 지혜를 말한다.

2. 정욕적(프쉬키케)-짐승들처럼 본성적인 욕망에 지배되어 살아가는, 성령 이 결여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고전 2:14, 15:44,46, 유 1:19)

3. 마귀적(다이모니오데스)-악한 영을 닮은 혹은 ‘악한 영에서 기인하는’ 이라는 미혹하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지혜는 하나님과 대적 할 수 밖에 없다.

16절

QA 세상 지혜의 가장 큰 특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간시키는 일 같은 것은 예사로 한다.

**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은 평정이 없기에 무질서와 파멸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17절

** 위로부터 난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로서 이 지혜는 세상으로부터 난 지혜 와 완전히 정 반대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야고보는 바울이 말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22~23)와 유사하게 하나님께서 난 지혜의 여덟 가지 구체적인 특성을 나열하고 있다.

1. 성결(하그노스)-‘순결한, 순수한’이란 뜻으로 부정하거나 더럽지 않음 과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선한 지혜는 더럽고 추한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2. 화평(에이레니코스)-‘평화로운, 평온한’이란 뜻이다. 즉 화평을 목적으 로 하고 화평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실제 우리의 삶에서 지혜의 사람은 대인 관계든 어떤 관계든 반드시 다툼으로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고, 자기의 유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세상 지혜를 동원하다보니 다툼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참 지혜는 자기의 생명과 희생을 무릅쓰고 라도 화평을 만드는 것이다. 자기 몸을 깨뜨려 이웃과의 사이에 쌓인 높은 담을 허는 것이다.

3. 관용(에피에이케스)-‘온화한, 온순한’이란 뜻으로 세상의 지혜를 가진 독선적이고 오만한 사람의 마음과 달리 참을성과 이해심이 많고 관대하며 친절한 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이웃의 잘못을 접하게 된다. 그때 진정 필요한 것은 이웃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그 마음이 옹졸해지지 않고, 비좁아지지 않는 관대함 그것을 바로 관용이라 한다. 우리가 사람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바로 이러한 관용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악한 자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이 우리의 못난 마음을 고친다. 관용의 마음을 가지지 못할 때 자신의 영혼은 병들어 간다.

4. 양순(유페이데스)-‘쉽게 순종하는, 고분고분’이란 뜻이다. 즉 복종하는 태도를 말하며 유순한 성품을 말한다.

특히 양순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어른들로부터 바보가 되지 말라고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데에 대한 경각심부터 배우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가장 큰 덕목은 똑똑함과 야무짐이다. 그것을 위해 어려서부터 손해 보지 않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아이들의 성품을 병들게 한다. 아이들은 적당히 불순종하고 적당히 항거하는 것이 이미 몸에 익혀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순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 인생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5. 긍휼(엘레오스)-고통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향해 하나님의‘자비, 동정 심’이란 뜻을 의미한다. 하늘의 지혜를 가진 가는 사람의 지혜로부터 나오는 냉정함과 냉랭함과는 달리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긍휼한 마음으 로 자비와 동정심을 아끼지 않는다.

6. 선한열매(아가돈카르폰)-긍휼의 결과로 나타나는‘주제(엘레에모쉬네)’ 를 말한다. 즉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다.

7. 편벽(아디아크리토스)이 없는 것-사람의 외관만 보고 판단하거나 공정성 을 잃은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외모를 사람에 대한 모든 판단의 기준과 잣대로 삼는 것이다. 학연, 지연, 혈연 등에 얽매이지 않고 제대로 된 평가를 행하여 이 사회를 개축하는 지혜를 지녀야 한다.

8. 거짓이 없다(아뉘포크리로스)-위선이 아닌 진실하고 참되게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거짓이란 속임수를 말한다. 남을 속이는 것이다.

18절

QA 세상의 지혜와 신령한 지혜에 대한 결론으로 본 절의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의 지혜로 사는 삶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현명해 보이고 또 결과 역시 확연하게 보이는 반면, 신령한 지혜로 사는 삶은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고 그 결과 역시 불확실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곧 자기주장을 중심으로 한 세상의 지혜로 사는 자는 당장에는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열매도 없이 비참한 파멸에 이르는 반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신령한 지혜로 사는 자에게는 비록 당장은 아닐지라도 반드시 궁극적인 열매와 보상, 구원과 영광이 있다는 것이다.

 

4장(1-12) 세상 정욕의 경계 및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합당한 자세

1절

**‘싸움(폴레모이)’이란 원래 군사 용어로 집단 사이에 일어나는 대규모의 분쟁 또는 전쟁을 의미한다. 그리고‘다툼’이란 개인 간의 시비와 분쟁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싸움과 다툼이란 두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당시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 이런 싸움과 다툼이 많이 일어났던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QA 사회적이든 개인적이든 모든 분쟁과 다툼의 궁극적 원인은 무엇인가?

야고보는 성도들 간의‘싸움과 다툼’의 원천이 외부적 환경이 아니라 그들의 내부적 원인으로 본다. 개인 자신의 쾌락과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이웃에 대한 피해까지도 서슴지 않는 세속적인 성도들을 바라보며 싸움과 다툼의 원인은 바로 정욕에 있다고 규명한다.

2절

** 너희들은 어찌하여 필요한 것이 있으면 먼저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그처럼 아무 유익도 없는 무모한 싸움을 하고 있느냐. 라는 말씀

3절

QA 만일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 하지 않으시는가?

우리가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먼저 하나님께 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다 응답 받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그 동기와 목적이 선(善)해야만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죄악이 있으면 결코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시 66:18, 사 59:1~3) 또한 우리의 기도가 자기중심적이어서 (기도 속에 이기적 요소가 포함) 분명히 하나님의 목적에 어긋나면 응답하지 않으신다. 성도들 가운데는 이 진리를 무시한 채 무조건‘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소리를 높여 기도한 후 반드시 응답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4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모이칼리데스)’의 본래 의미는 자신의 남편에 대한 정조를 지키지 않고 다른 남자와 부정행위를 하는 여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본문에서 야고보는 이것을 문자적 의미가 아닌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육신적인 간음 행위를 저지른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영적으로 타락을 일삼는 자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다.

QA1 왜 우리가 간음한 여인이 되었는가? 그 간음은 무엇인가?

문맥을 자세히 살피면 그것은‘하나님을 바라지 않고 자기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신부됨을 포기하고 세상의 벗이 된 그 모습이 바로 간음이었던 것이다. 주를 좇아 고개를 돌려 주 바라기가 되기를 거부하고 세상이 주는 것을 얻고자 마음과 몸이 세상의 해를 향하여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가 되었기에‘간음하였다’라고 하는 것이다.

QA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신다는데 왜 우리는 세상과 벗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세상’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 하시 듯(요 3:16)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이 하나님께 적대적인 ‘타락한 풍조’를 가리킬 때 우리는 세상과 벗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러한 세상의 타락한 풍조와 벗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영적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5절

QA 본 절에서 야고보가 인용한 성경 구절은?

사실‘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라는 직접적 표현이 구약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야고보는 다만 성경에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언급한 말씀을(출 20:5/34:14, 신 4:24/5:9/6:15, 겔 39:25 등) 염두에 두고 성령이 성도들을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그 표현을 바꾸어 말한 것이다. 제 3위 하나님이시며 성도의 마음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이 성도의 영적 순결을 바라며 신앙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지면 불타는 질투심을 품으신다. 왜냐하면 사랑은 독점을 원하기 때문이다.

EX: 아내가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6절

** 본 절에서 야고보가 말하는 교만한 자란 화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비웃으면서 자기의 욕망을 따라 분쟁을 일삼는 자들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대적하신다. 반면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악한 욕망을 억제하고 형제와의 화목을 추구하며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는 오직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자기를 낮추는 길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자세임을 아는 자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자를 돌아보신다.(욥 22:29)

7절

** 본 절은 진정한 겸손이란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에 대해서는 그가 피할 정도로 단호하게 대적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겸손은 선에 대해서는 온유하고 악에 대해서는 단호한 것이라고 확대 해석할 수 있다.

QA 어떻게 우리가 마귀와 대적할 수 있는가?

1. 두려워 말고 마귀의 존재를 인정한다.

2. 마귀의 활동이 어떤 것들인지 파악한다. 예컨대 유혹, 비방, 이간질 등

3. 하나님께 복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맞선다면(엡 6:10~18) 예수님이 십자가로 마귀를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권세를 담대하게 주장할 수 있다.(요일 4:4)

8절

QA1 ‘두 마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과도 함께 벗하려는 마음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마음(눅 16:13)을 말한다.

따라서 마음을 성결케 한다는 것은 이러한 두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따르고 좇는 거룩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해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촉구하는 것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받기 위한 비결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함에도 우리의 주위에는 영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한편 세상의 쾌락과 재물의 축복을 얻기 위해 적당히 세상과도 타협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QA2 회개를 필요로 하는 그들에게 두 개의 명령형으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1. 손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다.

‘카다리조’는 구약 제사의 문맥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특히 손을 씻는 행위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행했던 중요한 의식이었다.(출 30:20~21) 이 의식은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음식을 먹기 전에 행해야만 하는 유전이기도 했다.(막 7:1~4) 그러나 여기에서 야고보는 그러한 의식적 정결의 용례를 도덕적, 영적 정결의 의미로 전환한다. 그는 죄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자신의 범한 죄를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에 씻김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2.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는 자들에게‘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요구한다.

여기에서‘하그니조’는 순결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과 동일하게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행했던 제반 정결의례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는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마음을 한 곳으로 돌리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9절

QA 주님의 강림을 앞에 둔 상황에서 두 마음을 품는 죄인들은 왜 웃음 과 즐거움 보다는 슬픔과 애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 모두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중한 죄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3:9~18) 반면 하나님은 이러한 죄인들을 엄히 심판하실 우주의 재판장이시다.(사 66:16, 욜 3:12) 그런데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보셨기에 먼저 인류를 심판하시기 전에 독생자를 화목 제물로 보내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으며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신다. 곧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화목하셔서 엄한 심판대신 구원의 기쁨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다.(엡 2:3~7)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을 거절하고 끝까지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면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의 심판대 앞에서 죄를 밝히 드러내 영원한 사망과 파멸을 가져온다.

10절

** 본 절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실체를 인정하고 죄에 대하여 애통해 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높여 주시되, 삶의 여정 중의 어느 한 지점에서 높여 주신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와 더불어 영광중에 세상을 통치하도록 종말에 높여 주실 것이다. 반면 진실하지 못하고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에 종국에는 실패하게 될 것이다.

11절

QA1 왜 야고보는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면 그것이 곧 율법을 비방

하고 판단하는 것이 된다고 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다.(출 20:1~17) 이 율법은 모세에 의해 출애굽기와 레위기, 신명기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율법의 본질을 두 가지로 나누어 언급하였다.

첫째는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막 12:28~33)

야고보는 2:8에서 레 19:18을 근거로‘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하였는데 여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랑은 율법의 핵심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행하여야 할 마땅한 본분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성도들이 다른 형제들을 비방하고 판단한다면 이것은 곧 율법의 핵심인 사랑의 본분을 어긴 것이 되고, 이것은 또한 율법을 대적하고 판단한 것이 된다.

QA2 비방하는 것이 왜 사단의 행위인가?

1. 비방하는 자들의 대상이 다름 아닌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이다. 곧 비방의 대상인 그들은 같은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이라는 것이다.(마 23:8) 야고보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형제’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데 이렇듯 믿음 안에서 하나 된 형제자매들을 중상하고 비방하다니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한 형제자매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단의 행위가 아닐 수 없다.

2. 우리 모두에게는 이웃과 동료 성도들을 판단할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그러므로 자신에게도 없는 권한을 남용하여 함부로 이웃을 비방하고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갖다 놓는 궁극적인 심판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는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으므로(살후 2:4) 이러한 행위야 말로 사단의 행위임을 더 없이 분명하게 증거 해 주는 것이다.

12절

** 야고보는‘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라는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이들의 오만함을 지적하며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이 마지 율법의 입법자인양 이웃이 되는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한 것이며, 또한 율법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 소경인 것이다. 율법은 실로 자신의 죄를 거울처럼 볼 수 있도록 하며 동시에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하신다. 만약 그들이 율법의 역할과 율법의 준행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뼈저리게 인식한다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어 형제를 비방하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4장(13-17) 자기 뜻대로 사는 세속적 삶에 대한 경계

13절

QA 야고보는 왜 완벽한 사업계획과 프로젝트를 수립하고 실행할 줄 아 는 자들을 그토록 신랄한 어조로 책망하는 것인가?

원래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계획을 통해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다.(사 14:24)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께서는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주님을 따라 나서겠다는 자들을 향해 좀 더 곰곰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셨다.(눅 14:28-32)

그렇다면 이러한 자들을 책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의 계획과 야심 속에는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꿈과 계획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고 오직 자기들의 뜻과 욕심만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다.(창 1:26) 더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케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 43:21, 엡 1:6)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웅대한 비전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 앞에 먼저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전제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14절

*우리 인간은 한치 앞을 알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마치 장래 일을 훤히 아는 듯이 내일 일을 장담하며 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 짧고 불확실 하며 허무한 인생을 안개로 비유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비유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실로 안개와 같고 들풀과도 같으며 (시 102:11)그림자같이 속히 지나가는 이러한 인생(욥 8:9)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바로 지금 이 순간 충성스런 마음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이다.

15절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자신들의 삶의 절대적인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삶 속에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게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 후에 비로소 주의 뜻 안에서 계획을 세우고 일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배제한 체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자들과 구별하여 나 자신이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가를 깨닫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겸손함으로 살아야 한다.

QA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되게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는가?

1. 자기의 뜻과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교묘히 위장하는 것이다.

Ex) 오로지 인간적인 야심으로 계획한 일을 하나님이 주신 비전 운운 하 며 자기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행위

2. 먼저 자기 욕심대로 행하고는 나중에 이를 하나님 앞에 내놓으며 인정해 달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3. 아무런 노력 없이 되는 대로 살아 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 하 는 것이다.

Ex) 무슬램들이 말끝마다 인샬라 곧 ‘알라의 뜻대로’

16절

QA1 내일에 대한 자랑이 허탄한 자랑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인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찌 될지도 알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허풍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야고보 기자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악한 것이라고 까지 말씀하고 있다.

QA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의 모든 자랑을 예외 없이 교만하고 악한 것으 로 보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자랑 가운데 유일하게 아름다운 자랑이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랑은 하면 할수록 아름다운 것이요.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의 의와 지혜일 뿐 아니라(고전 1:24) 이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롬 1:16)

17절

*‘선을 행한다는’개념은 유한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지칭한다. 사람이 하나님이 뜻대로 그 주관 하에서 겸손히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치 않은 것이 죄라고 선언 하는 것이다.

 

5장 (1-6) 불의한 부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

1절

QA 야고보가 당시 부자들을 향해 울고 통곡하리라는 폭탄과 같은 선포를 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한 마디로 심판자이신 주의 재림이 임박하였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분명 지금 압박한 종말 사상에 근거하여 본 서신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9절에서 원망을 말하고 권면하면서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고 선언한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은 듯 세속적이며 사악한 부자들에게 임할 재앙과 심판이 이미 문 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철저히 종말론적 관점에서만 이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2절-3절

QA 성경은 재물 자체를 악하다고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이를 책망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지금이 말세이기 때문이다. 즉 옛 세상이 지나가고 새롭게 열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이때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나갈 옛 세상이 아니라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현재 이 세상의 행적은 조만간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이며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며 재물을 쌓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 구원을 막고 재앙을 쌓는 어리석은 행위임을 알아야한다.

4절

*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결코 품삯을 착취당한 품꾼들의 절규를 무시하시는 분이 아님을 언급한다.

5절

QA ‘도살의 날 마음을 살찌게 하였다란 무슨 의미인가?

도살의 날이란 종말론적으로 심판의 날을 의미하며 마음을 살찌게 하였다는 것은 이 세상의 재물과 쾌락에 빠져 죄를 지으면서도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 본 문의 부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심판의 날을 위하여 자신들의 죄악 된 마음을 살찌우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소나 돼지 같은 짐승이 도살장에 끌려가 도살될 자신의 운명을 모르고 욕심껏 먹으며 살아가듯이, 부자들도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체 그저 자신들의 눈앞에 보이는 죄악 된 쾌락에 흠뻑 빠져 오직 그것만을 좇아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6절

QA1 옳은 자란 누구인가?

어떤 이들은 옳은 자를 예수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옳은 자라는 표현은 그 분에게만 어울리는 칭호이고, 스데반 설교와 바울의 고백에서 예수를 의로운 자, 의인으로 호칭하였기 때문이다.(행 3:14-15, 7:52, 22:14) 그러나 문맥으로 볼 때 옳은 자는 가난하지만 하나님의뜻대로 살아가면서 부자들에게 착취당한 자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QA 본 절의 내용을 통해 야고보는 과연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인가?

아마도 야고보는 단순히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행하는 죄악을 폭로하는 데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비록 현재에 아무런 힘이 없어 대항할 수 없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신다.(롬 12:19, 신 32:35) 공의의 하나님은 분명 자신의 진노의 날에 부당하게 억압받는 자들의 억울함을 외면하지 않고 갚아 주실 것이다.

5장(7-12) 고난 중의 믿음의 인내 권면 및 맹세 금지 교훈

7절

QA1 우리가 주님의 재림 때까지 인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주님께서 이 땅의 구원을 위해 지금도 참고 기다리시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 역시 동일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벧후 3:9)

2. 주님의 재림 때까지 인내하는 자만이 온전한 열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막 13:13)

QA2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어떤 비인가?

이른 비는 10월~11월 파종기에 내리는 가을비로 이른 비가 제 때에 와야 메마른 땅이 부드럽고 촉촉하게 되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데 좋은 환경이 된다. 늦은 비는 곡물의 추수기 3월~4월에 내리는 봄비로 이비가 제때 와야 농작물의 결실이 풍요롭게 된다. 따라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때를 따라 적절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상징한다.

* 농부는 씨앗을 파종해 놓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정해 주신 때에 내리는 그 비를 인내로서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 야고보는 인내를 본으로 제시하면서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강림의 날을 기다리며 인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농부가 수확 시기를 자기 맘대로 앞당길 수 없듯이 주의 강림의 날 또한 성도들이 앞당길 수 없다. 재림 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오셔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이 빨리 오지 않는 다고 하여 기다림을 포기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인간의 생각으로 볼 때 비록 더디 이루어진다고 할지라고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이기에 성도들은 그날을 고대함으로 기다려야 할 것이다.

8절

**본 절에서 야고보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인내로서 기다리되 조금도 흔들림 없이 견고한 자세를 견지 할 것을 권면한다.

9절

* 세상이 주는 시험과 고난에 대한 인내를 멈출 때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서로에 대한 원망이다. 따라서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 참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다른 측면에서 말씀한 것이다. 본 절에서 서로 원망하지 않음으로써 심판자 되신 주님의 심판을 면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서로 원망하지 않으면 오히려 상급을 받으리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다.

10절

*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 순종하며 살면서 얼마나 주의 이름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하였는지 또 그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어떻게 그것을 온전히 참아내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선지자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듯이 항상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야고보는 선지자들을 인내의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라면 이 땅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될 고통을 인내로써 소망 가운데 이겨내야 함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1절

* 야고보는 고난 중에 인내한 두 번째 모범으로 욥을 들며 그의 결말을 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욥 42:10-17에 언급된 대로 욥은 그의 인내로 말미암아 처음보다 두 배의 축복을 누리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야고보는 이러한 인내와 축복에 대해 언급하면서 단지 인내했던 욥 뿐 아니라 결국 이러한 인내와 축복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 절에서 야고보는 이러한 하나님을 가리켜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긍휼을 뜻하는‘라함’은 자궁에서 나온 말로 ‘같은 태에서 나온 이들에 대한 감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 절에서는 ‘라함’대신 ‘플뤼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바, 성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는 단어로, 이 말은 ‘불쌍히 여기는 내장으로 가득 차 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헬라 적 표현이라기보다 전형적인 히브리 적 표현의 하나로서 그야말로 우리 하나님은 그 중심부터 자비와 사랑이 많을 수밖에 없는 분임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2절

* 우리는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경우에 맹세를 하게 된다.

1. 미래에 대한 약속과 장담을 할 경우이다. 곧 ‘맹세컨대 앞으로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맹세가 얼마나 허망하게 끝나는 지는 성경 속의 베드로가 잘 보여주고 있다.(막 14:27-72)

2. 진실에 관계된 증언을 할 경우이다. 곧 선서와 같은 경우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법정에서나 국회의 청문회와 같은 소위 실체적 진실이 문제가 되는 경우 증인으로 하여금 진실만을 말하도록 선서시키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 심지어 위증죄와 같은 것까지 만들어 두지만 선서를 통해 진실이 가려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데도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걸핏하면 ‘내 목을 걸고’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성을 간다.’는 식의 말로 아무렇지 않게 맹세를 하곤 한다. 하지만 그 맹세가 어긋나는 경우는 수없이 많아도 실제 목을 걸었다거나 성을 갈았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세상의 맹세조차도 믿을 수 없는 불신과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는 성도들조차도 예외일 수 없다. 즉 성도들 역시 ‘교회 직분이나 신앙을 걸고’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맹세하면서도 거짓을 말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본인의 명예는 물론 하나님의 영광까지 가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QA 맹세는 전혀 해서는 안되는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맹세가 신성 모독이 아니라는 이유로 쉽게 남발하는 경우가 흔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교훈에 따라(마 5:33- 37) 이 같은 무책임하고 가벼운 맹세의 남발을 금한 것이다.

5장(13-20) 고난 중의기도 및 미혹된 자에 대한 인도 권면

13절

QA 본 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고난과 기쁨이라는 각기 다른 상황에서 성도가 어떻게 하여야 하는 가에 대한 선명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고난과 역경이 오면 기도하고 즐거울 때면 찬송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신앙의 원칙조차 제대로 지키기 못할 때가 많기에 강조하는 것이다. 장로들은 이에 응하여 환자를 찾아가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주어야 한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자에게 기름 바르고 기도하는 행위 모두가 ‘주의 이름으로’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야고보는 여기서 하나님의 권능의 개입만이 병자의 병을 낫게 하는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QA 왜 병자는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장로들을 청해야 하는가?

만약 장로 한 사람이 혼자 병자의 집에 가서 병자를 위해 기도한 후 병이 나았다면 그 장로는 자만심에 빠지게 될 수 있다. 그러나 병자를 방문할 때 여러 장로들이 함께 가게 된다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병자의 병이 자신의 능력 때문에 나았다고 치유의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려는 교만을 미연에 방지 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15절

QA1 과연 무엇이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인가?

1.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곧 의심 이라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온전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4:8)

2.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바라는 마음이 더 없이 지성스럽고

절실하게 드리는 기도이다.(눅 8:40-42, 마 15:22-28)

Ex) 사랑하는 자식을 구하려는 부모의 심정

QA2 믿음의 기도는 치유를 보장해 주는가?

병실 사역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야고보가 치유에 대한 의학 용어를 사용치 않고 죄 사함과 구원이라는 신앙의 용어만을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병자에게 있어 육체적 치유 이상으로 영적 치유가 중요함을 의미한다. 영적인 건강함이 먼저 회복 될 때 다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육체적인 치유가 허락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16절

* 질병이 죄와 연관이 있다면 그 죄를 서로 서로에게 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 의인이란 문자 그대로 아무런 죄와 결점도 없는 완벽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이 땅에 완전한 의인이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홈 3:10) 따라서 여기서의 ‘의인’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성도들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 특히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여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 장로들의 믿음의 기도가 병자를 살리듯이 의인의 간절한 중보기도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17절-18절

QA 왜 엘리야의 기도를 예로 드는가?

의인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16절)

그것은 비를 내리게도, 그치게도 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이었다.(왕상 17-18장)

* 엘리야의 기도로 3년 6개월이나 내리지 않았던 비가 다시 내림으로 땅이 열매를 내었다는 것은 의인이 병자를 위해 하나님께 진실하게 기도 할 때 병자가 치유되는 은혜를 통하여 사랑과 진리의 공동체인 교회가 감당해야 할 기도의 사명을 제시하고 있다.

19절-20절

QA1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는 누구인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었다가 이단의 유혹을 받아 교회를 떠나간 자를 가리킨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각종 이단들의 유혹이 극심했기 때문에 교인들이 미혹을 받아 유대교나 이방종교로 되돌아가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야고보는 잃은 양떼를 다시 찾아 기독교 진리의 바른 길로 인도할 필요성과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죄인을 바른 길로 돌아서게 한 자는 하나님의 작은 목자로서 잃은 양을 찾는데 대한 보상으로 하늘나라에서 영광의 면류관으로 풍성한 상금을 잃지 않으리라 확신 한다.

(마 18: 12-14, 눅 15:3-7)

QA2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란 무슨 의미인가?

이는 문자적 의미 그대로 죄인을 바른 길로 돌아서게 한 자가 그 죄인의 죄를 사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 죄인의 죄가 하나님께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 할 수 없다. 죄 사함의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다. 다만 우리는 미혹된 형제를 옳은 길로 돌아서게 하는 일을 통해 그의 죄 값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 받지 않도록 도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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