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진화과정
허성욱(이학박사, 명광교회 교육목사, 창조과학회 이사,
한국상담협회 및 한국교류분석협회 부산지부장)
물질과 생명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논의는 밑도 끝도 없는 논쟁거리인 것 같습니다.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있는가 하면 저절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앞의 주장은 창조설, 뒤의 주장을 진화설이라고 하는데, 불가에서는 연기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어져 있습니다. 만약 과학을 공부한 사람이 진화론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면 과학계에서 이단자 취급을 받기 쉽습니다. 창조과학회가 출범하기 전에는 교회에서조차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공교육기관에서 그렇게 배워 왔기 때문입니다. 또 종교와 과학은 다루는 영역이 다르다는 생각으로 서로 비껴가 버린 데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필자가 창조론을 받아들이고 창조과학사역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의 몰이해와 공격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달에는 진화론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다윈 이전의 진화론
고대 그리스 시대에 탈레스(Thales, 624-546 B.C.)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은 물이라고 하고, 이전 사람들과는 달리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데에서 신화에 바탕을 둔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하고 설명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조금 뒤에 나온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610-546 B.C.)는 아페이론(apeiron)이라는 원초물질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는 생물체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축축한 것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했고,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각각 다른 모습을 가진 생물체로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이필렬, 1994). 그래서 그는 화석을 현생생물의 조상이라고 했고,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570-480 B.C.)는 내륙에서 바다생물 화석을 관찰하고 옛날에는 바다로 덮혔던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김영성 외, 1978).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504~433 B.C.)도 생물 진화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명체는 보다 고등한 생명체로 점차 진화한다. 식물은 동물보다 먼저 출현했다. 보다 덜 적응된 형태는 잘 적응된 형태로 대치되는 경향이 있다.”고 그는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는 생물체의 기원에 관해서 자연발생한다는 그 당시의 생각에 동조하였습니다.
18세기 초에 마우퍼튜스(Maupertuis, 1698-1759)가 다지증(polydactyly)의 유전을 연구하여 격리와 진화에 의한 자연선택의 역할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분류학자들(특히, 린네 Linne, 1707-1778)에 의해 다양한 생물이 분류됨으로써 진화적 사고에 대한 빠른 진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질학의 발달과 진화론
그 후 진화론은 지질학의 발달로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국 학자 허튼(Hutton, 1726-1797)이 동일 규모, 동일 속도의 지각변화라는 균일론을 주장하였고, 1798년에는 맬서스(Malthus, 1766-1834)가 <인구론>을 발간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밖에는 증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인구증가가 빈곤이나 악덕 등 사회악의 원인인 만큼 식량에 알맞도록 인구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후에 다윈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19세기 초에는, 균일론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프랑스의 퀴비에(Cuvier, 1769-1832)가 창조론적 입장에서 동물의 구조와 기능, 화석에 대해 연구하여 대변혁론(Catastrophism)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기를 든 라마르크(Lamark, 1744-1829)가 용불용설(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하였고, 영국의 지질학자 라이엘(Lyell, 1797-1875)이 1830년 <지질학의 원리>를 발간했습니다. 그는 "현재는 과거를 아는 열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다윈의 등장과 그 후
물리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다윈(Darwin, 1809-1882)은 자연세게에 대한 흥미를 갖고 있었고, 생물채집가가 되기 원했고, 사냥을 즐겼습니다. 그는 비글호에 박물학자 자격으로 승선하여 항해 하는 중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섬마다 독특한 핀치새가 서식하는 것을 발견하고, 귀국 후 여러 학자들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생물의 교배실험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종의 기원>이란 저서를 통해 자연선택적 진화설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의 주장은 창조론자들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고, 헉슬리(Huxley, 1825-1895)가 토론회에서 다윈의 설을 옹호하였습니다. 영국 박물관의 오웬(Owen, 1804-1892)은 다윈의 이론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하버드대학의 유명한 어류학자였던 아가시(Agassiz, 1807-1873)에 의해 미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아가시는 북유럽 전체가 최근의 지질연대에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주장하고, 대변혁론을 수정하여 신이 이 대변혁에 이어 몇 가지 특수한 경우에 대해서 창조적인 작업을 수행하였다고 추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진적 창조(Progressive creation)에 따르면, 신은 천지창조했던 그 이래로 자신의 창조물이 점차적으로 최종의 목표에 이를 때, 즉 하나님의 모습과 똑같은 사람이 창조될 때까지 재창조를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1860년에서 1902년에 이르는 기간에 생명과학은 다윈의 이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종의 기원> 발간 6년 후, 수도사 멘델(Mendel, 1822-1884)이 유전의 법칙을 발표하였지만 다윈의 진화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가 드프리스(Hugo de Vies, 1848-1935)의 실험 후 학계에 받아 들여졌습니다.
1940년경, 골트슈미트(Goldschmidt)는 종(種)의 형성과정에서 다윈이 제안한 많은 작은 변이들의 느린 축적보다는 커다란 유전적 변화가 중요하리라는 생각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지지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는 모든 생물학적 형질은 자연선택에 적응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습니다. 그리고 진화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거의 신다윈설에 의해 이해되는 것같이 보였습니다(성기창 외, 1990).
1980년 10월 16일-19일, 시카고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린 진화론자 학술회의에서 점진론적 진화가 부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의 현대적 종합이론의 제일인자로 알려진 아얄라(Francisco Ayala)는 "화석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작은 변이들이 축적되지 않음을 이제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그 후 하버드 대학의 구울드(Gould)교수는 갑작스럽게 다른 종으로 변한다는 <단속평형설(斷續平衡說)>을 주장하였습니다(한국창조과학회, 1981).
생명의 자연발생설 논의
레디(Redi, 1626-1697)는 실험을 통해 자연발생설을 부정하고, 신(천지창조주)의 뜻에 따라 최초의 동식물이 생겨났고, 그 종은 불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600년 대 말에 현미경이 발명되면서 미세한 작은 생물들이 상상 외로 다양하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자, 니담(Needham, 1713-1781)은 미생물의 자연발생설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스팔란차니(Spallanzani, 1729-1799)가 니담의 실험을 조심스럽게 재현해 보면서 자연발생설이 사라지는 듯했으나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1859년 프랑스의 화학자 뿌세(Pouchet)가 자연발생설을 주장하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파스퇴르(Pasteur, 1822~1895)는 생물과 비생물 사이의 간격이 너무나 큰 것을 보고 자연발생설을 부정했습니다. 그는 백조목 플라스크를 사용한 실험을 통해 "생명은 기존의 생명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생명속생설을 주장했습니다. 이후 자연벌생설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생경의 기원은 영원불변한 생명, 우주도래, 기적적인 창조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영원불변한 생명은 원시 지구의 상황 때문에, 우주도래는 우주공간의 극저온, 진공, 다량의 방사선 등으로 배제되고 있습니다.
1938년 구 소련의 화학자 오파린(Oparin)은 그의 저서 <생명의 기원>을 통해 생명이 어떠한 신비로운 창조에 의하여 생겨났으리라는 가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물질로부터 생명이 생성되었다는 화학진화를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1953년 시카고 대학의 화학자인 유레이(Urey)와 밀러(Miller)의 실험으로 증명된 것(성기창 외, 1990)처럼 진화론자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특성
생물은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물질로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거나 분해하며 살아갑니다(물질대사). 생물체는 세포들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체계를 갖고, 생식과 유전에 의해 자기와 닮은 자손을 남겨 종족을 유지합니다. 주변환경의 자극에 적절히 반응함으로써ㅗ 몸 안의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합니다(김윤택 외, 2002). 이러한 생명의 특성 자체가 저절로 주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비생물과 생물의 간극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화학진화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진화론은 이렇게 진화를 거듭해 왔지만, 여전히 열역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화석학적으로 부정되고 있으며, 그 과학적 증거는 없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이런 문제를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김영성 외(1978). 대학지구과학. 대학교재출판사.
김윤택 외(2002). 고등학교 생물1. (주) 중앙교육진흥연구소.
성기창 외(1990). 생물진화학. 서울 : 형설출판사.
이필렬(1994). 자연과학개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한국창조과학회(1981).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 서울 : 태양문화사.
허성욱 (2004). 창조과학의 이해. 도서출판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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