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배려. 기회
골 4:3-6
외인에 대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
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
할 것을 알리라.
우리는 섬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가정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성숙하고 아름다운 삶은 섬김의 삶입니다. 섬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시간으로 섬기고 물질로 섬기고 마음으로 관심으로 다가감으로 대화함으로 도와줌으로 나눔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물질로 섬기고 마음으로 섬기고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서 함께 하며 섬길 수 있는 삶도 소중하지만 그런 이웃을 만남도 생각하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그런 길벗이 있고 그런 이웃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축복입니다. 모두 다 좋은 섬김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또 한 가지 더 좋은 섬김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도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이웃을 섬기는 일에 이 보다 더 좋은 섬김은 없을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관심이고 배려이고 애정이고 사랑이고 섬김입니다. 이웃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 보다 더 큰 선물이나 섬김이나 영적인 사랑이 없을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전도자로 몸을 내 놓은 것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옥중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리는 중에 골로새 교인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나를 위해 전도의 문이 열려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지혜롭게 행동하라, 그래야 불신자들을 전도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전도가 무엇입니까. 전도는 사람들을 데려와 전도 상을 받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만 전도가 아닙니다. 전도는 그 차원 이상입니다. 전도는 진정한 사랑의 열매이고 관심의 열매이고 섬김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배려하고 선물을 주고 섬기는 일이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운명에 관심 갖는 것“
내 가까운 친구가 지금 암에 걸려 투병하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에 그냥 나만 알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상대방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딤후 2:10에서 “택한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가 구원받게 하려함이라“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전도 받게 된다면 나는 모든 어려움을 참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 일입니다.
이 관심이 중요합니다. 자식이라도, 부모라도, 형제라도 상대방의 운명이나 영혼에 관심이 없으면 전도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고로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영혼과 운명과 미래에 관심을 갖는 일입니다.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전도 안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배우자,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눈물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 눈물도 상대방을 사랑하고 관심을 가질 때 나오는 것입니다. 이 눈물은 여성들에게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여성들이 잘합니다. 눈물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은 모든 남편들을 데리고 나와 집사를 만들고 장로를 만듭니다. 그것은 여성들이니까 가능합니다. 여성들에게는 눈물이 있고 관심이 있고 집요한 설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거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여성들의 역할이 상당히 크게 나타납니다. 신앙의 흐름사를 보면 대부분 여성들을 통해서 모계를 통해서 전파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의 집안에 신앙이 들어온 경로를 살펴보십시오. 보면 거의가 여성들로 인해서 복음화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성들이 특별해서가 아니고 남성들보다 집요한 관심과 애정의 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 보다 여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신 이유도 그런 뜻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여성들은 정이 많고 눈물이 많고 전도도 잘하고 말도 잘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상대방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이런 관심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구원시키게 됩니다.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젊었을 때 친구와 사냥을 갔습니다. 그때 친구가 늪지대의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건질 방법이 없습니다. 그때 친구가 지쳐서 자꾸만 빠져들어 가고 있습니다. 힘이 빠진 친구는 마침내 탈출을 포기하려하고 있습니다. 그냥 놔두면 친구가 죽게 됩니다. 그때 방법을 찾던 비스마르크가 보다 못해 총을 빼들고 친구를 향하여 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를 원망하지 말게, 자네의 고통을 덜어주는 길은 이 방법밖에 없네”하고 총을 쏘려고 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쏘지 말라” 고 소리치면서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빠져나왔습니다. 빠져나온 후 친구가 얼마나 서운해 하는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친구가 말했습니다. “내가 총을 겨눈 것은 자네 머리가 아니고 자네의 정신이었네, 그래야 자네가 빠져나올 힘을 낼 것이 아닌가”하고 본심을 이야기 해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축복하실 때 물질과 큰 집으로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정신과 마음에 복을 주십니다.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면 그 삶은 자연스럽게 축복의 삶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뀌게 하는 일이 전도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게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는 것”
본문을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했습니다. 나의 행동이 때로 상대방에게 부정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선입견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때로 나의 생각 없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게 하고 예수께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신자들의 언행에 세심하게 관심 갖고 보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면서 직장에서, 동네에서, 모임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인색하고 너무 무례하고 너무 말이 많음도, 무책임함도, 신용상실도 모두 문을 막는 걸림돌 역할을 합니다. 오늘의 친절함은 씨를 뿌리는 일이고 심는 일이고 언젠가 열매를 거둘 날이 오게 됩니다. 공동체 삶을 이루는 데는 이 배려하는 삶과 정신을 발휘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무책임한 삶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무책임한 삶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거침돌이 되고 가로막고 거부감을 주고 마음을 닫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먼저 믿은 부모의 무책임한 삶이 자녀들의 마음을 막고 혐오하게 만들고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지 모릅니다. 부모의 옳지 못한 신앙의 모습을 보고 상처받고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가 다니는 교회에서 자꾸만 멀어져 가려고 합니다. 이웃의 무책임한 신앙의 삶이 이웃들로 하여금 신앙의 길을 막고 등을 돌리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무책임한 삶으로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게 되고 예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가끔 보면 그렇게 혐오감을 주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 없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각 없는 행동 하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닫고 마음을 닫히게 만들고 앞길을 가로막고 거침돌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옥중에서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도는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라”
본문 5절을 보면 “외인에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여기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헬라어로 “기회를 사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기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리고 기회는 잡아야 열매가 열립니다. 기회가 왔는데도 그냥 놓치거나 잡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기회가 왔는데도 모르는 것은 무감각 하거나 무책임해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여러 번 주어집니다. 전할 기회, 말할 기회, 인도할 기회, 이끌 기회들이 자주 옵니다. 그 때는 잡아당겨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스스로 교회에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불신앙 자들은 전도하면 일단은 거부부터 합니다. 순순히 가겠다고 나선다면 그 사람은 이미 마음속에서는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동안 많이 지켜보고 많이 생각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기회 많이 옵니다. 그때 전하고 간증하고 신앙을 소개하고 내 신앙의 삶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회가 잡힙니다.
“전할 때는 확신 있게 전하라”
오늘은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미래도, 운명도, 일 년 앞도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안하니까 잠을 설치고 점을 보고 그럽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시대나 문화나 기술이 발달되면 될 수록 사람들이 더 불안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시대는 점쟁이들이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오늘 현대인들이 비합리적인 방법에 마음을 의존하는가 하면 내일과 장래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정보화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정보화의 수단에 지쳐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어떤 권위에 의존하고 싶은 마음들이 발로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기독교인들까지 점을 보러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보다 응답이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 점술 산업이 얼마나 빠르게 확산되는지 모릅니다. 강남의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점술까페가 널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 거리를 “점술밸리”라고 부릅니다. 그곳에 점술까페가 70여 곳이나 몰려 있습니다. 이 점술 산업이 한 해 동안 2조원의 매출을 올린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년 매출액이 2조 3천억 원이라고 하니까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공주대학과 경기대학 등 10여개 대학에서 이 점술전문학과까지 개설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신앙적으로 확신 있는 신앙의 태도가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시대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이 그 모습에서 신선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우선 확신을 가진 모습으로 하여야 합니다. 내가 믿은 예수, 내가 믿는 천국, 내가 믿는 부활, 장차있을 심판을 확신 있게 믿고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요.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얼마나 자신감에 차 있는 고백입니까.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신앙인의 고백이고 자신감이고 확신에 찬 삶입니다. 내가 확신을 가지면 그 확신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전염됩니다. 옆 사람도 자신감을 갖게 만듭니다. 세일즈맨이 얼마나 자신 있게 설명을 하면 비싼 물건을 사 주겠습니까. 그 세일즈맨의 확신 있는 말과 태도 때문에 감동되어 돈을 푸는 것입니다. 사기꾼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자신감 있게 말하고 선전했으면 속아주겠습니까. 거짓을 가지고도 그렇게 자신 있게 상대방을 설득하며 사기를 칩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자신감,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부인이 술꾼 남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났는데도 꿈쩍도 안합니다. 그때 마음에 적잖게 실망이 되었습니다. 장장 10년을 넘게 기도했는데도 남편이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하던 기도를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또 불평하고 비난하고 원망할 수도 없어서 낙심했습니다. 그렇게 불평한다고 남편이 믿어줄 남편도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남편 앞에서 더 확신 있고 자신 있게 행동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술에 취해 밤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혼자 온 것이 아니고 술꾼 몇 명을 데리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좋아할 아내는 이 세상에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꼴도 보기 싫고 따라온 술꾼들도 사람으로 안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내는 그날 기분 좋게 술 취한 남편과 술꾼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밤이 늦었지만 술을 사다가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놀란 것은 남편이 아니고 따라온 생각 없는 남자들이었습니다. 자기 아내 같았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불호령이 났을 것인데 그런데 저 아내는 반갑게 맞아주고 아무 불평 없이 술을 사다가 상을 차려 내 놓았습니다.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우리가 밉지도 않느냐”고. 그랬더니 이 아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죽으면 천국에 갑니다, 그렇지만 내 남편은 지옥에 갈 것이 분명합니다, 기왕 지옥갈 것 불쌍해서 살아있는 동안 맘 편하게 잘 해주자고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술이 깨서 아무소리 안하고 슬며시 일어서더니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확신이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주고 때로는 무서움을 줍니다. 이 아내의 말을 듣고 술꾼 친구들이 집에 돌아가면서 또 집에 가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 여인의 말이 얼마나 무섭게 들렸겠습니까. 그 확신 있는 태도가 술꾼 친구들을 데리고 온 남편에게 온갖 말로 꾸지람하고 불평하는 말 보다 얼마나 상대방을 무섭게 만들고 두렵게 만들었습니까.
요즘 “남자 3대 망조”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망조는 소년출세, 너무 일찍 출세하는 것이고 둘째망조는 중년상처, 즉 중년에 아내를 잃는 것이고 셋째망조는 노년무전, 노년에 돈이 없어 고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년신앙이 하나 더 들어가서 “사나이 4대 망조”라고 한다고 합니다. 중년신앙은 오죽 할일이 없고 갈 데가 없고 부르는 데가 없으면 교회를 다 나가느냐는 것입니다. 중년에 교회에 나가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차에 태워 교회 문 앞에까지 오기는 하는데 예배드리는 동안 사우나에 가 있다가 가족들이 예배마치고 나오면 와서 데려가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이 남편들은 교회 앞에까지 오면서 마음으로 다짐한다고 합니다. “목사를 만나도 결코 넘어가지 말아야지, 그리고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꼬셔봐라 내가 넘어가나“.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교회 앞까지 가족을 데리려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년 남편을 전도한 사람은 곧 바로 여전도회장을 시켜도 충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도는 먼저 믿은 사람들이 할 일입니다. 알고 보면 이 전도하는 일이 참 감사한 일입니다. 우선 내가 남에게 전도할 수 있음이 감사한 일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 믿음이 있고 신앙중심이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또 전도를 했더니 전도 받음이 감사한 일입니다. 그것은 내 말에 상대방이 감화를 받았다는 말이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역사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가정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 섬김이 바로 전도하는 일입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내가 전도했더니 나를 믿고 따라와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이웃을 섬기고 받들고 배려하는 것 중 가장 큰 배려는 전도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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