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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 된 것은?*이재철 목사

by 【고동엽】 202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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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좋다오

내가 나 된 것은?
이재철 목사
성경 사도행전 17장의 말씀을 보면,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이 평소에 습관대로,유대인 회당
을 찾아가서 세 안식일에 거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인간을 대신해서 반드시 죽으서야만 하셨고, 인간을 살리시기 위해서 죽은자 가
운데에서 반드시 다시 사서야만 하셨던,예수님만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신 메시아라는 것이었
습니다.
바울의 그 설교를 듣고 놀랍게도,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않은 귀부인들이,주님을 영접
하고,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올림푸스 산이 지척(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그 어떤 도시
보다도 더 헬라신화가 판을 치는 우상의 도시, 데살로니가에서 그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은,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올림푸스 산: 해발 2919m로,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2천년 전 올림푸스 산은,헬라신화
속에 등장하는,신들의 거처로 알려져 있다. 헬라신화 속의 최고의 신 인, 제우스의 왕좌도. 올림
푸스 산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2천년 전 사람들은, 헬라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들이, 실
제로 올림푸스 산에 살고 있다고, 굳게 굳게 믿었다. 하지만 바울의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모두
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떠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
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 내려고 찾았으나.-성경 사도행전 17장 5절 말씀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통해 일어난 결과를 보고, 돌이여 바울을 시기했습니다. 그
리고 그들의 시기는, 바울이 성경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밝힌, 사랑의 부정적 정의의 순서에 따라
서 전개되었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떼를 지어 다니면서 소동을 피우다가, 바울 일
행을 붙잡기 위해서,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을 덮쳤습니다. 바울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왜 하필
이면,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을 덮쳤겠습니까?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왕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사도행전 17장 6-7절 말씀
블량배들을 동원한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마침 그 시간에, 야손의 집에서 바울을 발견할 수
없자,그 집 주인인 야손과 그 때 그 집에 있던 믿음의 형제들을 붙잡아서, 그 지역의 책임자들
앞으로 개 끌듯이 끌고가서, 거짓 모함으로 고발했습니다. 그 거짓 모함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거짓 모함 속에 내포되어 있는 진실입니다. 즉 야손
이 바울 일행을 맞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이였고,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불량배
들을 동원해서,야손의 집을 덮쳤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줄신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인근 사람도 아닙니다. 바울은 아시아 대륙에서 태어나서, 아시아 대륙에
서 성장하고, 아시아 대륙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그 바울이 아시아 대륙에서,에게해(지중해)를
건너,유럽 대륙으로 진줄했던 것은, 그 자신의 의지나 계획으로 인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성령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야시아 대륙 드로와에서 자신의 도움을 요청하
는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바울은, 일행과 함께 유럽 대륙으로 진줄
해서,마게도니아의 주요 도시 빌립보를 먼저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암비 몰리와 아볼로니 아를 거져서, 마게도 니아의 행정수도인 데살로니가로 찾아갔습니다.
이처럼 바울 일행에게 유럽 대륙은,전혀 계획에 없었던 행선지였음으로,유럼 대륙에서 바울 일
행은. 마지 뜨내기와도 같았습니다. 걸어서 며칠씩 여행하는 동안에는, 노숙하는 것이 다반사였
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누군가가 호의를 베풀어서 숙소를 제공해주지 않는다면, 노자(路資 먼
길을 떠나 오가는 데 드는 비용)가 넉넉하지도 않는 바울 일행은,편한 잠자리도 구할 형편이 아
니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서 야손이라는 사람이 감사하게도,바울 일행을 맞아 주었습니다. 성경에서
는 야손의 나이나 직업, 가족 상황이나 줄신배경에 대해서, 그 어떤 정보도 우리에게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그런것은 전히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야손도 바울의 설교를 통해,
주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이였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야손이 바울일행을 자기
집으로 맞아 들였을리가 만무(S無: 절대로 없다)합니다. 즉 야손은 그저 건성으로,형식적으로
맞아 들인것이 아니라, 야손이 바울 일행을 자기 손님으로, 자기 집으로 기꺼이 맞아 들였습니다.
그 때 바울 일행은,바울에 실라를 합쳐서, 남자 장정 세 명이였습니다. 야손은 남자 장정 세 명
인 바울 일행을, 하루 이틀만 묵게 해준게 아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세 안식일
에 거쳐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를테면 바울 일행은 최소한도 3주 동안 데살로
니가에서 머문 셈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울의 연대기를 계산하면서, 이 때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최소한 수 개월동안 체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남자 장정 세명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수 주간에서, 수 개월동안, 자기 집에서 모신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
닙니다.
그럼에도 야손은. 아시아 대륙에서 건너 온 뜨내기같은 바울 일행을.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맞아 들이고, 기꺼이 자기 집을 그들을 위해 제공해 주었습니다. 2천년 전 초대교회가, 일류의 역
사를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요한,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우리와 똑같은 유한한 인간이였음을 감안하면. 그들의 힘만으로 역사가 새
로워 질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야손처럼.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자기 삶의 자리에서 사도들을 도와, 주님의 뜻을 자기
의 삶으로 실천했던,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은
성경 고린도전서 1S장 10절을 통해서,•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해로 된 것이다’고 고백합니
다. 나의 나 된 것은,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성
경 고린도전서 1S장 10절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교회를 짓밟던 폭도였던 자신이, 주님의 증인으로 살 수 있게 된 것
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의 덕분이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언급한 그 주님의 은혜가 대체 바울
에게 어떻게 임했습니까?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불쑥 솟아 올랐습니까? 그렇
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임한 주님의 은혜는,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 임했습니다. 다마서커스 도
상에서,주님의 빛에 사로잡힌 바울은, 시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다메섹에 들어가서도 바울
은, 식음을 전폐한재,하루아침에 시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 바울을 위해서 동원하신 사람이,아나니아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였던 아나
니아는, 바울이 얼마나 반 교회적이고, 반 그리스도적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처음
에는, 주님께 의의를 제기했지만, 마침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자기 발로 반 그리스도적이고,
반 교회적이였던, 바울을 직접 찾아가서,그 머리 위에 자기 손을 얹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바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겨져 나가면서,바울의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다마서커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연행하기 위해서, 다마서커스까지 찾아가다가, 그리스도인
으로 거듭난 바울이, 바로 그 다마서커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시작하자,이번에는 다
마서커스에 있는 유대교 교인들이, 바울을 배교자(背敎者:믿던 종교를 배반한 사람)로 간주해서
죽으려고 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 교인들이 군인들을 매수해서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
자, 다마서커스의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걸고,한밤중에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 위에서 줄에
달아 내려,바울을 피신시켜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바울은,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동역하기를 원했지만, 교회를 짓밟
던 바울의 전력을 잘 알고 있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회심에 진정성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그리스도
인이 되었다고, 보증하고 나선 사람이 바나바라는 사람이요, 바로 그 바나바 덕분에 바울은 비로
씨 예루살램 교회 일원이되어,사도들과도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교인들도 바울을 죽이러고 하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인들이, 바울의 생
명을 지켜주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86km떨어져 있는 가이샤라까지 바울과 함께 동행하여 내
러가서,거기에서 바울의 고향 다소로 보내어 주었습니다. 그 때로부터 청년 바울은 무려 13년
동안,고향 다소에서 집거해야만 했습니다.
13년이 흘렀을 때, 당시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한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175km
나 떨어져 있는 바울의 고향 다소까지 일부러 찾아가서, 바울을 자신의 동역자로 영입했습니다.
그때까지 교회 목회 경력이라고는 전무한 바울을,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 공동 목회자로 세워준
것입니다.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서 안디옥 교회가 1차 전도 여행팀을 파송할 때, 바나바 바울 그
리고 수행원 마가로 이루어진 전도팀 우두머리는 바나바였습니다.
그러나 전도 여행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두 가지 사건이 터졌습니다. 첫 번째는, 수행원
이였던 마가가 무책임하게 중도에서 전도팀을 무단 이달해서 집으로 되들아가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전도팀의 우두머리가 바나바에서 바울로 바뀌어져 버린 것입니다. 교회 목회에 관한한
바나바의 능력이 더 탁월했는데, 두 사랑이 막상 전도의 현장에 나가자, 전도의 현장에서는 바울
의 능력이 바나바를 앞질렀습니다. 어제까지 우두머리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자기 팀원이였던
사랑을 우두머리로 섬긴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나바는, 수행원 마가도 없어진 상황 속에서, 1차 전도 여행이 끝날때까지, 자신이 영
입해 들였고,자신의 팀원이였던 바울을, 우두머리로 끝까지 섬겼습니다. 그 결과,바울은 최소 1
년여 이상에서,최대 2년까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되는 1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우리가 알고 있
는 것과 같은, 전도자로서의 지도력을 확고하게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
이 방문하는 도시에서마다, 바울을 통해 주님을 영접한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과 바
나바를 도왔기에, 그들이 1차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
다.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바울은 바나바와 결별합니다. 1차 전도여행 때, 무책임하게 전도림을 무
단 이탈했던 마가를 바나바는 다시 대동하기를 원했지만,바울은 그런 무책임한 청년을 또 다시
대동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 때 바나바와 결별해서 롤로 남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을 할 수 있도록, 바울의 동역자로 따라 나선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의 실라였습니다. 루스트라에
서는 청년 디모데가 바울 일행에 합류했습니다. 매일 걸어서 전도여행을 다녀야만 하는 바울에
게, 청년 디모데의 합류는 더 없이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드로와에서는 또 의사 누가가 합류했습니다. 의사 누가는 말년의 바울이 로마 지하 감방에 감혀
있다가 참수형을 당해서 순교할때까지,바울의 곁을 지키면서,바울의 주치의가 되어 주었습니
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의사로써 고등학문 습득을 통해 연마한, 수러한 문장으로 누가는, 바울의
일거수 일투족을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 사도행전 속에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드로와에서 마게도니아 사랑이 도움을 요청하는 환상을 보고, 일행과 함께 유럼대륙을
진줄해서, 마게도니아의 주요도시 빌립보를 찾아갔을 때는, 안식일을 맞이해서 바울일행이 기도
할 곳을 찾기 위해서 성문 밖 시냇가를 나갔는데, 시냇가에 마침 여러 여인들이 앉아 있었습니
다. 그 절호의 기회콜 놀칠 바울이 아니였습니다. 바울 역시 그 여인들 곁에 자리콜 잡고 앉아서
여인들에게 복융을 전했고, 여인들 가운데에 루디아가 복융을 받아들였습니다. 루디아는 자기
집안 식구들과 함께 주님을 영접하고,바울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루디아가 바울에
게 뜻하지도 않게, 빌립보에 체류하는 동안,자기 집에서 머물러 달라고 청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사양했습니다. 루디아의 호의는 고맙지만,바울이 일행과 함께 여인의 집에서 유
숙한다는 것은,여러모로 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루디아가 물러선 것은 아닙니다. 만약
내가 정말, 주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한다면,반드시 우리 집에서 머무르라는 루디
아의 강권에 따라서、바울과 실라,디모데와 누가,남자 장정 4명으로 이루어진 바울일행은, 빌립
보에 체류하는 동안 감사하게도, 루디아의 집에서 유숙할 수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재, 악덕 고용주에게 착취당하던 가련한 여인을 바울이 구해주었을 때,
바울은 실라와 함께 거짓 모함을 당하고, 심한 매질과 함께. 빌립보의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습니
다. 그러나 그 억울한 투옥 사건을 통해서,바로 그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바울을
통해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 교인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콜 떠날 때 바울은,루디아와 그녀의 가
족, 감옥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한데 어우러지서,빌립보 교회콜 이루고 있는 그 교인들을 위해
서, 자기 일행 가운데에 누가콜 잠시 빌립보에 남아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암비블리와 아■로니아콜 거져서 데살로니가로 갔고, 앞서 확인했던 것처럼, 데살로니가
에서는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야손이라는 사람이,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기꺼이 맞아 들였습
니다. 그러나 이 이후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써 보낸 편지인,성경 데살로
니가전서 2장 9절을 통해 바울은 이 런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역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해콜 끼치지 아니하러
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데살로니가전서 2장 9절 말씀
바울일행은. 야손의 집에서 유숙하기는 했지만은,초신자에 지나지 않는 야손고卜,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자기 손으로 일을 해서,돈을 벌어,필
요한 경비콜 조달해 가면서,복융을 전했습니다. 객지에서 돈을 벌면서 복융을 전한다고 하는 것
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때의 상황과 관련해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써 보낸 편지
인, 성경 빌립보서 4장 16절을 통해서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뿐 아니라 두번이나, 나의 쓸것을 보내었도다.-빌립보서
4장 16절 말씀 여기에서 너희는, 루디아와 빌립보 감옥 간수콜 포함한,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
을 의미합니다. 빌립보콜 떠나 데살로니가로 간 바울이,데살로니가에서 자기 손으로 돈을 벌면
서, 어렵게 복윤을 전하고 있다는 소문을 접한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은 원치도 않는데, 두번씩이
나 헌금을 거두어서 바울에게 보내어 주었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빌립보서 4장 16절 말씀에 의하면, 마가도니아에서 전도 사역을 끝
낸 바울이, 아가야 지역으로 건너갈 때, 빌립보 교인들은 또 다시 헌금을 거두어 바울에게 보내
어 주었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9장에서,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 오늘 전한 말은 속에서,
데살로니가콜 방문하기까지는,약 20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 20년동안, 바울이 어느 곳을 가든
지, 바울이 전혀 예상치 않았던, 수없이 많은 사랑들이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 20년 동안,바울을 도왔던 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없었던들, 2천 년 전 지중해 세계콜 누비
고 다니는 위대한 전도자로서의 바울의 삶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오늘 전한 말씀 이후도 마찬
가지입니다. 오늘 전한 말씀 이후에도,바울이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할 때까지, 바울이 어
느 곳으로 가든지, 예상하지 않았던 사랑들이 항상 바울을 도왔습니다. 다마서커스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로마에서 참수평을 당해 순교할 때까지, 바울을 도왔던 그 수없이 많은
사랑들은. 주님께서 바울을 위해 동원하시고, 바울에게 붙여주셨던, 주님의 은혜의 손길이였습니
다 •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자기의 삶으로 확인하고 잘 아는 바울이였기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의 은혜로 된 것이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바울의 이야기는,바울만의
이야기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우리의 가含에 절절하게 와달는 것은, 그의 이야
기가 바로 우리 각자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이래, 지금 그리
스도인으로 이 자리에 있기까지,우리의 지난 삶을 되들아 보십시다. 되들아보면 되들아불수록,
우리의 지난 삶이, 바울의 삶과 똑같지 않습니까?
주님을 알지도 못하던 우리콜 주님께서 핀셋트로 집어 내시듯 부르시고, 오늘 이 자리에 그리스
도인으로 있기까지, 주님께서 우리콜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랑들을 동원하셨습니까? 우리가 전혀
예상지 않은 사랑들을 동원하서서,우리에게 도용의 손길을 내밀게 하신 적은 얼마나 많았습니
까? 주님께서 우리 각자콜 위해서 동원하시고,우리에게 붙여주셨던, 그 수없이 많은 사랑들이
없었던들, 우리는 절대로 오늘 이런 모습의 그리스도인으로, 이 자리에 존재하지는 못할 것입니
다.
오昔은,우리콜 위해 반드시 죽으시고, 또 우리콜 살리시려 죽은 자 가운데에서 반드시 다시 살
아나시기 위해,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성탄을 기리고, 그 분의 재림을 대망하는, 대림절 셋째 주
일입니다. 우리가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 한 주간이, 진정 주님을 위한 대림절로 엮어지기콜 소망
한다면, 우리 모두 이 한 주간동안, 그 동안 주님께서 우리콜 위해 동원하셨던 그 수없이 많은 사
람들. 이률테면 나룹 위한 아나니아, 바나바, 마가, 실라, 디3데, 누가, 루디아,야손과 같은,내
삶의 은인물윤 한 분 한 분 씩 기억해 보십시다.
이름은 잊었지만, 언젠가 내 인생의 외진 길목에서,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내게 도움의 손
길을 내일어 주었던, 그 분의 얼굴을 기억해 보십시다. 그렇게한다면, 우리 역시 바을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고 고백하면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와,찬양을 드리지 않
움 수 없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우리 역시도, 바을처럼 우리의 삶을, 주님 앞에 기꺼이 온전히
내어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믈 동원하시면서까지, 나를 빚어주셨던, 주님의 은혜의 손길이 거미즐처럼
영켜있는 나의 지난 삶을,되돌아보면 되돌아불수록, 주님 앞에 내 삶을 내어 드리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이 한주간은,
얼마나 의미있는 대림절로 엮어지겠습니까?
- 증처: 이재철 목사께서 설교 하신, '야손이 맞아 들였도다' 中에서-®.
에수가종다오
굴을 보시고 스크캥 하시기 전에 그냥 가지 마시고 엇글로 따즛한 소감으로 감사퓰 표하는 그리스도인미 됩시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一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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