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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입의 말씀*이재철 목사

by 【고동엽】 202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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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좋다오

 

하나님 입의 말씀
擊하나님께서는, 성경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말씀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모든 육체
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도L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성경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말씀
이 세상에 있는 것지고, 한 중의 재로 끝나지 않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 모든 것이, 유한
한 까닭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은 영원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은, 바로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하는 길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순식간에
사라저 버릴 내 인생을, 영원하신 하나님께 접붙이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의미 없이 나를 스쳐 지나가 버릴 수도 있는 1초 1초를, 영원의 의미로 축적시켜 가는 것이다. 반
면에 말씀을 등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 한 중의 재로, 먼지로 허망하게 사라지고 있음을 의
미하는 것인즉,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서는, 당신의 영원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그 말씀대로 살기를 요구하고 계신다.
성경 에베소서 5장 16절을 통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신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성경 에베소서 5장 16절 말씀 이것은 우리도 른히 쓰는 표현이다. 자기 할 일을 하지 않고 빈
둥거리는 사람을 향해 우리 역시,'세월을 아끼라'록은 '시간을 아끼라'고 말한다. 과연 세월,즉 시
간을 아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어 원문에는 '아끼라'는 동사가 '엑사
고라조'(exagorazo)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뜻을 쉽게 풀이하면 '건저 올린다'는 말이다,
시간을 아낀다는 것은 시간을 건져 올리는 것이다. 태평양에 아무리 물고기가 많아도 건져 올리
지 않으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시간이 1초 1초 쉬지 않고 나를 스쳐 지나간다 할지라도, 그
1초 1초를 건저 올리지 않으면, 그의 삶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실은 허망한 시간낭비에 지
나지 않는 것이다. 유럽대륙은 2년마다 축구열 병을 알는다. 월드컵대회가 4년마다 열리고, 그 중
간에 유럽선수권대회가 또 4년 터울로 개최되기 때문이다.
2000년에는 유럽선수권대회가 있었다. 죽구 중계방송 시간이 되면, 거의 모든 시가지가 철시(撤
市:시장 가게 따위가 문을 닫고 영업을 하지 아니함)하고, 경기가 끝나면 이긴 나라 국민들이 국
기를 들고 경적을 울리며 온 시가지를 누비고 다닌다. 그해 6월28일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준
결승이 있었다. 모든 전문가들은, 강력한 우승후보인 네덜란드의 승리를 장담하였다. 더욱이 경
기 장소가, 네덜란드의 홈그라운드였기에 네덜란드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네덜란드 팀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그러나 전반전이
끝나기까지 골이 터지지는 않았다. 후반전에서도 네덜란드의 우세는 여전했다. 이탈리아의 골문
을 향해 소나기처럼 슛을 퍼부었지만 단 한 골도 건져 올리지 못했다. 계속된 연장전에서도 사정
은 마찬가지여서 경기는 0 대 0, 끝내 무승부로 끝났다. 어절 수 없이 승부차기로 결판을 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죄고의 선수가 두 명이나 실죽, 네덜란드는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
구하고 무릎을 끓고 말았다.
이름날 아침 I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유럽판은 이 경기에 대한 기사를 1면에 게재하였는데,
그 제목이 다음과 같았다. Italy beat wasteful Dutch. (이탈리아가 낭비스러운 네덜란드를 격파
하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Ontemational Herald Tribune: 프랑스 파리에서 발간되는 영
자 일간신문,세계 10대 신문 중 하나)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죽구 경기에서 아무리 슛을 쉬지
않고 날려도 골을 건져 올리지 못하면, 그것은 단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죽구는 골을 건
져 올림으로써만 비로소 죽구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로부터 나틀이 지난 7월 2일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결승전이 벌어졌다. 경기는 이탈리아가, 1
대 0 으로 앞서 나갔다. 90분에 걸친 전후반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렸다. 그러나 주심은, 4분간의
루즈타임을 적용했고, 그 루즈타임이 끝나기 4초 전까지도, 이탈리아가 이기고 있었다. 모든 정
황으로 보아 이탈리아의 우승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종료 3초 전. 프랑스의 위또
르 선수가 날린 강슛이 심판의 휘슬과 동시에 이탈리아의 그물을 갈랐다. 프랑스가 최후의 순간
에 한 골을 건져 올린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한 골만 건져 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 한 골로 인
해 이미 진 것과 진배 없었던 그 경기 자체를 송두리째 건져 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계속된 연장전에서 프랑스가 한 골을 더 건저 올림으로써 대망의 우승컵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마지막에 건져 올린 역전골의 가치는, 그 한 경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예선전에서
부터 시작하여, 본선을 거쳐 결승에 이르기까지. 그 이전의 모든 과정이, 그 한 골로 인하여,우승
으로 건저 올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한 골의 가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1초 1초를 영원으로 건져 올리는 골과도 같다.
그분의 말씀이 명원하시기에, 영원하신 그분의 말씀으로만 덧없이 날아가는 시간을 영원으로 건
저 올릴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가 결승전에서 얻었던 마지막 골로 인하여 그 이전의 전 과정까
지 함께 건져 올렸듯이,비록 자신의 생명을 허망하게 갉아먹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왔을망정, 하
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기 시간을 영원으로 건져 올리기 시작하면, 그릇되었던 지난 시간들까지
도 그분의 말씀 안에서 모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새로운 의미로 회복되고 승화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방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열심히 뛰어 다닌다 할지라도. 그 삶이 말
씀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다면, 그의 인생은 낭비의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알씀으로 건져 올리
지 못한 삶이란 욕망의 노예 된 삶일 수밖에 없고, 그 삶을 스져 가는 모든 시간이란 한낱 뮴거품
에 지나지 않는다. 있는 것 같으나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소열되어 버리는 그 허망한 뮬거풍 말
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특인 빈민존을 직접 찾아가 보면, 소위 서구 백인들이 외치는 인권이나 정
의가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의 비참한 현실은 이루 말할 데가 없고, 그들을
그런 지경으로 몰아넣은 자들이 다름 아닌, 그 땅을 강탈한 백인들이기 때문이다. 특인 빈민들의
움막 속엔 벽이란 것이 없다. 벽을 만들 돈이 없는 것이다. 대신 큰 천으로 공간을 나누어, 이쪽
은 부모,그리고 저쪽은 자녀들의 구역으로 쓰는 식이다. 그런 구조이다 보니, 가려진 천은 단지
형식일 뿐이요, 그 천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서로 알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방중에 부모가 무엇을 하는지를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움막 속에서 특인
들은 평균, 다섯 명에서 여섯 명, 심한 경우에는 열 명의 아이들을 낳는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어김없이 아빠와 엄마가 된다. 아이들이 아이의 부모가 되는 것이다. 그
래서 사람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한다. 그곳의 특인들이 어릴 때부터 워낙 비교육적인 열악
한 가정환경 속에서 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연 특인 빈민존 아이들이,아이 때에 아이의 부모가 되는 것이 단순히 비교육적인 환경 탓인지
알이다.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면 스위스의 중학생들온, 학교를 파한 뒤 아파트 단지 내
잔디밭에서 서로 윙굴며 논다. 그런데 뒹구는 상대는 늘 동성이 아니라 이성이다. 그들이 입을
맞추며 한데 뒤엉겨 있는 모습은 단지 옷만 벗지 않았을 뿐,포르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뿐
만이 아니다. 그 중학생들은 며칠 단위로 서로 짝을 바꾸어가며 똑갈은 행동을 반복한다. 그 장
소가 아파트 단지인 만큼, 지나가는 사람물은 모두 부모이거나 이웃집 어른이겠지만, 그 누구도
어린 학생들을 제지하지 않고, 학생들 역시 누가 지나가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것이 지난 3년 동안 스위스에서 내가 서재의 유리문을 통해 보아온 광경이었다. 한번은 그곳
중학교에 다니는 한인 학생에게, 스위스의 중학생들이 학교에서도 그렇게 노는지를 물은 적이
있다. 대답은 울론이라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짝을 바꾸어 가며 뒤영기지만 선생은 이에 대
해서는 언급조자 않는다고 했다. 스위스인과 결론하여 스위스 교회에 다니는 한인이 내게 들려
준 이야기다. 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교회 수련회에 참석하겠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보내 주었
다.
그런데 그날 밤 그녀는 수련회 인솔자로부터 질책의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중학생 띨아이를 수
련회에 보내면서, 피임기구를 쟁겨서 보내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느냐고 말이다. 그 이후로 그
어머니에겐, 큰 근심이 생겼다. 딸이 어디를 갈때마다 피임기구를 주자니, 마지 그렇게 하라고 조
장하는 것 같고, 무시해 버리자니, 느닷없이 딸이 임신하여 들어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녀와 똑같은 근심을 하고 있는,아들을 둔 어머니률 영국에서 만난 적이 있다. 현재 서구에서
는 나라에 따라 학교장 재량으로 중학교에 콘동자판기를 설치하고 있다. 얼마 전 프랑스의 교육
부 장관과 가정부 장관이 중학교를 찾아가서, 반드시 피임기구를 사용할 것을 계몽, 통보하였다.
프랑스와 스위스 같은 서구세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니다. 그곳은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선진 사회요,그에 걸맞게 최고의 교육제도와 교육적 환경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와 비교해 몰 때, 청소년들의 무절제한 성과 관련하여 우리는 아무런 자이콜
발견할 수가 없다. 굳이 차이를 따진다면,남아프리카의 중학생들은 피임에 대해 무지하고, 피임
기구를 구입할 경제적 형편이 되지 못해 아이가 아이의 부모가 되고, 서구 중학생들은、사회가
공인하고 계몽하는 피임기구 덕분에 임신하지 않는다는 외형상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호리運:매우 적은 분량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으I 차이도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간을 건지 을리는 삶을 살지 않는
한, 죄고 선진 사회에서 살든, 아프리카의 빈민존에서 살든, 그 같은 인생은 결국 욕정과 담욕에
절어 덧없이 사라져 버릴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하하기 짝이 없는 우리콜 위해 말씀대
로 살 것을 당부하고 계신다. 그리고 말씀이신 주님께서는 친히 이 땅에 오시어, 오직 말씀으로
건져 올리는 삶만이 영원함을,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율 통하여 친히 보여 주셨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진정 사랑이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야말로, 한 중의 재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한 죄대의 선몸이다. 이 같은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나면,평소 우리가 이해하
기 어려웠던 성경 구절콜의 의미를 비로소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게 된다.
주콜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짧아지느니라.-성경 잠언 10장 27절 말씀
주를 경외하는 자는 장수하고 악은 단면한다는 이 구절을, 우리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세
상은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블의한 방법을 블사하면서까지 치부한 자들이, 그 돈으로 보
약을 먹고 누구보다도 더 오래 사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구절의 의미를 바
르게 깨달을 수 있다. 악한 자가 아무리 긴 세월을 살았다 할지라도,뭍의한 그는 말씀으로 건저
올린 시간이 없기에, 그의 삶은 전혀 산 것이 아니다. 삶의 모양이 어떠했든 상관없이, 하나님 앞
에서 그의 삶이란 한 중의 재요, 허망한 물거품일 뿐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생을 살았을망정. 답씀으로 인생을 건져 올린 자가 있다면,
참된 의미에서 그가 장수의 주인공이다. 그의 생은 이미 영원과 접목되어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
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게명들올 지기는 것이라. 그의 게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성경 요한일서 5장 3절 말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둘을 지키는 것
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 이외는 하나님율 사랑하는 중거가 달리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 즉 알씀이 무겁지 않다는 것에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많은 크리스
천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큰 짐으로, 엄청난 부담으로 여기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하
나님께서 당신의 계명이 무겁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까닭을 이전! 명료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거운 짐으로 여겨졌던 것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알씀대로 살아 드린다고 잘
못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무겁지 아니함은, 그것은 바로 한 중의 재에
지나지 않는 나 자신을 위함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통년이 극심할 때 길을 가던 사람들이 쌓 한 가마니콜 받견했다고 지자. 그 중에서 제일 힘센 자
가 가장 약한 자에게, 그 쌀가마니률 지고 자기 집까지 따라오라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무거
운 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힘센 자가 약한 자에게 네 집으로 지고 가서 네 식구들 양식으로 상
으라고 한다면, 그 쐰가마니가 아무리 무거워도 무거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때엔 무거울수록 가
볍다. 한 중의 재 이상일 수 없는 인간에게,하나님의 영원하신 알씀이 결코 무거운 짐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이지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듈을 지킨 것이니이다.-성경 시편119펀 56절 말씀
'소유'라면 은행동장이거나 중권 혹은 귀금속이라야만 할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것이 소유일 수 있단 말인가? 참된 소유란 우리의 코끝에서 호흡이 끝난 뒤에 하나님 앞에 들고
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때 지니고 갈 수 없는 것이라면 장시 빌린 것일 뿐 참된 소유일 수
는 없다. 영원하신 말씀으로 영원히 건져 올려진 삶만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들고 갈 수 있기에,
오직 그것만이 우리의 참되고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있다.
누구든지 나의 이 알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헤로운 사람 갑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블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
에 놀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저 그 무너짐이 심
하니라.•성경 마태복음 7장 24-27절 말씀
여기에서 말하는 창수(液水)란, 한 순간 느닷없이 닥쳐드는 죽융이다. 말씀을 등지고 산 자의 인
생이란 전여 건저 올린 것이 없기에, 죽옴과 동시에 그의 인생은 마지 모래 위의 진처럼 무너저
내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말씀 안에서 생을 건져 올린 자는,죽음이 찾아온들 그의 인생
은 반석 위의 집일 수밖에 없다. 말씀으로 영원을 건저 을린 그에게 죽융이란, 잔란하고도 영원
한 생명의 즐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의 절대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사랑하는 님昏! 결코 잊지 마시길. 하
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다. 바로 유한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그
대 자신을 위함이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부터 말씀으로 자신의 시간을 건저 올리는 것보다 더 큰
지혜는 없다,발취:이재철 목사의 저서 '참으로 신실하게' 中에서一®.
예수가좋다오
글을 보시고 스크업 하시기 전에 그냥 가지 마시고 엇굴로 따뜻한 소감으로 감사퓰 표하는 그리스도인미 링시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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