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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력서*이재철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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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좋다오

내 삶의 이르1서
이재철 목사
제 아버님께서는 1963년 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
지도, 신앙과 관련된 아버님의 글들은 제 가숨을 뭉클하게 합니다. 세상을 떠나실 당시 아버님은
54세였고, 저는 우리 나이로 15세였습니다. 이제 세월이 틀러 제 나이 65세가 되었습니다. 아버
님께서 이 세상에 사셨던 것보다 제 나이가 11살이나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아버님의 글이 주는 감동은 그대로입니다. 제 나이 70(800| 되어도 아버님의 글은 변함
없이 제 옷깃을 여미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를 사랑하시던 아버님이 남기신 믿음의 글들이
기 때문입니다. 1996년 86세를 일기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 어머님의 글 역시, 구구절절이
저 자신을 위한 믿음의 거울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기록과 거리가 업니다. 대부분의 사
람들이 일주일내내 단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않고 살아갑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유풍을 정리해도, 기록다운 기록이 전혀 없는 경우가 허다향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남기는 기록은 단순한 글자의 조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자신의 죽음 이후까지 이 세상에 연장시켜 줍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도 내가 남긴 몇 줄의 글을 통해, 누군가의 인생이 주님 안에서 새로워진다면 얼마나 가숨 설레
는 일입니까? 이런 의미에서 저는 좋은님들께,하루에 단 몇 줄이라도 주님 안에서 누군가를 위
한 기록을 남기시기를 권합니다.
기록을 위한 기록이 아니라, 진리를 좆는 삶에서 배어나는, 생명의 튼적을 기록해 보십시오. 주님
께서 베푸신 은종을,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을,주님을 향한 나의 회개를, 주님의 사랑 때문에, 사
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향한 마음을, 경허한 마음으로 기록해 보십시오. 그 사랑의 글을, 곤허
잠든 아내의 머리맡에 살며시 놓아두십시오. 아직 퇴근 전인 남편의 책상 위에 올려놀으십시오.
등교하는 자녀의 가방에 넣어 주십시오. 사랑하는 부모님의 옷장에 넣어 드리십시오.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에게 우편으로 부쳐 드리십시오. 긴 글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명문장
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명필이 아니라 해도 문제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주님 안에서 쓰인 글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글은 언젠가는 누군가의 심령을 움직이는 성령님
의 도구로 쓰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우리 영론이 하나님의 풍에 안긴 뒤에도, 우리의 삶
이 우리가 남긴 사랑의 기록을 통해, 후손들과 공유된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천국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마치 성경에 등장한 누가의
삶이,성경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속에서 오늘도 살아 있듯 말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맙시다. 기
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주님과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가운데,가
장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5 예수깨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
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성경 사도행전 1
장 1~2절 말씀
위 성경 말씀 마지막에 '기록하였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행하다'라는 의미의 '포이에오'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예수님의 생애를 다섯 개 동사로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행하시며_라고 표현할 때 사용한 헬라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2천 년 전 누가가,자신이 사랑하
는 데오빌로,그러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데오빌로를 위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그에게 주님에 대한 기록을 써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데오빌로에 대한 누가의 사랑이,
그 상황에서 기록의 형태로 드러난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의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누가의 사랑입니다. 만약 누가에게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데오빌로에게 글을 써 보내지도 않겠지만, 혹 썼다하더라도 그 글이 사
료의 가치는 지닐망정,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님의 도구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누
가의 기록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은, 그 기록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
진, 사랑의 결과물인 까닭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생명의 통로가 되고, 생명은 사랑과 구별되지 않
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장'이라 불리는 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목요연
(-S陳然)하게 설명해 줍니다. 그 가운데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
히 오랜 시간 혹은 오랜 세월 인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말 '오래 참는다’로 번역된
월라어 '마크로뒤메오'는 동사'뒤오'에서 파생되었는데,1회생하다' '제물로 바치다’라는 뜻입니다.
사랑이란 소극적인 인내를 뛰어넘어 적극적인 자기희생이며,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은 행위입니
다.
구약시대의 제사를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소나 양을 제
물로 바쳤습니다.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제물을 죽이는 것입니다. 소나 양이 제물로 회생당하는
대신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제사를 '회생 제사'라 불렀습니다. 사랑도 이와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식은 부모의 희생으로 성장학니다. 누구든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님 생각만
하면 가숨이 찡해지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부모님의 회생 속에서 성장하고 보존되었기 때문입
니다. 누가는 자신이 사랑해야 할 데오빌로를 위하여, 누가복음 24개 장과 사도행전 28개 장을
기록하였습니다. 종 52개 장에 이르는 장문의 글을 쓴 것입니다. 성경의 각 쪽이 2단으로 짜여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일반 도서의 경우로 따져 대략 100쪽에 이르는 긴 분량의 글을, 데오빌로
단 한 사람을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문장의 첨가나 삭제를 쉽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컴퓨터가 없었습니다. 편리한 필기도
구도 없었습니다. 파피루스 줄기를 종과 횡으로 겹쳐 만든 갈대 종이에 새의 깃털로 글을 적었습
니다. 그런 원시적인 방법으로 종 52개 장에 이르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다는 것은, 자
기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를 위하여 자신의 시간을 육체를 기꺼이
회생하였습니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주님 안에서 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열매가 누가복음과 사
도행전이고,주님께서는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그 사랑의 열매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
니다. 기록이 중요하지만, 기록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성경의 초
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으로 단 한줄의 글도
기록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는 자신을 회생하셨습니다. 인간을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놓
으신 것입니다. 당신 생명의 한 부분이 아니라, 돌아가시기까지 자신을 송두리째 회생하셨습니
다. 인간을,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죽음마저 마다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
은 우리를 살리는 생명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떤 문자로도 단 한 줄의
기록조차 남기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주님의 사링을 생생히 알고 그 사랑에 힘입어, 그 사랑을
본받으며 살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생명을 세상의 문자가 아닌,바로 당신의 삶으로 인간의 심령에 기록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회생임을, 회생의 결과는 찬란한 부활임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십
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당신의 삶으로 기록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당신의 삶으로
친히 기록해 주신 구원의 역사를, 인간이 인간의 문자로 되받아 쓴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주님
께서 당신 자신을 회생하는 삶으로 친히 기록해 주신 생명과 사랑의 내용이 없었던들, 성경은 더
이상 성경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남길 기록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자신의 삶으로 남기는 기
록입니다. 삶의 기톡이 뒷받침될 때만 문자의 기록 역시 생명을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
하든 못하든 인간은 자신의 삶으로 실은 매일 무엇인가를 기록하며 살아갑니다. 개인마다 차이
가 있다면 단지 그 기록이 무슨 기록이냐는 것뿐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자기회생을 꺼리
는 크리스천은 어떤 경우에도,자신의 삶으로 사랑과 생명을 기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과 생명으로 기록될 수 없는 삶이 사도행전으로 승화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해빙되기 전 황해도 해주에 살던 한 여성이,서올로 유학,이화여자대학 성악과를 고봉경 교수님
의 제자로 졸업하였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던 그녀는 졸업 후 해주로 돌아가 역시 크리스천
인 남편과 결혼했는데, 해방과 동시에 남북이 분단되어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 치
하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39세가 되던 1960년대 초,한 살 위인 남편은 예수쟁이란 이유
로 반동으로 몰려 처형당했습니다.
그 후 아들 둘마저 처형당하면서 그녀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79세가
되던 2003년 겨물, 그녀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얼어불은 두만강을 단신으로 건넜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남한에 입국하여,우리 정부가 제공한 서을 공롱동의 임대아파트에서 쓸쓸한 노
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북한에서 무려 50년 동안이나 체험한 공산주의를 단 한마
디로 표현하였습니다. "공산당은 사랑이 없어."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다 같이 힘을 모아 생산하고,생산한 것을 독같이 분배하여,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자는 공산주의
는 얼마나 이상적인 이론입니까? 그러나 그 속에 사랑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본래 공산주의는
자신의 회생이 아니라, 타인의 회생을 전제로 태동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공산주의는 정치
적 야망율 지닌 소수자들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어,수많은 사람에게 고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자기회생이 수반되지 않는 이념은,그 내용이 이상적일수록 도리어 인간율 더욱 옥죄는 흉기가
될 뿐임을, 공산주의 스스로 온 인류에게 입증해 주었습니다. 공산주의에 반하여 기독교는 공생
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생산의 결과에 상관없이 더블어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기독교는 처용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회생율 전제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
다. 그것이 공산주의와 갈은 허구의 이념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임을 성경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가 증명해 주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신의 시간과 물질, 인생율 회생해 가며,서
로 사랑하였고, 그 결과 초대교회는,세상물 새롭게 하는, 생명의 동로가 되었습니다. 생명이신
동시에 사랑이신 주님께서, 그 교회를, 당신의 도구로 삼아 친히,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래전부터 이 땅의 교회가 세상율 새롭게 하기는커녕,세상으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자
신들의 전매품인 것처럼 사랑을 외지는 교회를 향해, 도리어 세상이 '교회에 사랑이 없어'라고
간단하게 부정해 버리는 것은,교회를 이루는 우리 자신들이 사랑율 말하면서도 정작 자기회생
율 꺼리기 때문입니다. 자기회생율 마다하는 한,공산주의의 구호나 사랑과 공생율 역설하는 기
독교의 주장이나 허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부턴가 교회에서 나눔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요증은 기업도 여러 형태의 나눔에 앞
장서는데. 나눔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님니다. 자기 쏠것 다 쓰고 남은 것을 나눈다면 처분일망정
사랑은 아닙니다. 자기회생윤 결여한 나눔은 자선일 수 있으나,성경이 말하는 사랑일 수는 없습
니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교회에서 나눔이 강조되고 실행되고 있지만, 오히려 교회가 날로
생명과 멀어지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직 자기회생과 모판 위에서 생명의 열
매로 거두어집니다. 크리스천들이 자기회생율 꺼리는 이유는,자기회생율 자기 소모로 잘못 인
식하기 때문입니다.
회생에는 뮬론 자기 소모가 따릅니다. 그러나 사림뮬 사량하기 위한 자기회생에 뒤따르는 자기
소모는, 새로운 생명올 담는 그릇이 된다는 점율 알아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의 회생으로 성장한
다고 했습니다. 부모의 생명이 소모되는 만큼 자식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율 위한 생
명의 소모는 소모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식웁 위해 자신율 소모하는 가운데 부모는 비로소
인간움, 그리고 인생의 참의미를 터득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설익은 생명의 소모를 동해 성숙한
생명을 되돌려 받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회생도 이와 갈습니다.
주님 안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자기회생을 주저하지 않율 때, 그의 심령에는 자신이 치콘
회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과 생명이 훌러넘치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단 한 번이
라도 진심으로 다른 사람율 사랑해 본 사람이, 날이 갈수톡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까닭
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자기회생이란 이처럼, 자신의 심령움 온동 주님의 사람과 생
명으로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누가는 데오빌로 단 한 사람을 우I해, 파피루스에 새의 깃털로 원고지 수백 장에
이르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내는,자기회생을 꺼리지 않았고,나아가 사도 바윤과 림께 온 지중
해 세계률 누비고 다니며, 사람움 사랑하는 자기회생을 기꺼이 감수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생명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길임윤 누가는 분명히 깨달았
기 때문입니다. 그가 데오빌로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회생율 무릅쓰며 써 보낸 편지가,
성경의 일부가 된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율 문자로 기록하기 전에, 그의 삶은 이미 주님 안에서 생명과 사랑의 기록
으로 엮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란, 주님 안에서 자기 삶의 이력서를 문자가 아닌 삶
으로 매일 기록해 가는 사람입니다. 문자로 기록하는 이력서는,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지만, 삶으
로 기록하는 이력서는, 위조나 변조가 블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우리
는 글자로 기록된 이력서가 아니라,우리의 삶으로 새겨진 이력서를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움 지녔어도, 이 세상몰 떠날 때, 가져갈 수 있는 것만이,진정한 의미의
재산이라면,우리의 참된 재산은 주님 안에서 우리의 삶으로 기록된 이력서밖에 없습니다. 우리
의 코끝에서 호흡이 멈추는 순간, 오직 그 이력서만 하나님 앞에 들고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증은님들! 사람율 사랑하기 위한 자기회생율 두려워하지 맙시다. 아내 혹은 남편을 사랑하기 위
해. 형제률 사랑하기 위해, 부모를 사랑하기 위해,이웃올 사랑하기 위해,조국울 사랑하기 위해,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할 자기회생몰 기꺼이 감수합시다.
서로 사랑하라 명하신 주님의 명령을 좇기 위해 우리의 생명을 소모하여,도리어 주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재움 받읍시다. 매일매일 주님 안에서 우리 자신의 삶으로 생명과 사랑의 이력서를 기
록학시다. 우리의 승부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것으로 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승부는 오직 그
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으로 기록한 이력서로 판가름날 것입니다.
주님! 이 세상율 떠날때, 우리가 지닌 것 가운데 과연 무엇율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날 우리가 가지고 가는 것은 우리의 삶으로 기록한 이력서뿐이요,그
것만이 진정한 우리의 재산임율 평생 잊지 말게 도와주십시오. 주님 안에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윤 회생하기률 두려워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자기회생 없이는 이웃은 고사하고. 가족조차 사랑할 수 없으며, 우리의 모든 외침은, 공산주의의
구호처럼 허황할 뿐임을 명심하게 해주십시오. 주님 안에서 자기회생윤 기꺼이 감수하는, 우리
의 심령에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날로 홀러넘쳐,우리의 삶이 어두운 세상윤 살리는,이 시대의
사도행전이 되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곧 우리 생명의 가치률 극대화하
는 것임을, 그보다 더 자신을 아끼는 길이 없음을, 우리 자신의 삶으로 날마다, 확인하는 기쁨울
누리게 해주십시오. 아멘! - 발취: 이재철 목사의 '사도행전 속으로'中
예수가좋다오
글⑩ 보시고 스크업 하시기 전에 그냥 가지 마시고 엇굴로 따뜻한 소감으로 감사풍 표하는 그리스도인미 침시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一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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