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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장례식에 초대?
장례식에 갈 때마다 으레 떠오르는 단상이 있습니다. 장례용품과 관련된 것입니다. 망자(亡者:
생명이 끊어진 사람)에게 수의를 입힙니다. 수의는 주로 삼베로 만들어지는데 삼베의 종류에 따
라 수의의 가격이 달라집니다. 최상품 삼베인 안동포로 제작된 수의의 가격은 제일 싼 제3의
스무배에 닫합니다.
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동나무, 통송, 향나무에 이르기까지 재질에 따라 관의 가격 역시 천차만
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최고가의 수의나 관이라 한들,장례용품이란 오직 죽은 자를 위한 것
입니다. 다시 말해 장례용품은 단지 죽은 시제와 썩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죽옴용품에 지나지 않
습니다.
나무 중에는 가구나 건죽 재료르 다등어져 산 사람을 위한 생명용품이 되는 나무도 있습니다.
삼베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에 비하면 유독 죽음용풍이 되어 시제와 더불어 썩어저 간다는 것은
기막힌 일입니다. 가구나 건죽 재료 등 인간의 삶을 위한 생명용풍용 나무는 얼마든지 재활용이
가능하지만, 죽용용품의 재활용이란 아매 블가능합니다.
죽옴용품은 저용부터 단 일회용으로 제작됩니다. 누구에게 을려주거나 뮴려받을 대상이 아님니
다. 도저히 수의를 구입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차라리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매
장 될지언정,다른 시체에 사용되었던 수의나 관을 물려받는 예는 없습니다. 아니 관이나 수의
가 재S용된 경우가 있긴 있었습니다.
옛낳 무당이나 복술쟁이가 사람을 저주하는 부적을 만들 때 가공 무명 속의 관이나 수의 조각
을 부적의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목적의 재활용이라면 도리어 재활용되지 않융만
못합니다. 비석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습니다. 돌의 용도가 얼마나 다양합니까? 정원석이 되
어 자연미를 한껏 뽐낼 수도 있고, 공사장에 동원되어 문명의 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들이 비석으로 선택되는 순간 그것으르 끝입니다. 한번 비석으로 다둥어진 들은 다른 용
도로는 쓰이지 않습니다. 가령 무명을 이장할 경우 비석을 가저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 자리에
서 파손해 버리거나 아니면 땅속 김이 묻어 버립니다. 비석의 효용 역시 일회성이기 때문입니
다.
이처럼 삼베나 나무 그리고 돌 중에는 사람의 삶을 위한 생명용품이 있는가 하면, 단지 썩어지
기 위해 존재하는 죽움용풍도 있습니다. 같은 산에서 함깨 자라고, 같은 재석장과 같은 포목점
에서 한데 어우러져 있었지만, 이렇듯 생명용품과 죽음용품으로 확연히 갈라집니다. 우리로 하
여금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갈라짐입니다.
인생도 이와같습니다.
인생은 한 번밖에 없는 기회라는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학니다. 그러나 그 한 번뿐인 인생
올 많은 사람을 살리며 살아갈 수도 있고,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도리어 많은 사람을 해치면
서 허망한 공동묘지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전자가 자기 인생을 생명용풍으로 가꾸는 자라면,
후자는 오직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어리석게도 죽음용풍으로 소진하는 자입니다.
인생이라고 다 같은 인생인 것은 아님니다. 생명용품으로 승화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죽융용
품으로 단지 썩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인생도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인생에 대한 우리의
사유는 다움과 같이 더욱 김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장례용품과는 달리 인생의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삼베 톡은 나무가 수의나 관과
같은 장례용품, 죽음용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자기 결정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들에겐 아무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 결정은 오직 제작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제작자의 결정에 따라 갑은
산의 나무이건만 생명용풍과 죽음용풍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의사와는
전히 구관하게, 죽음용품으로 제작되는 나무나 삼베가 한편으론 딱하기 그지없지만,그럼에도
시체와 함께 썩어지는 자가 역할을 조금도 마다치 않기에, 그 앞에서 숙연힘으르 느끼지 않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자기 인생을 어떤 용품으로 일굴 것인지는 결코 타인의 결정 사항이 아님니
다. 그 결정권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소관입니다. 자기 인생을 생명용품으로 승화시키는 것도,
죽움용풍으로 허비해 버리는 것도, 결국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단 한 번밖에
없는 자기 인생을. 아무 생각도 없이 죽음용품으로 썩혀 버리는 인간보다 더 추하고 어리석은
자는 없습니다.
둘째, 인생이 인간의 결정 사항이므로 인간에게 절대적인 푯대가 필요합니다. 작년 초에 받은
연하장 중에 잊을 수 없는 카드가 있습니다. 발신자가 직접 만든 카드 속엔 신라 시대 학자이자
최고의 문장가인 최지원의 한시가 적혀 있었습니다. 笑指門前一條路 (소지문전일조로) 鐘山下
有千味 (재리산하유천기) 웃으며 문 앞 외길을 가리키니 겨우 산 아래에서 천 깊로 갈라지네 시
골집 마루에 앉은 시인을 머릿속에 그려 보십시다.
그가 웃으며 싸리문 밖 외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눈길을 던저 보니
이게 원! 일입니까? 바로 앞 산 아래에서 외길은 천 갈래나 같라저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시
률 동해 지리적인 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니다. 그는 지금 인생을 옮고 있습니다. 그렇
습니다. 인생이란 언제나 외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듈여다보면 그게 아닙니다. 우리 앞에 언제나 천 같래 만 같래의 인생길
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길 중에 우리 자신을 생명용풍으로 일구어 주는 길은 언
제나 한 길뿐입니다. 나머지는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모두 죽음의 걸입니다. 생명용3이 되기
위한 그 한 길, 그 외길을 찾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푯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주의 말b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W펀 105절
욕망은 바른 분별을 가로막는 벽입니다. 그래서 욕망에 집착하면 할수록 미용에 더 깊이 빠저,
S특 갈은 어둥 속움 죽용용품으로 여매다 인생이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
님의 말씀은 •발의 둥’이요 '길의 빛'이기에, 그 말씀을 푯대로 삼기만 하면, 이 세상 천 갈래 만
갈래의 길 중에서,자신을 생명용품으로 일구어 줄 생명의 길을 바르게 분별해 낼 수 있습니다-
내 영론융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편 3절
이것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의 절대적 푯대로 삼았을 때, 하
나님깨서 자기를 의의 길, 즉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 것은 다윗 자신을 위함이었다고 말하지 않
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였다는 것이 다윗의 고액입니다.
목사인 제가 어느 청년 그롭에게 성경을 가르친다고 가정했을 때,저와 성경공부 하다가 인생올
망쳤다는 소리를 등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저에게 더 큰 불명예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그롭
에 속한 청년둘 중 단 한명도 실족지 않도록, 아니 그들의 삶이 주님의 말씀 안에서 모두 새로워
질 수 있도록, 저의 명예를 걸고 그 청년들을 위해 저의 진액을 다 쏟아 붓지 않겠습니까?
사랑도 이병진대 하물며 하나님께서야 두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좋은님이 하나님의 말운을 좋
은님 인생의 절대적 푯대로 삼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좋은님의 이름과 명예콜 걸고 좋은님묻
반드시 생명용풍으로 가꾸어 주십니다. 이 사실을 자신의 삶으로 확인한 사도 바올은 다움과 같
이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곁사람은 남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
워지도다.-고린도후서 4장 16절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육체는 쇠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쏭
옳 자기 인생의 푯대로 삼은 자의 심령은,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새로운 생명으로 넘집니다. 그
는 죽움용풍이 아니라 생명용풍인 까닭입니다. 생명용풍의 연륜이 김어 갈수록 생명이 더욱 중
일해짐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1997년, 불과 닷새 간격으로 우리는 세계적인 두 여인의 죽옴을 목격했습니다. 그 중 한명은, 이
집트 줄신 애인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즉사한, 영국의 다이애나비입니다. 그때 그
녀의 나이는 36세였습니다. 그녀는 세계 최고의 왕가로 일걸어지는 영국 왕실의 왕세자비였고,
그녀와 함게 죽은 새 애인 알 파예드는 영국 재벌의 아듈이었습니다. 그녀는 명실 공히 부귀영
화와 젊융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순간에 죽었고,장엄하기 그지없었던 그녀의 장례식은 공허하고 허무하기만
했습니다. 36년 동안 자기만을 위해 살았던 그녀의 장례식에서, 죽용용품 이외의 것을 콜 수 없
었던 탓입니다.
다이애나비 사망 닷새 후, 인도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인도의 빈민을 위
해 평생옳 바친 그녀는 당시 87세의 노파였습니다. 젊은 왕세자비 다이애나에 비하면, 깊이 팬
주름에 깡말라 광대뼈가 유독 두드러져 보이던 노파 테레사 수녀의 외모는, 그야알로 붕풍이라
곤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소유가 넉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리 단 두 벌이 그녀의 전 재
산이었습니다. 다이애나비와 테레사 수녀를 비교한다는 것 자제가 부질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평생 초라해 보이기만 했던 그 노파의 장례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감동을 안
겨 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삶 자체가 곧 생영용풍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그녀의 육체는 비록 후패했지만, 생명용풍이었던 그녀의 삶은 죽어서도 생명을 발하고 있었습
니다.
셋째,한 인간의 인생은 역사의 지평을 뒤른듭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어떤 용풍으로 얼
구느냐는 것은 그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은 물론이요 다가을 미래, 다시 말
해 보이지 않는 역사의 지평에까지 반드시 그 영향을 미집니다. 예전에 젊은이둘이 즐겨 보는
책 가운데 (파페포포 메모리즈)가 있었습니다. 그 책 지은이는 특수영상 기획자인 심승현 청년
이었습니다. 짧은 에세이와 만화로 구성된 책이라 쉽게 읽협니다.
그러나 쉽게 읽을 수 있다고 내용마저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그 속엔 인생에 대한 깊은 종찰력
이 담겨 있습니다. 다음 에세이가 그 좋은 예입니다. 그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증아했다. 아이스
크림을 억는 모습이 너무 예뺐다. 그 아이는 야구를 좋아했다. 야구장에서는 곡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나도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게 되었다. 야구를 보면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 좋아하게 되
었다. 새로 생긴 내 친구는 야구장에서 나와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 증아한다. 언뜻 대수로워 보
이지 않지만,그러나 곱씹어 불수록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A라는 친구물 사귀기 전까지 나는 아이스크림이나 야구에 전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
이스크링을 좋아하는 야구광 A와 가까이 지내다 보니 그 친구의 삶이 나도 모르게 내게 전이되
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름이 날 때마다 야구장을 찾는 내 손엔 어김없이 아이스크림이 들러 있
었습니다.
세월이 혹러 새로운 친구 요와 단짝이 되었습니다. 처음 만났윤 떤 B도 예전의 나처럼 아이스링
이나 야구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그러나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B 역시
자연스럽게 아이스크림과 야구장을 즐겨 찾게 되었습니다. 이저럼 A의 삶의 한 부분이 나콜 거
처 B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A는 자신의 삶이 B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좋은님의 삶은, 좋은님의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좋은님이 아는 사람은 물론
이요 전혀 상상치도 못한 사랑에게까지 반드시 영향을 미쳤고,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미칠 것입니다. 즉 모든 인간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타인의 삶과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
으로 역사의 지평움 뒤론둘게 마련입니다.
구약성경 룻기의 강조점 역시 바로 이것입니다. 룻기에는 세 여인이 둥장합니다. 시어머니 나오
미, 그리고 며느리 오르바와 릇입니다. 나오미는 본래 남편 엘리엘렉과 항께 이스라엘 베들레행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오미 부부는 보다 나은 삶묻 위해 모압으로 이민 가기로 하고, 두 아듈 알
론과 기든을 데리고 고향을 떠납니다.
모압에서 두 아들은 그곳 줄생 오르바와 룻과 각각 결튼,그들의 이민은 성공적인 듯었습니다.
그러나 이민 10년 만에 남편과 두 아둘 모두 죽고 알았습니다. 졸지에 세 명의 과부만 남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어쩔 수 없이 고향 베들레행으로 되돌아갈 것을 결심, 두 며느리률 데리고
길올 나섰습니다.
그돌의 베묻레행행이 그곳 즐신인 시어머니 나오미에겐 고향을 되찾는 역이민이었지만, 모압
여인인 두 며느리 입장에서는 타국으로의 이민 길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도 없이 물설고
낮선 이국의 삶과 부딪더야만 하는 애처로운 신세가 된 것입니다. 한참 길을 가던 시어머니 나
오미의 마옴이 바뀌었습니다. 아들듈이 살아 있으면 모르지만 다 죽고 없는 판에 젊은 며느리둘
에게 이국의 삶을 강요하는 것은 못할 짓이란 생각에서였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 개가하여 행복하게 살기콜 권했습니다. 전혀 예상지
못한 시어머니의 권유에 두 며느리는 펄쩍 뛰었지만, 거든되는 설득에 큰며느리 오르바는 못 이
기는 척 친정으로 을아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작은며느리 붓은 끝까지 시어머니률 따랐습니다.
그것은 단지 고부간의 인간적 정분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g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콜 떠나며 어머니■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히지 마옵소서. 어머니
깨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깨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
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콜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옳 내리
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5기 1장 16~17절
롯이 죽기까지 시어머니콜 따르려 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융 때문이었습니다. 친정으로 들
아가면 육신적으로는 더없이 편하겠지만, 그러나 믿옴의 관점에서 콜 때, 를로 된 운상한 시어
머니普 따르는 것보다 더 큰 일을 없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순증하는 것과 가련한 시어머니
봉양을 구별하여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뮴테면 뭇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순종키 위해 자기 생묻 시어머니콜 위한 생명용품으로 내
어놓은 자였습니다. 그렇다고 젊은 며느리의 헌신을 시어머니가 당연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향 베둘레템에 재정착한 나오미는 릇으로 하여금 보아스라는 친척을 통하여 시아버지의 대콜
잇는 중보자의 역합움 하게 됩니다.
나오미의 배려로 룻은 새로운 사랑의 보금자리률 얻었습니다.
이에 보아스가 롯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주】깨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
므로, 그가 아윤을 낳은지라.-룻기 4장 13절 하나님께서는 풋을 통하여 시부모와 남편의 재산과
5어질변한 가계(家保)를 잇게 하는데 한 여인윤 이스라얼 땅에서 사용하지 않으시고 모압(이방
땅)에서 수입하여 사용하셨습니다. 룻이 기업을 무콜 자 보아스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웃이 낳은 아둘은 보아스의 씨지만 보아스의 자식이 아닌 나오미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룻기 4장 5절의 말순에 보아스가 가로되 너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발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야내 모압 여인 g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옳 그 이름으로 잇게 마여야 할찌니리. 그 기업
무률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혜가 있율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률
권리콜 내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그렇다면 쉽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늙은 시모콜 위해 자기 생을 생명용품으로 내어
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신앙심을 지닌 릇에게 하나님깨서 복을 주셔서 그녀의 삶이 행복한 결말
로 끌났다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 룻기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5기 4장 16절에서 17절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나오미가 아기콜 받야 품에 품고 그의 양
육자가 되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율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대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대,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 성경 5기 4장
1卜17 젊
아콜을 얻은 룻은 외로운 시어머니 나오미로 하여금 자기 아이를 키우게 해 드렸습니다. 나오미
의 품에 안긴 아이콜 본 동네 사람들은 아이콜 오벳이라 昔렀습니다. 지금 태어난 아이는 오벳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야이콜 가리켜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라는 설명을 SS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핏덩이 오벳밖에 없는데,성경은 그 핏덩이의 손자(핏덩이의 어머
니 롯에겐 증손자)인,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먼 미래에 태어날 다윗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습니
다.
다윗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이 암을하던 시절, 그 나라의 역사률 새롭게 한 위대한 신앙인이었
습니다. 그렇다면 핏명이 오벳과 함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다윗을 동시에 보여 주는 위 알은
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인생옳 생명용풍으로 일구었던 뭇의 삶이, 이스라얻 역사의 지평
율 뒤혼콜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불품없는 이방 여인이요, 한 것이라곤 겨우 핏명이 한 명 날은 것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
녀에 의해 이스라영 역사의 지평이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계속
되는 룻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베레스의 게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에스론을 날고 에스론은 람을 날았고 람은 임미니답을
낳았고, 임미나답은 나손뮴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야스콜 낳았고 보아스는 오
벳올 낳았고. 오벳은 이새률 낮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5기 4장 18~22절
룻기는 다윗을 힌 번 더 언급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룻기의 결론으로 제시된
이 족보는 대체 무슨 족보일까요? 성경 마태복옴 1장은 이 족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임
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족보를 동해,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인류의 역사가 새
로워졌습니다. 이것이 룻기의 결론입니다.
자신의 인생움 생명용품으로 가꾸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통로로 삼아 인류의 역사
륜 반드시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3,000년 전 베들레령 사람콜은, 나오미의 풍에 안긴 핏명
이 오벳밖에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핏명이의 어머니인 릇으로 인해,인류 역사의 지
평이 새S게 윤져지고 있옴을 이미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귀중한 사실을 일깨워 주는 웃기
는, 그래서 더없이 소중한 책입니다.
響은님營! 잊지 마십시오!
모든 인간의 삶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드시 역사의 지평에 영향을 미집니다. 좋은님들의
삶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좋은님의 삶에 따라 오늘의 결과인 미래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바
로 여기에 우리의 소망과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소망이라 함은, 우리의 삶이 아무리 작
고 보잘것없을지라도, 주님 안에서 생명용3이 되기만 하면, 무명의 릇이 그렸듯 우리로 인해
역사의 지평이 새로워질 것이기 때문이요,두려움이라 함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 우리 삶을 고
작 죽용용풍으로 일굴 경우. 바로 우리 자신이 역사의 지평을 허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지평을 새동게 하는 자와 허무는 자가 전혀 다른 사랑일수도 있지만, 사랑에 따라서는
동업인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은 그의 삶이 모든 면에 걸져 항상
옳았움울 의미하지 않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오
직 임용으로 순종했을 때, 그는 참 생명이 넘치는 생명용풍이었고,그의 삶을 토대로 이스라열
민족의 대역사가 얻져졌습니다.
그러나 아들울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 몸종하갈과 동침, 서자인 이스마엘을 얻은
순간의 그는 한낱 죽융용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적자 이삭과 서자 이스마얼의 갈등
은, 4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전쟁과 상S 살상으로 이어지면서,인류 역
사의 한 부분을 허물고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열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병어지고 있는 학살과 자
살 테러의 유혈 참극의 근원은,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한 생명용3인 동시에,역사콜 허문 아니 지금도 허물
고 있는 죽옴용풍이기도 잡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진면교사 혹은 정면
교사인 동시에, 달아서는 안 될 반면교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더할 수 없이 중
요한 인물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왜 평생 생명용품으로 일구어야 하는지,, 자신의 삶으로 웅변해 주고 있기 때
문입니다. 나의 그롯된 삶으로 인해 미래의 한 부분이, 역사의 지평이 어떤 의미에서든 허을어
진다는 것온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궁구해야 할 명제는 자명
해졌습니다. 역사콜 허물 없이, 일평생 역사의 지평을 새은게 하는 생명용품으로 살아가는 것입
니다. •이재철 목사의 저서 *인간의 일생| 中에서-®
예수가종다오
글몰 보시고 스크업 하시기 전에 그냥 가지 마시고 엇굴로 따뜻한 소갑으로 감사끌 표하는 그리스도인미 a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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