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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위함이니 / 요한복음 17 : 9∼21

by 【고동엽】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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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위함이니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7 : 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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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848 년전, 32세의 나이로 유다 왕국의 왕위에 올랐던 여호람왕의 통치기간은 불과 7년만에 그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여호람 왕이 만 39세의 나이로 요절해 버린 까닭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람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들과 함께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왕하 8:24)"
 
`그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우리는 지난 10월 첫째 수요 예배시간에, `대신하여'란 이 단어에 대하여 깊이 묵상을 나누어 본 적이 있습니다.
 
32세라면 전도양양한 젊디젊은 나이입니다. 그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다면 그의 재임기간이 최소한 2-30년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호람 자신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으로서 큰 포부와 원대한 계획이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 어느 왕보다도 더 멋지게, 더 오래도록 왕좌를 지킬 수 있을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꿈과 포부 그리고 계획과는 상관없이, 불과 만 7년만에 그의 자리와 역할을 송두리째 아하시야가 대신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 옛날 여호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이 어떤 자리,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든 지간에, 그 자리 그 역할이 본래부터 여러분의 것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분명 누군가가 그 자리에 앉아 그 일을 오래 전부터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여러분이 그 사람을 대신하여 그 자리를 차고앉아,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논리로, 여러분도 지금 앉아 있는 자리의 마지막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언젠가는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의 자리에 앉아 여러분의 역할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가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첫째, 매일 매일 모든 것을 바르게 정리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밤, 잠을 자는 동안 여러분의 심장이 멎었다 하십시다. 오늘까지 여러분이 지키고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내일부터 누군가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대신하여 앉아 여러분이 해 왔던 그 일을 대신하여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여러분의 자리에 앉아 여러분의 서랍을 열었을 때, 여러분의 옷장을 열었을 때, 여러분이 그 동안 해 오던 일을 들여다보았을 때, 모든 것이 바르게 정리되어 있습니까? 누가 보아도 수치스럽거나 의롭지 못한 것 없이 누구에게든 떳떳하게 보일 수 있는 것들입니까? 내일이라도 다른 사람이 내 자리에 나를 대신하여 앉을 수 있음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루하루를 바르게 정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자기 인생을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남의 잘못과 허물에는 한없이 밝지만 자기 잘못, 자기 허물에 대해서는 지극히 어둡습니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 필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인간의 모든 무리와 어리석음은 태동되고 증폭됩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내 자리에 앉는 날이 오늘 일수도 있음을 아는 자는, 나를 대신하여 내 자리에 앉을 바로 그 사람의 눈으로 나를 살피는 법과 지혜를 터득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을 늘 객관화시켜 봄으로써 무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는 어리석음에서도 벗어나 자신의 삶을 바르게 세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에게까지 봉사가 확대될 수 있습니다.
봉사가 결여된 신앙과 사랑보다 더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한결같이 봉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가 곧 인간에 대한 봉사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인간의 인간에 대한 봉사는 내 눈앞에 있는 사람, 내 눈에 보이는 사람에 대한 봉사에 국한되기 때문에 종교는 자칫 이기집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아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분명히 지금 내 자리에 나를 대신하여 앉아 있을 그 사람을,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이 사회를 살아갈 미래의 사람들을 내가 의식하면서 살아 갈 때, 나의 봉사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고, 그때의 봉사만이 모든 계파의 장벽을 초월하는 참된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자리를 천년 만년 나의 자리로 지킬 수 없다는 사실, 오늘이라도 누군가가 나의 자리에 나를 대신하여 앉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신앙과 삶의 성숙은 동시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나님께서 주님을 믿으시고 주님께 맡기신 사람들, 곧 제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간절히 드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 성부 성자가 하나이듯이 저들도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고, 그 다음으로는 저희가 악에 빠지지 않도록 진리로 거룩하게 보전해 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 그 상세한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지난 2주 동안 깊은 묵상을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이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세 번째 기도 내용을 이렇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제자들이란 누구입니까? 이제 주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고 나면 주님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자리를 대신할 그 제자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 제자들은 지금 주님의 눈앞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지난 3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 사랑하는 제자들, 이제 곧 당신의 자리를 대신해 줄, 지금 눈앞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 주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기도가 눈에 보이는 제자들에게서 멈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 드렸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여기에서 이 사람들이란 주님 앞에 있는, 주님 눈에 보이는 제자들을 일컬음이요,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이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한 제자들을 통해 주님을 믿게 될 미지의,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영어 NIV 성경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는 기도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당신의 자리를 대신할 제자들뿐만 아니라, 또 그 제자들을 대신해 갈 미래의 크리스찬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 속에는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목전에 둔 그 마지막 순간에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1996년 10월 27일 오늘, 이 땅에서 제자들을 대신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이처럼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리를 이제 곧 제자들이 대신하며, 그 제자들의 자리를 또 누군가 대신할 것을 알고 계셨기에 바로 그들을 위해 주님의 삶은 매일 바르게 정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좇아 살아갈 미래의 크리스찬을 보고 계셨기에, 그들의 본이 될 당신의 삶을 진리 위에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바로 세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주님의 헌신과 봉사와 기도가 열려 있었기에, 주님께서는 거대한 이기집단의 교주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만민의 죄를 걸머지고 십자가 위에서 그 홀로 찢어지는 만인의 그리스도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아침, 참된 크리스찬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마지막 순간 이렇게 기도하신 주님을 본받아 언젠가 지금 나의 자리,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나를 대신할 수많은 미지의 사람들―그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하여 오늘을 진리 안에서 사는 사람들―바로 그 사람들이 참 크리스찬들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지 무려 479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크리스챤들은 아직까지 여전히 개혁의 대상입니다. 보다 나은 자기 성숙을 위한 긍정적인 의미로서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안고 있는 모순과 허물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부정적 의미로서 개혁의 대상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틴 루터를 전후하여 활동한 많은 종교 개혁자들이 종교 개혁의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속해 있던 집단의 장벽을 끝내 뛰어 넘지 못해, 오늘날 자행되고 있는 심각한 교회 분열의 1차적인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 또한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참된 개혁이란 미래에 우리를 대신할 사람들,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을 위한 참된 봉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때에만 개혁의 밑바탕이 되는 참다운 자기 희생과 자기 헌신, 그리고 자기 부인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자기 눈에 보이는 사람, 자기에게 속해 있거나 자기가 속해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 개혁이 왜곡될 때, 그것은 치명적인 분열과 단절의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조만 간에 그들 자신이 개혁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5공화국과 6공화국은 모두 `개혁'이란 구호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들의 자리를 대신한 사람들에 의해 철저한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개혁이 그들 눈앞에 보이는 사람, 다시 말해 그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집단을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절대 다수에게로까지 확대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문민정부 역시 개혁의 팡파르를 울리는 것으로부터 돛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이 만에 하나라도 특정계보나 특정정파만을 위한 개혁으로 왜곡된다면, 이 정부 역시 머지않아 그들을 대신할 사람들에 의해 개혁의 대상이 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말 것입니다.
 
중국의 2대강이라면 양자강과 황하입니다. 그런데 황하가 강물이 급격히 감소하여, 강이 아니라 하천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는 가운데, 근자에 와서는 양자강 상류 역시 모래 량이 급증하면서 수량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5월부터 중국의 전문가들이 양자강 상류지역인 `청장고원' 일대를 한달 동안 정밀 조사한 결과, 그와 같은 변화는 지구적 차원의 환경변화 요인을 제외하면, 과도한 방목과 야생동물 남획이 주된 이유인 것으로 분석하였습니다.
 
양자강 상류 지역 일대는 목축업이 유일한 생업 수단인데, 그곳에 밀집해 있는 수많은 인구가 계절에 따라 방목지를 옮겨야 한다는 법을 어기고, 한 곳에 눌러 앉아 양들을 먹임으로 인해 초지가 회복불능으로 황폐화되어 버렸습니다. 그와 아울러 사람들이 야생 동물을 마구 남획한 결과 초식성인 쥐와 토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나머지 초지를 황무지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황폐하게 된 토양은 급격하게 사막화되어 그 모래가 양자강 상류를 계속 메우므로 수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이것이 하루 이틀만의 일이겠습니까? 장구한 세월에 걸친 인간 잘못의 결과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청장고원 지대의 주민들은 법을 어긴 방목으로, 그리고 밀렵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을 것입니다. 그들 가축의 생계를 책임지며 동네 이웃들을 위해 봉사도 마다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지역을 위해 나름대로 개혁도 시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행위가 그들의 눈에 보이는 자기 집단의 이익에만 국한되었을 때, 그들은 중국의 젖줄인 양자강을 죽이는 원흉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들의 거듭되는 이기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끝내 양자강이 말라 버린다면, 그것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하여 중국인 모두를 해치는 행위인 것은 물론이요, 언젠가 그들의 자리를 대신할 그들 자신의 후손들의 삶의 터전을 허무는 어리석은 결과가 될 뿐입니다.
 
양자강 상류지역에 사는 그 어리석은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어느 자리, 어떤 자리에 처해있건 상관없이 언젠가는 반드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을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 날이 내일일 수도, 오늘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때 여러분은 그들에 의해 개혁의대상이 될수도있고, 그들의 본보기로 추앙받을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언젠가 내 자리를 대신할 미래의 그들을 생각하며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봉사와 기도가 그들에게까지 확대되고 연장되게 하십시오. 그 때 우리의 하루 하루는 진리 안에서 정돈될 수 있고, 우리의 삶은 진리 위에서 객관화될 수 있고, 우리는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중단 없는 개혁의 선봉이 될 수 있으며, 이미 2천년전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때 우리는 죽어서도, 우리를 대신할 우리 자식들에게 부끄럼 없는 진실된 아버지,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다같이 기도 드리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지금 이곳에 머리 숙인 사람들 뿐만아니라, 미래에 이곳에 있을 사람까지 포함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봉사가 지금 더불어 사는 사람들로부터, 먼 훗날 우리를 대신하여 살아갈 사람들에게까지 연장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헌신이, 우리가 없을 그때에 우리를 대신하여 이 땅에 있을 모두를 향하여 확대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하루하루가 진리 안에서 바르게 정리되게하시고, 언제나 개혁의 대상이 아닌 개혁의 주체로 남게 하옵소서.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사랑하는 우리자녀들은 우리의 서랍도 열어보고 장롱도 열어볼것입니다. 우리가 자식 앞에서 숨기기 원했던 것들마저 그들은 적나라하게 보게될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자식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그때 우리의 자식들이 우리의 자식되었음을 수치스러워하지 않도록, 오늘 우리의 삶을 진리 위에 바르게 세우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 주님의 시선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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