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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전 하시기를 / 요한복음 17 : 9∼19

by 【고동엽】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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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전 하시기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7 : 9∼19




금부터 2,600년전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 5:1)"
 
예루살렘은 당시 유다왕국의 수도였습니다. 한 왕국의 수도라면, 아무리 2,600년 전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최대의 성읍이요, 인구 또한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거대한 성읍 그 수많은 백성 가운데에, 단 한사람이라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있으면 그 성의 죄악을 사하시겠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그 당시에 신자가 없었겠으며 또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드는 교인들이 없었겠습니까? 부지기수, 아니 예루살렘에 사는 온 성민들이 모두, 하다못해 일년에 몇 차례라도 성전을 드나드는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5장 2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맹세, 곧 그들의 신앙이 온통 거짓이라는 겁니다. 거짓이란 진실의 반대 개념입니다. 진실이 초지일관 나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변함없이 섬기는 것이라면, 거짓은 하나님을 달래고 어루어서 하나님을 내 욕망의 도구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온 예루살렘 성민이 다 그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6:4)"
 
정말 예루살렘 성전이 여호와의 전인줄 믿고 드나든다면,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드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 삶이 점점 더 진실하게 일구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루살렘 성민들은 무수히 성전을 드나들면서도 그 삶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란 사실을 믿지 않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만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이루기 원하는 자기 욕망의 확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이것은 여호와의 전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집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 고백하는 것은 송두리째 거짓말이라고 판정하신 것입니다.
 
왜 인간들은 어리석게도 거짓 신앙으로 일관합니까? 왜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길을 좇지 못합니까? 이유는 한가지, 자기 생명보다 자기 주머니-그것이 권력의 주머니든 물질의 주머니든 아니면 명예의 주머니이든 상관없이-자기 주머니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머니가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채우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쉬임없이 거짓된 삶을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한 삶은 자기 주머니를 찢어지게 하여 속에든 것마저 다 흘려버릴뿐 아니라, 끝내는 자기 생명마저도 해쳐 버리고 맙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생명을 영원토록 책임져줄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 8장 35절-36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누가 과연 지혜로운 자이겠습니까? 자기 주머니보다 자기 생명이 더 소중함을 알아 참 생명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거짓되이가 아니라, 진실되이 경외하는 자 그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미 3천 년전 솔로몬이 무엇이라 설파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이런 의미에서 2,600년 전 예레미아시대의 예루살렘 성민들은 어리석고 우둔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단 한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참되이 경외하는 자가 있으면 예루살렘 성읍을 용서하시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너도 나도 욕망과 쾌락을 따라 거짓되이 살다가, 주전 586년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모두 파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부터 4,000년 전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을 참되이 경외하는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2,600년 전 예루살렘은 단 한사람의 진정한 신앙인이 없어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1,400여 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신앙심은 향상되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또 2,600년이 지난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2,600년 전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학과 산업은 날마다 끝도 없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지식과 기술의 발달만큼 우리의 신앙도 향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날로 퇴보하고 있습니까? 4천년 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 비해, 2,600년 전 예루살렘 교인들과 비교하여 우리에게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들의 어리석은 삶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들을 포함하여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가리켜,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라 말할 때, 하나님께서 그 말을 수긍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하시겠습니까?
 
2,000년 전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을 목전에 둔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사람들, 이를테면 제자들을 위해 지금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 드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먼저,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듯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고, 그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 상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해 드린 두번째 기도 내용을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4∼15)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이제 주님께서 떠나시고 나면, 거짓과 불의가 가득찬 이 세상속에서 진리를 좇아 참되고 의롭게 살아가려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는 이 추악한 세상으로부터 제자들을 하루 속히 하나님 나라로 불러 주시기를 간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이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이 될 수 있게끔, 그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끔 보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리고 계십니다. 말하자면 상황과 여건에 구애 받음없이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지켜 달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어떻게 인간들을 보전해 주시는 것으로 인식하고 계셨습니까? 주님께서는 본문 17절을 통해 이렇게 기도 드리고 계십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보전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입으로만 즐기게 하시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보전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 땅을 구경하고 관광하시기 위함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서 건져 내시사, 우리에게 그 생명의 길, 그 진리의 말씀의 길을 친히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더불어 살고 있는 이 사회를 4천년 전의 소돔과 고모라처럼 만들지 않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우리 자식들이 살아 갈 미래의 이 사회가 2,600년 전 예루살렘과 같은 멸망의 성읍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섬기는 이 주님의 교회가 이것이 주님의 교회라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주님의 판정을 받지 않기를 진실로 원한다면, 우리 모두는 이 아침 두 가지 사실을 꼭 마음속에 새겨야 겠습니다.
 
번째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답게,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답게,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보전할 책임과 의무를 스스로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므로 내가 어디로 발자국을 디뎌야 할지, 어느 길로 향해야 할지 바르게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온 천지가 온통 흑암이어서 내 인생이 향방없이 헤매일수 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도외시하는데 어찌 솟구치는 욕망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답게 처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쾌락의 소용돌이 앞에서 그리스도인 답게 돌아설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르고,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전혀 불가능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말씀을 우리의 심령에 새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새기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저는 아이들이 자기 할일을 다 하는 한, 가고 싶어하는 곳이나 하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허락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6학년인 큰 아이와 4학년인 둘째 아이는, 지하철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혼자 다녀옵니다. 심지어는 지하철을 타고 인천 야구장을 가기도 하고, 방학때가 되면 서울을 떠나 아주 먼 곳까지 혼자 갔다오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원할 때는 온 가족들이 함께 노래방으로 가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얼마전 저녁을 먹을 때, 유난히 자세가 흐트러져 있는 큰 아이에게 바른 자세로 식사하도록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던 아이가 말했습니다.
"아빤 참 이상해요."
무엇이 이상하냐는 물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빤 우리에게 큰 자유를 허락하시면서, 도리어 작은 자유는 주시지를 않잖아요"
아이가 말하는 큰 자유란, 무엇이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허락해 주는 것을, 그리고 작은 자유란, 평소 바르지 못한 언행이나 흐트러진 글씨등을 금하고, 아침기도와 성경쓰기 등을 강조하는 것등을 의미했읍니다. 제가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아빠가 너희들에게 `큰 자유'를 허락하는 것은, 그것이 너희들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야. 사람은 절대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돼, 앞으로도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아빤 너희들의 세계와 시야를 넓혀 주기 위해 계속 큰 자유를 허락해 줄거야. 그러나 네가 말하는 `작은 자유'란 모두 원칙과 관련된거야. 원칙에 충실치 않으면 큰 자유는 무서운 방종이 되고 만단다. 그래서 큰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되기 위해서는, 작은 자유는 언제나 제한을 받아야 만 하는 거야."
 
우리에게 인생이란 큰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서, 왜 말씀을 멀리하려는 우리의 작은 자유를 허락치 않으십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심령 속에 새기도록 우리의 작은 자유를 제한하십니까? 우리를 악에 빠지지 않도록 거룩하게 보전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방종과 파멸로 끝나도록 방치해 두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히 세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모든 추악한 욕망과 허망한 쾌락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하는 자유인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써, 진리로 나를 거룩하게 보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에 결코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번째로는, 나 자신만 거룩하게 보전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역시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보전될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책임과 의무 또한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죽음 직전까지 제자들을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달라고 간구하신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 분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보전될 수 있음을 믿는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보전될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자 의무임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중국의 `정관정요'에 의하면, 당 태종이 위징에게 충언을 마다않는 충신이 되어 주기를 청했을 때, 위징은 충신이 아니라 양신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충신과 양신의 차이를 물었을 때 위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충신이란, 그 자신은 물론이요, 일가족 모두 몰살당하게 하고, 군주는 폭군이 되게 하며, 국가도 가문도 다 멸망한 뒤 다만 홀로 충신이란 이름만을 후세에 남깁니다. 그러나 양신이란, 그 자신이 추앙될 훌륭한 이름을 얻을 뿐만 아니라, 군주로 하여금 성군이란 이름을 얻게 하고, 자손 대대로 가게 은덕을 입어 행복이 한량없는 신하입니다."
 
굳이 위징의 말을 빌린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충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양신이 되어야만 합니다. 불의와 거짓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잘못을 직시하고 지적한다면, 그들의 허물을 배경으로 나 홀로 독야청청 내 이름만을 드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삶을 거룩하게 보전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4주전부터 살펴보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며, 나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무엇보다도 주님처럼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이것은 먼저 나를 진리로 거룩하게 보전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한국의 그린베레들인 공수부대원들이 훈련하고 또 훈련하고 그것도 모자라 진력이 나기까지 훈련을 반복하는 것은, 지휘관이 무능하거나 가르치는 요령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반사 작용을 익히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공수부대원들은 가장 어려운 작전지구에 투입될 수 있는 것입니다. 거짓을 떨쳐 버리고 참된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연속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법을 훈련해야 하고, 어떤 상항 속에서도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훈련을 거듭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나와 타인들을 그리고 교회를 동시에 거룩하게 보전하는 양신, 소돔과 고모라로 부터 이세상을 구해내는 하나님의 그린베레가 될 것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4천년전 소동과 고모라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2천6백년전 예루살렘성읍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저희들과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을 무조건 사랑하시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고 우리를 그 죄악 가운데서 건져 주시고, 저희들을 거룩하게 보전할수 있도록 말씀을 허락하여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말씀의 훈련을 게을리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마치 공수부대원들 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반사작용으로 들어날 수 있도록 이 훈련을 매일 거듭하고 거듭하는 자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나 자신과 이 세상사람들을 동시에 진리로 거룩하게 보전하는 하나님의 양심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고, 이 혼탁한 세상을 소동과 고모라로부터 구출 해 내는 하나님의 그린베레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 멘
 
 

 
출처 : 주님의 시선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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