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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좇으라(마 9:9-13) / 이철신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6.

나를 좇으라

마태복음 9 : 9-13

 

논 지 : 예수님은 긍휼이 많으셔서, 죄인들도 부르셔서 제자 삼으신다. 예수님의 긍휼을 받은 사람이 긍휼을 베푼다.

 

가. 예수님의 긍휼 (9, 10, 12, 13)

 

1. 예수님의 부르심 (9)

 

갈릴리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우리 예수님께서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말씀과 교훈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사역을 하시는 분이며,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에 혼자 일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택해서 일을 하셨는데, 제자들을 택하실 때에는 예수님의 명성에 어울리는 제자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별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을 택하셨습니다. 별로 많이 배운 것도 없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봐야 별로 배움이 신장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을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어부들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까지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사람은 진짜로 자격이 안된다고 생각이 되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가버나움이라는 도시는 갈릴리 북부 지방의 사람들의 통행이 많고, 물자가 왕래되는 중심도시입니다. 그 세관에 마태가 앉아서 관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태를 보시고 말씀하시길 “나를 좇으라” 부르셨습니다. ‘좇으라’는 말은 ‘함께 길을 간다’, ‘동행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좇으라”를 다시 쉽게 말하면, “마태야, 나와 함께 내 길을 가자”, “마태야, 내 제자가 되어서 내가 하는 일을 함께 하자”고 마태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 당시 세리는 로마 식민정부에 세금을 걷어서 바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쪽에서 볼 때에는 민족의 반역자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정해진 액수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서 착복했기 때문에, 부패와 비리의 대명사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세리라고 하면 유대인들에게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세리를 부르셔서 함께 길을 가고, 일을 하고, 제자를 삼으면 예수님께도 분명 나쁜 이미지가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별로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태라는 세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적절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격이 없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2. 구원으로 부르심(13)

 

여러분,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을 ‘예수님의 긍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격이 있어서 부르신 것이 아니고 불쌍히 여기고 동정해서 그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마태가 세리로서 일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닙니다. 마태도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는 미워했지만, 죄인은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가 세리로서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 생명이 멸망할 것을 동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셔서 회개케 하고 새 생명을 얻게 하셔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부르셔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13b).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크신지(엡 3:19), 예수님의 사랑의 품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우리 예수님의 사랑의 포용력이 얼마나 넓은지, 죄인도 다 품는 분이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태는 세리고 죄인이라고 정죄했지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 사람의 생명의 소중함을 아셨습니다. 그 생명을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3. 사명으로 부르심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는데 왕래를 하시면서 세관에 앉아서 일하는 마태를 눈 여겨 보셨습니다. 한번 보고 마태를 부르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태가 일하는 모습을 줄곳 지켜봤는데, 그가 하는 세관업무는 부패와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환경가운데 하는 일이지만, 그러나 마태는 세리로서 그 속에서도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가 가지고 있는 성실성과, 세관업무를 감당하는 지성을 눈 여겨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에게 사명을 맡길 때에 그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를 부르신 것입니다. 결국 마태는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과 사역을 잘 정리하고 기록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 주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를 불러서 그에게 제자직분을 주셨고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여러분, 저는 목사입니다만 제가 목사로 부르심을 받고 목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을 때에 이 목사라는 직분이 제가 자격이 있어서, 노력하고 애를 써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자격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겨서 이 직분을 제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이 일을 감당하고 감사함으로 이 일에 더욱 충성해야 합니다. 목사라는 직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분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우리가 수고하고 애를 써서 얻은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시작해서 3차에 걸쳐 우리교회 장로 12분, 안수집사 24분을 선출하는 일들을 합니다. 여러분, 이 일을 할 때에 이것은 결코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든지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일들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추앙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그 직분을 맡기시는데, 사람의 손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직분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직분을 맡지 못한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실망할 일도, 이 직분을 맡았다고 해서 자만할 일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우리에게 맡겨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부족하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맡겨진 일을 감당할 뿐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멸시를 받고 소외되어 있는 세리 마태를 이해하시고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만 사랑하시고 이해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어떤 사정과 형편에 처하든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정과 형편을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좇으라’ ‘얘야, 나와 함께 내 길을 가자’ ‘얘야, 내 제자가 되어서 나와 함께 내 일을 하자’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에 우리 주님께서 나는 좇으라고 하는 긍휼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나. 긍휼을 받아들인 사람 (9, 10)

 

1.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마태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상인들에게 물품 통관세를 받고, 국경을 넘어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태의 눈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람이 아니라 돈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돈을 걷어서 로마 정부에도 바치고, 자기의 주머니도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돈만 찾는 그의 눈은 날카로웠고 그의 마음은 차가웠습니다. 그의 앞에 온 사람들의 사정과 형편을 일일이 고려해 주어서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에 무자비하게 대할 수밖에 없고 그 속에 긍휼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민족 반역자로 미워하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패와 비리의 사람이라고 멸시하는 것을 그는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멸시하면 멸시할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더 날카로워졌고, 더욱 더 차가워졌고, 더욱 더 무자비하게 세금을 거둬들였습니다. 돈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삶은 외롭고 고독한 삶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의 마음은 더욱 더 부서지고 깨어졌습니다. 그의 인간성이 황폐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마태야,나와 함께 나의 길을 가자”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니, 그 분의 눈에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 미움과 멸시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목소리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차가움과 날카로움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긍휼의 따뜻한 목소리로 자기를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비로소 마태는 사랑의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예수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자기 인생이 부서지고 깨어진 인생이라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습니다. 외롭고 고독한 인생인 것을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외면적으로 나타난 날카롭고 차가운 표현은, 사실은 자기 자신의 황폐한 내면을 위장하기 위한 것임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9b). 그 분께 순종하였습니다. 그 분이 주시는 긍휼을 받아 들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들였을 때, 그의 황폐한 내면 속에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로 가득 채울 수가 있었습니다. 돈만 바라보던 그 눈, 날카롭고 차가웠던 그 마음이 이제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로서 그의 인생이 따뜻한 인생이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물질적 풍요가 보장된 안정된 직장을 버렸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돈을 바라보던 인생 길에서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사랑의 길로 바꾸게 된 것입니다.

 

 

 

3. 그는 즉시 자기 주변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10). 예수님과 함께 잔치를 벌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께 이끌어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받아 들여서 그 긍휼을 경험하고 나니까 다른 사람에게 그 긍휼을 베풀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한번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도 역시 이 땅의 삶을 살아가면서 소외된 채 외로운 인생과 차가운 인생을 살아가지 않습니까? 여러분, 모두 다 부서지고 깨어진 내면을 가지고 사는 그런 연약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시간에 여러분의 연약함을 우리 주님 앞에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 앞에 마음을 여십시오. 우리 주님의 긍휼과 사랑을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내면 속에 우리 주님의 긍휼과 사랑을 채우시고, 평안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우리 주님께로부터 받은 긍휼을 베푸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다. 긍휼을 베풀지 못하는 사람(11)

 

1. 그런데 그 긍휼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마태가 예수님께순종하며, 세리의 친구들과 식사하는 모든 과정들을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고 마태가 그 긍휼을 받아들이고, 변화되고 다른 사람들이 다 모여들고, 그들에게 긍휼이 확산되는 과정을 모두 봤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감사하게 여기고 감격할 만도 한데 바리새인들은 분노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선생들이었고, 그 율법을 잘 준수하므로 유대 백성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내가 잘 지키는 것은 좋은데 잘 지키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정죄했습니다. 내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좋은데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정죄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면서 그들 속에는 사랑과 긍휼이 없었습니다. 세리 같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들의 눈은 율법의 세밀한 규정만 보았습니다. 그 율법으로 사람들을 감시했습니다. 그 율법으로 사람들을 억압했습니다. 그 율법으로 사람들을 지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그 율법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더 많이 배우고 암송하고 지키면서, 그 마음은 더 날카로워졌습니다. 다른 사람을 감시하고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바빠서 그들의 마음은 차가웠고 무자비했습니다. 세리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율법 때문에 그들의 인간성이 황폐화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곁에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소외시키면서, 자신들도 또한 소외되었습니다. 그들도 역시 사람들과 인간적인 교제가 없이 외롭고 고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들도 부서지고 깨어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2. 그런데 세리들은 연약한 존재요, 외로운 인생, 부서지고 깨어진 인생을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서 예수님의 긍휼을 받아들인 반면, 바리새인들은 교만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외로운 인생이고, 부서지고 깨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긍휼을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세리 같은 죄인들에게 예수님이 긍휼을 베푸는 것도 너무나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긍휼을 베푸는 예수님도 비난하고, 긍휼을 받아들인 세리들도 정죄했습니다. 그들은 긍휼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긍휼이라는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긍휼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긍휼을 베풀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를 믿고, 성경도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만, 그러나 예배와 성경공부와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긍휼을 날마다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는 긍휼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오래 예수를 믿었지만,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열심히 기도하지만, 그러나 긍휼을 잃어버리게 될 때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지식을 가지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기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바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연조를 가지고, 우리의 전통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에 사도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할 때마다, 날마다 우리 주님의 긍휼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긍휼을 가진 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연약한 우리에게, 깨어지고 부서진 우리들에게 다가오셔서 긍휼과 사랑의 목소리로 ‘나를 좇으라’ 부르십니다. ‘나와 함께 내 길을 가자’ ‘내 제자가 되어서 나와 함께 내 일을 하자’고 부르십니다.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우리 주님께서 긍휼과 사랑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 주님의 긍휼을 받아 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의 심령을 가득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평안하고 사랑이 풍성한,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긍휼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조건 없이, 자격 없이 긍휼을 베푸신 것 같이 여러분도 다른 분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자격 없이 긍휼을 베푸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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