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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42:1-7 우리교회의 영성 / 김동호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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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의 영성

이사야42:1-7

 

우리 교회는 작년 10월 7일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1주년 감사 예배를 드린, 외형적으로는 크게 성장을 했다고들 하지만 아직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개척교회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미숙함이 많은 교회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지난 1년 간 우리 교회에 부어주신 은혜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었습니다. 교인의 수와, 많아지는 예산을 자랑하며 그것이 축복이라고 말한다면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런 것들을 배제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중 정말 부족한 우리에게 ① 예배의 장소와 교육의 장을 허락하신 것과, 또 진정 ② 좋은 교인들을 보내 주시어 동역 하라 하신 것은 감히 축복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1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감사와 격려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한 쪽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이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교회를 걱정하는 많은 소리 중 하나는 우리교회가 영성에 대해 너무 소극적이라는 지적입니다. 영성에 대해 소극적이다 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목사인 제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때, 그것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교회를 이끌어 가는 목회자들이 영성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뜻이요 두 번째는 교회 안에 영성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성장과 성숙을 위해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해야 하고 더 많이 모여 예배드려야 하는데, 현재 기도의 모임이 없고 기도의 시간이 적으며 예배의 시간조차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수요예배도 없고 금요일 철야 기도회도 없으며 그동안 매일 우리를 살찌우게 했던 새벽기도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인에 따라서는 부담을 주지 않아 좋아하실 분도 더러는 있겠지만 어떤 분들은 영적 성장에 대한 많은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영성이란 하나님의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즉 성령이 함께 하는 삶과 성령과 동행하기 위해 애쓰는 노력 전체를 우리는 총체적으로 영성이라 말합니다. 그러기에 영성을 말할 때는 반드시 성령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하는 성령은 무엇이며 성령의 활동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성령에 대해 각각 나름대로 체험한 것과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에 대해서 모두가 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사를 살펴보면 성령에 대한 이해가 크게 두 가지로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한국교회는 성령을 초자연적인 활동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로 오순절계통의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이해되어지는 것인데, 주로 방언, 병 고침, 예언 등 이적을 중심으로 한 성령의 이해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이해는 너무 강하게 사람들에게 각인이 되어 오순절계통의 교인들 뿐 아니라 보편적인 한국교회 교인들도 모두 비슷한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이라 하면 귀신의 활동을 많이 떠올리게 되고 귀신을 쫓든지 대화하든지 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영성이 강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성령이해는 개인의 중생과 회개로 이어지는 성화의 단계로서의 이해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우리 사람이 변화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개인의 회개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1974년 엑스폴로 74대회가 100만 명이 넘는 교인들이 모여 여의도 광장에서 회개 운동을 벌였고, 뒤 이어 1980년 민족복음화 대 성회가 이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성령에 대한 이해는 성령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또 다른 모습을 우리는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또 다른 모습.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에게 성령에 대해 또 한가지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의미 있는 일이 지난 8월 10일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지난 8월 10일은 바로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의 장례미사가 서울 정동 성공회 대성당에서 거행된 날입니다. 대천덕, 토레이 3세. 그는 성공회 신부였고 한국에서는 비교적 오지인 강원도 황지에서 생활했지만, 그가 설립한 예수원을 통해, 또 그곳에서의 그의 삶을 통해 그가 한국 교회에 던진 메시지와 영향은 매우 컸다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워낙에 큰 교계의 어른이 돌아가셨던 터라 각계각층의 인사와 한국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장례미사가 거행되었습니다. 이런 장례식에는 사회를 보는 사람이건 무슨 순서를 맡은 사람이건 간에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매우 중요하기에 단어 하나를 쓰더라도 엄선하여 정확하게 써야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 장례식 중에 순서를 맡은 홍성사 정애주 사장의 조사가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그는 성령 안에서 공동체의 형성과 공동체의 사회적 역할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이제 고인의 두꺼운 중보기도책을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것이 슬픈 일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성령이라고 하면 무슨 단어들이 연결고리처럼 생각나십니까? 아마 방언이라든지, 신유라든지, 회개 등등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위대한 영성가의 장례식 날 그의 생전의 모습을 그리며 조사를 할 때 성령과 공동체와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같이 쓰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뭔가 잘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이 단어들이 함께 연결된다는 것은 성령의 또 다른 이해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의 성령에 대한 이해가 편협해서 그럴까요? 그가 한국굑회의 성령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럴까요? 그는 성공회 신부이기 때문에 개신교의 신학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성령학자요 영성가입니다. 그의 성령에 대한 관심과 뿌리는 가히 세계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집안은 성령에 관심이 많은 삶들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인 토레이 1세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성령학자였으며, 아버지 토레이 2세는 성령학자이면서 중국의 선교사였고, 토레이 3세인 대천덕 신부는 1985년에 '성령론'을 두 권에 걸쳐 출간할 정도로 성령과 영성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권위자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냉정하게 성경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성경은 성령에 대해 뭐라 말하고 있는가? 오직 성경에서만이 그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나타낼 때, 즉 하나님께서 성령을 이 땅의 사람들에게 보내 주실 때는 한가지 특징적인 상황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공동체가 무너졌거나 무너져 가고 있다는 상황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소망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 황폐해지고 고통을 당해 살 소망조차 없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모습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성령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야 한다고 할 때 우리도 성령의 사람으로 예수의 삶을 좇아가는 그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는 공동체를 살리는 역할을 보여줍니다.

 

에스겔37, 47장도 그렇습니다. 마른 뼈다귀의 모습이나 성전 문지방에서 흐르는 생수의 무습들은 멸망당해 모든 의욕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꿈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성령님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행전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신약의 사도행전도 로마의 박해로 인해 위기에 놓인 초대교회를 살리시고, 또 복음의 팽창을 위해 일해야 할 사도들과 교인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기 위해 성령이 오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은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고통과 좌절 괴로움의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 역할을, 즉 공동체를 살리는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은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오시면 우리는 공동체를 보게 됩니다. 나를 위한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나를 위해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남의 고통을 내 아픔으로 느끼며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요 우리가 가져야 할 영성인 것입니다.

 

함부로 성령의 은사를 받겠다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더 큰 사명을 부여하시고 더 큰 희생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성훈련은 바로 남을 위해 나의 가진 것을 포기하는 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의 훈련은 바로 눈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나를 희생하고 포기하는 결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성령학자들에게 우리시대의 가장 위대한 성령의 사람이 누구냐 물었을 때 성령학자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을 지목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Martin Luther King 목사입니다. 비록 흑인이었지만 목회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하게 자라며 흑인으로서는 감히 가기 어려웠던 보스톤 대학을 비롯한 엘리트 교육코스를 거치며 신학박사가 된 소위 성공한 목사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의 삶은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목회지에서 한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들로부터 자라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일자 그는 그 여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1955년 12월 버스 보이코트 운동을 시작으로 비폭력을 원칙으로한 흑인해방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는 그 운동을 하게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니 의와 공평의 세계가 임했다."

 

"성령이 임하시니 내가 정의를 선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유명한 연설을 압니다.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라는 연설입니다. 그 연설은 Let freedom ring from every hill (모든 언덕으로부터 자유의 종이여 울려라) 라는 부제가 있습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 드립니다.

 

.....나는 오늘 꿈이 있습니다.

 

나는 어느 날 모든 계곡이 높여지고 모든 언덕과 산이 낮춰지고

 

거친 곳이 평탄해 지고 구부러진 곳이 똑바르게 되며

 

그리고 주님의 영광이 밝혀져 일체의 중생이 다 함께 그것을 볼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위대한 국가가 되려고 한다면

 

뉴햄프셔의 경이적인 언덕 꼭데기에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하십시오.

 

펜실베니아의 높은 알레게니 산맥으로부터 자유가 울려퍼지게 하십시오.

 

콜로라도의 눈덮힌 록키 산맥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하십시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 켈리포니아의 산정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하십시오.....

 

 

 

.....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닙니다.

 

조지아의 스톤마운틴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하십시오.

 

테네시의 루카우트 마운틴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하십시오.

 

미시시피의 모든 야산과 들판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하십시오.....

 

 

 

조지아의 스톤마운틴이 어디인줄 아십니까? 테네시의 루카우트 마운틴이 어디인줄 아십니까? 그곳은 백인들이 흑인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던 곳입니다. 바로 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조상들과 많은 흑인들의 조상들이 죽임을 당한 곳이요, 흑인들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의 장소인 것입니다. 지금 Martin Luther King 목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자유가 흘러나와야 한다고.

 

 

 

그것은 용서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가족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원수가 되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성령의 사람들은 그것을 덮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들에게 미움이 남아 있습니까? 시기와 질투가 자리하고 있습니까? 남을 향한 분노와 미움이 있다면 진정한 성령의 사람이 되기는 못할 것입니다.

 

 

 

1968년 4월 4일. 한 백인의 총격에 의해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었을 때 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장례식에는 백발이 된 King 목사의 아버지가 목사로 집례를 합니다. 장례식의 순서 사이에 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생전의 연설음성이 나옵니다.

 

 

 

" 여러분 중에 누가 내가 죽는 날 그 자리에 있게 되거든

 

너무 길게 나를 얘기하지 마십시오.

 

그는 노벨 평화상을 비롯해 너무 많은 상을 받았다고,

 

너무나 많은 일을 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저 오직 침묵 속에서 정의를 외쳤다고만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는 성령의 사람이라고만 말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Martin Luther King 목사는 이 땅에서 가장 성령이 충만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참으로 많은 시간을 기도에 투자하고 교회에 투자하지만 그런 교인들 중에는 남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선한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피해와 고통을 주는 이중적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국교회는 성령의 운동을 부르짖어 왔지만, 그래서 방언을 했고 병을 고쳤고 개인도 변했고 교회도 성장했지만, 그러나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나를 희생하고 포기하는 본질적 영성을 갖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었고 그 결과 교회는 사회의 지탄을 받으며 마치 거대한 타이타닉이 바다에 침몰하는 것 같이 서서히 몰락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영성이 아직 완성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는 바로 성경이 말하는 바른 영성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을 보고는 그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어 견딜 수 없는 그런 교회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괴로워하며 그 일을 위해 기도하는 그런 교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인들이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영성을 갖기를 원합니다. 어려운 사람들,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내가 움켜잡고 있는 것을 놓는 그런 교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기도의 모임이 없고 예배의 시간은 적지만 그것이 문제가 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영성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영성을 갖기를 원하고 계시고 그런 영성의 생활을 하는 우리 교회를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늘 성령과 동행하시는 교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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