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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남자의 변화된 이야기/ 요한복음 3:1~15

by 【고동엽】 2021. 12. 24.
어떤 남자의 변화된 이야기
요한복음 3:1~15


사람이 가지고있는 가장 진한 열망, 가장 뜨거운 열망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되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싶다라는 그런 열망일 것입니다. 사람이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로부터 해방. 그런데, 사람들이 그 과거의 영향을 극복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죠. 아~심리학에서 많이 쓰는 단어 가운데 성인 아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adult children’ 성인아동 성인아이, 우리가 다 성인인데요 어른인데, 그런데 우리 속에 아이가 있다는 거예요 아이가,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어린 시절에 어떤 결정적인 충격을 받아서 내가 어린 시절에 아~ 나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불신하는 어린아이, 그런데 내가 지금 어른이 되었는데도 나는 주변의 사람들을 전혀 믿지 못하고 아직도 불신한다 그 불신하는 어린아이가 어른이 된 내 속에 그대로 들어가 있는 거죠 지금도, 또 분노하는 아이, 어린시절 분노했든 나의 세상과 사회를 향한 분노, 내가 어른이 되었는데도 계속 분노를 해요. 그 분노하는 어린아이가 내 속에 있는 거예요. 또 어린시절에 버림받은 아이, 거절 받은 아이, 버림받고 거절 당했어요. 그런데 지금 컸는데도 누군가가 나를 버릴까봐 계속 두려워합니다. 내 속에 버림받은 아이, 거절당한 어린아이가 그대로 들어있는 거죠. 그래서 성숙한다는 것은,그리고 새로워진다는 것은 과거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로부터의 탈출, 또 과거의 극복,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제가 좀 가까이 지내는 선배 목사님이 한 분이 계시는데 이 목사님이 6.25 전쟁 때 말이죠, 6.25 사변때, 자기가 살든 마을, 자기가 다니든 중학교가 그 폭격을 맞아서 학교가 불타게 되었대요. 그런데 학교가 불타는데 자기는 너무너무 신나 가지고 막 그냥 신바람이 나서 막 춤을 추었다는 거예요. 좀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왜 그랬어요? 그러니까 성적표 불에 탈 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좋더래요. 성적표 불에 탈 생각하니까,하하~ 녜, 자기의 과거라는 레코더, 자기의 과거라는 레코더, 그 과거가 부끄러운 과거,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일 때, 할 수만 있다면 내 과거라는 내 인생의 기록부를, 레코더를 찢어버리고 내 인생의 역사를 다시 새롭게 쓰고싶다. 이런 마음을 갖죠.

아~우리가 시편에 봐도 아~ 다윗이라는 하나님의 사람, 저는 성경에서 사람들에게 부쳐진 별명 가운데 타이틀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별별 사람이 다 있죠 어떤 사람은 돈에 미쳐 사는 돈 사람도 있고,하하~녜, 어떤 사람은 명예에 미쳐 사는 사람도 있고, 명예의 사람도 있고, 쾌락에 미쳐 사는 쾌락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께 붙잡힘을 받아 창조주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 너무 좋은데 거기다가 그 다윗에게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었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얼마나 놀랍고 영애로운 칭호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이런 다윗에게도 자기인생의 어느날 결정적인 오점 하나를 남기게 됩니다. 실수를 하죠? 다윗이? 제가 자세히 얘기 안 해도 여러분 잘 알죠? 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다윗이 어쨌든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런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실수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것을 참회합니다. 그것을 회개합니다. 다윗의 유명한 참회의 시편이 그 시편 51편이죠. 다윗이 여기에서 자기 참회의 기도를 기도합니다.그런데 시편 51편에 보면은 이런 대목이 있어요. “우슬초로 저를 씻겨 주십시요. 그러면 제가 정하리이다” 우슬초로 저를 씻겨 주십시요 그러면 제가 정할 것입니다. 우슬초라는 것이 뭐냐하면 일종의 스폰지 같은 그런 식물입니다. 아~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같은 명절이 되어서,그 유월절이 되면은 피를 뿌리잖아요? 그러면 이 스폰지에다가 피를 적셔요.그래서 뿌리면은 잘 뿌려져요. 또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 이렇게 이런 판 위에다가 제물을 놓고 각을 뜨고 그러면 그 다음에 이제 피가 쫙 이제 젖겠죠.
아~ 제사가 끝나도 시간이 흘러가면은 그 피가 응고가 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세척제가 발달이 되지 않았으니까 이 피가 쉽게 닦여지지 안찮아요? 그런데 이 우슬초, 이 스폰지 같은 우슬초를 대면 깨끗이 씻겨져요. 깨끗이, 그런 걸 마음속에 여러분이 마음속에 연상하면서 이 시편을 다시 읽어보시면, 우슬초로 저를 씻겨주십시요. 그러면 제가 정할 것입니다. 우슬초로 저를 씻겨주소서 그러면 제가 정하리이다.

어떻게 우리가 과거를 씻어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걸어가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가 있을까요? 이 사건을 가리켜서 성경에서 아주 독특한 용어로 “거듭난다” 이렇게 씁니다. 거듭난다. born again한다. 거듭난다. 요즘 아주 거듭난다는 단어가 우리가 사회 속에서도 세상 속에서도 매우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우선 아~하도 정치가 어려우니까 정치가 거듭나야 한다 또 역사가 거듭나야 한다 저가 지난 주간에 천안에 잠깐 갔다 온 일이 있는데, 크게 간판을 썼더라구요. 천안은 거듭난다 뭐 이렇게,하여튼 써 놓았더라구요. 자동차 광고할 때도 거듭난 자동차! 뭐 이렇게 사용합니다.
이런 단어가 하도 보편화되다 보니까 오리지날한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진짜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이 거듭난다는 단어를 성경이 처음 썼을 때,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 성경 요한복음 3장을 같이 찾아 볼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 어저께는 저가 요한복음 4장을 했어요. 그런데 요한복음 4장하고 3장은 굉장히 대조적이에요. 4장에는 여자가 나왔죠? 3장에는 누가 나옵니까? 남자가 나옵니다.하나님은 여자도 사랑하시고 남자도 사랑하시고, 아~어제 그 여자는 어떤 여자였습니까? 도덕적인 여자입니까? 부도덕한 여자였습니까? 매우 부도덕한 여자였어요. 오늘 이 3장에 나오는 이 남자는 어떤 남자였을까요? 매우 사회적 수준에 있었던 아 그런 존경 받은 사회적 위치에서 인생을 살아가던 그런 사람이 였습니다. 자, 사마리아 여인은 언제 예수님을 만납니까 만난 시간이 하루 중에? 대낮에, 정오에 예수님을 우물가에서 만나죠? 그런데 오늘 이 남자는 언제 찾아왔습니까 예수님을? 밤중에요.그러니까 낮에도 예수님을 만나고 밤에도 예수님을 만나고 그래서 이번 집회를 낮에도 하고 밤에도 하고, 하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나누었던 대화의 주제는 영생이였습니다. 영생, 그러나 오늘 이 남자와 더불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소위 거듭남의 주제였습니다. born again, 거듭남, 우리 이 사람이 어떻게 이 말씀을 받았는지 그리고 이 사람이 어떻게 거듭났는지, 이 사람의 이야기를 같이 우리가 추적해 볼려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왜 거듭나야 하느냐? 왜 거듭나야 하느냐? 누가 거듭나야 하느냐? 무엇이 거듭나는 것인가? 또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같이 우리가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을 펼쳐놓으시고, 아~ 첫째로 누가 거듭나야 할까요? 누가? 우리가 거듭난다 그러면 얼른 마음속에 여러분 떠오르는 이미지가 뭐에요? 거듭나야 한다! 그러면, 누가 거듭나야 해요? 아주 인생을 형편없이 살아오든 사람들,어제 얘기한 사마리아 여자같이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여자, 이런 사람은 당연히 거듭 나야죠. 당연히 새로워져야 된다. 그러나 나야 뭐, 남한테 뭐 잘못한일도 없고, 특별히 해를 끼친 일도 없고 나는 그렇게 살았는데, 이렇게 생각하실지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늘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대상이였든 이 사람은 누구였는가? 이것을 우리가 같이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장1절, 요한복음 3장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3장1절 다같이 시작,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태인의 관원이라” 녜,이렇게 시작합니다. 우선 이 사람은 바리새인이였다고 말합니다. 바리새인, 우리가 바리새인이라는 이 말이 옛날에는 아~아주 좋은 말이였어요. 지금은 바리새인, 그러면 거의 위선자와 동의어처럼 쓰여지지만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그 사회의 도덕적인 계층에 속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율법인 토라, 이 토라의 율법을 지키고 수호하든 역할을 했던 그런 사람들이였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뭐였습니까? 니고데모, 아주 이름도 좋아요. 제 이름 만큼 좋습니다. 하하~녜, 아~니코라는 말이 본래 뛰어나다 탁월하다 그런 뜻이구요. 데모가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데모크라시 라고 그러죠? 민주주의를? 사람들, 그러니 ‘니코 데모’라고 그러면 뛰어난 사람, 탁월한 사람, 아주 이름도 좋고, 이름만 좋은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삶의 조건이 아주 좋았든 사람입니다. 그는 유태인이였습니다. 여기 1절에 유태인이였다, 자랑 같지만 유태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그 선민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다. 이 사람은 무신론자가 아니에요. 하나님 믿는 사람이에요.
잘 들어세요 하나님 믿고도 거듭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또 이 사람은 관원이였습니다. 관원, 아~이 관원이란 것은 지금의 국회의원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이란 공의회가 있었는데 그 의회 멤버가운데 한 사람이였습니다. 또 요한복음 3장 10절에 보시면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요한복음 3장10절 같이 읽습니다. 다같이 시작,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라고 그랬습니다. 아~랍비라는 말입니다. 랍비, 레바인, 녜, 유태인에게는 유태교회는 랍비가 있죠? 우리 기독교에 목사가 있는 것처럼 유태교에서는 랍비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랍비 도덕적인 랍비,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남을 가르치는 교사였어요. 교사, 녜,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거듭나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이죠. 이런 사람을, 또 이 사람은 상당한 구도적 자세를 갖고 있었든 사람입니다. 구도적 자세, ‘씨에스 루이스’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구도의 정신을 상실했다, 구도의 정신을 상실했다. 우리가 편리한 시대에 살고있고 과학이 발달된 시대, 그리고 지식이 첨예하게 발달되는 지식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지만 아~사람들이 구도의 열정이 없어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정, 죽음 건너편에 무엇이 있을까?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 이런 진지한 질문을 상실한 시대입니다.그런데 이 사람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구도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든 사람이였습니다. 훌륭한 구도자였습니다 자,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와 제도에도 불구하고 젊은 예수를 찾아와 그에게 인생을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죠. 또 이렇게 질문을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3장2절을 같이 한번 보겠어요.요한복음 3장2절 다같이 읽습니다. 다같이 시작,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자, 이 말을 들어보면은 니고데모가 한 말인데 이 말이 종교적입니까? 비종교적입니까? 상당히 종교적이죠? 다시 들어보세요. 디고데모가 예수님께 하는 말이에요 랍비여, 선생님이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인줄을 압니다.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고는 당신을 통해서 나타난 놀라운 기적, 또 당신이 베푸시는 놀라운 교훈, 이런 건 불가능하겠죠? 그 사람은 얼마나 예수님한테 접근할 때 우아하게 접근을 했습니까? 우아하다는 말은 ‘우라지게 아부한다는 말입니다’. 녜,아~하, 녜 얼마나 종교적으로 우아하게 아주 예수님을 칭찬하고 높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이런 놀라운 기적은 일어나지 않겠죠? 좋은 소리는 많이 했어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자기를 칭찬한다고 좋아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찾아왔던 목적, 이 사람의 마음속에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든 어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꿰뚫어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 거듭나야 돼! 너 거듭나야 돼!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 종교적인 경험, 또 자기가 가지고 있었든 철학적인 얘기, 인생에 대한 모든 자기의 지식에도 불구하고,그리고 존경 받는 자기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사람이 거듭나지 못하고 있었다면 거듭나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도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적용이 되는 말씀일 것입니다. 누가 거듭나야 합니까? 그것은 당신일지도 모릅니다. 당신, 자, 누가 거듭나야 할까요? 이 얘기를 했어요.

두 번째로 왜 거듭나야 할까요? 왜 거듭나야 하느냐? 왜 거듭나야 하느냐? 오늘 거듭나야 할 이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강조하셨어요, 이 짤막한 텍스트,예수님이 니고데모라는 사람과 대화한, 대화의 토막을 기록하고있는 이 텍스트를 읽어보시면 예수님이 계속 거듭나야 한다, 이 말씀을 반복해서 강조하십니다. 3장3절 같이 읽겠습니다. 성경 가지고 오신 분들이 안 가지고 오신 분들에게 보여주시면서 같이 한 번 읽으면 더 좋겠죠? 요한복음 3장 3절 다같이 시작,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가 없다. 한번, 그 다음에 5절 읽겠습니다. 5절 다같이 시작,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두 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또 7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7절 시작,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아라” 세 번, 이 짤막한 대화 속에서 벌써 세 번씩이나 예수님이 거듭나야 해! 거듭나셔야 합니다. 꼭 거듭나셔야 합니다. 그 말을 세 번씩이나 강조하셨거든요? 거듭나야 한다 왜 이렇게 반복될까요? 우리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유가 어디 있어요? 강조할려고, 예수님이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이 거듭나야 한다라는 말은 영어 성경에 보시면 You must라는 조동사가 쓰여집니다. ‘You must be born again’, 다시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도 좋고 안 나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옵션이 아닙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꼭 거듭나셔야 합니다. 당외의 문제, 당신은 반드시 거듭나셔야 합니다. 꼭 거듭나셔야 합니다. 이렇게 강조하셨어요. 계속 강조하십니다.

지나간 시대에 그 영국하고 미국에서 활동했든 유명한 목사님 가운데 ‘죠지 위필더’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시대 유명한 분이 두 분이였어요. 한 분은 요한 웨슬레, 쟌 웨슬리, 감리교 운동를 창설한 쟌 웨슬리와 함께 죠지 위필더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죠지 위필더, 그런데 목사님마다 설교하실 때 자기가 좋아하는 18번 설교가 있어요. 그런데 이 죠지 위필더 목사님의 18번 설교가 거듭나야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 설교를 듣고 한 청년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까 그 목사님이 굉장히 좋아졌어요. 그래서 어느날 찾아와서, 죠지 위필더에게 나 목사님 자원 비서 하고싶다고, voluntary secretary를 하고싶다고, 그래서 그렇게 하라고, 그래서 죠지 위필더 목사님이 집회하는 데마다, 부흥회를 하는 데마다 같이 따라다녀요. 한국식으로 말하면 가방 못지가 되었어요. 가방 들고 목사님을 따라다니는데, 처음에 굉장이 좋았는데 가만이 보니까 가는 데마다 이런 똑같은 설교만 해요. 계속 거듭나야 한다! 그 설교만 자꾸 한다 말이죠. 그 설교를 한 70번 듣고 난 어느날, 이 청년이 드디어 참을성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설교하고 목사님이 내려오는데 딱 붙들었어요. 목사님 그 설교 몇 번이나 한 줄 아세요? 70번이나 하셨습니다. 언제 새로운 설교를 하시겠습니까? 이때 죠지 위필더 목사님이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있습니다.그 청년을 딱 붙들고 또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왠 줄 아느냐? Because,영어로 왠 줄 아느냐? 너가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하~ 녜, 너가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뭐 설교 들었다고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앞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거듭나는 거죠. 예수님이 그렇게 강조 하셨어요 강조 하셨어요.

또 가만히 보시면 거듭나야할 이유, 거듭나야할 이유가 에~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본문에 보시면 아까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뭐라 그랬습니까?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또 3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뭐에요? 볼 수가 없다” 아까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번에는 하나님나라에 볼 수도 없다.하나님 나라를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나라를 볼 수도 없다. 구경도 못한다. 하나님나라를 구경도 못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가 쉽게 받아들여서 거듭나지 못하면 천국가지 못한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이땅에 사는 동안에도 천국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부분적이지만 불안전하지만 이땅에서도 천국을 경험합니다.그것은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내가 마음 속에 영접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나라 라는 것은 통치에요. 통치권자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이 나라죠. 우리가 인생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정말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의 현상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일까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그러면 사람마다 그리는 모습이 다 다를 꺼예요. 배고픈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 그러면 실컷 배터지게 먹는 나라, 이렇게 연상할지 모르고, 사람마다 다르죠. 저는 하나님의 나라,그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실컷 자는 나라, 항상 잠에 모자라고 쫓깁니다. 뭐 오늘 아침에, 새벽에도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가지고 새벽에 일어나서 갔다가 조금 아까 막 왔는데 밤에 또 늦게까지 설교하고,항상 이렇게 잠이 모자라요. 이상하게, 이러다가 안식년이 안쉴년이 되나? 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쨌든 아~항상 잠에 쫓겨요. 그래서 제 계획은 천국에 도착하면 최초에 일만은 그래서 주무실 작정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연상이 이미지가 다 다른데,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뭐냐? 바울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로마서 14장에 보시면 바울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따라서 하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바울사도는 하나님나라의 본질가운데 세가지 단어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의, 둘째는 ‘평강’, 세 번째는 ‘희락’, 이 세가지 단어를 강조했어요.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일까요? 정의로운 나라,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불의를 경험합니다. 불의를 경험하고 불공평함을 경험합니다. 사람들은 의에 목말라 합니다.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나타난, 그 완성된 천국, 그 천국은 정말 불의가 없는 공의로운 나라 사모돼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땅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경험하면서 살게 돼요. 자, 또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입니다. 샬롬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가리켜서 성경은 평화의 왕자다 그랬습니다. Prince of peace 평화의 왕자! 그 분은 평화를 가지고 오시는 분이에요.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천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 땅에서는 평화. 크리스마스 카드에 땅에서는 평화 하늘에 영광, 땅에서 평화. 이렇게 쓰여있는데 에~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조금 틀린 거에요. 왜 틀렸느냐 하면, 정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평화가 와야 한다면 왜 평화가 오지않았어요? 이 세상에, 이스라엘은 지금 이순간도 싸우고있습니다. 전쟁상태 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에는 계속 불안한 세상이 계속될 것을 알았어요.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불안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이 우리 안에 누릴 수 있는 견고한 평화, 환경과 상관없이, 환경이 불안해도 그런데 내 마음 속에서 잃어버려지지 않는 평화, 이런 평화를 약속하신 거예요. 이건 물론 나중에 영원한 천국은 진정한 평화의 나라일 것이고, 그리고 천국의 주인이신 우리 하나님은 또한 기쁨의 하나님이십니다.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에요. 저는 기독교가 기쁨의 종교에요.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교회가 잘못한 것 중의 하나는 교회를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어요.녜,

옛날에 제가 같이 일하던 선교사님 한 분이 있었는데 그 선교사님이 그러더라구요 왜 교인들이 크리스챤들이 교회 바깥에서는 친구들하고 얘기하고 그럴 때 막 웃고 재재거리고 막 즐겁게 웃다가 교회당 안에만 들어오면 갑자기 이렇게 엄숙하고 다 우거지상이 되느냐? 제가 대답이 궁해서 이렇게 대답을 드렸습니다. 그 선교사님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묵상하기 때문이라고,하하~
그런데 선교사님이 웃으면서 저한테 반문하기를 ‘아니 그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잊어버렸나요?’ 그러시더라구요.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우리가 그 예수님을 잃어버릴 때가 많아요.그 분은 기쁨의 하나님 기쁨의 주님, 그래서 그 분의 통치를 받으면 진정한 기쁨을 경험합니다. 슬픔 많은 세상에서 내 안에 넘치는 기쁨을 경험해요. 그런데 거듭나지 못하면 나중에 천국 못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이땅에서 의도 평안도 기쁨도 경험하지 못한다. 참된 평화 참된 기쁨이 없는 사람,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자, 오늘 본문이 요한복음 3장1절로부터 시작해서 15절에서 끝낼려고 합니다.그래서 본문이 3장 1절부터15절이에요. 그런데 15절 다음에는 몇 절이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이 대답하시기 아주 쉬운 질문만 질문합니다. 하하~ 15절 다음에는 16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16절은 아마 기독교를 안 믿는 사람들도 들어본 구절이에요 아주 잘 아시는 구절이죠? 녜,그래서 요한복음 3장16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물론 교인들은 다 외우시겠지만 또 안교인들, 초청 받아서 오신 분들은 이것도 좀 어려우실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같이 한번 읽어보세요. 찬찬히 요한복음 3장16절 시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지금 예수님이 니고데모 라는 사람과 대화하고있는 것이 3장1절부터 15절까지, 그 다음이 16절이거든요? 저는 어떤 면에서 요한복음 3장16절이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결론이라고 생각을해요. 대화의 결론, 거듭나야 한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진짜 믿게 됩니다. 거듭난 결과가 참된 믿음이에요. 그런데 요한복음 3장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거듭나서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어떻게 된다고 그랬어요? 멸망치 않고, 그 다음에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그러면 거듭나지 못하면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멸망이에요. 멸망합니다. 왜 거듭나야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절실한 대답은,왜 거듭나야 하느냐? 거듭나지않으면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옛날 청교도들이 퓨리탄들이, 믿지 아니하시는 분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할 때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과 지금 우리가 제일 많이 쓰는 ‘예수 믿으세요 그리고 구원 받으시고요’ 우리가 이런 말을 제일 많이 쓰겠죠? 그런데 청교도들이 전도할 때 쓴 말 가운데 이런 말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보세요. 사람이 두 번 태어나면 한번만 죽고요, 한번만 태어나시면 두 번 죽어요. 녜, 청교도들이 그렇게 전도를 했다고 그래요. 재미있는 말이죠? 사람이 두 번 태어나면 몇 번 죽습니까? 한 번만 죽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번 태어나면 몇 번 죽는다구요? 두 번 죽는다구요 두 번, 아니 두 번 죽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성경에 보면 두 번째 사망, 제2의 사망을 가리키고 있어요. 두 번째 사망 둘째 사망, 자, 이 둘째 사망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어떻게 쓰여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21장, 요한계시록에 대한 책은 성경에 제일 마지막 책이죠? 요한계시록21장, 요한계시록 중에서 거의 마지막 장,그러니까 성경 맨 뒤로 가시면 돼요. 요한계시록21장입니다.21장, 자,요한계시록21장 찾으셨으면 8절 말씀을, 요한계시록 21장8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거기 무슨 단어가 나왔습니까? 둘째 사망, 둘째 사망, 거기다 줄쳐 놓으세요. 둘째 사망.
자, 다시 읽어보시면 두려워하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자들, 두려워하는 것은 뭐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으면 두려워 할게 없어요. 두려움은 우리 죄의 한 결과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우리 믿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여기 죄인의 리스트인데 이것이, 죄의 리스트인데 그 중에 믿지 않는 자도 들어가요. 불신, 여러분이 부모님 앞에 ‘나는 아버지 못 믿어요. 엄마 못 믿어요’ 그것처럼 부모의 가슴을 헤치는 말이 어디 있어요?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그 다음에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을 원색적으로 쉽게 말하면 지옥 간다는 말이죠? 그것이 뭡니까? 둘째 사망입니다. 둘째 사망이란 것은 범죄한 결과로서 형벌을 받고있는 상태를 둘째 사망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죽습니다. 교인들도 다 죽습니다. 저도 틀림없이 죽습니다. 녜, 다 죽어요.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랬어요. 그런데 죽는다! 단순히 죽는다는 것보다 우리가 더 두려워해야할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 다음에 오는 죽음, 내가죽어서 내가 살아왔든 삶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게 된다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그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 번 태어나면 몇 번 죽어요? 한번만 죽어요 두 번 태어나면 한번 죽는데 한번만 태어나면, 나는 인간으로 한번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두 번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듭나면, 우리가 거듭나면 지옥갈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거듭나면, 거듭나지 아니하면 멸망하십니다. 왜 거듭나야 하느냐? 멸망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거듭나셔야지요. 꼭 거듭나셔야 합니다. 반드시 거듭나셔야 합니다.

자, 우리는 지금까지 왜 거듭나야 하느냐라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그러면 중요한 것이 무엇이 거듭나는 것일까요? 무엇이 거듭나는 것일까요? 자, 이 4절부터 6절 사이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읽어보시면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것을 자연적 출생과 영적 출생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부모를 통해서 인간으로 육체적으로 출생한 어느날이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또한 영적으로 출생해야 된다. 자,이것은 무슨 뭐 교리연구 시간이 아니니까, 이것은 뭐 신학적으로 접근해서 풀거나 해석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아주 결론적으로 쉽게 말할께요.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육체적으로 태어나서 인간이 된 것처럼 영적으로 태어나 영적인 출생에 의한 새로운 창조, 내가 영적으로 다시 한번 출생해서 영적으로 태어나서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된다. 새로운 존재로 출생해야 된다. 어렵죠? 그런데 그 말이? 하하~녜,영적으로 출생을 어떻게 하는 건가? 그래서 니고데모라는 사람도 어려웠던 것 같아요.이분이 사회적으로는 명사이고 심지어 종교적으로 남을 가르치면서도 이 말을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3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랬더니 4절에 니고데모가 이런 반문을 합니다. 4절을 다같이 읽습니다.시작,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가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수 있삽나이까” 아니 내가 이렇게 나이가 적지않고 꽤 많은데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란 말입니까? 예수님은 영적으로 말씀하셨는데 니고데모는 그것을 육체적인 자연적인 차원에서 이해를 하고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물과 성령으로? 그런데 그 다음에 보시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날 때 어머니의 모태에서 태어납니다. 저는 그것이 물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엄마를 통해서 태어났던 것처럼 이제는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다. 성령에 의해서, 성령으로 난사람은 이렇다 그랬어요. 성령에 의한 새로운 창조, 성령에 의한 새로운 창조. 영적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거듭난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에요. 영적인 새로운 창조. 영적인 새로운 창조.

그런데 이 말을 잘 이해 하기위해서 우리가 가장 오해하는 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거듭난다는 말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형편없이 살던 사람이 교회 나오기 시작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진다 성경은 그 정도 수준에서 거듭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그건 개선이에요. 개선되는 것. 내가, 인간이 개선되는 것 그런데 하나님은 개선 보다도 더 깊은 곳에 관심을 가져요. 수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아예 새롭게 만들어주기를 원하셔요 새로운 창조, 새로운 창조.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성경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따라서 하세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녜, 새로운 창조, 옛날 것은 지나갔다 너희가 새 피조물이 되었다 이 새 피조물이라는 것을 영어로 New creation 그래서 새로운 창조, 새로운 창조. 바울 사도는 그것이 우리가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설명합니다. 기독교의 본질, 갈라디아서 6장에 보시면 6장 15절에 바울이 이런 말을 기록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말도 잘 이해가 안되지요? 그런데 옛날 그 유태인들에게는 종교적인 최대의 행사가 할례의 행사였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8일만에 받는 할례, 그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종교의식이예요. 그러나 바울은 할례받느냐 안받느냐? 그것을 요즘식으로 말하면 뭐 세례받느냐 안받느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안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종교의식에 참여한다고 해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만 나왔다고 새로워지는 것도 아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할례를 받느냐 안받느냐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오직 새롭게 지으심을 받는 자니라. 내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것,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 그러니까 수선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보다 나은 인간이 아니에요. Better person, 보다 나은 인간이 아니라, New person 새로운 사람,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새사람,

제가 그것을 비교하는 흥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좀 해 보겠습니다. 저는 미국에 그 이민 목회를 하면서 우리 미국 지구촌교회 그 이민 목회를 할 때 아~미국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영, 리크레이션 오락, 그러면 아마 미식 축구일꺼에요. 그래서 미국에서는 명절만 되면 다 아무것도 안하고 텔레비젼 앞에서 다 미식축구 구경하고 않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워싱톤 살 때 그 워싱톤 미식축구팀이 굉장히 잘했어요.제가 있을 때는 굉장히 잘하다가 제가 한국에 오니까 못하더라구요.하~그런데 그 미식축구팀 그 풋볼팀에 코치가운데 아주 유명한 코치 한 사람이 있었어요. ‘죠 깁스’라는 코치가 있었어요 ‘죠 깁스’ 이 분이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 인이에요. 미국 침례교회에 나가시는 아주 신실하신 집사님이셨습니다. 워싱톤에 사셨습니다. 죠 깁스, 그래서 우리 크리스챤들도 미식 축구 하는 날이면 우리 교포들까지도 그분을 너무 너무 좋아했고 그래서 그분이 그냥 텔레비에 나오기만 하면 ‘조 집사님 나오셨다’ 그러고 좋아했습니다. 하~ ‘조 깁스’니까,
제가 이 분이 좋아가지고 한번 제가 있는 교회에 모신 적이 있어요.아~이 분이 아주 재미나는 텍스트 모니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간증을 했어요. 그런데 그 분의 간증가운데 저가 잊어버릴 수 없는 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 이 분의 친구 얘기를 하는데, 이 분의 친구가 어느날 자기집에서 그 애완용동물, 개를 기르고 있었대요. 저녁에 회사에 나갔다가 저녁 어둑 어둑할 무렵에 자기집에 오다가 보니까 자기집 개가 문 앞에서 뭘 씹고 있드래요. 하얀걸 씹고 있더래요. 동물을 씹고 있는 것 같아서 깜짝 놀라가지고 앞에 가서 탁 보니까 토끼를 씹고 있는 거에요.그래서 얼른 빼앗았대요. 얼른 뺏아가지고, 그런데 사람이 너무 당황을 하고 그러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이 사람이 너무 당황한 나머지 토끼를 딱 뺏아가지고 집안에 들어가서 갑자기 이상한 일을 했어요.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막 토끼를 씻어요.그리고 비누로 깨끗이 닦고, 그 다음에 향수를 뿌리고 그래 가지고서 아~ 이렇게 당황해 가지고 바깥으로 조금 있다 나갔데요 인제 조금씩 조금씩 더 어두워지는데 아~그러니까 이 사람이 왜 그러느냐 하면 그 토끼가 왜 그러냐 하면, 바로 자기 옆에집 사람이 토끼를 기르거든요 그래서 옆에 집 토끼를 죽이고 있구나 자기집 개가, 그러니까 너무 놀라고 미안해 갖고서 뺏아 갖고서 갑자기 한다는 행동이 비누로 막 닦아주고 향수를 뿌리고 그래 가지고 조금 어두워지기를 기다려서 집 밖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미국에는 뭐 집과 집 사이에 담이 없잖아요. 담이 없으니까 옆에 집에 썩 가서 토끼장을 들여다 보았어요.그런데 토끼가 없어요. 맞아! 이 토끼야, 하, 우리집 개가 그냥 토끼를 죽일뻔 했구나 그래 갖고서 얼른 그 토끼를 토끼장 속에다가 다시 원 위치시켜놓고 자기는 들어왔습니다. 아~그날 밤 대충 잤겠죠?
그리고 그 이튿날 자기 회사 갔다가 아 그냥 이웃집 사람의 반응이 궁금해 가지고 조금 일찍 왔답니다. 그래 가지고 오후에 그 이웃집 토끼장 앞을, 잔디밭 앞을 서성거립니다. 시침 딱 떼고,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건 범죄수사학의 원리에요. 아~범죄자는 반드시 현장에 돌아온다.하하~
그래 가지고서는 이 토끼장 근처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그 이웃집 주인이 딱 나타나더니, 아~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시침 딱 떼고 ‘하이!’ 그러면서 인사를 했어요. 그러니까 이웃집사람 표정이 좀 이상해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하,우리 집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그래서 시침딱 떼고 “What happen?”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물어보니까 그 이웃집 사람이 설명을 하기를 사실은 사흘 전에 우리집 토끼가 죽어서 자기가 땅속에다 그 근처에다 파묻어놓았는데 어떤 놈이 그것을 파헤쳐 가지고 토끼를 끄집어내어 가지고 목욕을 정성스럽게 시켜가지고 거기다가, 비누로 씻고 거기다가 기름 바르고 향수까지 뿌려가지고 원위치를 시켜놓았다.이런 희귀한 일이 있느냐? 뭐 이런 얘기를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분이 그런 얘기를 하느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관해서 오해하는 것이 뭐냐하면 그 죽은 토끼처럼,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가 있는 인간,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죄송하지만 영적으로 죽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는 살아있는데 영적으로 죽었다 허물과 죄로 죽어있다. 죽어있다라는 말을 성경에서는 관계의 단절이라는 의미로 씁니다.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 창조주 하나님인데,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다 예수님이 또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진데, 가지가 포도나무에 분리되어 있어봐요. 한참 있다가 죽을 지 몰라요. 그러나 관계가 끊어져있는 자체가 이미 죽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고있는,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지어주셨는데 그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떠나가있는 상태가 영적으로 죽어있는 거란 말이에요.그래서 영적으로 죽어있어요. 그런데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 데려다가 교화 시키고 감화시키고 녜, 노자 강론하고 또 어떤 분이 요즘은 또 뭐 논어강론을 시작했어요. 녜, 막 그냥 그렇게 해가지고 인간을 교화 시키면, 교화 시키면 인간이 점점 조금씩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이죠. 그런데 송장을 아무리 감동시켜도 송장은 송장이에요.
송장의 희망은 하나 밖에 없어요. 송장 속에 새 생명이 들어가면 되요. 새로운 생명이 들어가면 되요 기독교는 죽어있는 송장과 시체와 같은 인간에다가 비누칠하고 향수뿌리는,녜, 종교가 아니란 말이죠. 우리는 영적으로 죽어있어요 그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되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 단절되어 있느냐? 죄 때문에 단절된 거에요. 죄 때문에, 죄를 범하는 순간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단절되어있어요.그러나 그리고도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셔요 그래서 이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성경은, 기독교는 예수님을 중보자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오신 중보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도, 중매자도 한 분이신데 그분이 예수그리스도라.

죄 때문에 하나님과 나사이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내가 맞아야 할 채찍을 대신 맞으시고 내가 받아야할 죽음을,내가 받아야할 진노를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놓으셨어요. 그리고 그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으면 너희는 다시 하나님께로 오게 된다.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요. 그 순간 예수님 안에 있던 새로운 생명이, 새로운 생명이 우리 안에 선물로 주어져요. 새로운 생명,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님 안에 있든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는 순간 우리 안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뉴 라이프(New Life) 새로운 생명이 딱 주어져요. 새로운 생명이 주어진 증거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요 이런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순간 나는 영적으로 살아나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영적인 새로운 창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창조에요. 새로운 창조, 송장에다가 향수뿌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받은 거에요 새로운 생명, 이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은 새롭게 창조되었다, 거듭났다. 새로운 창조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을 같이 다루어 볼려고 합니다.그 질문은 뭐냐하면 어떻게 거듭날 수가 있는가? 어떻게, 어떻게? 그러면 그 예수님을 어떻게 해야만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창조물이 되고 새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느냐? 어떻게 거듭날 수가 있느냐? 이런 가장 중요한 물음을 우리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오늘 이 요한복음 3장,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1절부터 15절 사이에, 특별히 14절과15절 맨 마지막의 두 구절이 그 회답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복음3장 14절, 15절 말씀을 우리 다같이 읽어요 다같이 시작,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녜,그게 회답인데 조금 어렵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게 무슨 말인가 도대체? 성경이 그렇게 또 쉽지는 않아요 그렇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런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 이집트 땅에서 포로생활을 했잖아요? 노예생활, 지난번에 한창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유행하든 영화 가운데 애집트의 프린스(Prince) 녜, 그 영화를 보신 분,성경이 지루하시면 영화를 보시면 됩니다.하하~녜,
그래서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모세의 인도로 애집트에서 풀려났잖아요? 어디로 갑니까? 가나안을 향해서 갑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땅,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밀크와 하니(Honey)가 뚝뚝 떨어지는 땅,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주시면서 그리로 가라!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을 인도해서 가요. 그 사이에는 광야가 있어요. 녜, 아주 광막한 시나이 반도 광야가 있습니다. 그 광야를 거쳐서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이스라엘땅으로 가야 합니다. 가야 하는데 광야생활이 힘들거든요. 그러니까 가나안 땅이라는 목표는 좋은데 빨리 가나안 땅으로 가고싶은데, 그기 가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젖과 꿀을 먹고 정말 놀라운 삶을 살고싶은데, 거쳐가는 광야가 너무 힘들고 괴로운 거예요. 그러니까 광야 생활하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얼 제일 많이 합니까? 불평을해요. 자꾸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해요.이럴 줄 알았으면 애굽 땅을 차라리 떠나지 말았었을 것을, 이렇게, 녜, 막 그렇게 불평을 하죠. 원망을 하죠. 그래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 여기에는 먹을 것도 제대로 없네요. 광야에 먹을 것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래? 그럼 먹을 것을 줄께,하나님이 무슨 먹을 것을 주셨어요? 만나를 주셨어요. 만나,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서 주시는 만나, 저는 이 만나를 한번만 맛보았으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 같아요 Made in U.S.A도 아니고 Made in korea도 아니고 이것은 Made in Heaven, 녜?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서 주시는 만나, 성경에 보시면 이 만나가 하얀 색깔이였다고 그래요 마치 광야에 눈송이처럼 만나가 쏟아졌을 거예요. 야~ 달리는 먹을 것이 없었든 배고픈 광야에서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만나를 내렸을 때 그 감격이 어떠했을까요? 녜?그런데 처음에는 만나가 꿀송이 같다고 그랬어요. 아~꿀송이 같은 만나, 처음에는 만나가 내려오니까 아유 저게 뭐냐? 저게 뭐냐? 저게 뭐냐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만퓨’라고그래요. ‘만퓨’ 저게 뭐냐? 저게 뭐냐? 그러다가 다같이 이름을 저게 뭐냐로 결정했습니다. 만나란 뜻이 저게 뭐냐란 뜻이에요.하하~ 그런 신기한 양식을 먹고 나서 아~꿀송이 같다. 그런데 사람이 이상해요 .그 만나를 또 먹고 먹고 또 다 먹으니까 나중에 가서 뭐라고 불평을 합니까? 왜 만나 밖에 없습니까? 잘 들으세요. 사람은 자기가 받고 누리는 축복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 축복을 더 이상 축복으로 생각하지않아요. 따라서 하십시다 “사람은 받고 누리는 축복에 익숙하면 그 축복을 더 이상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녜,자기가 누리는 축복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 축복을 축복으로 생각하지 못해요. 그것이 사람이죠.

제가 좀 비행기를 많이 타는데 어떤 때는 그냥 타기가 싫어요 너무너무 싫어요. 아유 또 타? 아~힘들잖아요. 여러분 미국 같은데 한번 가보시면 12시간,14시간, 15시간 타고나면 너무너무 힘들어요. 아유 또 타? 그 말이 나올려고 하다가, 제가 나올려고 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요. 에이,내가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사실은. 옛날에,옛날에 아주 제가 촌놈이였을 때, 비행기를 탔을 때의 감격, 하하~ 나도 비행기 탔다! 옛날엔 그래서 최고로 사람을 높일 때 비행기 태워 주시네, 이 말이 옛날에는 큰, 그 사람을 높여주는 언어였어요. 그렇죠? 비행기 태워준다.
아, 미국 처음에 갈 때, 아,내가 거창한 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까지 가는구나! 아~뭐 사람들은 처음에 미국갈 때 지루할꺼라고 뭐 어떠 어떠하라고 얘기했지만 하나도 지루하지 않더라구요. 그 큰 비행기가 그 구름 위에서 날아가는 모습, 야~, 신기하다 말이죠, 하나님 감사합니다. 비행기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유학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했든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걸 내가 잊어버리고 또 불평한단 말이에요. 비행기 또 타?, 그 말을 할 때마다 야, 내가 타락한다, 너도 타락하고 있다. 이 축복을 축복으로 생각하지 못하구나,녜? 축복을 축복으로,

제가 도사시절에요. 도사란 말은 전도사란 말의 준말입니다. 이상하게 쳐다보지 마세요. 녜, 저는 전도사 시절에 장가 못 갈 줄 알았어요. 제가 워낙 갈비씨였으니까, 그때 제 평생소원이 50k 한번 되어보는 것이 소원이였습니다. 믿거나 말거나,하하~녜,그래 전도사 시절에 하도 영양실조에다가 하도 말르고 그래 가지고 가끔 전도사 시절에 설교하다가, 저가 섬기든 교회에서 설교하다가 가끔 인제 전도사에게도 설교기회가 옛날엔 왔는데, 설교하다가 쓰러져요.설교하다가 쓸어졌는데, 그 광경을 저의 처가집 식구들이 봤거든요.같은 교회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제 아내가 어느날 저한테 시집온다고 그러니까 처가집 식구들의 반응이 어떻겠어요? 저 비리비리한 전도사, 녜? 뭐 설교하다가 쓰러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 그러니까 온 저의 저 친정 식구들이 만장일치 결사반대! 하하~ 뭘 시집식구? 내가 잘못 얘기했나? 아니 친정식구, 친정식구. 하하~ 내가 오늘 아침을 제대로 못 얻어먹고 나와 가지고 지금 착각을 일으키고 있어요. 하하하~ 친정인지 시집인지, 하여튼 자기친정.녜,
아이구, 그러니까 정말 장가가고 나서 감동적이더라구요 못갈 줄 알았는데 아,나한테 오는 여자가 있다, 신기하더라구요. 너무너무, 제가 모시고 있든 목사님이 배려를 해주셔서 자기 차까지 내어주셔서 그 유명한 온양온천 관광호텔로 갔습니다.하하~ 제가 지난 주에 가봤어요.그 온양온천 관광호텔에, 옛날 생각하느라고, 천안에 연합집회 하러 갔다가 그 관광호텔 앞을 빙 둘러보면서 회상에 잠겼습니다. 에~,하~내가 장가들었구나 그리고 딱 호텔 방에 들어가서 이제 우리교회 오래 나오신 분들은 아는 스토리지만 호텔에 딱 들어가서 가방을 열었더니 막 개구리가 막 튀어나와요. 개구리가, 진짜에요 개구리가 튀어나와요. 너무너무 당황해서 이게 웬 개구리야? 이게 도대체? 그래서 첫날밤부터 피볼 수가 없고, 개구리를 잡아서 죽일 수도 없고, 깡통 같은 것을 하나 구해 갖고 와 가지고 거기다가 개구리를 집어넣고, 그런데 어디서 또 튀어나와요 또 잡아넣고, 고무줄로 이렇게 또 잡아넣고, 개구리 잡고, 첫날밤부터 피볼 수는 없으니까 죽이지는 못하고 개구리를 잡아서 이렇게 거기다가 계속 잡는 거에요. 그래서 가방 또 하나 여니까 또 튀어나와요. 개구리들이 막 튀어나와요.
사정이 뭐냐하면, 저가 인제 결혼식이 끝날 무렵에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이, 학생과 학생들이 아~그 우리집 식구들에게 찾아가서 전도사님 신혼가방 달라고, 우리 학생들이 선물마련 했다고,그래서 가방마다 개구리를 잡아넣은 거에요. 하하~ 그래서 저희는 첫날밤을 개구리와 함께 지냈습니다.
덕분에 성경에 나타난 출애굽의 개구리의 재앙을 아주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너무너무 좋았든 그날 밤, 하하~ 그런데 솔직히 요새는 마누라 얼굴 봐도 그냥 그저 그래요. 하하~ 하나님 마누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봐도 저 여자가 내 마누라인가? 하하~

에~사람이 그 익숙해지면 그 축복을 망각하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제일 싫어하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중에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만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 어떻게 발전하느냐 하면, 이 박힌 식물을 싫어합니다 그래요. 이 박한 식물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가지고 이 박힌 식물을 싫어합니다. 제가 성경을 읽어보니까 하나님이 그때 제일 화가 나셨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불뱀을 보냈어요. 불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 문거에요. 막 물었어요. 그런데 백약이 무효에요. 안 낫는거에요. 한의원, 양의원, 그땐 뭐 호침도 없었으니까, 하~ 녜, 낫지를 않아요 막 죽어가요. 그러니까 다시 모세에게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려달라고, 당신이 좀 기도 하라고 하나님 앞에, 그래서 ‘하나님! 이 백성 그대로 죽이시겠습니까?’그랬더니 그때 하나님이 모세보고, 뭐냐하면 야! 저기 장대가 있는데 장대 끝에 놋뱀을 매달아라! 참 하나님 굉장히 재미있는 분이예요.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장대 끝에 놋뱀을 매달아라 그랬어요. 불뱀에 물렸는데 장대 끝에 놋뱀을 매달아라, 그리고 ‘그 장대 끝에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마다 살리라! 이렇게 말하고 다녀라’. 그러니까 이제 모세가 장대 끝에다가 뱀을 매단 거예요.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중사이를 다니면서 ‘이 장대 끝에 놋뱀을 쳐다보면 여러분은 살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어떤 사람은 웃기네, 뭐 장대 끝에 저 놋뱀? 아 우리가 불뱀에게 물린 거 뱀소리만 들어도 지긋지긋 한데 또 뱀 쳐다봐? 또 어떤 고상한 사람들은 야, 그건 미신이야, 그건 샤마니즘이야 우리가 첨예한 과학으로 내가 다 치료해 볼려고 그래도 치료가 안 되었는데 뭐?장대 끝에 놋뱀을 보면 살아? 그러면서 죽어가요.그러면서 계속 죽어갑니다 사람들이,

그런데 누군가가 그 중에 한사 람이 아주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 하나가 있었습니다. 저는 구도자의 마음자리,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가장 소중한 마음자리가 이 단순한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simple mind 아주 단순한 마음,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하나가 우리가 별별 노력을해도 안났잖아! 이병이, 죽잖아, 계속 죽어가고 있잖아,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신 구원의 방법이라면,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방법이라면 하나님을 한번 신뢰해봐야지 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단순한 믿음으로 모세가 높이 쳐든 그 뱀을 쳐다봤습니다.봤어요. 그런데 몰라요. 뱀 쳐다보고 나서 금방 몸에서 뭐가 기운이 일어났는지, 기가 돌았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성경에 그런 말씀이 없어니까, 어쨌든 보고 났는데 더 나빠지지 않아요 몸이, 괜찮아요.나았어요. 이 사람이 얼마나 놀랬을까요? 그 다음에 이 사람이 어떻게 했을까요? 뭐 미치는거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했을 것 같아요? 야, 나봐 나, 살았어, 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소리쳤을 꺼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으면서 계속 죽어가고,또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을 따라서 이 사람이 전해준 Good news, 그게 복음의 소식이죠. 이 사람이 전달해준 Good news, 복음의 소식을듣고 쳐다보고 또 살아요. 살아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생겨요. 지금 그 얘기하고 있는거예요. 예수님이요.

다시 한번 잘 보세요 요한복음3장 14절에,따라서 하세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그 구절 하나 설명할려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어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뱀을 든 것 같이 그 다음에?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인자는 또 누굽니까? 인자는? 순자 명자 인자가 아니고, 명자는 우리 마누라 이름이고,하하~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란 말이에요.사람의 아들, 사람의 아들, 그런데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이세상에 오셨어요. 그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독특한 칭호가 인자에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되신 예수님도 들여야 하리니, 예수님은 어디에 들여셨습니까? 모세는 광야에서 막대기, 작대기를 들고 그 위에다가 놋뱀을 매달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인자도 들여야 하리니, 저를 믿는 자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잘 들어보세요. 자,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장대 끝에 뭐에요? 놋뱀을 매달아 놓으셨어요. 그런데 그 동일하신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제가 죄 때문에 불안하고, 죄 때문에 인생에서 갈등과 고통을 겪고, 마지막 죄 때문에 죽어야하고, 또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십자가에 매달아 놓으셨어요. 이걸 ‘유비’라고, ‘유비’ 뭐 고상한 말로 ‘아넬로지’라고 그래요
자, 잘 들어보시면요.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장대 끝에 뱀, 놋뱀을 매다신거죠. 동일하신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인생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뒤집어 쓰시고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예수님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지금 매달려 게셔요. 죄인이 되어, 나대신.
리해가 되십니까? 녜. 저 북한에 두번 갔다 왔는데요. 옛날에요, 그 사람이 막 설명을 하다가 내가 이해를 못하면 선생님 목사 선생님 리해가 되십니까? 그러더러구.
여러분 리해가 되십니까?이게 참 중요한 거예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여야 하리니, 예수님도 들여야 하리니,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순간, 그래요. 내가 이 죄 문제를 해결해 볼려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좌절과 갈등과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할려고 몸부림을 쳐보았어요. 결심도해보고 일기도 써보고, 참선도 해 보고 별 노력을 다해도 내 인생이 새로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죽어가는 거예요. 지금,죽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어요, 자 요한복음 3장16절이 뭡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 이니라” 그 광야에 있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땐 구약시대니까 신약을 몰랐어요. 그러나 그들이 만약 이 말씀을 알았더면 틀림없이 이렇게 기록을 했을 거예요. ‘하나님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처럼 사랑하사 장대 끝에 매달린 놋뱀을 매다셨으니 그 놋뱀이 하나님의 구원의 처방,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믿고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마다 새로운 삶을 얻었더라’
죄 때문에 죽어가는 인생,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 우리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내 힘으로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보내셨다 예수가 내 죄를 짊어지고 내가 죽어야할 자리에서 죽음을 대신 죽으셨다 이 사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바라보는 사람마다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아직도 자신에게 희망을 거는 사람 자신의 노력 자신의 방법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은 십자가가 의미가 없을 거예요.아직도 자기를 믿고 있으니까. 자기의 철학과 자기의 모든 방법을 믿고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분의 방법과 여러분의 철학과 여러분의 노력이 묻습니다. 여러분을 구할 수 있었어요? 여러분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었습니까? 언제까지 희망없는 자신의 방법 자신의 철학을 의지하겠어요.
그렇다면 그 방법과 내 철학의 절망을 느꼈다면 이제 십자가 앞에 오세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 죄를 짊어지시고, 그리고 나대신 보배로운 피를 흘리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세요.
그리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 새로운 생명을 얻으리라.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믿는 순간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있던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세요 새로운 생명이 내 속에 선물로 주어줘요. 이 새로운 생명을 예수님을 통해서 받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야, 너 새로워 졌구나.”

제가 첫날저녁 그 말씀을 했는데요, 저도 도덕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교회 나오면서도 내가 도덕적으로 노력하면 내가 좀더 나은 인간이 되겠지, 안 돼더라구요. 교회 나와도,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정말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거야! 그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거야. 이사실이 어느날 믿어지더라구요. 교회 나오기 시작해서 삼년 만에. 사실은, 그래 정말 깨달아 지더라구요. 눈이 열리더라구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예수님 나 이제 믿어요” 한마디 했어요 “예수님 나 이제 당신을 믿어요” 그 말하고 딱 성경공부 하던 자리에서 나왔는데 그때가 9월이였습니다. 9월이였는데요 딱 나와서 보니깐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는 징조가 느껴지는데 나뭇잎이 흔들리는데 나뭇잎이 달라 보이더라구요.
막 생명을 노래하는 거 같아요. 하늘과 땅이 막 새롭게 보입니다. 지나가는 사람하나가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몰라요. 그날 제가 성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날 제가 분명히 새로워졌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예수님을 무지무지하게 사랑하기 시작했고, 제 인생의 목적이 달라졌고요. 제 인생의 가치관이 달라졌어요, 세계관이 달라졌어요 너무나 좋아 가지고 제가 사랑했던 저를 위해 기도했던 친구 하나에게 찾아가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날밤, 야! 나도 거듭났어! 여러분 거듭나셨습니까? 안 거듭 나셨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귀한 분들이 오늘 결심하고 일어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또 하나님의 자녀로써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자신을 주앞에 드리기를 기뻐 합니다. 이들을 받아주시옵소서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이 시간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순간, 예수님 안에 있던 새로운 생명이 내 마음속에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나는 이제 예수 안에 새로운 존재, 새롭게 피조된 자, 이제 하나님이 저들을 붙드시고 저들의 인생의 길을 천국에 들어갈 때 까지 인도해 주시옵소서. 또 저희들의 이땅의 삶도 날마다 천국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저들을 축복합니다. 축복합니다. 인도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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