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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인의 변화된 이야기 / 요한복음 4장

by 【고동엽】 2021. 12. 24.

어떤 여인의 변화된 이야기

 

요한복음 4장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건들은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그런가 하면 또 인생에서 가장 속상하고 가슴 아픈 사건들도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만남을 운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만남은 운명인 것입니다. 아, 저는 예수 믿고 나니까, 저는 20대 초에 예수를 믿었는데요, 본래 저의 집안이 믿지 않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사돈의 팔촌까지 다 뒤져도 예수 믿는 사람 그림자도 없는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났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예수 딱 만나고, 예수 믿고 나니까, 너무 너무 좋더라구요.그 좋은 것을 어떻게 표현할 도리가 없어요. 막, 나도 예수 믿으라고 사람들한테 말하고 싶은 충동. 견딜 수 없는 충동 때문에, 그 딱 이 강대상에서 서서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너무 너무 좋아 보이더라구요. 믿자마자 설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교회 찾아가서 목사님께 저 설교 한번 하겠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막 저를 아래위로 쳐다보더라구요. 그러면서 정 그렇게 설교하고 싶으면 주일학교부터 가르치라고, 어린아이, 주일학교 교사하면서 하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주일 학교 교사를 했습니다. 한 1년 동안 열심히 하고, 우리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근데 조금 더 큰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중등부를 가리치는 분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니 기회를 주더라구요. 그래서 중학생들을 모아놓고 그냥 막 열심히 예수 믿으니까 이렇게 내 인생이 변했고 바뀌어 졌고,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얘기 했습니다. 뭐, 그때는 제가 열정이 참 많았습니다. 지금도 많지만 옛날에 훨씬 더 많았습니다. 막 이렇게 말을 할때면 침을 막 튀기고 그랬어요. 작은 교회였기 때문에 제가 앞에 나가서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앞에 앉은 학생들이 그냥 침이 튀겨 오니까 침을 이렇게… 그러니까 침례를 받은 거죠. 그때부터 아마 전 침례교 목사가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앞에 앉은 여학생이 몇 사람이 쭉 앞에 앉았는데 침이 튀겨오니까 그런데 침이 튀면서도 뒤로 안가고 저를 계속 쳐다보면서 말씀을 듣더라구요. 너무 고맙더라구요. 감사하고, 그 중에 한 여학생이 고등학생이 되고, 여고생이되고 계속 교회에 나오고 열심히 주님 섬기고, 여고생이 되더니, 그 다음에는 여대생이 됐습니다. 그래도 계속 교회에 나오고 열심히 사람들에게 전도도하고, 같이 가르치고 대학교를 졸업하더니 여학교 선생님이 됐습니다. 어떤 날 저한테 찾아 오더니 저한테 시집오겠데요. 그래서 오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제 와이프가 그래요. 그 때 침을 막 튀기는 것을 맞으면서 그런 말을 했대요. 자기 옆에 친구보고, 저 사람 뭐 저래. 저렇게 침을 튀겨. 침을 튀기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과 눈이 마주쳤던 그 Spark. 그 만남. 그 만남이 저희들을 부부라는 삶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 부부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일생이 결정되죠. 일생이 결정됩니다. 그것은 운명입니다. 그러나 이 부부의 만남보다 더 중요한 또 하나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과의 만남입니다. 그것은 일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남은 운명입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만남은 ~~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습니다. 잊기에 너무나 너무한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그건가. 네 영혼을 태우리. 너무 너무 좋아해요. 저는 노래를 잘 못 부르지만 찬송가에 집어 넣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요.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한 여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한 여자의 이야기. 내일 낮 시간에는 예수님 만나고 변화된 남자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남자 얘기하는 것이 더 좋겠죠. 그것은 내일로 더 좋은 얘기는, 남자 이야기는 내일하고 오늘은 여자 얘기를 하겠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예수님에 대한 그 생각이 변했습니다. 그 변한 얘기를 하려고 그래요. 요한복음 4장에 나타난 사마리아 여자라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잘 아시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서 우리에게 빛이 바래버린 오랜 앨범 속의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아주 오래된 낯익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또 아직 교회에 익숙하지 못한 분들에게는 새로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막에서는 저녁에 선선할 때 우물가에 와서 물을 긷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사막중의 한 부분이죠.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많은 사막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낮시간에 활동하지 않습니다. 낮시간에는 잡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낮잠이라고 말합니다. Siesta 라고 말하죠. 어떻게 된 것인지 이 여자는 대낮에 남들이 물을 긷지 않는 시각. 정오에 12시쯤 그는 우물가에 나와서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이 우물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장소는 사마리아라는 장소였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4장을 읽어보면 4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어떤 강력한 의지. 사마리아로 통과해야 된다.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성경 말씀속에 강력한 의지가 들어 있는것을 이 성경을 읽으면서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땅은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요즘 이스라엘이 다시 팔레스타인과의 전쟁 때문에 세계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가자라는 곳에서 헤브론에서 그리고 사마리아 땅, 요셉의 무덤이 있는 그 곳에서 지금 전쟁의 초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곳은 지금도 이스라엘 국경 안에 있지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치령에 속합니다. 예로부터 이 사마리아에는 북쪽으로 가는 무역의 통로가 있었고, 그래서 이스라엘이 북쪽에서부터 침략을 받게되면, 침략자들의 발 아래에 갈릴리나 사마리아 땅은 쉽게 밟힘을 당했고 또 침략자들이 정복자들이 되어서 그 땅에 어느 정도 머물게 되면 거기서 자연스럽게 국제 결혼이 이루어 지기 때문에 국제 결혼은 소위 International Marrige를 한 국제 결혼 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좀 더 아래에 있는 유다쪽, 예루살렘쪽의 사람들은 굉장히 갈릴리나 사마리아 땅의 사람들을 천시했던 것입니다. 그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 국제 결혼한 사람들. 지금 많은 시각이 변하고 있지마는 우리가 조금 옛날 10년, 20년 전만해도 한국에서 국제 결혼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것은 동네의 뉴스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어요.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상대 못할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피가 섞인,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사람들. 상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 그래서 저 예루살렘에서부터 갈릴리쪽으로 볼 일이 있어서 간다고 할지라도 사마리아라는 중간에 있는 땅을 절대로 통과하지 않고 옆으로 지나갑니다. 사람들이 피해다녔던 유배지와 같던 유랑의 땅. 그런데 성경은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예수님의 의지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마리아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남들이 거부했던 그 땅을 꼭 가셔야만 하셨던 절박한 이유가 예수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만남을 위해서 입니다. 만남을 위해서 한 여인과의 만남을 위해서 사람들이 거부하고 거절했던 그 길을 예수께서는 가셨습니다. 선택하셨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물가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이 기다리고 있던 이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어젯밤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 우리가 이런 잔치를 열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런 바램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친구들이 예수님 만나고, 인생이 변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을 내 이웃들도 꼭 같이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이웃들 가운데는 진지하게 신앙을 찾고 또 예수님을 찾는 이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응답의 결과로 또 여러분들이 초청도 받고,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어떤 갈증.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열망 이상으로 훨씬 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경의 스토리가 계속 또 우리에게 확인시켜주는 이야기는, 내가 아마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훨씬 더 그 이상, 10배, 20배 예수님이 나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한 여인을 찾고 기다리는 이야기.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물가에 앉아서 이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여인,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아니 우물가에 아무도 없겠지. 뜻밖에 한 남자가 유대쪽에서 온 남자 같은데, 남자가 걸터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물 좀 주시겠습니까? 그래야 대화가 시작될 것 아니예요.
자, 이 말을 듣고 오늘 9절에 보시면 사마리아 여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같이 성경을 가지고 오신 교우들이 옆에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면서 요한복음 4장9절 우리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4장 9절 같이 시작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써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예,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태인으로써 어찌하여 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자, 사마리아 여자의 마음 속에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생각,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참으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에 관해서 맨 처음 가지고 있었던 첫번째 생각은 이런 생각 이었습니다. 나는 사마리아 사람. 당시는 저 남쪽에서 온 유대인.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잘 서로 상종하지 않고 거래하지 않고 서로 만나기 싫어하고 꺼려하는 관계. 나는 사마리아 여인. 당신은 유태인.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보시면 이 단어가 힘주어 강조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예수님이 남자라는 것을 상당히 의식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여자. 당신은 남자. 나는 여자. 당신은 남자.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하곤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낯선 타인. 이것이 이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최초의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꼭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얘기를 들으면. 예수, 나는 대한민국 사람. 배달 겨레의 자손. 단군의 자손. 나는 한국인 예수는 유태인. 나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 그리고 예수는 2000년 전의 사람. 그 예수님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낯선 타인. 아마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괜찮아요.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구도라는 것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은 거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왜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느냐?. 나는 21C,20C를 넘어서 21C산업화를 넘어서서 지식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 속의 인간. 2000년 전 까마득한 그 옛날 속의 사람. 도대체 예수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낯선 타인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첫번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변하네요. 생각은 변할 수가 있습니다. 변합니다. 예수님과 계속 대화를 나누면서 이 여인의 생각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을 계속 읽어 보시면 마침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15절에 보시면 15절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15절을 펼쳐 놓으시고, 같이 읽습니다. 요한복음 4장 15절 다같이 시작.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그랬어요.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물을 주십시오. 나한테. 여러분 조금 아까하고의 대화하는 얼마나 벌써 커다란 변화가 있었습니까? 아까는 긴장했습니다. 왠 낯선 사람이야.? 왠 남자야, 이 시각에 낮 12시에 정오에 사막에서 우물가에 걸터앉은 저 낯선 Stranger 나그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 나는 사마리아인 저는 유태인. 나는 여자, 저는 남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여인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저에게 물을 좀 주시겠습니까. 저에게 물을 좀 주십시오. 저 뭘 달라고 말하고 있어요. 예수에게 뭘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굉장한 변화가 아닌가요. 어떤 대화가 벌써 이런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을까요? 자, 사마리아 여자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유태인으로써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말하십니까. 그 다음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10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재미나는 대화인데요. 이런 대화입니다. 여자가 당신은 유태인, 나는 사마리아인. 당신은 남자, 나는 여자.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물을 달라고 그랬지만 당신에게 물을 달라했지만 내가 누구인줄을 당신이 알았더라면, 내가 당신에게 물을 달라고 그랬을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당신이 나보고 물을 달라고 그랬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었을 것입니다. 아주 재미난 대화가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 그 때 예수님이 옆에 있는 우물가를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야곱의 우물이라는 우물, 이스라엘의 오랜 조상 때부터 계속해서 애용했던 그 우물가. 사막에서는 우물이 생명입니다. 물이 생명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방금 전에 성지 순례 갔다 왔거든요. 네, 여행가면 물 때문에 난리입니다. 두 가지 난리입니다. 물과 화장실. 그래서 성지 순례 갔다오면 긴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 뭐가 젤 생각 나십니까. 물하고 화장실이요. 화장실이 변변치 않으니까 긴줄. 특별히 여자들. 네 그것이 젤 기억에 오랫동안 남죠. 물, 물, 물은 생명입니다. 아니 저분이 어디 굉장한 우물가 신선한 우물가, 한번 마시면 목마르지 않는 약수터라도 감추어져 있는 우물가라도 저분이 알고 계실까. 아마 이런 상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래서 말하기를 아니 그런 물이 있어요. 그런 물이 있다구요. 그러면 저에게 주십시오. 분명한 것은 아직 이 여인은 예수께서 주시겠다는 말씀한 이 물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아직은 모르고 있었어요. 이 물은 뭘까요. 예수님은 상징적으로 이 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이 나에게 달라 그랬으면 나는 당신에게 당신 안에서 당신 속에서, 당신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었을 것입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었을 것입니다.

14절 한번 확인해 보시죠. 같이 한번 읽어 보실까요. 다같이,14절 다같이 시작.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것은 밖에서부터 이렇게 채워지는 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솟아날 수 있는 물, 당신이 나에게 부탁하면 나는 당신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당신 안에 행복의 우물가가 있어요. 그래서 내 안에서 언제나 길어 먹을 수 있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환경이 아무리 변하고 변해도 내 속에서 계속 솟아 오를 수 있는 영생의 샘물.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을 물로 비교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 그 분이 약속하는 영생. 그 영생을 물로 비교하신 것입니다. 왜, 영생을 물에 비교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보편성과 필요성. 보편성과 필요성. 자 물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물이 필요하지 않는 분이 있으십니까? 보편적으로 누구나 다 필요하고 그러나 그 필요가 절대적인 필요입니다. 그것 없이는 죽습니다. 물 없으면 죽습니다. 물은 사치품이 아니죠. 꼭 필요합니다. 그것 없이는 죽습니다. 영생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영생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제가 지금도 젊었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대학가에 다니면서 Campus에서 대학생들과 신앙 얘기를 많이하고 전도하던 계절이 있었습니다. 어떤 날, 제가 어떤 대학생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했더니 그 대학생이 이러드라구요. 저한데 전도하지 마세요. 저는 예수 체질이 아니예요. 저는 예수 체질이 아니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종교인이 따로 있다는 이런 생각. 편견이겠죠. 제가 그 때 요한복음 4장 얘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요한복음 4장 가지고 설명하다가 갑자기 이 청년이 던진 얘기가 나는 예수 체질이 아니예요. 그래서 제가 그 청년에게 형제여, 예수님이 줄 수 있는 영생을 여기서는 물에다 비교했는데, 내가 질문을 이렇게 바꿔 보겠습니다. 형제는 물 체질 혹시 아닙니까? 물 체질 아니예요. 한번 옆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물 체질 아니세요. 한번 물어보십시오. 아니 물 체질 아닌 사람도 있습니까? 물 체질 아닌 사람. 물은 우리 육체를 적시는 물, 육체의 생명을 보존하는 물이지만, 우리의 영적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그런데 그걸 몰랐어요. 아직도 영생의 의미가 불확실해요.
여러분도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마음속에 서서히 이런 변화가 일어 날 수 있습니다. 그 변화는 뭐냐하면 혹시 예수 믿으면 손해는 안 볼 것 같애. 손해는 안 볼 것 같애. 뭔가를 나에게 주실 수 있는 예수. 그 뭔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Something. Something. 그 뭔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주실 수가 있는 예수. 자, 어떤 분은 글쎄 교회 나가고 예수 믿으면 나에게 건강을 주실까. 혹시 그분은 나에게 행복을 주실까. 여러가지 우리 마음속에 욕구가 있습니다. 뭔가를 주실수가 있는 분. 혹시 그분은 내 미래를 다르게 만들지 않으실까. 우리의 기대는 다 이렇습니다. 하여튼 그 무엇. 그 무엇에 대한 목마름. 무엇에 대한 목마름. 우리는 인생이 얼마나 목이마른 광야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시면서 이 우물에서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를 것입니다. 다시 목 마를 것입니다. 제물에 물을 먹어도 모자라요. 모자라요. 마셔도 맛도 모자라요.
우리가 얼마큼 돈을 벌으면 만족할까요.얼마큼 돈을 벌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부자는 아마 록펠러일 것입니다. 록펠러. 한번은 이 록 펠러에게 어떤 신문 기자가 찾아와서 이 세계적인 부호에게 이런 유명한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당신은 얼마큼 돈을 벌어야 만족하십니까? 이 때 록펠러의 유명한 대답에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얼마큼 돈을 더 버셔야 만족하시겠습니까? Just Little the more!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벌면 된다. 조금만 더. 아, 제가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제가 전에 초창기에 서울에서 목회를 할 때 그 때 제 교회나오시는 분 가운데, 잠실에서 나오시는 분이 계셨어요. 그 때 잠실벌이 막 개발되기 시작할 때 잠실의 한 13평이 되는 아파트에 그분이 아파트에 들어가서 입주해서 목사 초청해서 감사 예배를 들여 달라고 해서 그래서 갔어요. 아주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My Home, 우리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파트. 작은 평수지만, 아파트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같이 감사 예배 드려거든요. 한 1년쯤 지나갔습니다. 다시 가을 신방. 요즘 교회도 체질이 많이 변하지만 그 당시에는 꼭 추계 대 심방 이런거 하잖아요. 다시 가을철에 그 다음에 갔더니 목사님 기도 제목이 있어요. 뭔대요. 13평 살아 보니까 너무 좁아요. 우리 가족의 평생 소원은 20평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갔어요. 얼마 후에 20평으로 또 기뻐서 갔죠. 감사 예배 드리고 기뻐했거든요. 그리고 그 다음에 얼마쯤 지나서 저를 만나더니 목사님 우리 집에 한번 더 오시겠어요. 목사님 기도하면 잘 응답 되네요. 그러면서 예배 드려 달라고 그래서 20평가서 예배드리고 했더니 그 다음에 또 만났어요. 그분이 그러드라구요. 목사님 소원이 하나 더 생겼어요. 뭐예요. 그러니까, 화장실 2개 있는 아파트로 이사가는 것. Just Little the more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인간의 마음속에서 계속되는 욕망. 재물은 결코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쾌락도 조금만 더 재밌는 것, 어디 재밌는 일 있을까? 허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찾아요. Something. 그 무엇이 뭔지 모르고 계속 찾아요. 그리고 계속 목 말라 합니다.
어쨌든 이 여인의 태도는 굉장히 변했습니다. 아까는 상관없어 나하고 절대로 상관없는 예수. 이제는 변했어요. Something. 그 무언가를 주실수가 있는 예수. 이렇게 변했습니다. 자,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는 분, 아주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여기 오시지 않을 것 같은데. 뭔가 그 뭔가를 추구하는 단계. 이 두번째 단계에 와 있을지도 모르죠. 뭔가 줄수가 있는 예수.

자. 그러나 이 여자가 또 한번 변신합니다. 이 여인의 화려한 변신. 네, 어떤 변신인지 좋은 변신이 있습니다. 조금 더 변했어요. 어떻게 변하는가. 또 이 여자의 고백을 한번 들어 보세요. 자, 19절, 요한복음 4장 19절을 옆에 사람과 같이 보면서 읽겠습니다. 4장 19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 시작.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 로소이다.” 예수님을 보면서 이런 고백을 했어요. 주여 당신은 선지자 이시군요. 굉장히 변했습니다. 자, 조금 아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유태인, 나는 사마리아인. 당신은 남자, 나는 여자.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예수. 조금 변해갔고, 나에게 주세요. 뭔지 모르지만 그것 주세요. 나를 목마르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 물을 내게 주십시오. 주십시오. 나에게 뭘 제공할 수가 있는 분. 드디어 이 여인의 입술에서 터져나온 이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이시군요. 당신은 선지자. 굉장한 변화예요.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순간 예수님이 대화를 바꾸십니다. 충격적인 대화의 파격이었습니다. 대화의 맥을 깨트리는 파격적인 이야기. 전혀 엉뚱한 얘기를 예수님이 끄집어 내셨어요. 여기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갑자기 예수님이 남편 얘기를 해요. 이 얼마나, 실례되는 얘기입니까. 이 낯선 여인. 오랫동안 교분이 있었던 사람도 아니고, 우물가에서 아니 전철 속에서 어느날 갑자기 만난 이 낯선 남자가, 내 남편 얘기를 꺼내다니 얼마나 무례한 얘기예요. 남편 불러오라고. 그러니깐, 전 남편 없어요. 남편 없어요. 이 때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마치 다섯이나 있었으니까, 지금 남편도 남편이 아니지. 어. 이 충격. 이 순간에 이 충격. 아니 오늘 처음 만난 이 사람. 우물가에서 처음 만난 이 분이 내 과거를 알아요. 내 과거를 알아요. 여러분.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는 인간이 아닙니다. 단순한 인간이 아니예요. 인간으로 오셨지만, 단순한 인간만은 아닙니다. 그 분은 본래 하나님 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아는 거예요. 내 과거를 아시고, 내가 걸어왔던 인생의 모든 길을 아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지만는 그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시는 것이예요.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신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나의 과거를 아시고, 나의 절망을 아시고, 내 비틀거림을 아시고, 내가 살아왔던 힘겨웠던, 버거웠던 인생의 길도 아시고, 내 화려했던 삶의 Carrier도 아시고, 그러나 그 화려함 속에 가득 감추었던 내 뒤안길의 인생의 실존의 고독도 아시는 바로 그 분. 바로 그런 분이예요. 하나님이시니 나를 아세요. 어 이거 깜짝 놀래갔구, 그 말을 듣더니, 네 남편, 지금 있는 자도 다섯이나 있었으니 남편이 아니지. 그랬더니 깜짝 놀랬어요. 어이구 당신은 선지자 이시군요. 요걸 쉽게 바꿔 말하면 지금식으로 말하면 용하시네요. 계룡산에서 점치다 오셨나요. 이런 스타일의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여기 남편 다섯이나 있었는데 지금 있는 남편도 남편이 아니니 이게 요한복음 4장 18절에 있죠. 중에 4장 18절에. 아주 재미나는 얘기가 생각이 나는데요. 기독교인들의 Joke입니다. Humor인데요. 어떤 남자가 말이죠, 어떤 자매하고 이렇게 데이트를 하고, 무척 좋아했는데 결혼이 잘 성립이 안된 모양이예요. 그래서 그 여인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그래도 옛 남자에게 자기는 이제 시집 가게 되었다고 통보를 했어요. 그래도 한 때 사랑했던 여자. 이제는 과거를 잊어 버리고 잘 살아 가도록 내가 축복하고 싶다. 이런 마음에서 이 여인에게 축복하는 전보를 띄어습니다. 네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그리고 성경구절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과거를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모든 마음속의 불안이나 두려움을 다 떨치고 새로운 미래를 찾아가길 원하는 마음으로 갑자기 성경 구절하나가 생각이 나는데, 요한 일서라는데 보면 아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그래서 네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요한일서 4장 18절. 그런데 요한일서를 기독교인들이 간단히 쓸 때 요일4:18. 요일4:18. 그런데 우체국에서 우체부가 전보할 때 요일에서 일자를 빠트렸어요. 그래서 이 자매가 결혼 전야에 딱 옛 남자한테 축복하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네 결혼을 축복한다. 요한복음 4장 18절. 그래서 찾아 봤더니, 네가 전에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자도 남자가 아니니,,, 지나가는 얘기이구요. 너무 놀랬어요. 내 과거를 아는 저 분.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이신군요. 당신은 선지자 이신군요. 그 말은 여러가지 뉘앙스로 바꾸어서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인 생각. 예수님에 대해서 조금 존경스러운. 예수님을 좀더 연구하면서 좀 더 자세히 예수님을 알아보면서 사람들의 예수관은 관점은 좀 더 바뀔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 위대한 스승이시군요. 이렇게 예수님을 향해서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당신은 위대한 철학자이시군요. 뭐,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은 슈퍼스타시군요. 당신은 위대한 슈퍼스타시군요. 아니면 오늘 말씀처럼 당신은 위대한 선지자, 이슬람교에서도 예수를 선지자로는 인정을 합니다. 당신은 선지자이시군요. 당신은 선지자이시군요. 상당한 변화예요. 상당한 변화지만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이런 존경의 모든 Title , 존경의 칭호를 고백하는 이 순간까지 아직 이 여인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변화의 시점이 아니예요. 조금 더 가셔야 해요. 조금 더 가셔야 합니다. 드디어, 드디어 이 계속되는 대화속에서 여인의 입술에서 예수에 대한 엄청난 고백이 드디어 쏟아져 나왔습니다. 자, 그 고백이 어디에 있습니까. 계속 읽어보시면 이제 여기 25절 말씀이십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25절 다 같이 볼까요. 시작.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셔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갑자기 이 여자의 입술에서 메시야.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것을 다 일러주시겠는데, 메시야, 그리스도 갑자기 이 여인의 입술에서 뛰쳐나온 단어. 이 놀라운 단어. 이 중요한 단어. 메시야, 메시야, 그리스도, 그리스도. 이 말이 나왔습니다. 남편 얘기하다가 예수님이 너 남편 다섯 있었지. 그러니까 지금 남편도 남편이 아니지. 그러니 찔린거예요. 사람이 찔리면 그 찔린 얘기를 다시는 하고싶지 않습니다. 과거를 말할 수가 없는 사람들. 그 과거가 아직도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래서 이런 사람일수록 과거를 피합니다.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침묵 속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유령 같은 고통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 거죠. 근데 예수님이 그 과거를 끄집어 내거란 말이죠. 하고 싶지 않잖아요.
이 여자. 얘기를 돌려요. 하고싶지 않으려면 상대방을 오히려 공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말 하기를 아니, 종교적 논쟁을 시작 했습니다. 아니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의 이 그림시스 산에다가, 여기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당신들 유대 사람들은 저 예루살렘의 거기 성전에 가서 꼭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것이 옳습니까? 우리가 보통 믿지 않는 이웃들과 얘기하다 보면, 예수 믿지 않는 분들에게 우리의 어떤 과거얘기 이런 얘기 보다는 과거얘기 하다보면 괴롭죠, 아프죠. 우리 얘기, 다른 얘기하길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이 받는 질문, 아니 왜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 교파가 많습니까? 그것도 알고 싶고, 하나님 선악과는 알면서 왜 만들어 났습니까? 또 요즘 교회가 왜 그 모양입니까? 이런 얘기를 하고 싶죠. 꼭 이 여자의 심정이 그랬던 것 같애요.
근데 예수님이 아주 친절하게 대답하십니다. 아 예배는 사마리아에서 예배하느냐,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느냐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야.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교파도 중요한 것이 아니야.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다. 예배하는 사람들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해야 한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으면서 에이, 그런 얘기 관둡시다. 골치 아프네요. 뭐 지금 우리가 하는 이런 어디가서 예배 드리냐? 교파가 옳으냐? 그런 것 다 메시야가 오시면 대답해 주겠죠. 메시야가 오시면 여러분 유태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려 왔거든요. 메시야. 메시야, 메시아하고 그리스도는 똑같은 말입니다. 하나는 아람어고 하나는 그리스도어고, 희랍어고 ,아니 그리스어고, 그리스어고 그 차이지 똑같은 말입니다. 메시야하고 그리스도는 똑 같은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이 뭘까요. 그리스도의 뜻은 본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자다. 이런 뜻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 그리스도. 우리가 예수님를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의 진짜 이름은 뭘까요. 예수님의 진짜 이름. 예수님의 진짜이름은 예수입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드리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붙여서 말하는데,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예요. 그리스도는 Title입니다. 그리스도는 Title. 일종의 직업이예요. 자, 제 이름이 이동원 목삽니까. 이동원 목사 중에서 제 이름은 뭘까요. 네, 저는 제 와이프가 저를 부를 때 제일 싫어하는 것이 목사님. 집에 가서도 꼭 목사라고 불려야 되는지 몰라. 여보도 있고, Honey도 있고 많은데, 꼭 그렇게 불러야 하나. 집에서는 목사 때려치우자. 제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목사는 제 이름이 아닙니다. 제 이름은 이동원입니다. 이동원. 목사는 Title이죠. Title.자, 유대인들은 늘 메시야를 혹은 그리스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즉, 기름 부어주시는 분, 이게 무슨 말이예요. 기름 부어 주시는 분. 옛날 구약시대에 보면 어떤 지위에 그 자리에 오를 때 기름 부음을 받고, 우리가 미국의 대통령이 취임할 때 보면 성경에다 손을 얹고,대통령에 취임을 합니다. 근데 유태 나라에서는 왕의 자리에 취임할 때, 그 왕에게 양 뿔, 양각, 양으로 만든 뿔 같은데 기름을 채워요. 그 다음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왕의 자리에 취임을 해요. 기름 부음을 받고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종류의 직업이 세가지 입니다. 왕이 그렇구요. 또 하나는 제사장. 그리고 지금 말하는 선지자. 여기 나온 선지자.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앞으로 인도하고 가리치는 교사입니다. 선지자는 교사죠. 교삽니다. 잘 가르치는 사람. 좋은 선지자가 있는 것는 축복입니다. 좋은 교사가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속에는 가짜가 많았습니다. 가짜 선지자가 많았습니다. 그랬을 때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계속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진짜 선지자가 온다고, 하나님이 기름 부어주셔서 우리들을 정말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그 선지자. Be Profect. 그 선지자가 온다고. 또한 제사장. 제사장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한다든지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중간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중간, 중매 해결자의 역할을 하던 것이 제사장의 역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불행, 가난, 사고,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그 문제를 짊어지고 나가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해서 해결하는 해결사. 그게 제사장이거든요. 제사장은 해결자입니다. 그 다음에 왕은 뭐합니까. 왕은, 왕은 왕이죠. 왕은 다스리는 것입니다. 왕은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도 이스라엘은 제대로 된 왕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새로운 희망을 갖습니다. 2년만 지나가봐요. 2년만 지나가면. 취임식때 처럼 그렇게 왕을 존경했던 민족은, 민족 역사에 없어요.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예요. 조금만 지나가면 그렇게 좋다고 했다가, 인기가 90%였다가, 그 다음에는 쫙 떨어져요. 그것이 인간입니다.
이러한 비슷한 역사를 반복하는 역사의 전철을 반복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은 이런 약속을 하는 거예요. 그래.너희들 왕한테 늘 실망하지.선지자한테도 실망하고, 제사장한테도 실망하지.내가 말이야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을 한꺼번에 완성할 내가 기름 부어 주실 사람을 내가 보내주지. 그 분이 오면 너희들에게 진짜 진리를 가리치고, 너희들의 죄 문제 해결해 주고 용서해 주고, 그리고 너희들의 인생을 다스리시고 통치해 주실거야. 그 메시야, 그리스도를 내가 보낼 거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마름 그들의 기다림은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그리스도를 기다려왔어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있는 그 어떤 분. 어떤 분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다른 말로 우리말로 가장 쉽게 말하면 무슨 말이냐면 구주라는 말이예요. 구주. 구주. 다같이 구주. 구주. 구원해 주는 주님. 구원해 주시는 주님. 내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 내 인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왕처럼 내 인생을 다스려줄 수 있는 분. 여러분 얼마나 누군가 내 인생을 다스려 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떤 결정 결정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그 분이 이렇게 해. 이 완벽한 결정. 후회할 필요가 없는 결정을 해주시는 분이 있다면,그리고 내 삶의 짐과 버거운 짐을 함께 짊어져 주는 분이 있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나를 날마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 있다면 그가 메시야야. 그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근데 갑자기 이 여인이 예수님과의 대화속에서 메시야의 생각이 났어요. 그리스도 생각이 났어요. 그리스도가 오시면 다 우리가 지금 서로 얘기하고 있는 논쟁에 있어서도 대답을 주실텐데요. 그 때, 그 때,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이 4장이 하나의 드라마라면 이 드라마의 클라이 맥스-절정에 도달합니다. 이 드라마의 절정이 뭡니까? 그 다음에 보시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시면서 아마 그것은 한없는 긍휼과 한없는 자비의 눈동자였을 것입니다. 내가 그야. I am He. 내가 바로 그야. 내가 메시아야. 내가 그리스도야. 여러분 아무렇지도 않네요. 만약 이 여인이 까무러칠뻔 했을 거예요. 이 여인이. 당신. 당~~당신이 내가 그리스도야. 내가 그리스도지. 자,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라는 제자가 있잖아요. 베드로라는 제자하고도 3년 동안 같이 있었어요. 있었는데도 예수님이 마지막 세상을 떠나기 전에 혹시 자신을 잊지 않았는가 마지막 Test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든? 사람들이 나를 예수를 누구라고 하니? 여러 대답이 나왔어요. 위대한 교사, 존경할 만한 스승,또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놀라운 치료자, 많은 대답이 있었어요. 그래.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니? 3년 동안 나와 더불어 가장 가까이서 나를 관찰했고, 나와 더불어 길을 걸었고, 나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던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때 베드로가 주님 앞에 엎드리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당신은 주는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You are the Christ . 당신이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기다려 왔던 그리스도. 우리가 기다려왔던 메시야. 우리가 기다려 왔던 내 인생의 왕. 내가 기다려왔던 내 인생의 교사. 나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고, 나를 붙잡아 주고, 내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나를 다스리시고, 통치할 수 있는 메시야. 당신은 그리스도시여. 이 때 예수님이 시몬아 베드로야, 맞았어. 그 대답은 하나님이 알수 있도록 도와주신 거야. 여러분 누가 그리스도인 일까요. 크리스챤들을, 크리스챤, 다른말로 그리스도인. 크리스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입니다. 믿습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야. 이 말을 바꿀까요. 예수가, 예수가 대답이야. 내가 찾고 있던 인생의 대답. 예수가 대답이야. 예수가 희망이야. 예수가 구원이야. 예수가 행복이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 그가 그리스도인 인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자, 이 놀라운 발견, 이 놀라운 절정의 고백, 예수가 그리스도다. 이 부딪힘 앞에서 이 깨달음 앞에서 이 여자가 사마리아 여자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변화가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요.그 후에 두 가지 변화가 일어 났어요. 두 가지 변화가, 자,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내가 그야. 이 말을 듣고 나서, 여자이 보여준 반응은 어떤 것이였습니까?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그 때나 지금이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자와 여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죠. 이상히 여겼으나, 그랬죠. 이상히 여겼으나 그랬어요.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 하나시나이까. 감히 묻지는 못했어요. 그 다음절에 보십시오. 그 다음절에 어떤 말씀이 나옵니까? 한 번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다음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그 다음절, 29절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더냐” 물동이도 버려두고 동네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물 길을 생각을 잃어 버렸어요. 왜 그러느냐고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달은 순간 여러분 들으세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난 순간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달은 순간,이 여인은 더 이상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목마르지 않았어요. 이제는 물동이를 버려두었어요. 물 길을 생각을 잃어 버렸어요. 아예. 이 놀라운 사건이 이 여인의 인생을 뒤집고 압도하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만족했어요. 이제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아요. 예수께서 말씀하셨죠. 이 물을 먹는 사람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아. 이 여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았어요. 다시는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우리가 목마르지 않은 목마르지 않은 인생을 살수 있다. 사모되지 않습니까. 나도 내가 목마르지 않는 인생을 살수가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목말라 합니다. 제물에 목말라 하고, 쾌락에 목말라 하고, 권력에 목말라 하고, 행복에 목말라 하고, 어떤 사람은 지식에 목말라 하고, 그래서 배우고 배우지만 끊임없는 지식의 욕구. 삶의 의미에 굶주려하고, 목말라 하는 인생. 어느 한 순간 이럴 수가 있어요. 나 더 원하는 것 없어요. 나 더 이상 원하는 것 없어요. 이럴 수 있는 인생.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인생.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인생.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목마르지 않기 위해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몸부림치면서 고통하는 그 고통의 결정. 그 십자가의 고통의 결정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 내가 목마르다. 왜 그분은 목마르다고 그랬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목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목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분이 십자가에 달리셨다구요.
저는 본래, 어저께도 얘기하고 오늘도 시작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는 기독교 배경이 전혀 없던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차라리, 저희 집안은 불교에 많이 가까운, 많이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저희 집 절도 있었으니까,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추곡리 사명사 지금도 기억하고 하고 있는 우리집, 우리 큰 집 절입니다. 우리 큰집에서 운영하고 있었던 절. 저도 절에 자주 갔고, 불교하고 참 가까웠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에는 사실은 불교 학생회 회장님도 지내신 바가 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했던 인물은 고등학교 학생였다면 제가 제일 존경한 인물, 저는 두 번도 서슴지 않고, 청담스님이라고 썼을 것입니다. 조계사에 가서 가끔 그 분의 설법도 들었고, 참선도 했고, 묵상도 했습니다. 저는 특정 종교에 대한 비방의 의도는 없어요. 전혀. 단지 제가 경험한 것을 말씀해 드릴 따름 입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에 떨어졌어요. 나 같은 사람을 왜 떨어트렸는지 지금도 나는 대한민국 문교부를 의심합니다. 어쨌든. 아이고 뭐 처음으로 떨어져봤어요. 그래도 공부를 잘 했다고 늘 생각을 했는데, 촌에서 그래도 좋은 학교 서울로 갔고, 이렇게 공부했는데 처음으로 떨어졌어요. 황당하더라구요. 인생이 노래 보이고, 죽어버리고 싶고. 거기다 그 무렵 저희 집안이 휘청거리고 꺽여졌습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어 버리시고, 집이 파산상태, 내 앞길에 아무런 희망의 한 조각의 구름도 보이지 않던 그 계절, 저는 제 마음의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 그 어느날 처럼 조계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불당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얼마나 부처님의 얼굴이 평안합니까 세상의 아무런 번뇌, 걱정, 근심을 모르는 그 편안한 부처님의 얼굴, 근데 그날 방황하고 고통스럽고, 헤매고 있었던 저에게는 부처님의 얼굴이 좀 다르게 보이더라구요. 갑자기 그 편안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뜩, 내 속에서 문뜩, 내 속에서 솟아나는 질문하나가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저 분이 내 사정알까? 저 분이 내 사정 알까, 저 돌 속에 편안하게 앉아계신 저분이 나를 알까? 내 십대를 벗어나서 지금 인생의 문턱에서 좌절해버리고 꺽여버린 나의 고통과 내 좌절과 내 눈물과 내 아픔을 저 분이 알까,저분이 과연 나를 알까, 알까. 그러다가 갑자기 부처님 뒤에 close up되는 영상하나가 있었어요. 나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던.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던, 예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몸부림치는 예수. 십자가에서 고통하고 있는 예수. 보기 흉한 예수. 젊은 예수.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의 영상이 Close up되면서 내 마음속에 문뜩 이런 질문이 솟았습니다. 그 분이면 알까. 아냐, 그분이면 알지 몰라. 고통 받으신 예수 몸부림치시는 예수. 그는 알지 몰라. 이 문득 일어난 호기심. 예수에 대한 목마름. 예수에 대한 호기심. 그래서 저는 불당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주부터 교회 쇼핑을 시작했습니다. 이 교회 , 저 교회 다니기 시작했고, 성경공부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알았습니다. 드디어 알았어요. 맞았습니다. 그 예수가 고통받으신 이유, 예수가 십자가로의 다시는 내가 목마르지 않기 위하여 그가 목말라 지셨습니다. 내가 고통받지 않기 위하여, 나의 행복을 위해서, 그분이 고통을 짊어진것입니다. 내가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 그 고통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 내 구원을 위해서, 내 죄 때문에, 내 죄 때문에 내가 받아야할 진노, 죄값, 형벌, 그 고통, 그 고통을 다 짊어지고, 나 대신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뿌리고, 고통을 받으신 그 예수.
저는 시인 윤동주의 시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이 묘사부분을 너무 너무 좋아해요. 아주 정확한 묘사라고 생각해요.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저는 그 표현이 너무 좋은거 있죠.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내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들리우고, 피어나는 붉은 꽃처럼 어두운 하늘 아래 내 피를 흘리겠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건. 우리의 죄와 우리의 절망과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아픔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 다시는 내가 목마르지 않기 위하여, 다시는 이 고통의 좌절과 늪 속을 방황하고 헤매지 않기 위하여 내 고통과 내 절망을 십자가에서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게로 오라고. 내 고통을 안다고 내 눈물을 안다고, 내 좌절을 안다고, 내 목마름을 안다고. 내가 생수를 주겠다고. 내가 행복을 주겠다고. 내가 용서를 주겠다고. 내가 영생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오래 전에 바라보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의지했던 다윗이라는 사람은 또 이런 고백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나님은 내 인생의 길을 인도하는 목자시니. 제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니예요. 내게 부족함이 없다구요. 더 원하는 것이 없어요. 예수 만난 순간 내 속에 출척 출척했던 욕망의 그 뜨거운 늪소리. 더 갖기 위해서, 더 소유하기 위해서 몸부림쳐도 다시 목 말랐던 내 인생.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되었요. 되었요. 더 원하는 것 없어요.나 행복해요. 이제.
이게 여자에게 일어난 사건이예요. 그 다음에 이 여자는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나 메시야를 만났어요. 나 그리스도를 만났어요. 그랬더니 4장을 계속 읽어오시면 온 동네 사람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인은 더 이상, 더 이상 동네에서 손가락질 받던 그래서 감히 대낮에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던 이 여인이 이제는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구요. 나는 변했다구요. 나는 행복하다구요. 당신도 행복을 알아야 한다구요. 행복을 전하는 전도사로 변했던 이 여자. 세상을 바꾸고 있는 이여자,이 여자의 화려한 변신 이 여자의 놀라운 변신 이 여자의 놀라운 행복의 비밀. 이 여자가 우리 시대의 노래를 알았더면 틀림없이 사마리아 동네를 맨발로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돌아보지 말라. 후회하지 말라. 나는 이제 후회하지 않아요. 나는 이제 슬퍼하지 않아요. 내 인생의 세월은 더 이상 바보가 아니예요. 바보처럼 나는 이제 살지 않아요. 내 인생은 후회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이제 기뻐요. 내 인생은 새로워졌어요. 왜냐구요. 나는 사랑을 알았거든요. 사랑해 너를 이제는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후회할 필요가 없는 인생. 나 이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냥 행복해요. 너무 행복해요. 이 행복을 사마리아 여인은 오늘 당신들에게도 나눠어 드리길 원하십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 하나님 앞에 왔어요. 하나님 앞에 일어 났어요. 저는 죄인 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를 변화시켜 주세요. 하나님, 예수님 보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날 위해 못박히셨다구요. 나를 대신해서 고통을 받으셨다구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저의 죄를 씻어 주세요.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제 마음속에 오세요. 저를 구원해 주세요. 저 예수님 믿고 싶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어요. 저를 인도해 주세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많은 이웃들이 함께 참여하여 우리 중에 여러분들이 인생의 처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다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초청하며, 참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주님으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돌아가신 그분 다시 사신 부활의 예수. 살아계신 예수님을 자기 생애 가운데 초청해 드린 사랑하는 분들을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제부터는 저들이 홀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인생. 예수님이 손잡고 걸어가시는 인생. 앞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저들이 정말 목마름이 없는 행복 속에 이 충만함 속에 저와 더불어 인생의 마지막길을 하나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영원한 집에 갈 때 까지 주님 도와주시고, 축복해주시고 함께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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