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킵시다
에베소서 4:1-6
지난 한 주간동안 남북 정상회담의 뉴스가 보도되고 있는 동안에 저는 줄곧 수 년 전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짤막한 skit drama가 생각이 났습니다. 15분 정도의 짤막한 연극이었는데 이 드라마의 제목은 건축이었습니다. Construction 건축이었습니다. 하도 인상적이라 제가 전에도 소개한 일이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몇 명의 젊은이들이 어떤 낯선 섬에 도착하는 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들은 아마도 조난을 당해서 어떤 낯선 섬으로 표류해 온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들이 섬에 도착하자 마자 보니까 섬 한 구석에 건축 자재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 몇몇의 젊은이들은 건축자재를 둘러싸고 토론을 벌입니다. 이 자재를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한 젊은이가 우리가 여기서 상당히 오랜 동안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집을 짓자 그래야 우리가 우선 살 수가 있을 것이 아닌가. 한 청년이 말하기를 집은 급하지 않다. 우리가 그런대로 가져온 비상식량이라든지 구급약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잘 저장할 수 있는 창고가 필요하지 않느냐. 창고를 짓자. 또 한 사람은 지금 당장 우리 몸이 말도 아닌데 우리가 조그만 크리닉을 먼저 짓자. 이런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납니다. 소리가 나는 곳을 지켜보니까 자기들이 도착한 섬에서 멀지않은 곳에 또 하나의 섬이 보입니다. 거기서부터 들려오는 어떤 소리였습니다. 갑자기 그들 사이에는 어떤 긴장감이 돌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아무래도 저쪽 섬에서 누군가가 쳐들어 올 것 같다. 우리가 건축자재를 갖고 벽을 만들자. 담을 만들자. 맞다. 우리가 담을 쌓아야겠다. 그래서 그들은 그 건축자재를 가지고 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이 벽이 담이 완성될 무렵에 또 한 차례의 어떤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은 주목합니다. 그때 아마도 저쪽 섬에서 건너온 것 같은 어떤 젊은이 한 사람이 바야흐로 이 섬에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려가서 이 도착하는 젊은이를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그때 이 젊은이는 대답하기를 나는 저쪽 섬과 이쪽 섬을 함께 소유하고 계시는 주인이 나의 아버진데 나는 그의 아들입니다. 나의 아버지의 뜻은 여기 있는 건축자재를 가지고 이쪽 섬과 저쪽 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는 것이 우리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당신들은 다리를 놓는 대신에 그것을 가지고 벽을 쌓고 있군요. 그것을 제지하려고 왔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말하기를 저 놈이 수상하다. 맞아. 수상해. 죽여. 죽여. 천둥과 벼락 치는 소리가 나더니 캄캄해졌습니다. 캄캄한 어둠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체포 당했던 젊은이는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짤막하지만 인상 깊은 드라마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제자들까지도 오늘날 다리를 놓기보다도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떠나 벽을 쌓고 담을 쌓고 있는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지나간 한 주동안 우리는 남북 정상이 55년 만에 적대시하던 그런 대결을 청산하고 손을 잡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우리는 감격을 했습니까? 휴전선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지만 갈라졌던 남과 북의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역사의 배후는 단순한 정치적 진행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얼마나 오랜 동안 우리는 이것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까? 그러나 이제부터의 과제는 우리가 손을 잡았다, 우리의 마음이 통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부족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통하기 시작한 이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어떻게 진정한 하나됨으로 연결시켜 나갈 수가 있느냐 라는 것은 우리 앞에 놓여진 민족사적인 과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그 대답을 배울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됨을 지켜나갈 수가 있는지.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4장. 에베소서 라는 이 책 전체는 교회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서1장부터 3장까지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교리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1장에 보시면 바울 사도는 이 교회는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예정의 사건이라고 가르칩니다. 교회는 우연히 생긴 공동체가 아니라 창세 이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공동체다. 그것이 1장의 강조점입니다. 2장에 들어오시면 교회는 유태인들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맨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권을, 그들을 먼저 선택하신 하나님의 특권을 다른 사람들과 그들을 나누는 잘못된 편견으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2장에 가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 사이에 있었던 벽을 허시고 담을 허시고 그 이방인들까지 이스라엘과 화해시켜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다. 이것이 2장에서 설명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화해의 공동체, 평화의 공동체다.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상관 없는 백성들이라고 그렇게 천시하고 무시하던 그들과의 사이에 있었던 담을 허시고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화해를 이루는 화해의 공동체,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특별히 2장14절,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그는, 예수죠.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Jesus is our peace. 예수는 우리의 평화이시다. 화평이시다. 이렇게 선언합니다. 둘로 하나를 만들고 막힌 담을 허셨다. 15절에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로운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이 새로운 사람의 화해의 공동체,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이렇게 바울은 가르칩니다. 그리고 3장에 들어가면 이제 이방인이었던 사람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왔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축복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3장6절을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어떤 단어가 강조돼죠? 함께.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또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다. 우리가 3장에 보시면 비밀이란 단어가 많이 나와요. 3장3절에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4절에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놀라운 비밀은 그것은 이방인도 유태인들과 마찬가지로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함께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비밀이었다. 이것이 3장의 내용이에요.
그 다음에 4장이죠? 자, 4장1절이 오늘 본문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무슨 단어로? 그러므로 란 단어로 시작됩니다. 이방인들을 유태인들과 화해시켜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함께 하나님의 약속 속에 참예하게 하셨다면 이제 더불어 함께 된 공동체 안에서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는 살아야 하느냐? '그러므로' 이게 중요한 단어예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바울은 이 편지를 감옥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이 편지로 부탁합니다.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 함께 이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들이 더불어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는 이제 3절에서 발견합니다. 3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어떻게요? 힘써 지키자 그랬습니다. 자, 우리는 이제 민족사적인 중요한 순간 앞에 서서 어떻게 남과 북의 민족이 하나가 정말 될 것인가를 묻고 있는 그런 역사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역사적 과제를 실현하기에 앞서서 저는 우리 교회의 중요한 미션 가운데 하나는 우리 교회가 먼저 하나됨의 모본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평화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교제 안에서 진정한 화해를 이루지 못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해서 역사를 향해서 화해의 메시지를 던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천 휴머리스트였고 작가였던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이런 재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 안에 넣어 보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 기대를 뛰어넘어서 잘 지내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마침내 그들도 더불어 잘 어울릴 수가 있었다. 그 다음에 들어보세요. 나는 이번에는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은 결코 잘 지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그들 사이의 교제를 소중하게 관리하지 못하는가 라는 모습을 꼬집은 풍자적인 해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서 화해의 메시지를 외치기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하나됨의 모본을 이룰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문에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하나됨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됨의 근거가 무엇인가? 4절부터 6절까지 보시면 이 하나됨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한 주간동안 남과 북의 민족이 하나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논리적인 근거는 우리가 같은 혈연공동체요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역설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크리스천의 하나됨의 근거는 혈통때문은 아니예요. 크리스천은 혈통이 달라도 하나일 수가 있습니다. 문화가 달라도 하나일 수가 있습니다. 엄청난 이 크리스천의 하나됨의 더 넒은 스케일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한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런데 4절이하 6절을 좀 더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게 되었기 때문에 또 한 구주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또 우리가 한 성령님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가 아니더냐? 이것이 메시지입니다.
잘 보세요. 4절에 보면, 저는 4장4절에 제일 중요한 강조된 단어가 성령이라고 생각해요. 성령 거기다 줄쳐 놓으세요.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그 다음에 5절에서 강조된 중요한 단어는 주라는 단어입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그 다음에 6절에서 강조된 단어는 하나님 혹은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어떤 순서로 강조되어 있어요? 성령님, 그 다음에 주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 그 다음에 성부 하나님. 이것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으로 기억하는 순서와 거꾸로 역으로 기록되어 있죠? 자,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를 때 고백할 때 어떤 순서로 고백합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런데 바울은 성령을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성자 하나님이신 주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그 다음에 아버지 하나님을 나중에 언급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 성서 학자는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관련에서부터 나타나는 경험적 순서라는 말을 했습니다. 경험적 순서.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성령 하나님을 먼저 만나요. 우리가 죄를 깨닫게 되는 것, 아 우리가 예수 믿어야겠다 라는 마음에 생각이 든 것, 이런 우리 마음 안에 일어나는 일체의 역사는 누구의 역사일까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먼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요 주님이시다는 것을 우리는 그 다음에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자 마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또 우리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경험적 순서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분석해서 자세히 들여다 보면 4절에 보면 성령만 언급된 것이 아니라 성령과 더불어 뭐가 언급됩니까? 몸 그 다음에 소망. 읽어 보실까요? 4절 다같이 시작.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성령이 몸과 소망이란 단어와 나란히 열거되어 있습니다.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여기서 몸은 교회죠.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교회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믿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은 나를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교회의 지체가 되는 순간 우리는 동일한 한 소망, 하나님 나라의 소망, 천국의 소망, 꼭 같은 소망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강조점은 성령이지만 성령님이 몸과 소망과 더불어 언급되면서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 다음에 5절에 보시면 자, 중요한 강조점은 주 그리스도입니다만은 주 라는 단어가 무슨 단어와 더불어 나란히 언급됩니까? 믿음 그 다음에 세례, 침례, baptism이란 단어와 나란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란 인물에 대한 객관적 이해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나의 믿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마다 반드시 그 믿음을 고백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 고백의 의식이 바로 baptism이죠. 침례를 받는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고백의 의식입니다. 우리는 동일하신 주님 그리고 동일한 믿음 그리고 동일한 내용의 신앙 고백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6절에는 하나님도 하나, 만유의 아버지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그 순간 그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진 것처럼 그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 우리들의 아버지, 그리고 만유를 창조하신 아버지를 믿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한 하나님, 한 아버지를 우리는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아까 교회 들어오셔서 예배에 동참하면서 이런 기도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도 시작하면서 아버지 도와주세요. 어떤 분은 이번 한 주간 물들어갖고 아바지 하고 기도하신 분도 계실지 몰라요. 자, 여러분과 제가 동일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 동일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여러분과 별로 면식이 없는 사람일지 몰라요. 그러나 기도하는 소리를 자세히 들어보세요. 아버지, 나도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동일하신 아버지를 부르는 그와 나 사이에 관계를 정립하지 않고 살아가는 때가 얼마나 많아요. 자, 같이 온 가족말고 조금 뛰어 넘어서 그 옆에 옆에 뒤에 뒤에 있는 분들을 한 번 째려 보시죠. 한 번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저 사람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가 같다. 같다면 뭐예요? 저 사람하고 나하고 형제다, 자매다 이런 생각으로 다시 한 번 쳐다보세요. 다시 한 번 쳐다볼 때 한 번 더 인사할 때 정말 반갑습네다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이게 하나됨의 근거예요. 하나됨의 근거. 몸도 하나, 성령도 하나, 소망도 하나, 주도 하나, 믿음도 신앙 고백도 하나, 하나님 아버지도 한 분. 그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속해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한 가족이요 한 지체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우리의 하나됨의 움직일 수 없는 영원한 근거가 있다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러면 우리가 하나됨을 어떻게 삶 속에서 진짜 이루어갈 수가 있느냐? 이 하나됨을 지키는 덕목들에 관한 교훈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2절이에요. 2절 말씀, 우리 다같이 읽어요. 시작.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4가지 덕목들이 나옵니다. 4가지가 어떤 거예요? 겸손, 온유, 오래참음, 사랑 가운데 용납함. 4가지가 나옵니다. 4가지 덕목. 여러분 성도의 교제가 흔들릴 때 혹은 성도의 교제가 깨어질 때 상처를 받을 때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 중에 누군가가 혹은 내가 이 4가지 덕목 중의 하나가 우리 가운데 결핍되어 있을 때 우리의 교제는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 중의 누군가가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온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오래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피차에 사랑으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교제는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의 남북 대화에서도 우리가 진정한 평화로운 통일을 지향하는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이 4가지 덕목들이 계속 남북 사이에 강조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사랑으로 용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우리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 이 덕목들을 이루는 삶이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신학자는, 한 원어학자는 이 4가지 단어를 연구하면서 이 4가지는 따로 떨어진 덕목들이 아니라 이것은 연쇄적이고 단계적인 덕목들이란 말을 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겸손한 사람이라야 그 다음에 온유할 수가 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이라야 그 다음에 오래 참을 수가 있다. 그리고 오래 참을 수가 있는 자라야 사랑 가운데 용납할 수가 있다. 이것은 따로 떨어진 덕목들이 아니라 이것은 연쇄적이고 단계적인 덕목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자, 이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 겸손이 뭘까요? 자, 우리는 이 단어의 정의를 얻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겸손의 반대는 뭘까요? 교만입니다. 잘 압니다 우리는 그것을. 교만은 뭘까요? 그것은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 그리고 인간의 역사에서 이것은 최초로 나타났던 죄악이었습니다. 사탄이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찾아왔을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에 향한 유혹을 주면서 네가 이것을 먹으면 뭐같이 된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싶은 끊임없는 유혹, 이것은 본래 사탄 자신의 죄예요. 사탄이 사탄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천사장 루시퍼의 타락의 가장 중요한 죄가 바로 이 교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14장에 보면 이렇게 이사야 선지자는 이 루시퍼의 타락의 영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내가 하늘에 올라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무슨 말이 제일 많이 나와요? 내가.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이 사탄은 이 악마는 지금도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에 분열을 충동하기 위해서 우리 중의 누군가의 혹은 내 마음 속에 이 죄를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만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1,2,3서란 책이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교제, 태초부터 있는 교제, 이 아름다운 교제에 대한 메시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3서에 가면 요한3서9절에 사도 요한은 한 사람의 이름을 찍어서 얘기하면서 이 사람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교제가 깨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기록했어요 요한3서9절에 보시면 디오드레베. 그런데 이 사람 앞에 수식어가 붙어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 공동체 가운데 어떤 사람이 튀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 그리고 자기 의견을 절대화하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기 시작할 때 공동체의 평화가 위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겸손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상대화시켜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았을 때 죄인이었던 나,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피할 수 없었던 나, 나는 결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겸허의 자리, 거기서부터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제의 아름다움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함께 주 앞에 한 평생 겸손의 덕을 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온유의 덕목이 강조됩니다. 온유. 온유가 뭘까요? 우선 온유라는 것은 그 단어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어떤 이미지처럼 온유한 사람 그러면 아주 약한 사람을 연상하기가 쉬워요. 빌빌 대는 사람. 그게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유란 단어의 본래의 뜻은 잘 통제되고 절제되고 있는 힘이란 뜻입니다. Power under control, 그 control되고 있는 power. 이것이 본래 온유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뜻입니다. 일종의 거의 자기 통제의 의미, 그것이 온유입니다. 자기를 잘 조절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반대는 자기 통제를 잃어버리는 사람, 그러니까 쉽게 자기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사람. 쉽게 분노하고 신경질내고 폭발시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참 교제하기 힘들죠. 공동체의 평화가 위협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적 리더쉽에 있어서 이 온유는 다른 어떤 덕목보다 앞서 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사람들에게 계시하면서 제일 먼저 이것을 강조했어요. 나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마음이 뭐라고 그랬어요?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 그의 인격 가운데 첫 자리를 창조하는 가장 강조된 덕성은 바로 이 온유함이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여러분과 제가 그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자처한다면 또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온유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유명한 리더였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구약에서 제일 유명한 지도자가 있다면 모세일 것입니다. 모세 그러면 우리는 약하다는 이미지를 전혀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뻣뻣하다거나 교만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민수기12장에 보시면 이 모세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그가 온유하기가 지면에 뭐예요?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다 그보다 승했다.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뛰어났던 사람, 그것이 모세였습니다. 저는 이 온유함이 꼭 천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덕성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가운데 뭐가 포함될까요? 온유가 포함돼요. 그렇다면 우리가 주 앞에 엎드려 정말 기도하고 성령충만을 구한다면 여러분과 제 안에 이 온유함이 이루어져 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온유함의 자리에 설 때 우리의 교제는 더 아름다워져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 세 번째 덕목 뭘 강조했어요, 그 다음에는? 오래참음. 우리가 하나됨을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은 오래참음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온갖 종류의 인간관계 가운데서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무슨 관계 같아요? 지상의 모든 인간관계 가운데서 가장 가까운 관계 뭐예요? 부부 관계죠. 자, 부부가 이 남남이 한 몸을 이루어서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납니까, 부부 사이에? 그런데도 아직도 살아있다, 살고 있다, 뭐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그것이? 사랑하기 때문에, 참기 때문에. 그런데 이 두 가지가 관련이 있어요. 왜? 사랑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오래 참고 그랬잖아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이란 뭐냐? 구체적으로 참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참았고 참았기 때문에 부부 관계는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이라 말이죠. 얼마나 우리는 용서하고 용납하면서 서로 참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부부 사이에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 이웃들에게도 베풀 수 있다면 이웃들을 향해서도 그렇게 참을 수가 있다면 우리의 관계는 얼마나 더 깊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인내한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인내는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라고 또한 성경은 가르칩니다.
제가 데이빗 리빙스턴의 전기를 읽다가 재미나는 얘기를 하나 기억합니다. 영국의 기자 가운데 H.M.스탠리 라는 기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1871년에 아프리카로 데이빗 리빙스턴을 찾아갑니다. 취재하기 위해서 찾아갑니다. 그 당시 영국에는 유명한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에 대한 두 가지 엇갈린 루머가, 보도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 쪽에서 뭐냐하면 리빙스턴은 성자다 성자다 아프리카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한 쪽에서는 데이빗 리빙스턴은 사기꾼이다 그는 선교비의 많은 돈을 가로챘다 그리고 심지어는 원주민들 가운데서도 그의 지도를 받지 않고 지금 이탈하고 있다. 엇갈리는 두 개의 보도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자는 그 진상을 알기 위해서 아프리카로 날아갑니다. 그리고 밀착취재를 합니다. 그는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3개월이상 거의 4개월에 가깝도록 밀착취재를 하면서 데이빗 리빙스턴의 일거수 일투족의 생활을 추적하고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함께 만났습니다. 4개월 후 이 스탠리 라는 기자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크리스천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 당신이 리빙스턴한테 전도받았느냐? 그러니까 아니라고. 리빙스턴은 나에게 예수 소리 한 번도 한 일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느냐? 내가 가만히 보니까 정말 리빙스턴은 엄청난 오해를 받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안팎으로,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서도 모든 선교사들이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그를 배신하고 그는 엄청난 코너에 몰려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를 지켜보면서 놀란 사실 가운데 하나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어려운 고난을 엄청나게 참을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참게 만드는가? 이것은 단순한 인간적인 인내만은 아닐 것이다. 신앙일 것이다. 나는 데이빗 리빙스턴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싶었습니다.
이 오래 참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가 지난 주까지 아브라함의 생애를 쭉 공부해봤습니다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히브리서6장에 보면 그의 생애의 결론 부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축복의 근원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삶의 비밀을 기록하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마침내 오래 참아 하나님의 약속을 누릴 수가 있었던 사람. 그렇다면 그의 믿음의 후손들인 저와 여러분은 우리 한 평생 인생을 살 때에 우리가 가는 곳마다 평화의 도구로 하나님의 샬롬으로 쓰임을 받기 위해서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오래 참음을 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네 번째 덕목 뭐예요? 사랑 가운데 용납함입니다. 마지막 덕목, 사랑 가운데 용납함. 여기서 용납은 참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이것은 거의 용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용납하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4장8절에 보시면 사도 베드로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어떻게 한다고 그랬어요? 덮는다. 잠언10장12절에 보시면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람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동체의 평화가 흔들릴 때 교제가 상처를 받을 때보면 항상 남의 허물을 그리고 약점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가운데 허물을 덮어주기 보다 드러내고 공격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공동체의 문화는 축복의 문화가 아니라 그것은 정죄의 문화가 됩니다. 정죄의 문화.
저는 한국 사람들에게 인간관계와 교제에 있어서 상당히 정죄의 경향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저는 그 영향이 상당히 유교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늘 얘기합니다만 유교가 준 장점도 있어요. 그러나 유교가 준 만만치 않은 피해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는 그 책의 많은 부분들을 상당히 공감합니다. 정죄의 문화가 많아요. 정죄의 문화가. 우리가 창조해야 할 문화, 성경적인 문화, 기독교 문화는 정죄의 문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용서의 문화, 그것은 용납의 문화, 격려하고 세워주고 사랑하고 축복하는 문화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문화 없이는 저는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 나갈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대북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가 과거를 근거로 해서 계속 계속 공격하는 한 우리는 새로운 내일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그만 용서하고 격려하고 세워주고 용납하고 사랑하고 축복할 때 새로운 문화의 창조는 새로운 역사는 가능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메시지의 시작을 이 마크 트웨인이라는 크리스천 휴머리스트의 이야기로 시작함으로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의 얘기를 다시 한 번 인용함으로써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그가 또한 이런 얘기를 남겼습니다. 마크 트웨인의 말입니다. 우리가 본능대로 미워하고 복수하고플 때 우리는 짐승이다 우리는 animal이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며 상처를 잊어버리고 살고자할 때 우리는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까지 용서하고 용납하고 축복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참으로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우리가 본능의 감정대로 미워하고 복수하고플 때 우리는 짐승이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며 상처를 잊어버리고 살고자할 때 우리는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아프게 한 그를 용서하고 축복하고 용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일 수가 있다. 그때 우리는 더 이상 벽을 쌓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리를 놓는 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기립하셔서 함께 같이 기도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벽을 쌓고 담을 쌓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아니 우리 민족사의 55년 동안 우리는 벽을 쌓고 살아왔습니다. 55년 만에 벽이 무너지는 감격은 얼마나 커다란 감격이었습니까? 그러나 우리 가족사에도 아직도 이 벽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친구 사이에도 벽은 있습니다. 직장에도 신앙의 공동체 안에도 이런 벽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런 벽을 헐어주시고 두 정상이 맞잡았던 손보다 더 뜨거운 사랑의 교류가 사랑의 다리가 나와 이웃들 사이에 놓아지게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겸손하게 하시고 나를 온유하게 하시고 나를 오래 참는 자가 되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사랑으로 용납하는 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벽을 쌓는 자가 아니라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자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지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나를 받아주셨다면 이제 우리는 동일한 사랑으로 이웃들을 용납하고 용서하고 축복하고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 하나님 성령으로 역사하시사 주님이 우리 안에 보여주신 그 아름다운 모본을 따라 하나님, 벽을 쌓는 자가 아니라 다리를 놓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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