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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귀히 여깁시다 / 요한복음 9:1-7

by 【고동엽】 2021. 12. 24.

장애인을 귀히 여깁시다

요한복음 9:1-7



오늘 우리는 장애인에 대한 성경공부를 같이 하려고 합니다. 장애인을 귀히 여깁시다.

오늘 우리는 산업화 시대를 넘어서서 지식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류가 농경사회를 벗어나서 산업사회화의 과정을 겪는 동안에 우리의 삶이 무척 편리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삶의 편리 대신에 우리가 잃어 버린 것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환경 파괴입니다. 지나간 시간에 환경 파괴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우리가 삶의 편리를 부단히 추구해 오는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연을 훼손했고 환경을 파괴했고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이 환경 파괴와 산업화의 과정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역기능적 산물이 뭐냐하면 수많은 장애인의 발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산업 재해, 교통 사고, 약물 복용 들이 증가하면서 우리는 많은 후천적 장애인들을 양산하는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천년을 살게 되면서 밝아온 새 천년과 함께 우리가 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기독교적 미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째가 환경 보호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크리스찬으로서 환경 보호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고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환경 보호에 참여할 수 있고 어떤 일에서부터 환경 보호적 삶을, 환경 친화적인 삶을 어떻게 추구할 수가 있느냐를 함께 같이 나누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장애인 회복운동, 장애인 치유운동에 관해서 같이 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괄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장애인 선교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인 그러면 선천적 장애인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장애인 가운데 선천적 장애인으로 진단되는 사람은 장애인 전부 가운데 6%~10%에 불과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6%~10% 범주 안에 장애인들이 있어요. 이게 선천적 장애인지 후천적 장애인지 그 진단이 불가능한 확률이 10%정도라고 합니다. 나머지 80%는 다 후천적 장애인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는 인구의 10%이상은 장애인이란 것을 아십니까?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이라면 우리 나라에 장애인이 얼마나 될까요? 500만이 장애인이라는 통계입니다.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장애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저는 장애인 문제를 함께 나누기 앞서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라는 사실입니다. 장애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이 장애인의 운명을 살아가고 나하고는 상관없다는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천적 장애의 경우에 장애의 원인들이 여러 가지로 진단되고 있습니다. 과거의 이런 방면의 연구 조사서를 살펴보면 몇 가지 순서 가운데 제일 첫 번째가 임신 중 태아에게 미친 영향 이었어요. 두 번째는 유행성 질환, 어떤 전염병 바이러스로 말미암은 것이 후천적 장애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또 하나 외상, 밖으로부터 받은 외상, 그 다음은 약물 중독, 그 다음은 교통 사고, 그 다음은 산업 재해. 그런데 그 순서가 바뀌고 있어요. 산업화가 촉진될수록 우리의 사회가 문명 사회가 되고 더욱 과학화 되는 사회가 될수록 산업 재해가 더욱 많아지고 교통 사고가 더 증진하면서 더 많은 후천적 사고가 일어나면서 후천적 장애인들이 양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애인의 정의가 무얼까요? UN장애인 권리 선언에 보니까 장애인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장애인이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신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원인으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홀로 서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들, 그것이 선천적 원인이든 후천적 원인이든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애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속의 발자취를 보면 그 분과 장애인의 접촉이 그의 생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장애인들은 삶의 소중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밝아온 새천년에 새로운 삶,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추구해 나가는 삶을 위해서 오늘 우리는 장애인 문제를 새롭게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장애인을 보셨는가?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우리는 몇 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들의 신학적 문화적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편견 혹은 문화적인 편견을 먼저 극복하는 데서부터 우리 장애인 선교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2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길을 지나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요한복음 9장2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먼저 여기서 우리가 언어 그 자체를 조심해서 보실 필요가 있는데 예수님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일부러 소경 이란 단어를 피해서 쓰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 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장애인에게 붙여진 그 타이틀, 그 편견의 타이틀을 우리가 먼저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깊은 편견은 먼저 언어 자체에 대한 여과 없는 전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빨리 버려야 할 언어들 가운데 병신 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 문화재 가운데는 병신춤이라는 문화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뿌리깊은 문화적 편견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번역학자들은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이 성경을 다시 번역한다면 성경의 언어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소경이란 말 대신에 어떤 말을 써야 합니까? 시각장애인입니다. 성경에도 앉은뱅이, 저는 자 라는 말이 나옵니다. 앉은뱅이, 저는 자 대신에 지체 장애인입니다. 성경에 문둥이 란 단어가 많이 발견됩니다. 이것은 하루빨리 성경이 다시 번역된다면 바뀌어야 할 단어인데 문둥이 대신에 한센씨병 환자 혹은 우리가 보통 많이 쓰는 나병환자입니다. 귀머거리 대신에 우리가 써야 할 말이 청각장애인. 벙어리 대신에 농아인 혹은 언어장애인. 귀신들린 자, 미친 자 대신에 정서장애인 혹은 정신 지체자 혹은 정신 박약자. 우리가 단어 자체부터 새롭게 바꾸어 쓰는데서부터 편견을 극복하는 일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사상적인 편견, 이데올로기의 편견, 우리 마음 속에 어떤 신학적인 편견이 있어요. 그 편견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매우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여기 예수님의 제자들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면서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죄 때문이다. 자기 죄때문이거나 아니면 이 사람의 조상의 죄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모든 불행과 모든 질병의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원인이 죄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이 사람의 케이스에 있어서 특별히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이 이 사람의 특별한 죄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강경하게 부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사람의 원죄에서 왔다 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어요. 그것은 사실이예요. 그러나 이 사람의 날 때부터 소경된 케이스가 이 사람만의 혹은 이 사람의 조상만의 특별한 어떤 범죄 때문에 기인했다고 굳이 주장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3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특별히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 장애인의 문제에 관해서 구약적인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약성경만 보게 되면 상당히 인간의 불행이나 장애의 원인이 죄하고 관련시킬 수 밖에 없다는 어떤 인상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참 많습니다. 특별히 레위기서, 신명기, 민수기 이런 데 보면 죄와 관련된 인간의 불행의 문제들이 많이 언급되어 있고 또 이런 사람들을 성경은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정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환자들을 동네 바깥으로 쫓아내는 그런 경우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것을 기록할 때 왜 그러한 기록이 필요했는가 라는 상황을 철저하게 면밀하게 연구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 당시의 이런 상황이 특별히 200만 명에 가까운 수많은 집단이 집단으로 광야에서 이동하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 이 교훈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먼저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장애를 발생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거할 목적이지 사실은 그 사람 자신을 제거할 목적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군집된 공동생활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 그것이 어떤 전염병으로 발전할 우려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일시적으로 격리하는 어떤 제도를 만든 것이지 사람 자체를 제거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으로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을 두면서도 그러나 이런 사람에 관한 편견을 구약성경이 여전히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균형있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레위기 19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19장9절부터 읽겠습니다. 레위기 19장9절 이하의 말씀은 광야 생활과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종의 사회정의의 규례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가나한 자들에 관해서 연약한 자들에 관해서 장애인들에 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접근해야 하겠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주목할 만한 말씀들입니다. 9절 이하를 보시면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추수를 할 때 반드시 넉넉하도록 추수의 이삭들을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기 위해서 항상 그것을 남겨두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에도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 하나님이 얼마나 가난한 사람, 또 나그네, 외국인은 자연히 편견 속에서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애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나그네, 장애인 이런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매우 균형 있게 연구하던 성경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의 이런 사람들에 관해 편애를 갖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슴이고 심정이예요. 11절 이하에서는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 다음에 제가 정말 함께 주목하고 싶은 말씀은 사실은 14절입니다. 레위기 19장14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우리가 장애인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구약성경 안에서도 이미 밝혀놓았다는 말씀을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였던 격리의 일시적인 현상은 그 죄를 초래하는 원인을 격리시키려는 하나님의 마음이지 사람 그 자체를 격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장애인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넘어서야 됩니다.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편견을 넘어설 때 우리는 좀 더 자유롭게 당당하게 장애인 이웃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두 번째로 장애인의 선교는 예수님의 선교의 본질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의 3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사람의 케이스는 자기들 자신의 어떤 죄와 관련된 것이라고 보기 보다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것이 하나님의 미션의 계획 속에 있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였다. 그 다음에 4절을 계속해서 읽어 보세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거기서 특별히 예수님이 우리가 라는 복수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인 자신이 바로 이런 사람을 위해서 장애인을 위해서 오셨고 그의 치유를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선포하시고 또 5절에 보시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바로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주기 위해서 오셨다 라는 사실을 주께서 선포하십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예수님만의 사명이 아니라 이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더불어 함께 해야 할 일이란 것을 간접적으로 제자들에게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조상 탓입니까 이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신학적 토론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런 신학적 토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이다. 선교의 본질이다. 선교의 사명이다 라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생애를 이런 관점에서 가장 자세하게 관찰 있었던 사람은 저는 누가 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이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인간의 신체를 관찰하는 일에 있어서 더 정확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생애의 미션을 어떤 점에서 관찰하고 있는지 몇 개의 중요한 구절들을 같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장18절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선교의 시작의 부분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이 말씀은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공적 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선포한 말씀이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것을 위해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 나를 보내셨다.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또 눈먼 자에게는 보게 함을 시각 장애자에게는 광명을 전달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왔다. 주님이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역에 매우 중요한 한 본질이었음을 그의 생애의 초창기에서 먼저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20절부터 보시면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침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요한에게 사람들이 물은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정말 메시야인가 아닌가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이 질문이 던져졌던 것입니다.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그 다음에 예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요한에게 가서 이렇게 대답하라고. 2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러니까 아직도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마 요한도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했을 때 예수께서 내가 메시야 라는 증거가 있다. 그 증거가 나를 통해서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고 있다. 그의 바로 사역이 그가 메시야 되심을 증명한다 라는 사실로 답변하셨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실 속에서도 예수님의 메시야됨의 그 본질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치유사역 속에 있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 누가복음 14장을 보세요. 누가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시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어디 있는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대한 교훈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시면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다 16절에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청하였더니"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누가 초대되었느냐? 여러분, 이것은 그 당시 소위 유태인의 관념, 그 당시의 세계가 가지고 있었던 장애인에 대한 깊은 편견에 비추어서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아주 파격적이고 거의 혁명적인 교훈이었다고 생각을 해요. 21절을 보세요. 다같이 읽겠습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중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여기도 병신이란 말이 나오는데 어떤 병신이 병신같이 번역을 했어요. 번역이 앞으로는 다 바뀌어야 돼요. 하나님 나라의 잔치의 게스트는 누구냐?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의 게스트다. 이것은 오랜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들을 소외시키고 제외시키는 그 사회에 비추어서 이것은 거의 혁명적인 말씀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장애인이 있었어요. 삶의 소중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선교의 본질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예수님이 어떻게 장애인들을 접근하셨느냐? 세 번째 장애는 오히려 축복의 도구가 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향하여 말씀하셨을 때 단순히 그 분의 치유만을 겨냥해서 주께서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도구로 쓰임받을 수가 있다는 보다 적극적인 교훈이 오늘 이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 것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이 사람의 인생 속에 어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 그렇다면 장애는 결코 장애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치유를 통해서 아니면 치유가 아닌 꼭 다른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낼 수 있는 도구로 이 사람의 삶이 쓰임을 받을 수 있다면 장애는 오히려 축복의 도구가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극적인 관점에서 장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장애인들에 관해서 좋은 감동을 누릴 수 있는 책을 읽고 싶다면 제가 책을 하나 추천하고 싶어요. 헨리 나우헨은 원래 하버드와 예일 대학에서 교수로 있던 사제입니다. 예수회 계통의 사제였어요. 어느 날 갑자기 하버드 대학, 예일 대학 교수를 하다가 집어 치우고 캐나다의 토론토 근처에 데이 브레이크 공동체 라는 몇 사람의 장애인을 수용한 수용소에 일종의 목사가 되기 위해서 사제가 되기 위해서 그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몇 사람을 위해서 그 속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장애인들과 공동 생활을 하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특별히 공동체 속에 있었던 아담 아네트 라는 태어날 때부터 육체적인 장애와 정서적 장애를 안고 있었던, 아담 아네트 라는 한 사람의 생애를 지켜보고 돌보고 섬기다가 그가 죽은 후에 그를 주제로 책을 하나 쓴 것이 아담이라는 책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책에서 나는 처음에 아담을 돌보기 위해서 이 곳에 왔지만 그러나 오히려 아담이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아담이 나에게 축복이 되었다. 나는 아담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했다. 아담의 연약한 부분을 통해서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했고 아담의 그 투병 과정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광야 생활을 볼 수 있었다. 아담의 그 말할 수 없는 고난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고난을 보았고 아담의 죽음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소망을 발견했다. 아담은 아무것도 안 하고 거기 있었을 지 모르지만 아담은 나를 가르쳤다. 그러면서 이 책의 서론에 아담은 내 생애 최고의 스승이었고 안내자였고 그리고 나의 소중한 친구였다. 그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쳤고 더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다. 나는 그를 돌보러 왔지만 그가 나를 변화 시켰다. 이러한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의 60페이지에 보면 이런 글이 있어요. 그의 진짜 선물은 내가 그것을 환영할 때 비로소 나에게 선물이 될 수가 있었다. 돌보는 것이란 주는 것만큼 받는 것이며 요구하는 것만큼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며 자아의 확신을 구하는 것만큼만 그에게 주는 능력있음을 확인시켜 줄 수가 있는 것이었다. 아담을 돌보는 일이란 우리가 그를 돌볼 때 그로 하여금 우리로 돌보도록 허락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아담과 그를 돌보는 사람은 상호관계와 풍요로움 가운데 자라날 수가 있었다. 이 깨달음을 갖고 나서야 비로소 아담을 돌보는 일이 부담이 아니라 특권임을 알았다. 아담이 우리를 돌보게 함으로써 나는 우리의 삶의 열매가 맺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이 책의 맨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아담이 죽고 나서 장례를 치루고 나서 책을 쓰면서 마지막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나는 아담의 진리의 증인이다. 나는 먼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알지 못했다면 아담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음을 알고 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아담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얻었다. 바로 그 이야기에 비추어 나는 가능한 한 단순하고 솔직하게 아담의 이야기에 대해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라르시가 나의 공동체가 되고 데이 브레이크가 나의 안식체가 된 것은 바로 아담 때문이었다. 나의 팔로 아담을 붙들고 완전히 순수하고 자유롭게 그를 다가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내게 소속감을 주었다. 그는 육체적 존재라는 진실에 뿌리를 내리게 해주었고 공동체에 닻을 내리도록 해주었으며 함께 하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깊이 경험하게 해주었다. 아담과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 내가 어디에 서 있을지 모른다. 이 공동체에서의 첫 14개월 동안 아담을 씻기고 먹이고 옆에 있으면서 나는 그토록 갈망하던 안식처를 얻었다. 그것은 단순히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안식처가 아니라 나의 몸, 나의 공동체의 몸, 교회의 몸, 하나님의 몸 안에 있는 안식처였다. 나는 예수님의 삶에 대해 듣고 읽었지만 그 분에게 손을 대거나 그 분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담에게 손을 댈 수가 있었고 그를 보았으며 그의 삶에 다가섰다. 그를 목욕시키고 면도를 시키고 이를 닦아줄 때 육체적으로 그를 만졌다. 조심스럽게 그의 옷을 입히고 아침 식탁으로 그를 데려다 주고 숟가락질을 도와 주면서 그를 만졌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안마를 해주고 체조를 시키고 수영장과 목욕탕에서 곁에 앉아 있으면서 그를 만졌다. 머레이, 캐시, 브루너도 그를 만졌다. 그것이 우리가 한 일이었다. 그를 만진 것.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곧 아담에 대한 이야기였다.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리라. 아담에게 손을 댄 모든 사람들은 각각 어딘가가 온전해졌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축복된 경험이었다.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그가 받을 수 있었던 풍성한 축복의 경험. 그들은 우리의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니어요. 동정심의 시각을 가지고는 장애인에게 다가설 수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축복이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그와 섬김을 통해서 그가 내 생애 오히려 내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가 있다는 사실을 갖고 접근할 때 우리의 교제는 더 풍성한 교제가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는 오히려 축복의 도구가 될 수가 있다고 그는 가르칩니다.

네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장애인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도움이 되고자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판단한 내 방법으로 도움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도움이 될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중에 더러는 장애인 선교에 관심을 갖고 이런 일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본위입니다. 그런데 자기 본위의 관심을 베풀고 있는 한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도움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치유할 때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치유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여러 가지 유형의 병자들을 만나시는데 결코 예수님의 방법이 꼭 같지가 않아요. 다 달라요. 그때 그때마다 달라요.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방법으로 다가섰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만 하세요. 어떤 사람은 손을 얹어서 안수하세요. 어떤 사람에게는 명령을 하세요. 어떤 사람에게는 야단을 치세요. 다 달라요. 예수님의 방법은 달라요. 본문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한 번도 빛을 본 일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했습니까? 침을 뱉었다고 그랬는데 저는 이 번역이 참 싫어요. 침을 발랐다고 해야 합니다. 침을 바르시고 이것이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진흙을 발랐습니다. 그랬을 때 이 사람은 뭔가를 느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아! 내 눈에 무슨 일이 일어날 모양이다. 침을 바르시고 진흙을 바르시고 그 다음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보라. 그래서 뭔가 자기 눈에 발라지고 물이 자기 눈을 씻기 시작했을 때 거기서 그는 어떤 하나님의 구체적인 임재와 손길을 경험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아! 내가 무슨 일이 일어날 모양이다. 그는 더 믿음을 가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도와주십니다. 말씀만 하면 고칠 수 있는 주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꼭 필요한 방법으로 주님이 다가설 수가 있었다는 사실, 이것이 참 중요해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렇게 우리 주변의 장애인들을 접근할 때 그들을 우리 중의 한 사람으로 수용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장애인 선교에 있어서는 통합적 선교라고 말합니다. 즉 그들을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우리와 격리시켜놓고 도움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되게 하는 일이예요. 그래서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일.

그런데 한국 사회는 아직도 멀었죠. 장애인 시설을 어디다 지으려고 하면 혐오시설이라고 생각해서 나가서 뻔뻔하게 데모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어요. 그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선교의 자리에 설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앞으로 이런 면에서 많이 노력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관심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이것을 부지런히 연구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솔직히 우리 교회 건물을 처음 사고 들어올 때 제일 처음에 걱정이 하나 있었어요. 와서 딱 보니까 너무나 가파르고 우리가 지은 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올라올 수가 없겠구나 이게 제일 커다란 마음의 부담이었어요. 다행히 나중에 지하 일층 쪽으로 들어올 수 있는 다른 통로를 우리가 낼 수가 있었고 또 보니까 화장실도 전혀 장애인들을 고려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장애인 화장실을 따로 만들어 놓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화 통역을 우리가 시작을 했고 또 아름 주일학교를 통해서 장애인들이 통합적인 교육을 우리와 함께 누리면서 자랄 수 있도록 만드는 작은 노력을 우리가 시작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우리 장애인 형제와 자매들이 교회에 출석할 수 있도록 차량을 제공하고 또 함께 목장에 참여하고 그들을 부지런히 데려 오기 위해서 노력하는 아름다운 마음의 형제와 자매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요.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해요. 앞으로 우리가 이런 문제를 아주 진지하고 심각하게 연구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교회에 나오는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장애인 차량 자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다 뻔뻔하게 주차를 해요. 지금도 두 대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았어요. 거기 장애인 표시가 없어요. 따라서 하세요. 그건 인간도 아니다. 그것은 크리스찬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예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상상하지도 말아야 돼요. 생각도 하지 말아야 돼요.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태도가 아니예요. 내가 조금 더 불편하더라도 나보다 더 불편한 형제와 자매에게 삶의 자리를 양보하고 자연스럽게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삶의 공간을 창조해 나가려는 노력. 우리가 본당을 짓는다면 제 소원은 그래요. 제일 먼저 고려하고 싶은 것이 우리 장애인 형제와 자매들이 편안하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들이 더불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함께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릴 수 있는 공동체, 그것이 우리가 주님에게서 배우는 교훈이예요.

어떤 장애인 문제 연구소를 보니까 장애인들이 제일 크게 느끼는 불편이 뭐냐 하면 세 가지 제일 큰 불편 가운데 육체적인 불편은 맨 마지막이예요. 첫째 불편이 경제적 빈곤이예요. 장애인이 되면 동시에 경제적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돼요. 저는 정의로운 사회는 약자가 보호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의 발생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예요. 상당히 사회적 책임이 커요. 우리 사회가 이런 산업재해를 발생시키고 그리고 교통 시설도 그렇고 그렇다면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돼요. 교회도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소외감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다는 소외감.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 그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중의 한 사람, 식구 중의 한 사람, 우리 지체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 주님은 교회를 설명할 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 부분의 지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지체 주에 약한 부분을 더 돌아보고 더 잘 입혀주지 아니 하느냐? 지체 중에 연약한 부분이 있으면 아픈 부분이 있으면 관심을 갖잖아요. 돌아 보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 약한 사람들을 더 돌아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삶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 그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다가서서 그를 우리의 자연스러운 지체 중의 하나가 되게 하려는 노력,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가장 중요한 모본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장애인들의 영적 회복을 돕는 일입니다. 금년도에 우리가 가진 계획 중의 하나가 호스피스 운동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나 하나 차근 차근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 교회의 꿈 가운데 하나가 우리 교회 주변에 우리 성도들이 달려가서 언제나 섬길 수 있는 그런 사회복지 공동센터를 갖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소중한 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에 앞서서 그보다 먼저 우리가 가져야 할 중요한 관심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관심입니다. 그것은 장애인에게 영적 회복을 돕는 일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9장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치유를 받았어요. 그것은 육체적이 치료죠. 그러나 예수님이 육체적인 치료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요한복음 9장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35절부터 보겠어요.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내었다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사람들에게 쫓김을 받은 그 사람을 찾아가서 예수님이 물으셨어요. 네가 인자를 믿느냐 너를 치료해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내가 인자다. 내가 메시야다. 유대 민중이 기다려왔던 메시야. 사람의 모습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내가 바로 메시야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바로 그에게 보여주었어요. 그랬더니 38절에 이 사람이 드디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눈 뜬 것보다 더 커다란 기적이예요.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38절에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드디어 신앙의 고백이 이루어졌어요.

어떤 통계에 보니까 한국의 장애인들 가운데 크리스찬은 5% 미만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약 20%인데 장애인 가운데 교회 다니는 사람은 5% 미만이라 말이죠. 못 나오고 있는 거예요. 부끄러워서 여러 가지 이유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책임이죠. 우리들이 그들에게 무엇보다 할 수 있는 일, 그들의 영의 눈이 뜰 수 있도록 그래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일 왜냐하면 더 무서운 장애, 인간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장애는 영적인 장애예요. 만약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면 예수님을 볼 수가 있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있다면 더 이상 이 사람은 장애인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장애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장애, 가장 무서운 장애는 영적인 장애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장애예요. 본문의 마지막에 예수님이 바리새 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40절에 보시면 "바리새 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비꼬았습니다. 그때 예수님 말씀이 뭔 줄 아세요? 마지막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 네가 더 소경이다. 네가 더 무서운 장애자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장애자를 도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제로 도움이 되어 주어야 해요. 축복이 되어 주어야 해요. 그러면 축복이 나에게 돌아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영적 회복을 돕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들이 우리와 더불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는 일. 이것이 크리스찬 라이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는 것,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 이런 소명을 느끼는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는 새천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주변에 햇빛을 볼 수 없는 그런 장애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숨겨두고 부끄러워하고 아파하고 그래서 소외되고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도 찬양하지 못하는 아픈 마음의 이웃들. 누구나 다 장애인이 될 수가 있는데 나도 예외가 아닌데. 새로운 천년이 그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새해, 하나님,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우리가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축복이 되어 주는 한 해가, 그래서 나도 축복을 누릴 수 있는 한 해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장애인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에게 다가서셨고 그들을 수용하셨는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주님이 장애인을 바라보시면서 민망히 여기셨던 동일한 심정이 우리의 마음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밝아오는 새천년 우리가 관심을 갖고 돌아보아야 할 삶의 영역, 바르게 고쳐야 할 우리의 삶의 모습들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는 장애인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다시 한 번 말씀 앞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우리의 무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너무나 잘못 주 앞에 살아왔던 부분들을 주께서 용서해주시고 주님이 장애인들을 향해서 느끼셨던 주님의 민망히 여기셨던 그 마음, 주님의 사랑, 그것이 우리의 사랑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가슴이 우리의 가슴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눈, 주님의 손을 가지고 장애인 형제와 자매들의 손이 되어 주고 발이 되어 주고 그들의 빛이 되어 주는 삶, 그래서 그 축복이 오히려 내게 축복이 될 수 있는 삶. 하나님, 이런 삶을 살아가는 한 해가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 안에 또 우리 교회 언저리에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많은 식구들을 주께서 축복하시고 그들이 새로운 용기와 비전을 갖고 일어서는 한 해. 공동체의 사랑 안에서 결코 소외된 이웃이 아니라 우리 중의 한 소중한 이웃인 것을 기억하고 용기를 갖고 다시 일어서는 한 해가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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