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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익 목사 준비중

사랑 배우기

by 【고동엽】 2021. 12. 21.

 사랑 배우기

 

 

 

 

 

 

 

 

                                      요일 4:11-12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이 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돈을 버는 것이 꿈이고 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아들을 낳아 놓고 이름을 “돈“이라고 지은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부모는 자식을 돈을 받고 팔아버린 부모도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없다고 비관하다가 온가족이 함께 동반자살해서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돈이 우상인 사람들입니다. 또 사람들이 화려함을 목표삼고 살아갈 수 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대부분 이 화려함에 대한 동경심리가 들어 있습니다.

 

 

 

 

 황우석씨를 보십시오. 그분이 연구실에 파묻혀 조용히 연구하다가 어느 날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목이 자기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그 화려함의 맛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맛이 얼마나 화려합니까. 그리고 그는 그 화려함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조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철저한 과정과 절차를 검증받아야 하는 과학의 세계에서 앞으로 이루어야 할 성과를 이미 이룬 것처럼 미리 발표해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매사 덮느라고 속으로는 얼마나 괴로움이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 거짓말이 있고 속임이 있고 과장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이 허영심이 다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돈이거나 화려함이거나 성공의 욕망 정도이면 안 됩니다. 오늘 돈이 목적이고 성공이 목적이고 화려함이 목적인 사람들 많습니다. 그래서 주일도 잊어버리고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것이 삶의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최대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을 오늘 읽은 본문에서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라는 말은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이고 근본적인 은혜입니다. 내가 택함 받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참 복중의 복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사랑을 나누는 삶입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하고 했습니다. 즉 우리들이 그 사랑을 입었으니 그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나누는 삶이 또 복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런 차원의 사람들입니다. 사랑을 입는 것도 분명 복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나누는 삶은 더 큰 복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닮아가는 것”

 

 

 

 

 

 

 

 

 

사랑은 한마디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모델이고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하면 예수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사랑을 말씀하셨고 그 사랑을 표현하셨고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모방하고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의 삶을 닮고 정신을 닮고 생각을 닮고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삶이 사랑을 나누는 삶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그리고 딸을 어머니 닮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아들을 낳아 놓았는데 이웃집 아저씨를 닮았어 보십시오. 그 일을 어쩌겠습니까. 어떤 아이가 밖에서 놀다 울고 들어왔습니다. 왜 우느냐고 물으니 대답도 않고 누워 앓습니다. 마침내 학교 선생님이 문병을 오셨습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니까 아이가 “나는 이집 아들이 아니래요, 어른들이 그러는데 나는 다리 밑에서 데려왔대요”하고 서럽게 웁니다. 그 말을 듣고 부모님들이 “그게 무슨 소리냐, 너는 엄마가 낳았고 이게 네 진짜 아빠야”하고 말해 주어도 믿질 않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기를 진짜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어야겠다 싶어서 증거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빠 얼굴을 보았더니 아이와 닮은 곳이 없습니다. 뒷모습을 보아도 아들과 닮은 곳이 한곳도 없습니다. 그렇게 찾다가 마침내 아버지의 발가락을 보니까 그 발가락이 아들과 닮았습니다. 그래서 이 발가락이 닮지 않았느냐고 말하자 아이가 그때서야 믿고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닮은 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사랑은 예수님을 닮는 생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랑의 표본이고 기준이고 사랑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는 사랑이 끊임없이 솟아나왔습니다. 그의 말씀에서, 그의 삶에서, 그의 손끝에서, 그의 가르침에서, 그의 사상에서 끊임없이 사랑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자체가 신앙의 삶이고 사랑을 나누는 삶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면 닮게 되어 있습니다. 이 품는 삶이 중요합니다. 마음에 품는 대로 만들어 집니다. 그래서 링컨은 사람 나이 40이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온 대로 얼굴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가끔 TV에 비친 강도의 얼굴을 보십시오. 꼭 얼굴이 강도같이 생겼습니다. 살아온 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무꾼이 나무하러 산에 갈 때 마다 큰 바위 곁을 지나갔습니다. 그 바위를 볼 때 마다 이 나무꾼은 소원을 빌었습니다. “나도 저 바위처럼 듬직하고 의젓해졌으면” 그런 마음을 품고 그 바위 곁을 매일같이 오고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료가 말하기를 “자네 얼굴이 저 바위 모습과 비슷해졌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마음에 그 마음을 품고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면 그대로 닮아가고 이루어집니다. 내 마음에 예수를 품고 사모하게 되면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그러면 나도 그 예수님의 사랑을 행하게 되고 그의 사상을 가지게 되고 그의 인격과 그의 성품을 소유하게 되고 그의 인내를 배우게 되고 그의 영을 품게 되고 그의 성숙을 나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를 닮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것”

 

 

 

 

 

 

 

 

살아가다 보면 때로 남을 원망하고 탓할 때가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때로 사람을 오해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원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해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부작용일 것입니다. 상대방의 의도는 그것이 아닐 텐데 내가 이해가 부족해서 상대방에게 오해하고 서운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이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게 되면 오해하거나 불만하거나 탓할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가 입니다. 어떤 분이 저녁때 만찬초대를 받고 부부가 집을 나섰습니다. 주차하기가 어려워 택시를 불렀습니다. 막 택시를 타려고 하는데 도둑고양이가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그 고양이를 붙잡아 내쫓으려고 집으로 갔습니다. 택시 안에 부인 혼자 앉아 있습니다. 혹시 기사가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면 좋지 않을 것 같아 말하기를 “남편이 2층에 계신 어머님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러갔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남편이 돌아와서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말하기를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 늙은 것이 침대 밑에 숨어서 나와야지요, 그래서 옷걸이로 쿡쿡 찔러서 빼내느라 혼났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기사가 어떻게 이해하였을까요.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영국의 비평가 버나드 쇼가 로댕작품에 아주 나쁜 편견을 가진 사람 앞에서 한 장의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최근에 구입한 로댕의 작품입니다”하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말이 끝나자마자 혹평을 하고 그 그림에 대해서 난도질을 했습니다. 조금 후에 버나드 쇼가 아주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아 제가 큰 잘못을 져 질렀습니다, 그림이 바뀌었습니다, 이 그림은 로댕의 작품이 아니고 미켈란젤로의 그림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한마디 말을 못하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해이고 편견이고 아집입니다.

 

 

 

 

 그래서 에릭 프롬은 사랑은 다섯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 것, 존중하는 것, 이해하는 것, 주는 것, 책임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다섯 가지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해하면 이 세상에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나 불상사는 이해하지 못해서 일어납니다. 강아지와 고양이는 언제나 원수입니다. 그 원인이 좋다는 표현의 방법이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는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높이 말아 올립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밑으로 낮게 내립니다. 이 표현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부부가 함께 살아갈 때 이 마음을 표현하는 기호나 방법이 같을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가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이 이렇게 고양이와 강아지처럼 서로 다르면 평생 살아가기 곤란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갈라서는 부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이혼 사유가 성격차이라고 말합니다. 이 성격 차이라는 말은 표현의 방법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데 상대방은 다른 뜻으로 이해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상대방은 정반대로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융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 번 반복되다 보면 인내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그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해하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예수 안에서 살면서 가장 먼저 생각할 일은 이해하는 일입니다.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남의 생각과 생활과 입장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생활이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표현하는 방법이 다른데 왜 너는 나와 생각이 다르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해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

 

 

 

 

 

 

 

 

사랑은 혼자 있어서는 배울 수도 없고 나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과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과 교우들을 주셨습니다. 거기다 세상에 불행한 사람들과 가난한 이웃도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이웃과 함께 하고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웃이 아주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고 함께 부대끼면서 한 가지씩 배우고 터득하고 깨우치듯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도 사랑하는 것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그 사랑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그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 가셨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위로하시고 고치시고 어루만지시고 격려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고 사랑의 표현방법이고 삶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고는 사랑은 표현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렵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것은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나고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애하고 싶은 마음은 연습하거나 배우지 않아도 성장하면 자연적으로 그 마음이 솟아나옵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은 그렇게 자연적으로 솟아나오지 않고 배워야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애하는 사랑과 이웃 사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성을 사랑하는 사랑은 본능적인 사랑이고 육신적인 사랑입니다. 남자가 남자를 볼 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싫은 이성에게 마음이 끌리는 법도 없습니다. 이성적인 사랑은 본능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극진하다고 하지만 그 사랑도 내 자식만 극진할 뿐 남의 자식에게는 조금도 발휘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본능적인 사랑은 소극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사랑은 그 한계를 뛰어 넘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반드시 배워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마음에 작정해야만 실천되는 그런 사랑입니다. 사람이 성장해서 이웃에게 마음을 열고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려서 배우거나 훈련받아야 가능합니다. 어려서 헌금하는 것이 훈련된 사람은 커서도 큼직하게 헌금할 수 있습니다. 훈련되지 않으면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아이들 보는 앞에서 이웃에게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서양 사람들이 기부문화가 잘 발달된 것도 어린 아이 때부터 부모들이 기부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 사회에 그 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집안에서 부모가 부부사랑이 돈독하고 사랑으로 살아가야 아이들이 보고 배웁니다. 그래야 그 아이도 커서 결혼하게 되면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부모들이 교회생활, 헌금생활, 나누는 생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보고 배우게 되면 장성한 후에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본 것이 없이 자라면 아이들은 성장한 후에도 할 수 있는 용기가 없어집니다. 부모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와 매일같이 부부싸움을 하면 그 아이들이 나는 커서 저렇게 살지 않을 거야 하고 다짐을 하지만 문제는 그 아이들이 커서 그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너희는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말씀에서 사도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개념적으로 듣거나 그냥 하는 설교로만 듣지 말기를 바랍니다. 개념적으로 듣게 되면 이 말씀은 나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신앙생활을 할 때 “단무지 신앙”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단순하게 믿고 무식하리만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지칠 줄 모르게 사역하여 끝장을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관계의 악화, 갈등, 불화 때문에 고통을 앓고 있습니다. 그 고민을 가서 풀고 해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마음이 열리지 않고 다가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무지 신앙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한번 무식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그러면 세상에 풀리지 않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가르쳐 주실 때 그렇게 아주 무지할 정도로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으면서 그 사랑의 모습을 실연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많은 이웃들이 나에게 누군 인가, 왜 그들이 내 곁에 주어졌는가를.”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들입니다. 그것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이웃을 향하여 마음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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