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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박종순 목사 설교집 (3)(5-28)

by 【고동엽】 2022.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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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엎드리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4년 12월 11일

민수기에는 두가지 큰 반역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14장에 기록된 바란 광야 가데스의 반역 사건 입니다. 애

굽에서 나온지 2녕 정도 지난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렀

을 때 각 지파의 대표 한 사람씩을 뽑아 장차 들어갈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했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군들은 모세의 파송을 받고

그 딪당에 들어가 40일 동안 비빌리에 샅샅이 정킹마을 마치고 돌

아왔습니다. 그리고 정탐 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땅에서 가져

온 실과를 보이며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며 심히 커

우리 실력으론 그 땅을 점령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이

보고가 끝나자마자 백성이 소리를 지르며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원망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애굽에서 죽었거나 이곳 광야에서 죽는 것이 좋았겠다.

2) 왜 하나님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그들의 칼에 죽게

하려는가

3)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 났겠다.

4)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 모세를 향한 반역이었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반

역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며 애굽으로 돌아가자던

그들은 단 한명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

고 능히 들어갈 수 있다던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습니다.

민14:27절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조치가 기록되오 있습니다.

1) 나를 원망하는 이악한 회중을 어느때까지 참겠느냐

2) 내가 그들의 원망을 다들었다

3) 말한대로 해 주겠다.

4) 너희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다.

5) 너희 시체가 광야에서 없어질 때까지 너희 자녀들이 40년을

광야에서 유리방황하게 될 것이다.

6) 그리고 하나님과 모세를 악평한 열명은 하나님 앞에서 재앙

으로 죽었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진노였습니다. 40년을 방황하게된 결정적 이유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반역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다른 하나의 반역은 가데스의 반역이 있은지 38년, 길고도 험했

던 광야 바황이 끝나갈 무렵 당시 지도층 인사였던 [고라, 다단,

온]세사람이 작당하여 반역사건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주모자였던 [고라]는 레위 지파인데다 모세의 사촌 형제였

고 성막의 기물을 운반하고 관리하는 고핫 자손이었습니다. 한 마

디로 그래선 안될 사람이 반역 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들 세 사람은 250명의 저명 인사들을 포섭하여 구테타를 모의

하고 항명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악은 언제나 악과 뭉치기 마련입

니다.

그들이 내건 원망과 불평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너희가 분수에 지나치다 왜 너희가 스스로 여호와의 총회 위

에 스스로 높이느냐

2)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과야에서 죽

이려하느냐

3) 우리 위에 왕이 되려느냐

4) 왜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지 않고 고생을

시키느냐

5) 이젠 가나안은 싫다, 물러가라는 것이었습니다.

 

 

 

38년전 바란광야 가데스의 반역 때문에 38년 동안 광야를 방황해

야 했던 그들은 38년후 고라의 반역으로 엄청난 징벌을 받게 되었

습니다.

민16:32절을 보면 땅이 갈라져 산채로 고라, 다단, 온 세삼과 그

의 가족과 온 집이 생매장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동조했던 250명

저명 인사들은 하나님의 불에 소멸되고 말았습니다(16:35). 그 뿐

만이 아닙니다. 그 사건 이후 하나님의 진노로 동조했거나 동의했

던 14,700명이 염병으로 죽었습니다. 이 두 반역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두렵고 치욕스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두 반역 사건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의 항변이나 반역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그 이유가 무엇이든 하나님은 피조물의 도전이

나 항거나 반역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은 유일하게 인간들입니다. 개나 돼지나 소나 말 심지

언 범이나 사자도 창조주를 반역하지는 않습니다. 인간만 반역죄를

짓고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단코 그 죄를 용납하지 않은십니

다.

롬9장20절을 보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

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

느냐 말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말대로 된것입니다(14:28)

"광야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 "가나안은 절대로 못들어간다""우

리는 안들어간다"이 말은 저들이 걸핏하면 쓰던 상투어였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말대로 된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될꺼야]를 반복해도 좋은 사람이 되기가 힘든 법인

데 [나는 나쁜 놈이 될꺼야, 나는 죽을꺼야, 나는 망할꺼야]를 노

래 부른다면 그 사람은 그대로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는 원망과 불평은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심리는 반드시 남을 끌어 드리고 싶어집니다. 동조자

를 찾고 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고라는 250명을 모았습니다.

네째는 모든 원망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바란광야 사건도 고라의 사건도 하나님이 친히 들으셨고 보셨습

니다(민14:27). 하나님은 돌이나 나무나 쇠붙이로 만든 신이 아닙

니다. 듣고 보고 느끼고 행동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19:14절에서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섯째는 모세 원망과 하나님 원망이 같은 맥락에서 취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4: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라고

했고, 14:11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

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14:27절을 보면 "나

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라고 했습니

다. 민16:3을 보면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거스렸다"고 했고,

16:30절을 보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했다"고 했습니

다.

민16:4을 보면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고, 16:42을 보

면 "모세와 아론을 칠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더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

이요 보내신 자요 일군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개인적인 권력욕이

나 공명심 때문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해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심부름

하고 있는 종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사역을 방해하고 반항

하고 반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하나님

 

 

 

이 간섭하신 것입니다.

여섯째는 댓가 지불이 너무나 크고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가데스 사건의 경우는 주모자가 모두 진노로 죽었고 40년 방화이

시작 되었습니다. 고라의 경우는 당사자와 부화뇌동했던 250명 무

리들, 말로 마음으로 동조했거나 박수를 보냈던 14,700명이 멸망했

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 행동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하고자하는 이야기의 초점은 처참한 비극을 들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을 대했던 모세의 태도를 살펴 보려는 것입니다.

14:5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자라"고 했고

16:4을 보면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라고 했고 16:45을 보면 "두

사람이 엎드리니라"고 했습니다.

출34:8절을 보면 "모세가 급히 엎드렸다"고 했고 민20:6을 보면

"모세가 회막문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엎드리는 사람입

니다. 힘들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막막하면 땅에 엎드렸습니다.

신9:18-25을 보면 40일동안 그는 물도 떡도 먹지않고 하나님 앞

에 엎드렸습니다. 수5:14을 보면 여호수아도 엎드렸습니다. 모세한

테 배운것입니다. 도대체 엎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첫째는 자신을 낮춘다는 것입니다.

높은 사람 가진 사람 강한 사람은 대개 뻣뻣하게 서거나 앉기 마

련입니다. 땅바닥에 엎드리는 것은 종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모세

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래서 땅바닥에 엎드린 것입니다.

둘째,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땅바닥에 엎드린 종은 [머리를 들라]는 임금이나 주인의 하명이

있을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답답하고 속상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을 앞에 놓고 하나님

의 뜻을 기다리기 위해 엎드린 것입니다.

셋째, 기도를 의미합니다.

모세는 땅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말씀 드리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뜻을 기다리기

위해 엎드렸던 것입니담. 한마디로 모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결과입니다. 엎드릴 때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1) 절망하고 낙심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 태도는 문제를 더 힘들게 만들 뿐 아니라 회복 가능성

차체를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2) 원망하는 태도입니다.

사회를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여건을 원망하고 이웃을 원망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

다. 그러나 원망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원망하면 결과는 파멸입

니다.

3) 출구를 찾는 태도입니다.

누구를 만날까? 누구에게 호소할까? 누가 도와줄 수 있을까? 지

평선이나 수평선에서 출구를 찾는 것입니다.

4)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과 태도는 하나님께 부탁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회사

나 가정이나 업체에 찾아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그토록 애타

게 찾던 누군가를 보내시고 누군가를 통해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

시는 것입니다.

죠지 뮬러는 한 평생 동안 기도 응답으로 최고 기록을 세운 사람

입니다. 통산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톺해서 기도 응답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경우 엎드릴 때마다 하나님이 임재하셨고 사건에 개입하

셨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셨고 주변의 교통 정리를 해 주셨

습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였던 멜랑크톤은 "환난과 곤고는 나를 골방으

로 몰아 넣어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는 그 환난과 곤고를 내게서 떠

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죤 번연은 "만일 당신의 입이 벙어리일때 하나님

은 당신에게 귀머거리가 되실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벙어리는 말

못하고 디스크 환자는 땅바닥에 허리굽혀 엎드리지 못합니다. 나는

영적으로 버어리가 아닙니까? 허리 못굽히는 허리병 환자는 아닙니

까?

지금 입을 열어 기도합시다. 엎드립시다. 지금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여 내가 기도하나이다 내 기도를 들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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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승리하는 교회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4년 12월 04일

 

우리는 본문 20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

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뜻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교회에 승리

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한구절 속에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평강의 하나님께서 사단을 이기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투는 칼과 칼, 총과 총의 대결입니다. 맨 주먹과

권총을 든 사람이 싸우는 것은 어린 아이와 어른의 싸움과 같은 것

입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신데 반해 사단은 난폭하고 간교하기

짝이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평강의 하나님이 사단을 상하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참 승리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

다.

창 3:15절을 보면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미 태초에

사단과의 영적 전쟁이 있었음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단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악을 쓰고 고함을 지르며 덤비는 사람보다는 싱글싱글 웃으며 덤

비는 사람이 이기기 마련입니다. 사단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싸움을 걸지만 하나님은 평강으로 이기시는 것입니다.

사단이 동원하는 무기는 어떤 것들입니까? 17절과 18절이 설명해

줍니다.

첫째, 분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하나되게 하시고 사단을 분쟁하게 합니다. 부부가 갈라

서게 하고 형제가 분쟁하게 만듭니다.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시기

하고 질투하게 만듭니다. 사단은 교회 안에서도 분쟁을 일으킵니

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되게 하십니다.

엡4장3절을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하나되고 싶은 마음 하나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되는 것을 방해하

고 찢는 것은 사단의 역사인 것입니다.

둘째, 거치게 합니다.

17년을 보면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리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치게 한다는 것은 방해가 된다는 것입

니다.

영의 세계는 민감한 세계이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가 그

시야를 가려도 그 영혼에 큰 그늘이 드리우는 것입니다.

카메라 렌즈에 눈섭 하나가 붙어 있었는데 그대로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현상을 해보니 사진에 큰 기둥 하나가 가로 놓여 있었습

니다. 눈섭이 확대인화된 것입니다.

내 영혼을 방해하는 것은 눈섭처럼 작은 것도 닦아 내야 합니다.

사단은 모든 것을 거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하면 필요없는 사람

이 되게 만듭니다. 그 공동체에서 필요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필요

한 사람이 됩시다.

셋째, 예수를 섬기지 않습니다.

18절을 보면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

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 배만 섬긴다"고 했습니다.

사단은 자기를 섬기게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것도

내 이익과 내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고 가르칩니다.

털끝 만큼만 손해되는 일이 생기면 악을 쓰고 덤비는 것이 사단

 

 

 

의 생활 방법입니다.

미국의 큰 제과회사 사장이었던 존 하일러는 사업을 시작하기전

하나님과 중요한 약속을 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를 하겠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는 통장 하나를 별도로 만들고 통장 주인의 이름을

M.P라고 했습니다. M.P는 My partner의 약자입니다.

그날부터 전체 수입의 10분의 1은 그의 파트너인 하나님 통장에

자동으로 입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파트너에게

10분의 2, 10분의 3으로 이익배당을 늘려갔습니다. 그와 함께 그의

사업 역시 2배 3배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

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옛날 얘깁니다만 비만오면 교회 마당에 꽃을 옮겨다 심는 권사님

이 있었습니다. 자기집 마당에 심으면 시들고 교회 마당에 심으면

잘 자란다며 자기집 마당의 꽃을 떠다가 심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꽃이 자라는 모습을 자켜보고 순을 집어 주며 기뻐하는 그 모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바로 그런 태도가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태

도인 것입니다.

네째, 순진한 사람을 꼬입니다.

18절 끝을 보면 "공교하게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공교하다는 것은 세련되었다는 것이고 아첨한다는 것은 듣기 좋

고 보기 좋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세련된 매너와 듣기 좋은 화술과

보기 좋은 태도로 순진한 사람을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별명은 유혹자, 꼬이는자 입니다. 그 사람을 파멸시키기

위해 꼬이고 미혹하는 것이 사단의 전문 기술입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감언이설띵

에 넘어가 멸망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사단의 유혹과 시험을 이

기도록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2. 속히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사단의 시험이나 유혹은 영원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

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 시련, 슬픔, 시험이라는 것들은 영원히 계속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한 그것들

은 속히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사단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환난이나 시험

이나 실패나 고통이라는 것들은 한평생 내 뒤를 따라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20절 끝 부분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바

울은 하나님께서 사단을 속히 이기게 하시는 그 사건을 은혜로 해

석한 것입니다. 그 은혜가 내게 임할 때 시험도 유혹도 고통도 실

패도 속히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주님의 은혜가 임해

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받는 몇가지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겸손해야 합니다.

은혜란 나 자신의 능력이나 가능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라야 된다는 겸손을 가진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

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다든지 내가 해 낸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

진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둘째,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도 구하는 사람이 받습니다. 은혜도 갈망하고 사모하는 사람

 

 

 

이 받는 법입니다. 이유는 갈증난 사람에게라야 냉수 한그릇이 꿀

맛인것처럼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꿀보다 더 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

다.

지난번 미국의 중간 선거는 민주당의 참패와 공화당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공화당의 승리를 미국 언론들은 보수파의 승리라고 표

현했습니다. 그 이유는 민주당의 정책이나 클린턴의 정치 노선이

진보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클린턴은 대통령 선거 공약에 동성연애를 인정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동성연애자들의 표를 긁어 모았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의 모든 국민하교에서는 매일 한차례

씩 의무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했습니다. 매일 아침 수업

을 시작하기전 전국 교실에서는 담임 선생님의 인도로 기도를 드리

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도인 케네디가 대통령

이 되면서 1962년 헌법 2조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국시에 배치된다하여 연방대법원이

위헌판결을 내리고 기도를 없애버렸습니다. 그것이 케네디가 위임

한 다음해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기도를 빼앗겼던 사람들이 이번 대거 공화당의 승리의 주역

들이 되면서 빼앗긴 교실의 기도를 되찾아 미국의 위기를 구하고자

나선 것입니다. 그들을 언론은 보수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말합니다.

오늘 미국이 이 모양 이 꼴로 전락한 것도, 심지어 국민학교 아

이들과 시골의 중고등학교 아이들까지도 총기를 휴대하고 마약 중

독에 빠져 들어가는 것도, 그리고 케네디가 총에 맞아 죽은 것도

기도시간을 빼앗은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태 경제협력 각료회의 18개국 정상 회담

을 마친 클린턴은 기자회견에서 공립학교 기도시간 부활 문제를 반

대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을 했습니다.

공화당의 공세는 단순한 정치 공세가 아닙니다. 병든 미국, 썩어

가는 미국을 다시 살리는 처방은 기도 밖에 없다는 신앙적 진단을

내린 것입니다. 저도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클린턴은 타 종교의 반발을 고려해 [자발적 기도] 방안을 제시했

다지만 미국이 다시 사는길은 클린턴과 민주당과 공화당과 전 국민

이 무릎꿇고 두손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썩어 곪아터져 건드리기만 하면 동서남북 사방에서 고름이 터지

는 이 나라! 그것이 4공 책임이냐, 5공 책임이냐, 7공, 7공 책임

이냐를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살릴 길이 뭡니까? 청와대도 국회도 사법부도 교회도 모두 한 통

속이 되어 기도 운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1863년 4월 30일 목요일을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국민금식과

기도의날]로 지킬 것을 선포하면서 "우리는 계속된 성공에 도취되

어 너무 자족하고 교만한 나머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우리 자신을 겸비하여 국가적인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관용과 용

서를 빌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부산에서 만난 모장로님은 약국을 경영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아

파트 단지에 있는 약국이어서 저녁 11시 지나서야 문을 닫는다고

했습니다. 그 분의 선친도 장로님이셨는데 평생 새벽 기도를 빠뜨

리지 않으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세상 떠나기전 모든 죄를 다 낱낱

이 회개하고 숨을 거두셨는데 심지어는 교인들 손이 더럽다고 악수

안한 것까지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분의 아들 장로 역시 아버지가

 

 

 

물려준 전통을 지키기 위해 새벽 기도회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

다. 집에 돌아가면 저녁12시 잠자리에 들면 1시가 되지만 반드시

일어나 새벽 제단을 쌓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참으로 좋은 모범과 전통을 물려 받았

다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은혜받는 비결도 기도입니다. 국가가 살고 민족이 사는 것도 기

도입니다.

1773년 불란서 의회가 [불란서 국민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

다]는 결의를 했습니다.

그 이후로 부터 불란서의 정신과 도덕과 윤리는 곤두박질치기 시

작했습니다. 그후 불란서의 혁명 국회는 다시 "불란서 국민은 초월

적 존재와 영혼불멸은 인정한다"는 결의를 투표로 결정했습니다.

그것마져도 없었더라면 불란서는 망했을 것입니다. 기도해야 가정

도 살고 문제도 해결됩니다. 기도해야 은혜받고 승리 할 수 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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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던지고 다시 찾는 법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전 11:1-4

 

 

미국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26세)는 '부인들'이라는 영화에 1천 2백만

달러를 받고 출연해 사상 최고의 여배우 출연료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우

리 돈으로 96억원입니다.

같은 영화에서 [맥 라이언]은 1천만 달러(80억원)을 받았고,"씨스터 액터"

라는 영화에 출연한 {우피 골드버그}는 8백만 달러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영화 한 편에 출연하고 96억원을 받았다는 보도를 읽으면서 몇가지

생각나는게 있었습니다.

첫째는 도대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점입니다. 얼마나 잘 나

고, 잘 생기고, 연기가 좋아서 천문학적인 출연료를 받을 수 있을까.

둘째는 세계의 내노라하는 배우들이 얼마나 부러워 할까.

셋째는 그 돈을 어떻게 쓸가.

넷째는 그토록 엄청난 출연료를 지불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골이 찬

사람일까. 골이 빈 사람일까 하는 것이빈다.

얼마전 미국에서 WBA챔피언을 뽑는 권투시합이 있었습니다.

45살된 [조지 포맨'과 25살난 [마이클 무어러]의 권투경기에서 포먼이 10

회에 무어러를 KO시키고 챔피언이 되었습니다.KO로 상대편 선수를 때려 눕

히고 KO승을 거둔 포먼이 자신의 코너로 돌아가 기도하는 모습이 텔리비젼

으로 증거되었습니다.

현재 [조지 포먼]은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시 북부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권투시합이 있기 전 주일 포먼은 강단에서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뺨마저

내밀어 주라"는 요지의 설교를 해 교인들을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포먼 목사가 링에서 그것도 20살이나 아래인 무어러 선수를 두

둘겨 패 KO시키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본 많은사람들이 도대체

링에서 뭐라고 기도했는지 모르겠다고 비아냥댔습니다.

그러자 포먼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성직지가 사람을 팰수 있느냐는 공세에 그는 "복싱은 하나

님 말씀을 전하는데 필요한 자금마련을 위한 수단이며, 선교의 일환이다"라

고 응수했다고 합니다.

그는 87년도에 권투로 벌어들인 파이트머니로 불우청소년을 돕는데 전액을

썼다고 합니다.

마이클 무어러와의 경기를 지켜본 권투전문가들은 역시 목사 복서로서 모

범적인 매너를 보여줬다고 칭찬했습니다.

솔직하게 저는 96억원을 받았다는 미녀배우 [줄리어 로버츠]보다는 흑인목

사이자 권투선수인 [조지 포먼]이 더 매력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다움이란 얼마나 버느냐, 얼마를 가졌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버느냐, 어떻게 쓰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

다.

지난 10월 최명길 자매가 방송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짤막한 그의 수상소감

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오늘 제게 주시는 상금은 제가 다니는 충신교회를 통해 르완다 난민을 돕

는데 쓰겠습니다."

이 짤막한 얘기는 세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연기자로서의 신선한 이미지를 높혔고,

둘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걸 밝혔고,

셋째는 충신교회를 알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옛말에 짐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기독교인의 청

지기관은 바로 벌고 바로 써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청소년시절 홍길동전이나 임꺽정 소설을 진지한 흥미와 관심을 가지

고 읽었습니다. 그들의 의협심과 탐관오리를 징벌하는 그들의 의기가 손뼉

을 칠만큼 통쾌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때의 소견이었습니다.

정당한 행위란 동기도 방법도 결과도 좋아야 합니다.

제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하더라도 도둑질을 하거나 사람을 죽이면서 그 목

적을 성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이스라엘의 3대왕 솔로몬의 인생과 신앙고백록입니다.

그는 전도서를 통하여 인생이 무엇이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자신의 경홈을 반추하며 밝히고 있습니다.

11장 본문에서 그는 "던지라.. 다시 찾으리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 교훈을 찾겠습니다.

 

1.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1절을 보면 "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했

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식물은 내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

다. 먹는 것으로 시작해 쓰는 것, 소유한 것들을 말합니다.

동물과 사람의 차이가 여러가지입니다.

동물은 영혼이 없으나 사람은 영혼이 있습니다.

동물은 고도의 윤리성이 없지만 사람은 윤리적 결단과 삶이 있습니다.

동물은 하나님 예배가 없지만 사람에겐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행위가 있

습니다. 동물에겐 언어와 문자가 없습니다만 사람에겐 언어와 문자와 과학

과 문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겐 너무나 많고 다양한 생필품이 있습니다. 동물은 필요한

것들이 간단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겐 집, 자동차, 침대, 이불, 베개, 전기

불, 저금통장, 돈,보석, 숟가락, 젓가락, 의복 등... 그 수를 셀수가 없습

니다.

 

동물들에겐 없어도 되는 것들이 사람들에겐 너무나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

고 그런 것들은 만족이 없습니다. 더 좋은 것들이 줄을 이어 개발되고 시판

되고 있기때문입니다.

당시 솔로몬은 최고의 향락과 사치를 만끽하며 살았던 통치자였습니다. 부

와 영화와 향락을 마음껏 즐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여기 몇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고 유행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영원히 가지고 있을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본인은 영원히 가지고 있고픈 마음이지만 그것들은 언젠가 내 곁

을 떠나 물흐르듯 흘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관식을 하는 묘지에서 세상떠난 부인의 관 위에 손으로 흙을 덮

으며 중얼거리던 남편의 독백이 생각납니다.

그것은 "바보같은 사람, 이렇게 훌쩍 떠나려면서 집수리는 뭣하러 했소"라

는 것이었습니다. 구름이 흘러가고 물이 흐르듯 우리의 모든 것도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둘째 주라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물에 던진다는 것은 대상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대상이 분명하지 않더라도 그 사실 자체만으로 귀한 것입니다.

저는 6.25전쟁 직후 미국사람들이 보내준 구호물자 가운데 양복한 벌과 구

두 한 켤레를 다니던 교회를 통해 선물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마침 제 발과

몸에 맞는 것이어서 제 차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도 그 신발 임자가 누구였는지, 그 양복 주인이 누구였는

지 모릅니다. 그냥 미국교회 어느 교인이었을 것이라는 것외에는 아는 이

없습니다.

 

 

 

그 구제품을 보내는 미국교회 교인들도 누가 자기 것을 입고, 신고,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보내준 것입니다.

편애는 시기와 질투와 증오와 싸움을 일으킵니다만, 박애는 그런 불순물을

만들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쌀쌀하고 냉정하다는 평을 듣는 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저도 부드러운 남자입니다.

제가 그런 평을 듣게된 데는 저 자신의 개성탓도 있습니다만 특정인만을

위해 목사의 사랑을 편애해선 안된다는 다시 말하면 목사는 만인의 목사여

야하며,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해야 된다는 목회 철학 때문인 것입니다.

저는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를 도와준 나라, 내가 어렸을 때 처음으로

구두를 신게해 줬고, 양복을 입게해준 나라라는 고마운 마음을 갖곤 합니

다.

 

욥기 22:44을 보면 "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긔하면 전능자가 네 보매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라"고 했

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는 물질을 버렸는데 하나님이 그 자리를 친히 메꿔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제아무리 귀한 보배나 값진 보석이라도 뜻있고 값지게 사용한다면 하나님

이 그 빈자리를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본문은 밝

힙니다.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반드시 도로 찾

는다는 것이고, 오래 걸리지 않아 도로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면서 사는

생활이 복이 있음을 기억하고 많이 던지고 삽시다.

쓸데없이 던지고 쓸데없는 것에 던지지 맙시다. 바로 던져야 도로 찾게 됩

니다.

 

2. 많은 사람에게 나눠주라

 

2절을보면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줄찌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첫째 폭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하나나 둘만을 보지 말고 일곱이나 여덟을 보라는 것입니다. 나만 보지 말

고 이웃을 보라는 것이며, 서울만 생각하지 말고, 한국을 생각하라는 것이

며, 한국만 생각하지 말고 북한동포를 생각하라는 것이며, 나아가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둘째 골고루 나누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물질도, 정성도 골고루 넓게 나눠야 합니다.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주라는 구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일곱으로 국한하지 말고 일곱이라는

제한수를 넘어 여덟에게도 나눠주라는 것입니다.어떤 주경학자는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주라는 본 구절을 곱셈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7*8=56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흔히 사랑은 국경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전 세계 어느 곳이나 들어갑

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높이, 그 깊이, 그 넓이, 그 길이로 이

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남을 돕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까?

첫째 성경의 명령입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사랑과 봉사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둘째 주님이 삶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는 것은 거짓말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셋째,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주님이 옥에 갇히셨으며, 주리셨으며 헐벗었으며 목마르셨나이까?"

라는 질문에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언제 무슨 재앙을 당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많이 넓게 던지라"고

했습니다.

심은 만큼 거둡니다.

정을 주면 정을 받고,

덕을 베풀면 덕을 입게 됩니다.

사랑과 온정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경기탓으로 돌립니다만 백화점

은 초만원입니다. 그것은 종말현상입니다.

말세가 되면 사랑이 식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합시다.

남을 도웁시다.

손을 폅시다.

지갑을 꺼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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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제 목 : 물동이를 버린 여인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요 4:27-30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과 한 이름없는 여인과의 만남에 관한 기사로 채워

져 있습니다. 그녀가 누구의 딸이었는지,나이는 얼마나 됐는지, 교육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들에 대해선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어느날 물길러 나왔다가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고, 얘기 끝

에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다는 것이 본문의 줄거리인 것

입니다.

여자라고 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라,리브가,한나,마리아 등 성

경 속엔 여러 명의 여인들의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미라아 여인의 경우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녀의 과거

는 철저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대화는 여자로선 가장 아픈 상처인 과거를 들춰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그 과거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다녔고, 사람접촉을 피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외출이 뜸한 한 낮을 골라 물을 길러 나

왔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과거를 끄집어 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과거

를 부인하지 않고 시인했다는 점입니다.펄쩍 뛰며 웬 사람잡을 소니랴고 잡

아뗐다면 그날 에수님과의 만남은 무위로 끝났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사람, 주님을 마나는 사람에게

이름이 없으면 어떻게 과거가 드러나면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

겠느냐"라는 극단적인 굴욕을 당하면서도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

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주님께서로 더 바짝 다가

섰습니다. 그리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서울시내를 누비며 운전하는 영업용 택시 기사들에게 설교할 기회

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지금까지 교통법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는 사람

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떠니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범법자들이

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법자

아닌 삶은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그날 예수님을 만나 여섯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하

지 않았더라면 일생 어둔 그늘에 묻혀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과거를 들추고 상처를 건드리신 것은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상처를 싸매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시

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렸을 때 종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매일 병원에 가서 수술부위에

부쳐놓은 거즈를 떼낸 후 소독약으로 상처를 닦아냅니다. 그때 그 아픔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파서 악을 쓰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간호사나 의사가 사정없이 미

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주일이나 열흘씩 거즈를 떼내지도 않고 닦아내

지도 않고 약도 바르지 않는다면 환부는 썩어 고름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천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과거를 들추고 괴롭히고 그것을 약점삼아 악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과거를 말함은 악용 치유하기

위해서이며, 주께서 상처를 건드리심은 그 상처에 고여있는 피고름을 닦아

내고 고쳐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1.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 그녀와의 대화를 위해 제자들을 마을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곁에서 이러쿵 저러쿵 거들고 나서는 제자들이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단 둘이 나눴던 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3-15절을 보면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

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

르지도 않고 여기 물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장소가 우물가였기 때문에 화제는 자연히 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자는 마

실 물을 달라고 했고, 주님은 생명의 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단계는 신앙의 초보단계인 것입니다.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 신앙의

주된 관심이라면 그것은 신앙의 초보단계입니다.

먹고 또 먹어도 배고픈 것들,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나는 것들이 세상 것

들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벌고, 얼마나 소유하면 "이제 그만"이라고 손을 저으며 만

족할 수 있을까요?

[프랭클린]은 "만족은 가난한 사람을 부하게 만들고 불만은 부한 사람을

가난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 전서 6:17에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했습니다.

정함이 없다는 것은 재물이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동성 고

기압과 같아서 언제 어디로 옮겨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를 받

고 가지면 된다는 상한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하는 목적도, 사업을 하는

목적도 잘 먹고, 잘 살고, 부자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실현되지 않고 깨어지게 되는 날이면 절망하고 좌절하고

스스로 목숨까지도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

라"고 하자 그는 바로 그런 물을 내게 달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강의실에서 물마시는 것, 밥먹는 것, 숫가락질하는 것, 줄

서는 것, 신호등 보고 길 건너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면 그 꼴이 뭐가 되겠

습니까? 그런 것은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차원과 신앙의 차원을 한 단계 높입시다.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의 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2) 예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물에 과한 이야기가 20절에서 갑자기 예배에 관한 것으로 돌변합니다. 화

제가 바뀐 것입니다.

화제를 극적으로 바꾼 것은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는 그녀의 대답 속에는 진짜 남편이라고 믿고

살았던 사람은 없었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가 불륜과 부도덕으로 일관된 삶이었다는 실토이기도

한 것입니다.이유는 남편아닌 여섯 남자와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과거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안고 있는 도

덕적 갈등과 고민과 함께 영적 갈망을 헤아리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남자나 바라보고 웃고 우는 그녀의 일차원적 삶을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고 예배하는 삶으로 끌어내 주신 것이빈다.

23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

습니다.

금년들어 재벌기업들의 신입사원 채용규정이 변했다고 합니다.

남녀 성차별 없앤 것은 이미 오래고, 전 같으면 병역필,명문대학, 성적 등

이 우선조건으로 꼽혔지만 금년부터는 그 사람의 인성, 적응 능력, 인간관

계, 창의성, 품성 등 주로 인격적 조건이 중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 "자기에게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

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본래 예배(라트뤼오)라는 낱말의 뜻은 "고용된 하인"이라는 말에서 유래했

는데, 그 뜻은 봉사하다, 섬기다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봉사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예배를 써비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쳤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세상섬기고,남자섬기고,그것도 제 남편도 아닌 남자들에

게 시달리며 살던 그녀에게 눈을 들어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하시기 위해

서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녀의 위대한 삶의 전환이 있는 것입니다.

참된 변화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매어달리고, 사람에게 매어 달리며 살던

사람이 그것들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 섬기며 살게 된 것이 참 변화입니다.

삶의 방향과 질이 달라진 것이 참 변화인 것입니다. 드디어 그녀는 사람답

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된 것입니다.

 

2. 그녀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28절을 보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라고 했습니다.

물동이는 식수수단이며, 생활수단입니다. 지금처럼 상수도시설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물동이가 없으면 물을 길어다 먹을 수가 없스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좋고 귀한

시간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모래퍼서 밥만들고 풀잎 잘라 반찬만들어 노는 소꼽장난이 끝나고 진짜 밥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은 모래밭에 그것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갑니

다. 그 밥상을 가지고 들어가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껏 죄에 파묻혀 살면서 여섯명 씩이나 남자 파트너를

바꿔가며 소꼽장난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생활은 고독했고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우물가에서 예수님 만나고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버

렸습니다.

그녀에게 물동이는 그의 지나간 과거였고, 어두운 삶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에겐 버려야 할 것들과 버러선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소중한 것,

귀한 것, 필요한 것, 가치있는 것은 버려선 안됩니다. 그러나 해로운 것,

유익하지 않은 것, 나쁜 것들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간 그 여인은 결단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으

로 다가섭니다. 진실로 예수를 만난 사람은 동네도, 사람도 겁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가던 그 여인의 모습을 영상처럼 보십

시다. 발걸음 가벼웠을 것입니다. 어깨는 덩실거렸을 것이고, 입에선 노래

가 흘러나왔을 것입니다.그리고 그의 눈에는 감격의 이슬이 맺혔을 것입니

다.

그 이야기는 오늘 나의 이야기라야 합니다. 그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 되

어야 합니다.

2)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말했습니다.

29절을 보면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은 와 보라 이는 그리스

도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날 그 여인의 간증과 증거 때문에 39절을 보

면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42절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사마리아인들이 그 여자에게 "우리가 믿는 것

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신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우물가에서 죄많은 여자에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하셨

습니다. 그리고 사미라아 동네에도 사건이 터지게 하셨습니다.

예수 바라보고 믿는 것이 진짜입니다. 예수님이 던지는 폭탄이 진짜 폭탄

입니다.

물동이를 버리게 하신 것도 그토록 저주스럽던 동네로 뛰어들어가게 하신

것도 눈에서 펑펑 눈물이 쏟아지게 하신 것도 예수님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줄을 서 예수를 믿게 된 것도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주여! 나도 그렇게 만들어 주소서, 나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아멘.

 

발행일 : 941120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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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제 목 : 졸지 맙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행 20:7-12

 

 

정상적인 수면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127:2에서 "여

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

러나 잠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교통사고의 주된 원인은 과속운전, 과로운전, 음주운전,

졸음운전이라고 합니다.

고속도로를 주행해본 운전자는 누구나 경험했을 것입니다만 주행중 조는

시간은 불과 2-3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2-3초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졸지 않아야 될 자리에서 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졸음은 일종의

생리 현상입니다. 졸음의 원인은 수면부족일 때,피곤할 때, 식사 후 식곤증

때문에, 허약할 때 등입니다.

졸릴 때 잠자고, 깨야할 때 깨는 것은 자유로운 행복입니다.

그러나 잠자고 싶을 때 잠자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3일간 밥을 먹지 않는 고통보다는 3일간 잠자지 않는 고통이 더 큰 것입니

다. 그래서 고문 가운데 무서운 것은 잠을 못자게 하는 고문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잠은 은헤이며, 축복입니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잔다든지,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졸고 앉

아 있다면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의 중요정책을 결정하는 각료회의에서 장관이 끄떡거리고 졸고 앉아

있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 됐다면 그 장관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골자는 영적인 졸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

기서 주목할 것은 영적 상태가 무너지면 정신상태가 무너지고, 정신상태가

흔들리면 육체도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긴장상태가 무너져 내리면 모든 분야의 나사못이 풀리게

된다는 것이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졸다가 떨어져 죽은 한 젊은이의 사건을 통해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주일에 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7절을 보면 '안식후 첫 날에'라고 했습니다. 안식후 첫날은 주일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고 마침 선교여행중 드로아를

방무한 바울사도가 말씀을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스럽고

복된 날, 복된 장소에서 불상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다락난간에 걸터 앉아서 졸다가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던 1950년 6월 25일은 주일 새벽이였습니다. 그동안

일어났던 대형 사건이나 사고들은 대부분이 주일에 일어났습니다.

작년 (1993년)10월 10일 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침몰로 270명이 희생당한

사건도 주일에 일어났습니다. 휴일을 즐기려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

다. 그중에는 교회다디는 교인들도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이나 주일에 대한 개념을 올바로 정립해야 합니다.

 

창세기 2:2을 보면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

시니라"고 했고, 3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렸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의 출발은 엿새동

안 천지창조 사역을 의해 노동하신 하나님이 쉬신날입니다. 아담이나, 하와

가 쉬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후에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쉬라고 안

식의 법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쉬시도록 해드리고 그대신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날이 안식일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엿새동안 눈코뜰새없이 자기 사업, 자기 직장, 자기 생업에

골몰하다가 안식일이 되면 내가 쉬는 날로 착각하고 놀고 쉬려하고 있습니

다.

그것은 안식일의 기본정신을 망각한 처사인 것입니다.

주일의 경우는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사건으로 바뀌면서

지키게 된 주의 날입니다.

글자 그대로 주일은 주의 날, 주님의 날입니다. 그날의 주인은 주님이십니

다. 그런데 우리는 주인한테 물어보지 않고 휴일이니, 공일이나, 주일이니

하여 제멋대로 남용하고 죄짓는데 쓰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유두고의 경우는 안식후 첫날 교회에 나와 앉

아 있었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떨어져 죽었다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의 교훈은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의 날 주의 전에 나오지 않는 것은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와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참 예배자의 정신과 자세를 가다듬고 앉아 있어야 되

는 것입니다. 주의 전에 나와 바른 에배를 드려야 합니다.

 

2. 그 사건은 말씀듣는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7절을 보며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때 말을 밤중

까지 계속하매"라고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저녁집회가 좀 길어졌는데 3층에서 졸던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잡담하고 노닥거리는 것은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만 진리를 탐구하고 말씀

을 들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은 지루하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

나 그것은 내 생각에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옛날 얘깁니다만, 영화곤에 영화보러 갔다가 중간에 쉬고 본 영화가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빅터 플레밍'이 감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였고, 하

다른 하나는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한 [벤허]였습니다. 지금도 생생한 것

은 그 누구도 '무슨 놈의 영화가 이렇게 길담','쓸데없이 길구먼'이라며 짜

투덜댄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끝을 알리는 The End싸인이 화면에 나오고 극장 안의 불이 켜졌는

데도 사람들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조는 사람도 없었

습니다. 세기의 명화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면서 조는 사람은 [바

람과 함께 사라질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유두고는 하나님을 만나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졸

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졸아선 안될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8절을 보면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다"고 했습니다. 조명은

수면과 직접 관계가 있습니다. 불을 끄거나 조명이 어두우면 졸거나 잠을

청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날 밤의 경우는 윗다락까지 등불을 밝혀 두었습니

다.

그리고 그날 밤 졸았던 사람의 수가 수십 명이었다면 그건 바울의 책임입

니다만 다 정신차리고 말씀듣는데 유두교 혼자만 졸았습니다. 한마디로 은

혜의 등불, 마음의 등불, 영혼의 등불이 꺼졌기 때문입니다.

 

꽃피고 새우는 봄날도 마음이 싸늘하게 식으면 춥게 느껴지는 것처럼 마음

의 등불이 꺼지면 은혜는 떠나고 졸음만 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신자가 은혜받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해

야 다루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은혜받는 것을 방해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에 대해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둘째 말씀에 대해 의심을 일으킵니다.

셋째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불평스러운 마음을 일으킵니다.

넷째 교회를 등지게 만듭니다.

다섯째 졸도록 유도합니다.

 

시험 중에 가장 심각한 시험은 말씀듣다가 거의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설교듣다가 시험드는 것입니다.

'새롭게 하소서' 상담시간에 보낸 편지사연 가운데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헌금이야기를 하면 거부감이 일어나고 은혜가 안되는데 이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제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설교는 합시다와 하지 맙시다로 구분됩니다. 전도해라, 기도해라, 사랑해

라,봉사해라,바로 살아라, 못된 짓 하지말라, 미워하지 마라,죄짓지 말라

등이 계속 반복되고 설파됩니다. 그런데 다른 얘기는 아무 반응이 없다가도

헌금문제만은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부정적 반응을 보이면 내 신

앙이 모자라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거부하는 습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맨날 설교가 헌금소리로 채워진다면 그건 잘못이지만 한두번 정도라면 '주

님 저도 헌금생활 많이하고 바로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소

원하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고 복받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날 그날의 말씀

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도록 노력하십시오."라는 내용의 대답을 한 일이 있

었습니다.

유두고는 말씀듣다가 떨어졌습니다. 만일 충신교회에서 누구누구가 설교

듣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보도가 된다면 그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3. 걸터 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9절을 보면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졸

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왜, 뭣하러 3층까지 올라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위험은 피하는 것이 최상의 예방책입니다. 화재를 예방하려면 불을 조심해

야 하고, 교통사고를 예방하려면 차를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추락을 막으려

면 걸터앉아서 안됩니다.

 

저는 이 상황을 영적 사건으로 조명해 보고 싶습니다.

걸터 앉았다는 것, 그것은 안정감이 없습니다. 그리고 방자스러운 행동입

니다. 의자에 앉는 것도 엉덩이를 디밀고 허리를 등받이에 붙이고 똑바로

앉는 것이 가장 단정한 자세입니다.

영적으로 걸터 앉는다는 것은 뭔가 산만하고 오만하고 그러면서 지쳐있느

니 그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위기입니다.

지난 주간 뉴스위크지 뉴스메이커 안에 두 사람이 소개된 바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인기 텔레비젼 토크쇼의 호스트로 최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

는 [오프라 윈프리]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홍보담당 비서였던

콜린랠리를 내쫓고 다른 사람을 채용했는데 전비서가 20만달러의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시청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것입니다.

거기다가 시청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중이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미지

수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현재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바이얼린 연주가인

금년 23세의 [질 새햄]에 관한 얘기입니다.

 

지난 주 필라델피아 교향악단과 함께 카네기 홀에서 연주회를 가졌는데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얼린 협주곡 연주가 끝나자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박수가 끝나자 그는 슬금슬금 무대 뒤로 걸어가더니 오케스트라의 바이얼린

 

 

 

파트 제일 마지막 줄에 앉아 다른 단원들과 함께 [드보르작] 의 제8번 교향

곡을 신나게 연주했던 것입니다.

교만방자한 윈프리는 구설수에 오르고 겸솨난 질 새햄은 칭찬을 받고 있다

는 기사였습니다.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힘들든지 쉽든지, 편하든지

괴롭든지, 걸터 앉으면 안됩니다. 정신차리고 말씀듣고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졸고 있는 사단병력보다는 깨어있는 1개 소대가 훨씬 더 강한 법입니다.

졸고 있는 교인 10만 명보다는 눈을 똑바로 뜨고 말씀을 경청하는 1천명

교인이 힘이 있습니다.

운전도 졸면 안되고, 공부도 졸면서 하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몽롱한 상태에서는 능률도 오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몽롱한 상태에서

하면 안됩니다.

분재토양에 3대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흡수성이고, 둘째는 통기성이고, 셋째는 배수성이라고 합니다.

분재에 적합한 흙은 공기가 통해야 하고, 물이 흡수가 잘 되어야 하고, 배

수가 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성장의 조건이 있습니다.

교회출석 잘하고, 말씀 잘 먹고, 졸지 않고 깨어 기도하고, 예수님 바라보

고 전진하노라면 믿음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졸지 맙시다. 정신차립시다.

깹시다. 일합시다. 아멘.

 

발행일 : 941113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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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제 목 : 제자가 됩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요 15:7-10

 

 

국토면적에 비해 자동차 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한국이라고 합니다. 그

리고 세계에서 교통사고가 제일 많은 나라도 한국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주한 외국인이 한국에서 운전하는 법을 소개해 화제를 모은 일이

있었습니다(미국 자동차 잡지 오토모티브 뉴스특파원).

 

첫째 파란불은 자동차 경주의 출발신호다. 파란불이 켜지는 순간 반드시

뒷차의 경적이 울릴 것이다. 그 전에 나가라.

둘째 차간거리는 1인치의 틈도 두지 말라. 그 틈을 메우지 않으면 뒷차가

매울 것이다.

셋째 시원하게 달릴려면 레미톤 차를 사서 타라. 모든 차가 길을 비켜줄

것이다.

넷째 모든 차선을 헤집고 다녀라. 주행차선만 골라서 다니면 앞으로 가기

어려울 것이다.

다섯째 차가 막힐 때마다 경적을 길게 울려라. 스트레스도 풀고, 건강에

좋을 것이다.

여섯째 손을 흔들어라. 마구 끼어들고도 손만 흔들면 된다. 얼굴은 보이지

않으니까>..

 

한마디로 우리의 자동차 문화를 비아냥댄 글이었습니다.

교육부는 금년 9월부터 유치원에서는 한해 40시간, 국민학교와 중학교는

20시간 이상 도로교통법과 경범죄 처벌법 등을 가르치도록 의무화했다고 합

니다.

그것은 잘못된 운전습관이나 비뚤어진 운전문화를 어려서부터 바로 가르치

자는 때늦은 발상인 것입니다.

누구에게엇 배우느냐, 어떻게 배우느냐, 무엇을 배우느냐에 따라 그 사람

의 인격과 인생과 신앙이 결정되는 것이빈다.

훌륭한 스승에게서 바른 삶을 배우면 인격인이 됩니다. 위대한 스승에게서

참 도를 배우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잘 만나야 하는 것이빈다.

 

본문 8절 끝을 보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

리가 예수님의제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있으며 제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본문 속에서

찾아보겠습니다.

 

1. 제자는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7절을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부입니다. 그래서 '무촌'이라고도 합

니다. 그리고 부인을 [안사람]이라고 부릅니다.여기서 말하는 [안사람]이란

집 안에 있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람, 그래서 언제나 함께

있는 사람,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나와 함께 살자. 내 집에 들어와 살자, 나와 함께 일하자는 것입

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친구들 몇 사람이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의 꽃을 피우느라 식사시간이 길어져 저녁 10세가 넘었습니다. 식사 후에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한잔씩 하기로 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집에 전화를 걸더니 부인이 몸살기가 있으니 빨리 약을 사오란다면 먼저 자

리를 떴습니다.그러자 3년 전에 부인이 세상을 떠난 친구가 "우리는 천천히

일어섭시다. 집에 가봐야 기다릴 사람도 없는데.."라며 천정을 바라보았습

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시한부

존재들입니다.

늘 언제나 기다려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가끔씩 지방집회를 마치고 돌아

오면 새벽 2시나 3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집에 도착해 보면 아이

들은 잠에 골아떨어져 있지만 제 아내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밖에서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

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니 생각했지만, 두번 세번 울려도 대답이 없자 섭섭

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기 혼자 잠을 자다니..."

그러나 만일 입장이 바뀌어 내가 기다렸다면 나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안에] 거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이 원리가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안에 거하면 '원하는대로 이루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예수 밖에 거하면 원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부림처도 안되고, 안간힘 써도 안되고, 발을 동동 굴러도

안되는 이유는 내가 예수안에 거하지 않고 예수 밖에 살기 때문인 것이빈

다.

 

우린 자칫 잘못하면 예수 안에 산다든지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을 부자유자

나, 속박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예수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안되게 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뜻을 이루려면 행복을 잡으려면 진실한 성공을 이루려면 예수 안에 거해야

합니다.

5절을 보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2. 과실을 맺어야 합니다.

 

8절을 보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

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의 비유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과실

을 맺지 않는 가지는 재해 버린다"고 했고, 4절에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는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고

했고, 8절에서는 "과실을 많이 맺어야 제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나무는 관상수가 있고, 유실수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관상수에게서 과실

을 찾지는 않습니다.그러나 유실수라면 당연히 과실이 있어야 합니다. 포도

나무는 과실을 맺는 유실수입니다.

탐스럽게 잘 익은 포도는 포도주의 원료가 되는가 하면 과실로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강조되고 있는 포도나무가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입니

다.

그리고 과실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당연한 본분을 의미합니다. 과실

은 나무의 결과이며 평가기준입니다.

 

 

 

포도가지가 제아무리 무성해도 과실이 없으면 포도나무 가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지가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영양공급이 중당됐기 때문입니다. 그리

고 6절을 보면 "과실이 없으면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고

했습니다.

 

나에겐 과실이 있습니까?

일년동안 뭘했습니까?

단 한 알의 과실도 맺지 못한 채 잎떨어진 앙상한 가지만으로 금년을 마무

리할 생각입니까? 제자는 과실을 맺어야 합니다.

금년 봄 유치부에서 아이듬에게 호박씨를 나눠주면서 집에 가져다가 심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 머리통보다 더 큰 호박 한 덩이를 가져온 아이가 있었습

니다. 자기집 아파트앞에 심었더니 호박이 열렸다는 것이빈다.

1년 동안 교회를 들락거리면서 신앙생활하면서 호박 한덩어리도 맺지 못했

다면 그는 호박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제자는 열매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 기도의 열매, 봉사의 열매, 성령의 열매들 가운데 다는 맺지

못했다 하더라도 몇가지는 맺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3.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9절을 보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했고,

10절을 보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라히라"고 했습니

다.

예수님의 제자는 스승인 예수님의 삶을 따르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여러가지 면에서 사표가 됩니다.

예를 들면 청빈, 검소, 절제, 근면,관용,진실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본받

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희생과 사랑입

니다.

 

만일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외면

한다면 그는 제자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마

디로 자기를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자기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문법을 연구해 보면 명사의 종류가 여러가지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명사,인칭대명사,추상명사 등 명사의 종류가 여러가지 입니다. 사랑은

추성명사도 아니고, 형용사도 아닙니다.

 

사랑은 사건이며, 역사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뭔가를 골똘히 추상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

다. 사랑은 행동하고 사건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사랑을 추상화하고, 형용사화하고, 소설화화고,드라마화

하고,작품화해버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죽어가는 자식의 머리맡을 떠나지 않고 밤새 뜬눈으로 눈물을 쏟으

며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의 사건입바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로 죽어가는 인간을 멀고 먼 하늘에서 지켜보며 관조하

고, 사색하고, 명상한 하나님의 명상록이 아닙니다.

친히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매맞고, 찢기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몸으로 고난의 사건인 것입니다.

 

제자는 그 사랑을 배우고,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신장기능이 약화돼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찰결과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문제

 

 

 

는 누가 신장을 기증하느냐였습니다.

 

어느 주일날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된 유명한 목사님이 전후사정

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교인들 가운데서 신장기증자가 나와야 될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기증자의 조건을 이야기한 후 고통받는 주의 종을 위

해 신장을 기증할 뜻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잠시후 여

기저기서 두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인 천여명이 거의다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신장은 한 사람의 것이

면 되기 때문에 손을 내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데 놀랐습니다.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겠습니다"라며

오리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불었습니다.

"이 오리털이 머리 위에 내려앉은 사람을 선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의 뜻을 기다리기 위해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드

디더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리털이 가까이 날아오면 사방에서 주여, 할렐

루야, 아멘 소리가 입바람에 섞여 나오고 그와 동시 오리털은 다른 곳으로

날아갑니다. 오리털은 그 누구 머리 위에도 내려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위해 신장을 바칠 사람을 결정하는 오리털이 내 머리 위로 날

아오고 있을 때 나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제자는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따르고,실천해야 합니다. 제자가 지킬 게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아멘.

 

발행일 : 941106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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