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본문에서 놀라운 부분은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부르는 2장 4절입니다. ‘여자여’ 포도주가 없는 상황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본문이 가장 우리를 놀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자기 어머니를 분명히 메테르(?), 자기 어머니라고 소개했는데 예수님 어머니라고 소개한 요한복음의 저자와는 달리 예수님은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여’라고 부르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어려운 본문입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건 요한복음 첫 부분에 나오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11절에서 오늘 이 본문을 요한복음 전체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얻습니다. 2장 11절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영광이란 말입니다. 표적이란 말과 영광이란 말입니다. 영광이란 말이 왜 중요한가? 원래 영광은 구약성경에서 성전의 지성소에 머물던 거죠. 이 영광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처음 유인할 때 불타던 그 빛입니다. 시내산 정상에서 두터운 검은 구름 안에 감추어졌던 게 영광입니다. 이사야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다가 자기가 죽었다고 소리치게 만들었던 그 거룩한 빛이 영광입니다. 영광은 우리의 불길함과 죄악됨을 순식간에 들추어내는 하나님의 존재자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하나의 빛입니다. 이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 이건 구약백성들이 보았던 것이고요.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보았던 것입니다. 직접 보았습니다. 그다음에 열왕기상 8장 11절에서 솔로몬의 성전이 완성됐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다음에 출애굽기 40장 34-35절에 성막을 준공하고 마침내 이동식 성전인 성막을 세웠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습니다. 영광,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결정적으로 구별 짓는 표지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머물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왕적 통치권을 행사할 거란 증거를 역사 속에 남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모든 세상 만민의 역사와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증거는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성전에 머물렀어요. 그런데 여호와의 영광은 성전에 머물렀지만 그걸 본 사람은 제한돼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 왕들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객관적 표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역사임을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좋다 하고 이스라엘 역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향도하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이스라엘 역사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객관적 증거가 있습니다. 그 객관적 증거는 무엇일까요? 주관적 증거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있는 겁니다. 그것도 물론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건 소수에게만 관찰됐습니다. 목격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경험한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표징은 무엇입니까? 어떤 존재가 연속적으로 출연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자들이죠. 예언자들의 존재가 이스라엘 역사를 하나님이 함께하신 역사로 결정적으로 구별 짓고 각인시키는 증거가 되죠. 예언자들이 하나님 영광의 인도를 받았고 하나님 영의 추동을 받았고 하나님 영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예언자들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언자들이 왕과 제사장과 지주와 거짓예언자들과 일반백성을 민중을 깨우쳤고 이방인들을 책망했기 때문에, 예언자들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 함께하신 게 되죠. 그런데 예언자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나타난 초자연적인, 자연 질서를 초월한 것 같은 그런 표적들이 예언자의 신임장입니다. 대표적으로 예언자의 신임장은, 최초의 예언자, 예언자의 신임장, 성경에서 최초의 예언자 이름을 듣는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최초의 개인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개인기란 말은 개인에게 위탁된 카리스마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표적을 행했습니까? 불임녀를 일시에 치료하는, 임신하는 못하는 블레셋의 여인의 태를 갑자기 열어젖히는 즉 임신 잘 하게 만드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중보, 그는 선지자라 그는 임신 못하는 이방여인들의 태를 열어서 일시에 임신하게 만드는 표적을 보였습니다. 그다음 예언자는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그다음 예언자는 누구입니까? 하늘에 천둥번개와 더불어 지진과 천둥번개를 동원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각시켰던 예언자가 누구죠? 사무엘, 아얄론 골짜기의 여호수아도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다윗, 전부 다 무엇입니까? 모든 예언자는 무얼 보였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표징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자의 강력한 표징과 함께 활동했던 예언자의 마지막 주자가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18만 5천명의 적군들이 하룻밤 사이에 전멸되는 사태를 몰고 온 기도의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표적과 여호와의 영광은 동궤, 같은 궤적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구약시대 때 떠나버렸습니다. 어디로 떠났습니까? 에스겔 8장 10장 1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성전 한복판에 있던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올라 성전 동편산을 떠올라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뭐가 됐습니다. BC.586년 경에 성전은 돌무더기가 됐습니다. 뭐가요? 여호와의 영광이 그 안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의 영광이 거할 때 성전이 붕괴되면 여호와의 영광이 반응을 했겠죠? 그런데 바벨론 군대가 와서 여호와의 영광이 한 때 머물렀던 성전을 돌로 부시고 공성퇴로 치고 박격포로 쏘았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면 성전은 뭐가 됩니까? 돌무더기가 됩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의 영광이 어디에 다시 출연하느냐면 에스겔 1장에 나타납니다. 바벨론 포로 한복판에 성전에 계시던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인구가 90% 정도 됩니다. 바벨론에 끌려 간 인구는 10% 정도밖에 안 됩니다. 10%도 안 됩니다. 심지어 14만 4천명만 돌아왔다고 하는 걸 보니 매우 적은 숫자만 있습니다. 여러분 바벨론 포로 땅에 가서 하나님의 불의 연단을 받은 그 백성에게 여호와의 영광이 있다는 그 말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연단을 받고 하나님께 매를 맞는 그 백성이 여호와의 담지자가 되고, 가나안 땅에서 매도 안 맞고 버림받고 더 이상 예언자의 탄핵과 규탄도 받지 않는 그런 하나님 말씀의 가청권에서 너무 멀어진 팔레스타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영광이 더 이상 머물지 않는 땅이 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디가 하나님 영광이 머무는 땅이 됐습니까? 바벨론 포로의 땅은 하나님 영광이 머물렀기 때문에, 하나님 영광이 머물면 반드시 누가 나타납니까? 하나님 영광이 머물면 어떤 존재가 나타나죠? 예언자,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이 이렇게 잘못됐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역사 가운데 있다면 누가 나타나겠어요? 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누가 일어날까요? 예언자된 목사가 일어나겠죠? 하나님 함께 하신다면 여러분 인생이 잘못됐는데 비탈길로 절벽으로 치닫는데 여러분이 하나님의 그 손아귀에 있고 하나님의 통치에 그 영토 안에 머물고 하나님 말씀의 가청권 내에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거리 안에 머문다면 여러분이 잘못됐을 때 누가 나타날까요? 예언자의 문자가 오겠죠? 까불지 마, 이런 게 오겠죠. 죽을래? 이런 거, 자매님 조심하세요, 다칩니다, 그런 문자가, 그게 양진일 목사가 될지 박규준 전도사가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예언자적 현존이 나타나겠죠? 잘못됐을 때는 예언자가 나타나야 하죠. 여호와의 영광은 예언자적 인물의 활동을 백업하는, 원천적으로 가능케하는, 원천적인 영적 파워 현존이거든요. 그런데 이 여호와의 영광이 바벨론 포로들에게 있다는 말은 바벨론 포로들은 심판 중에서 징계를 받는 중에서, 여호와의 불꽃같은 눈초리에 시달리면서 거룩해지면서 정결해지면서 새로워지고 있다는 말이죠. 여호와의 영광은 태우는 불과 같은 거예요. 이사야에 이런 말이 있어요. ‘누가 소멸하는 불과 동거할 수 있느냐.’ 여호와의 영광은 소멸하는 불과 같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불태우기 때문에 여호와의 영광과 함께 있다는 말은 긴장을 유발합니다. 그런데 이 영광이 얼마나 좋은 영광이냐면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 영광을 빛나는 광채를 프리즘에다 집어넣고 보니까 두 가지 빛깔이 나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호와의 영광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서 죄인을 원천적으로 갱생시키는 은총이 여호와의 영광의 중심구성이기 때문에, 영광 때문에 우리가 짓눌려서 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옛 자아는 죽지만 새로운 자아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6장 5절입니다. 여러분께서 일단 성경을 많이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게 부담이 되고, 성경을 많이 읽으시면 훨씬 설교를 잘 깨닫고 깊이 깨닫게 되고 계시의 광채에 많이 노출됩니다. 일단 텍스트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본문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이사야 6장 5절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런 말을 할 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게 됩니다. 이사야가 거룩한 영광을 보고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는 말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했는데, 그때 이사야가 옛 자아가 죽긴 죽었지만 이사야는 ‘보라 이것이’ 부젓가락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우리 하나님의 영광은 죄사함의 빛입니다. 우리 하나님 영광은 죄를 사하여 주시고 존재의 연약함을 완전히 치료하는 하나님, 회복하는 하나님, 재활복구의 빛입니다. 죽이는 빛이 아닙니다. 뭘 죽입니까? 옛 자아를 죽입니다. 죄를 죽입니다. 우리 생명을 죽이지 않고 옛 자아를 죽이고 나쁜 습관을 죽이는 살상의 빛, 거룩한 방사능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영광은 죄를 죽이는 거룩한 빛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로 죄의 연약한 가운데 싸인 우리를 건져내시고 진리로 우리를 또한 인도하기 때문에 다르게 살도록 능력을 주시는 것이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들은 은혜와 진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와 진리를 경험한 바벨론 포로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바벨론 포로들을 따라 다시 오신 것이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그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스룹바벨이 지었던 성전에 다시 가득 찼습니다. 이 여호와의 영광이 제2성전, BC 520-515년에 완성된, 낙성식은 BC 515년에 했습니다. 공자 소크라테스보다 더 오래 전에, BC 515년은 석가모니가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BC 515년에 완성된 그 성전에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 찼지만 이 여호와의 영광이 언제 떠났습니까? 또 다시 2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시 그대로 죄를 반복해서 지었습니다. 그래서 또 한 번 나라가 절단 났고 여호와의 영광이 또 한 번 성전을 떠났는데, 이제는 여호와의 영광이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알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이방 사람에게 마음대로 능욕당해도 도와줄 자가 없는 하나님이 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BC 164년에 끝난 마카베오 독립전쟁 전후의 상황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때부터 무슨 믿음이 생겼나요? 메시아만이 여호와의 영광을 회복시킬 뿐이다, 메시아 그는 바로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킬 분이다, 영광을 회복하는 그 분이 바로 참 성전역할을 하는 분이고, 그분이 바로 죄사함을 가져 오는 분이고, 그가 바로 은혜와 진리의 빛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치료하는 분이고, 은혜와 진리로 이스라엘 백성을 갱생시켜서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을 새 언약 백성 삼는 분이다, 이런 믿음이 쫙 깔렸어요. 언제? 약 200년간 이런 믿음이 유포되었을 때 그때 요한복음 1장 14절이 그런 맥락에서 퍼졌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200년 동안 앙망되고 간절히 학수고대한 그 영광, 이스라엘 민족을 떠나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종적도 알 수 없었던 그 영광, 메시아가 다시 회복시키기로 약속된 그 영광을 보니 그 영광은 바로 구약백성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했던 은혜와 진리로 가득 찼던 그 영광이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가득 찬 영광이었고 성막에 가득 찬 그 영광이었고, 시내산 정상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사해주고 언약백성 삼았던 은혜와 진리의 영광이었다. 예수 안에 바로,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예수 때까지 150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영광, 은혜와 진리의 빛이 예수 안에 가득 찼다, 그게 요한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은 연역법입니다. 연역적 복음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영광의 광채가 구체적 사례를 통하여 개별적으로 쭉 나타난 사례, 즉 7번 나타납니다. 예수의 영광은 7개의 표적을 통하여 7번 영광이 발산됩니다. 즉 예수 육신의 장막,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의 육체적 조건을 강력하게 투과하여 육신의 장막을 뚫고 영광이 발산됩니다. 그래서 첫 표적이란 말은 무엇이죠? 앞으로 전개 될 6개의 영광발사표적, 영광을 발사시키는 표적의 첫 번째 표적이 오늘 본문이란 말이에요. 이런 긴 역사를 알아야만 요한복음이 크게 깨달아지는데, 신약성경은 얇지만 구약성경 두꺼운 책을 다 전제한 책이기 때문에 결코 얇지도 않고 이 책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쉽다는 건, 마술적인 주문으로 외워버리면 쉽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아무 뜻 없이 무조건 외워버려서 구원받기로 작정하면 쉬운데 그 뜻을 알고 고개를 끄덕거려서 평생 동안 내 마음이 뜨거운 감동 속에 있기까지 가려면 구약성경을 이렇게 알아야 하니까 구약성경을 전제한 책이 요한복음 얇은 책이지, 구약성경을 모르면 1500년 동안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이스라엘 역사 안에 나타났던 하나님 영광의 현존과 철수의 역사를 모르면 이 번역이 얼마나 심오한 걸 모르기 때문에 답답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책이 어려운 이유는, 여러분 대부분이 요한복음을 읽어서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요한복음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 1500년의 역사를 정말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강력한 충동을 일으켜서, 격동을 일으켜서 계시의 빛을 비춥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약을 몰라도 섬광처럼 벼락을 치듯이 은혜를 줘서 탁 깨달아지는 수가 있습니다. 물론 깨닫기는 하지만 가르칠 수 는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그 영광은 바로 구약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이 200년 동안 믿어왔던 바 제2성전이 망할 때 떠났던 그 영광, 그 영광을 회복하는 자 메시아 예수, 이런 일종의 그 시대의 민중에게 응답하는 겁니다. 2장 19-22절이 참 중요합니다. 이건 오늘 서론 부분이 어렵죠. 2장 19-2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플라톤이 만든 철학학교가 아카데미아거든요. 아카데미아 정문에 이런 말을 써 놓았습니다.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여기 출입하지 말라’ 가향공동체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출입하면 그만큼 인생이 손해입니다. 일단 돈 버는 기회비용이 없어지고 주일에 북한산 836m를 오르면 심장이 튼튼해져서 동맥경화증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숙자 아저씨들이 쳐 놓은 버림받은 이 땅, 철길과 1호선 국도가 지나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 있기 때문에 매주 와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인생의 낭비입니다. 여러분 가향교회에 왔다면 성경을 일반적인 알파벳 아라비아 숫자처럼 구사해야합니다. 우리가 알파벳 22자 있으면 무한한 문장을 만들듯이 성경 66권 우리가 숙독하고 있으면 무한한 문장을 가능케 합니다. 무한한 사상이 꽃이 피고 무한한 철학과 예술과 문학이 성경 안에서 나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으려는 실용적 목적으로 성경을 읽지 말고 인문학, 자연과학, 역사철학 이런 세계사 전반을 다루는 성경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 자칫 잘못하면 구원받는 데 필요한 몇 구절이 있는 책,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건 아직까지 초보입니다. 성전된 자기 육체, 이렇게 세계사에서 종교사에서 자기 육체를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이건 정신적으로 도착된 사람이 주장할 수 있거나 진실로 그런 사람이 주장할 수 있는 겁니다. 어떻게 자기 육체가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에 가득 찬 그 영광이 자기 안에 가득 찼기 때문에 이렇게 진술할 수밖에 없었어요. 성전에 가득 차서 이스라엘 백성을 재림신학으로 언약적 치료를 하고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매년 회복시켰던 그 성전에 가득 찼던, 지성소에 가득 찼던 그 영광이 예수의 말과 사역과 인격을 통해서 발산시켰기 때문에 예수는 걸어 다니는 성전이 된 거예요. 너무 개념이 달라요. 예수님은 여호와의 영광, 즉 은혜와 진리 작용이 끊임없이 예수의 말과 행동과 눈빛과 사역을 통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는 육체 자체가 성전이었어요. 그래서 예수의 육체 안에는 영광이 가득 찼어요. 지성소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 찼던 것과 똑같아요. 열왕기상 8장 11절, 이사야 6장 3절, 출애굽기 40장 34-35절, 성막에 가득 찬 그 영광, 성전에 가득 찬 그 영광, 그 영광이 예수 육체 안에 가득 찼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라는 그런 33세 목수 이런 인간적 조건 속에 누적된 그 예수의 육체성 안에, 예수의 인간성 안에 신적 영광이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작동하는 예수의 영광을 예수님이 7번 보여줬어요. 7개의 표적을 통해서 보여줬어요. 예수님의 신적영광의 본질을 7번의 표적을 통해서 보여준 거예요. 요한복음에도 7개의 표적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첫 표적이란 말이 중요합니다. 어차피 여러분이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오늘 서론을 들었는데, 여기까지가 서론입니다. 이 복잡한 이야기 빼버리고 몰라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제가 포도주인데다가 결혼식인데다가 그냥 아무런 신비한 느낌을 안 주는 일상적인 그림이 나옵니다. 그런데 1장 43절을 보면 이런 본문이 나옵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엑셀데인 에데 데스엔 엑셀데인 에이스탠딩 갈릴리안, 갈릴리로 가려고 의도적으로 했어요. 그런데 3일 만에 갈릴리에 왔습니다. 갈릴리 가나하고 90마일정도 떨어졌으니까 154km 정도 떨어진 겁니다. 하루에 40km정도 걷거든요. 40km걸어서 왔는데 예수님이 왜 갑자기 갈릴리로 가려고 했느냐면 결혼식 참여하려고 온 겁니다. 예수님 너무 멋진 분입니다. 공적사역이 바쁘지만 어머니 친척 결혼식에 가려고 그 중요한 사역의 현장에서 갈릴리로 기수를 트신 겁니다. 1장 43절에 갈릴리로 가려고 하셨다는 이 의도가 2장 1절에서 해명됩니다. 셋째 날, 거기서부터 삼일 째 되는 날 결혼식이 있었구나, 예수 어머니가 거기에 주장하는 분이구나, 그걸 볼 때 예수님이 공생애에 바쁘셨지만 또 가정 일에도 매우 배려심이 많았구나, 알 수 있죠. 그래서 우리는 왜 갈릴리로 가려고 했는지 생각했는데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서 갔다, 90마일 정도 떨어진 거리라면 154km니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삼일 동안 걸어가면 됩니다. 가장 먼저 갈릴리 가나가 어디냐면 나다나엘의 고향입니다. 1장 마지막에 나다나엘 이야기 나왔죠? 갈릴리의 가나 사람 나다나엘이 지금 사는 동네의 결혼식에 참여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제자가 모두 6명입니다. 요한 안드레 야고보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최초의 6인 제자입니다. 전부 갈릴리 사람 6인 제자인데, 이 제자들이 전부 결혼식에 참여했는데 이 결혼식을 묘사할 때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메테르 투 예수스 에케이, 예수 어머니가 있었다는 이 말은 이 결혼식이 예수 어머니 쪽 친척 결혼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다음에 2장 2절입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에크 메데 카이홉 예수스 카이홉 마세 다이스 오 도이스 인 카모스, 예수님이 그 제자들과 함께 초청받았는데 문제는 제자들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결혼식에 많이 가면 큰일 납니다. 초청 받지 않는 사람이 가서 먹기 시작하면 큰일 납니다. 초청 받지 않고 결혼식에 가서 먹다가 자주 경범죄에 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노숙자 아저씨들이 주로 그런 일을 많이 하십니다. 물론 결혼식에 옷만 잘 차려입으면 충분히 틈새가 있습니다. 신랑 친구라 그러고 팔촌 이렇게 하면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결혼식에 가려면 반드시 invitation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어머니는 초청받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왜? 친척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초청 받은 겁니다. 예수님이 초청 받은 건 누구냐? All together with his disciples. 제자들과 함께 초청받았으니까 이 결혼식에 당사자는 제자들을 알고 있는 사람임이 전제돼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초청한 게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6명의 제자들과 예수님 어머님의 친척인 이 집안 사이는 서로 아는 사이인데 그걸 어떻게 짐작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즉 갈릴리 가나 사람을 제자 삼는 것을 볼 때 예수님과 나다나엘 사이가 이미 친구가 됐습니다. 이 6명의 남자가 예수님과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꼭 이 6명이 가서 많이 먹어서 그런지 어쨌든 갑자기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게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주석서들은 없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포도주를 매우 많이 마셔서 술고래라는 별명을 얻은 것을 볼 때, 예수님 별명이 wine vidal, 이 말은 술을 마시는 wine drinker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wine vidal, 엄청나게 들이키는 겁니다. 완전히 예수님 별명이 술고래라는 뜻입니다. 포도주 고래, 예수님 술고래, 그다음 제자들도 같이 이렇게 참여하는데 마침 포도주가 없다고 하니까 예수님께 이 말을 하니까 유머러스한 상상이 일어납니다. 많이 먹으니까 책임지시라, 이런 것 같이 들리는데, 아무튼 포도주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이논 우크 에쿠신 ‘포도주가 없다, 그들에게’ 이렇게 됩니다. 포도주가 중요하단 말입니다. 포도주가 없으면 결혼식이 파탄 난다는 뜻입니다. 그걸 누가 말했느냐면 마리아가 말했습니다. 여기가 이 결혼식이 마리아 친척임을 암시합니다. 마리아는 거기에 원래부터 있는 사람이지 초청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왜? 그는 친척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말이 예수님을 격동을 시키는데, ‘포도주가 없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는데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말을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여기가 도발적인 말입니다. ‘기나이’, ‘여자여’ 이건 절대로 과부 부녀 여자 한 번도 특별한 존칭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존칭이 붙은 말이 아닌데 이 말을 해석하기 위해서 주석서에서 ‘기나이’는 아주 극존칭으로 부인에게 썼던 말이다, 한 번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성경에 부인 이렇게 쓰였던 과부도 ‘기나이’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5절에 ‘거룩한 부녀들도’ 그 부녀, 그런데 엄마에게 기나이를 썼어요. 왜? 2장 1절에서 의도적으로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라는 말을 분명히 썼거든요. 그러면 예수의 어머니 자격으로 마리아가 지금 말한다고 기대가 되는데, 메테르 투 예수인데, 여기서 갑자기 예수님은 메테르 나이, 이렇게 말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말을 했다는 것은 마리아가 포도주가 없다고 말한 맥락 자체가 매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포도주가 없다는 그 말을 어머니가 아들에게 포도주를 사오라고 하는 일종의 민원을 해결해달라는 그런 사무적인 도움 요청으로 들었다면 기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주가 없다는 지금 이 상황을 하나님의 아들인 자기에게 피조물 인간이 요청하는 하나의 기도의 언어로 들었기 때문에 기나이라고 대답을 한 겁니다. 그다음 더 문제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건 정말로 해석이 어려운 본문입니다. 여러분, 여기는 상상력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포도주라는 것은 요한복음 맥락에서 성령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로마 군병이 예수님 옆구리를 찔렀더니 물과 피가 쏟아졌습니다. 이때 피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포도주를 보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포도주를 피로 동일시했습니다. 예수님 머릿속에는 포도주가 없다는 말은 새 언약 백성 삼을 성전이 모자란다, 성령의 세례가 없다, 성령의 감화감동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는 중도에 파탄 난 미완성 결혼식과 같이 되어버렸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관계는 결혼식 시작을 했는데 결혼 관계가 완성이 되지 못하여 포도주가 떨어진 결혼식장과 같다, 이런 말로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령의 새 포도주를 공급해달라는 인간의 기도로 들어버렸기 때문에 내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즉 내가 옆구리에서 피를 쏟을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 이런 말이에요. 이런 해석은 요한복은 2장과 19장 사이에 있는 일종의 아치모양, 이런 걸 문학에서 inclusive, 내포포괄구조,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포도주 이야기 나옵니다. 그다음 19장 마지막에 가서도 물과 포도주 이야기 나옵니다. 그러니까 포도주 이야기를 가지고 요한복음을 끌어가려고 하는 일종의 저자의 수사학입니다. ‘여자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말은 요한복음 19장 26절과 34절에 예수님이 그때 또 한 번 ‘여자여’라는 말을 합니다. 19장 26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사도요한에게 어머니의 남은 생애를 돌보아줄 것을 부탁하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하는 말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때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마리아에게 했던 말이 ‘여자여’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마리아에게 했던 ‘여자여’를 앞당겨 함으로 이걸 prolepsis, 일종의 선취적 수사입니다. 미리 내다보고 말을 한 겁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 ‘여자여’ 언어와 물과 피를 쏟는 사건과 요한복음 2장의 이 사건은 놀랍게도 내포포괄구조, inclusive, A & A' 구조가 돼서, 요한복음 전체는 예수가 옆구리에서 물을 쏟고 피를 쏟아서 성령을 공급하는 사건, 즉 예수 사건은 무엇이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 결혼식이 시작됐는데, 결혼식이 완성도 되기 전에 흥이 사라져버리고 성령이 결핍돼서, 포도주가 결핍돼서 결혼식이 완료에 이르지 못하고, 완성되지 못하고 중간에 파탄 난 혼인 예식장과 같은 이런 유대교의 상황, 이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교착상태, 이걸 해결하는데 예수님이 거룩한 양조작업을 통하여 옆구리에서 물을 뽑고 피를 쏟아서 성령 세례를 일으켜야 하는데, 예수님이 그 일을 하러 왔는데 지금 포도주가 없다고 하니 예수님은 포도주를 너무 많이 생각하다가, 자기 생각에 내가 포도주를 공급해야 할 텐데, 성령을 공급해야 할 텐데, 성령의 세례를 줘야 할 텐데 그런 사명의 강박 속에 있다가 갑자기 포도주가 없다고 하니 예수님 놀래서, 지금 내가 포도주를 쏟을 때가 아니다, 즉 내가 새 언약의 피를 쏟을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물러섭니다. 이런 요한복음의 대화는 일상적 대화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신학적으로 심오한 대화입니다. 그럴 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라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이 말은 무엇이냐? 성령의 새 포도주,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적 결혼식, 언약관계를 완성시킬 새 포도주를 내가 지금 쏟을 때가 아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여자여’와 포도주와 십자가의 언어가 맥락을 읽으면서 해석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주석은 제가 책에서 본 건 아닙니다. 이 주석은 순전히 제가 신림동에서 관악산 밑에서 기도하다가 깨달은 것이지 어떤 유럽 주석가의 책에서도 이렇게 된 걸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양목사가 나중에 제가 죽고 나서 오래 살면서 꼭 한 번 확인해보세요. 누가 이렇게 해석했는지, 저는 제가 이걸 처음으로 이렇게 해석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도 저는 누구에게도 이렇게 해석한 걸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요한복음을 수없이 읽으면서 순식간에 터득한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래서 제가 며칠 동안 이걸 깨닫고 박수를 치고 다니면서 미친 사람처럼 환희에 빠졌습니다. 이 깨달음을 하나님이 주실 때 너무 놀라웠습니다. 그 모든 요한복음의 언어가 갑자기 꿈틀거리면서 쇄도해 왔습니다.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때가 십자가에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때라는 것과 일치됐을 때, 옆구리에서 피를 쏟는 그 때와 일치됐을 때, 포도주를 언약의 피라고 말했던 그 언약의 언어가 다 살아났습니다. 결정적으로 제가 이 해석을 정당하게 여긴 것은 요한1서 5장 5-8절입니다.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물과 피 성령이 다 같은 겁니다. 증거하는 것, 물과 피 성령, 그다음 고린도전서 10장입니다. ‘우리가 부름 안에서 성령을 마셨다’ 세례 받을 때 포도주를 마신 걸 무얼 마셨다고 그래요? 성령을 마셨다고 말합니다. 성령과 포도주는 결국 메타포, 같은 겁니다. 포도주가 없다는 그 말을 예수님은 1500년 이스라엘 구원사의 맥락에서 들어버린 겁니다. 예수님이 참 너무 멋진 분이기도 하고, 이렇게 말씀을 해석해버리면 힘드신데, 예수님은 어떤 여인이 자기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삼백 데나리온 되는 향유를 막 뿌려서, 머리에 뿌려서 발을 씻고 난리를 쳤을 때 예수님이 이 여자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나요? 이 여인의 행동은 정당하다, 내 장례식에서 내 시체에 뿌릴 향품을 미리 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함으로 굉장히 높은 뜻으로 해석해버리고,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라고 해서 드디어 복음서에 나옵니다. 여인의 돌발적이고 충격적인 행동도 예수님의 재해석으로 살아났습니다. 마리아가 포도주가 없다는 그 말을, 민원을 해결해 달라는 그 간단한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포도주를 사올 데 없나 라고 들을 수 있는 그 말을, 포도주가 없다는 그 말을 예수님 자신의 옆구리를 향하여 예수님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성령세례를 주기 위해서 거룩한 포도주 양조업을 개설해야 할 그러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포도와 포도주가 무얼 상징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 ‘새 술에 취하였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보고 어디에 취했다고 그랬죠? 새 술, 포도주에 취했다고 그랬죠? 성령에 취한 게 포도주에 취한 거죠? 마태복음 20장에 하나님의 포도원에는 일꾼이 엄청 필요하죠? 오후 5시에도 필요하죠? 이게 무엇입니까? 순교자가 필요하다, 물과 피를 쏟을 순교자가 필요하다, 또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교회는 뭐라고요? 거룩한 보혈을 흘리는 공동체다, 그게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철두철미하게 포도 또는 포도주가 성령 보혈, 이런 강력한 메타포입니다. 예수님이 포도주가 없다는 말을 너무 깊게 해석해서 응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예수님이 대화 나누는 수준을 한 번 보십시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아들아 포도주 좀 사오너라, 이렇게 말했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 텐데, 포도주가 없다는 그 말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적인 개입을 요청하는 말로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답을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기나이, 이렇게 해버립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무엇으로 들었느냐면 거절로 듣지 않았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 말을 듣고 마리아가 예수님이 표적을 공개적으론 행하지 않겠지만 이 긴급한 현안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믿고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너무도 멋진 분입니다. 예수님은 물로 붉은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고 백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일으키셔서, 사태의 진실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조용히 사태를 해결하십니다.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기적을 일으킬 때는 아니고, 이런 뜻으로 받아들이고 은밀하게라도 도와주실 것을 믿고 마리아가 말합니다. 집사님들에게, 종들이 아닙니다. 집사님들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입니다. 그런데 종들은 둘로이, 둘로스입니다. 본문에서 종들이라고 번역된 것은 청지기들, 돕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죠. 마리아가 집사님들에게 말하기를, 일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진짜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가 높은 수준입니다. 거절로 듣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라고 하니 종들이 Yes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자마자 또,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에 두 번의 대화거든요. 한 번 포도주가 없다는 사실보고와 요청, 사실보고 안에 담긴 기도의 언어, 예수님께서 그걸 거절하면서 거절하지 않는다는 여운을 남긴 언어, 그다음 또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또 다시 거절당할 걸 알지만 후속적인 액션을 요청하는 이 절묘한 언어, 드디어 예수님이 말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그랬더니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얼마나 짧은 순간이지만 긴박합니까? 이 짧은 대화 속에서 물을 가득 채우라는 순간 집사님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드디어 역사가 벌어지려나보다 생각했죠. 엄청나게 물을 채웠습니다. 물이 180갤런 들어가는 통, 1갤런이 1. 몇 리터 되죠? 1갤런이 1리터보다는 크죠? 작습니까? 4리터입니까? 제 아반떼 차가 기름이 48리터 들어갑니다. 8만 9천원에서 9만 3천 원 되는, 그다음 무학소주 한 병이 1.8리터입니다. 옛날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무학소주, 이것이 1.8리터이니까 이것이 720리터니까, 이게 400개입니다. 이집이 바리새인임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많은 물이 필요했던 것은 손님이 엄청 왔음을 의미하고 이 집안이 유력한 집안이고 이 집안이 바리새인임을 의미하는데, 바리새 종교의 특징은 물로 씻어야 하는 청결강박종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청결강박 속에서 깨끗해지려고 합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기쁨과 희락 속에 연합하려고 하지 않고 깨끗해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단순히 깨끗해지는 데 있지 않고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깨끗해진다 깨끗해지지 않는다를 초월하는 결속과 연합과 혼인예식적인 강력한 영적 결합입니다. 모든 바리새 종교, 세상의 모든 종교는 청결의 종교입니다. 청결지향, 깨끗해지려고 하는 마음, 화엄종,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 모든 건 깨끗해지려고 하는 겁니다. 깨끗해지려고 하는 종교, 물로 씻는 종교를 하나님께서는 결혼식적 종교, 즉 희락의 종교, 결합의 종교, 연합의 종교 하나님의 종교, 하나님과 하나 되어 실천할 수밖에 없어요. 복음의 능력으로 하나님 요구를 사랑 때문에 실천할 수밖에 없는 즉 포도주에 취한 상태에서 착하게 만들어버리는 이런 종교가 바로 모든 종교의 완성인 복음,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 온 겁니다. 이 세상의 석가모니와 공자님과 마호메트는 돌 항아리 6개에 물을 가득 채워준 분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희락과 신인연합과 일치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실천하게 만드는 분이십니다. 이게 바로 표적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서 결혼식 민원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사건의 궁극적 지향은 뭡니까? 궁극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물로 씻는 종교, 세례요한 종교, 바리새종교, 고등종교 화엄경 법상종, 모든 씻어내는 종교, 깨끗해지려는 종교를 뛰어 넘어 희락과 연합과 하나됨의 능력을 주는 종교, 취한 상태가 되게 만들어주는 종교, 이런 종교,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져다 준 은혜와 진리다, 예수님이 성전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포도주에 취하여. 사도행전 2장처럼 새 술에 취하여 아침 9시부터 자기 재산을 막 내놓고,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민법에서 술 취한 상태에서 한 계약은 상당히 제한을 받습니다. 우리가 술 취하여 재산을 바치면 법적으로 무효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코올 지수가 없고 성령에 취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재산을 다 바치려면 무언가 취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을 보면 자기 재산을 다 바쳤는데 그건 술 취한 사람만 하는 것이지 정신이 말짱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진짜 심사숙고 끝에 결단해야 합니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해서 바보가 되어서 대책 없이 착해지려면 성령에 새 술에 취하시기 바라고, 천국에서 유통될 수 없지만 대한민국에서 유통되는 대한민국 화폐와 달러와 금덩이를 가지고 살려면 성령 충만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과 혼인 상태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선택적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적 즉 정결과 청결의 강박에 사로잡힌, 그러나 혼인예식의 기쁨은 다 사라져버린, 하나님과 연합하는 계약백성 언약백성의 환희는 사라졌지만 청결에 집착하는 유대교, 그걸 어떻게 바꾸려고 그랬습니까? 혼인 잔치의 기쁨을 회복시켜서, 기쁨과 감격에 가득 차서 하나님 요구를 자발적으로 행하는, 성령에 취하여 의를 행하는 그런 언약백성 삼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앞으로의 사역을 궁극적으로 가르쳐주기 때문에 이것은 표적이 됩니다. 즉 포도주 사건은 결혼식의 한 민원 문제를 해결해주는 조용한 사건임을 넘어서 예수님이 앞으로 인류에게 무슨 선물을 가져다줄 것인가, 거룩한 새 포도주를 부어서 성령을 부어서, 하나님과 혼인예식으로 우리를 이끌어서 하나님 요구를 행하게 만드는, 새 언약 백성을 창조한다. 즉 우리 인생을 결혼식 같은 분위기로 만들어주겠다, 이게 중요합니다. 중요한 건 마리아입니다. 포도주가 없다고 하는 이 사실의 보고, 이 사태의 분석 진단, 너무 중요합니다. 포도주가 없는데 있는 것처럼 하면 안 됩니다. 신앙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까? 자발성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까? 저는 봉사하고 싶은 자원하는 마음이 떨어졌습니다, 엔꼬가 났습니다, 기계소리가 들립니다, 성령의 능력 없이 일하면 기계 소리가 들립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 일하는 주부는 그릇 소리가 커집니다. 제 아내가 없어서 이 말을 하는데 아내가 기분이 약간 안 좋을 때는 설거지 소리가 시끄럽습니다. 빨리 달려가 봐야 합니다. 무언가가 있습니다. 설거지 소리를 통해 강력한 예언자적 메시지를 전하는데 가보면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게 있습니다. 물소리가 시끄럽고 요란합니다. 탁탁 놓습니다. 우리 아이가 방에 들어갈 때 문을 쾅 닫고 들어가면 이건 문제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사무실생활, 직장생활, 교회생활, 다 권태롭고 지루하고 반복적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신선하고 날마다 새롭고 감격이 있으려면 성령의 새 술에 취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이 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새 포도주를 공급하는 예배당, 거룩한 양조장 같은 같은 예배당, 윌리엄 블레이크가 이런 말을 했죠. ‘영국 교회의 예배당이 이 을씨년스러운 겨울 날씨에 흑맥주 한잔씩 돌릴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교회에 나올 수 있을 텐데’ 그 을씨년스러운 가운데 흑맥주 한잔씩 준다면 교회가 가득 찬다, 이 말은 어떤 시적 진실이 있느냐면 교회는 사람들을 따뜻한 술로 그 마음을 채워줘야 합니다. 취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포도주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기쁨의 포도주, 희락의 성령이 사라졌습니다. 주님 우리가 교회 오고 말씀 보는 감격, 아침마다 기도에 침잠하는 감격, 봉사하는 감격, 결혼식 같은 축제의 분위기, 회복시켜 주시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려주소서. 소생시켜주소서. 우리에게 혼인예식의 기쁨을 주시고 언약백성의 결속감을 주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에서 깨어나지 않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희락이 가득 넘치며 거룩한 포도주가 가득 넘치는 축제가 이 노동의 독성을 이기게 하시고 노동의 권태와 반복을 이겨내게 하여 주소서. 하루에 한 데나리온 벌기 위해서 분투하는 하나님의 아들 딸들을 복주시고 그들을 사나운 입술에서 건져내 주시고, 중상모략에서 건져주시고 시기와 질투에서 건져주시고 위험하고 불확실한 사업 환경에서 건져내주시기 원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바친 귀한 물질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 호주머니로 들어가게 해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거룩하게 낭비되게 하여 주시고, 이 땅의 교회가 돈을 쌓아놓고 스톡옵션에 집어넣고, 정권에 집어넣고, 동산 투기 재테크에 집어넣지 말게 하시고 거룩하게 낭비하여 한 점 남김 없이 이 땅 교회가 쌀자루를 풀고 양식을 풀어서 빈민을 구제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하늘 상급만 바라보는 거룩한 청빈자가 되게 하여 도와주소서. 우리 가향이 성장하여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고, 성령의 기름 부은 자들이 일어나서, 이슬 같은 청년들이 일어나서 이땅을 새롭게하며 이 민족을 갱생케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주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의 무한 교통하심과 거룩한 도취케 하심이 가향의 모든 지체들 위에 우리 교회 올 모든 미래의 지체들 위에, 우리의 어린 아이들 위에 태어날 아이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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