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01/ 마 5:1-10 / 2010.03.14 / 개역개정판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예수님께서 공생애사역을 하시는 때에 많은 무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산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설교하신 이 내용을 산상설교 혹은 산상수훈이라고이라고해서 마태복음 5장과 6장 7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기독교복음의 가장 정수가 되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우리가 좀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살펴보는 기회를 가지려고합니다.
산상설교의 첫번째 내용이 팔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부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까지 이르는 8개의 복을 나열하고 계시는데,
그 표현이 이러이러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되어 있어서 자주 복의 조건과 자격으로 오해되곤하는 내용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에서 천국의 복을 받으려면 심령이 가난해야 된다 라고 우리가 거의 본성적으로 이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팔복은 그런 복을 받는 조건을 또는 자격을 나열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에 시작하는 그 팔복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앞에 있는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4장 12절부터 봅니다.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으로 예언의 성취로 보면서 이 16절에 있는바와같이 흑암에 앉은 백성들에게 빛이 찾아오셨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다. 그러니까 사망에 앉아 있었던 자, 흑암에 앉아 있었던 자들에게 빛이 찾아온 것이지 저들이 빛을 찾아나간 얘기는 아닙니다.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23절을 보시면,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1)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이렇게 연결이 되죠. 그러니까 앞에 있는 무리와 그 성격상 동일한 무리들이다 그런 뜻이죠.
동일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동일한 현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베푸신 설교입니다.
그 무리들은 그 예수님의 복음전파에 호응하여 왔는데, 그 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그 복음이 필요했던 사람들. 어떤 복음, 여기 보시는데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다는 소문에, 여기 그렇게 되어있죠.
병든자, 모든 사람들이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 입니다.
앞에 있던 흑암의 세력아래 있던 자, 사망의 그늘진 땅에 앉았던 자들을 위한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팔복을 자격과 조건으로 가지고가는 것은 맞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이 자격과 조건을 우리 영혼이나 마음의 깊은 상태가 준비되어 있어야 복을 받는다 라고까지 억지로 앞뒤를 맞추려는 생각에 자격과 조건으로 가기도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가 다 조건이 되는 것이죠.
이것이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은 아주 당연하게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이 조건이 되면 예수님이 서 있을 자리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다른 무엇으로도 되지않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 때문에라는 것이 외면되는 조건은 기독교 신앙과는 합치될 수 없습니다.
제가 이것을 정확한 번역이 될 수는 없지만, 정확한 설명이 될 수는 없지마는 성격상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맘이 피폐하고 한심한 자도 천국은 부르고 있다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을 찾아 오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다, 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자도 괜찮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오셨다. 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정부에서 국민들을 위하여 무주택자들은 신고해라, 집을 하나씩 주겠다 그러면 여러분 그게 무주택자라는 것이 자격이고 조건이지만, 보상을 받는, 자기가 한 일에 댓가를 받는 조건이 아니고 구제를 받는 조건이죠. 그렇지않습니까? 구제를 받는 조건, 은혜를 받는 조건이지, 그것이 자랑할 수있는 댓가, 내가 한 일에 결과를 요구하는 천국권은 될 수없지 않습니까? 여기에 나오는 것은 전부 그 얘기들 입니다. 우리중에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 곧 그의 통치와 그의 복과 그의 은혜를 우리의 자격을 조건으로해서 권리로 요청하는 자는 없다, 다시 말하면 천국이 찾아오는 대상에 제외될 조건에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뜻입니다. 조금 더 가죠.
온유한 자는 어떤 자들 입니까? 온유한 자는? 주장할 실력과 자격이 없는 자이죠. 그러면 뭐든지 져야죠. 나서서 외칠 수 없는 자이죠. 큰 소리를 칠 수 없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이 가장 오해의 소지가 많은 건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성경에서 말하는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하나님 통치의 공의로움은 본잘아 자비로우심 입니다. 자비가 필요한 자란 뜻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요? 무료 급식소가 필요한 자, 무료 급식소를 찾아 헤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면 금방 이해가 되죠? 여러분과 저의 경우 아닙니까.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이 경우에 맞지 않는다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이 필요없습니다. 아니면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뭡니까? 긍휼이 여기는 자란, 자신의 한심함에 대하여 깊이 깊이 주눅이 든 사람이죠. 아무에 대해서도 정죄하거나 큰소리 칠 수 없는자를 말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천국은 찾아오고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뭐냐, 생각이 없는 사람이죠. 거뭐 있어야 더러워지죠. 제가 하는게 심하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심하게 느끼는 것은 여러분이 이걸 조건으로 삼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화평케하는 자, 이렇게 사람들이 주위를 끌면 안되는 자, 숨어다니는 자, 지명수배자이죠. 누가 쳐다보고 관심을 가지면 안되는 거죠. 조용해지길,, 조용해 조용해,, 자꾸 묻어지는 거죠. 실력이 있어서 화평케하는 것 아닙니다. 지명수배자도 천국은 찾아오고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자비가 통치하지 않는 한 대책이 없는 자,,, 입니다. 자비로 불러주지 않으면 자비로 대우해 주지않으면 답이 없는 자, 어떤 경우에도 괄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아게도 천국은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근데 우리는 본성적으로 이런 일들에 대하여 마음에 거부감을 가집니다. 죄의 본성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가 보십시다.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에 오늘 우리가 다루는 팔복을 자격으로 자꾸 생각하려는 우리의 본성을 잘 지적하는 비유가 나옵니다.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아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라고만 하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어리이까,
그러자 주인께서 '율법에 무엇을 하라고 되어 있느냐?' 라고 답하십니다.
그러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라' 그러자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굽니까?'
그렇게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재미는 이것입니다. 누가 길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죽게 되었는데 제사장이 지나가다 보고 그냥가고,
레위인이 보고 그냥 갔다는 겁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당시 유대인에 있어서는 특별한 직무에 선별된 사람들 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율법사의 질문을 여기서 이미 답을 하고 있는데 그게 뭐냐하면,
자신의 신분과 자신의 지위를 남과 다르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하죠.
그래서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준 자를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이제 그의 생각을 깨시는 것이죠.
제사장이 그냥 갔고 레위인이 그냥 갔는데,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해 주었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그 지역에 북왕조 수도가 있던 사마리아에 다른 민족들을 불러들이고 이스라엘의 천민들만 남겨서 혼혈을 만드는 정책을 씁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환했을 때, 다시 그 나라를 되찾았을 때, 사마리아사람들을 같은 이스라엘사람 취급을 안합니다. 경멸하죠. 그래서 사마리아사람을 동원해서 누가 누가 이웃이었겠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이사람이 대답하기를, 아주 재미있는 대답을 하는데,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 달라스위드라는 신학자가 이부분에 이렇게 아주 기가막힌 토를 달았습니다.
차마 사마리아인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자비를 베푼자이니다 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기가 막히죠? 율법사가, 율법사가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사마리아인입니다 라고 입밖에 낼 수가 없어서
자비를 베푼자입니다, 그렇게 말했다는 거죠.
기독교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뭐냐, 다른 모든 일반 종교가 신앙인, 믿는 자의 소원과 수단,
그리고 자격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에게 어떻게 하여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얻느냐하는 문제와
그걸 얻기위하여 내가 무엇을 어떤자가 되어야하느냐하는 자격과 조건을 생각하는 것이 일반 종교라면,
기독교는 전혀 다르게 천지를 지으시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깊으신 뜻을 이루기위해 찾아오시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잃어버린, (잃어버린이 아니죠) 배신하고 도망간 그의 백성을 찾아오시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이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은혜로우심과 성의가 예수그리스도로 다 증언되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 그의 부활 이것들이 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어떤 자격과 어떤 조건을 가져야하느냐를 말하는 것은 아닌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럼 우리는 자격을 논하죠. 물론 기독교신앙은 하나님이 찾아오사 당신의 깊으신 뜻을 이루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 거룩은 신앙의 순종의 문제이지 자격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독교신앙인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점검할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해야되느냐 하며는
하나님이 나에 대한 당신의 뜻을 포기하시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를 다시 신앙인으로 내몰지, 내가 이래 갖고 되겠느냐가 자격과 조건이라는 자존심의 문제로써 분발이되는 것이라면 힘을 잃습니다.
그건 전혀 기독교신앙과 사실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현실속에서 이런 자기 격려라는 것이 익숙한 방법이기 때문에
이 방법을 자주 씁니다만 사실은 본질상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앞으로 산상설교를 해나가면서 이부분을 더 분명하게 더 자세하게 설명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가면 바로 이 문제를 좀 한걸음 더나아가서 인간이 얼마나 이 문제를 민감하게
그리고 고집을 부리는가 확인시키는 구절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달라고 해가지고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셨습니다.
그래서 18절에 있는바와같이, 가난한 자에게, 그리고 포로된 자에게, 눈먼자에게 눌린자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나를 보내셨다 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당신에게서 성취되고, 그 일을 위하여 당신이 보내심을 받았다 라고 얘기 합니다.
그래서 그 회당에 나와있는 자들이 다 말하자면 당시에 종교인들이죠.
신앙인들이죠. 예수의 이 가르침에 대하여 말하자면 두가지 면에서 심기불편한 반응을 보입니다.
가난한 자 눌린자 포로된자에게 구원을 줄려고 한다는 것과 예수가 그 일을 하러 왔다는 두가지 일에서 불편해 합니다.
이제 23절 이하를 보죠.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님의 이 답이 뭐냐하면 나는 포로된 자, 가난한 자, 눌린 자를 위하여 왔는데
너희는 아니라고 우기고 있어서 너희들은 나와 상관이 없다 이렇게 답하는 대목입니다.
엘리야 시대에도 3년 6개월간 가뭄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 있는 과부들중에 아무도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시돈땅에 있는 이방에 사는 사렙다의 한 과부뿐이었고, 엘리사 선지자 때에도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그 혜택이 베풀어지지않고 그 수리아사람 나아만뿐이었다 라고 얘기함으로써
너희가 스스로 가난한 자이며 병든 자이며 포로된 자란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나를 받아들이지않기 때문에
너희와는 이 복음이 상관이 없다 라고 얘기 합니다. 그래서 28절,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인간이 가장 못참는 죄의 본성상 가장 못참는 게 뭐냐하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댓가를 받기 원합니다.
기독교신앙도 우리가, 우리가 한 일에 댓가로 결과를 얻는 종교라는 생각에서 빨리 벗어나셔야합니다.
은혜를 구할 줄 알아야됩니다. 여기가 어렵죠. 우리가 산상설교를 하면서 거듭 거듭 확인하게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셨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것은 우리 아는데로 은혜롭고 고마운 복음이면서 동시에 우리에 가장 깊은 죄의 뿌리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독립했던 인간의 죄성 말입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은혜며 복이며 기적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우리 모두 예수믿으면서 우리 세상살이속에서 만나는 믿지않는 세상사람들과의 이 단절, 죄인이라는 말의 단절,
예수를 믿으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되는데 그걸 인정하는 자연인은 없습니다.
그들이 완벽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구원을 필요로하는 죄인이라는 것은 그건 누구나 거절합니다.
어느 때까지 입니까? 예수님이 누군지 알 때까지, 모두가 이 문제는 거절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가 기독교신앙의 핵심되는 가장 중요한 성격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찾아오시며 구원하시며 복주려하신다는 신적 선택이요,
신적 의지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되고, 그런 차원에서 우리의 신앙의 현실속에서도 우리의 부족함이라는 것은,
물론 우리가 분발해야되는 문제이지마는 그것이 우리를 좌절시키게 놔둬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겁니다. 믿음이 없다는 건, 내가 신자답지못하다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신자된 선택과 결정이 하나님의 의지에 있다는 것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다는 것은 늘 확인해야 됩니다.
우리가 은혜에 속한 사람이라는 건 늘 확인해야 되지만, 은혜에 속해있기때문에 절망할 수없다고 꼭 생각하셔야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가 보십시다. 이것도 여러분 잘 아는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탕자의 비유를 보면 기독교신앙의 정수가 이렇게 드러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한테 자기 상속분의 재산을 미리 달라 그래서 먼나라에 가서 다 허랑방탕하고 나중에 굶어죽게 되어서 돌아오는 얘기입니다. 16절,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제 돌아가는 겁니다.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그러자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가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그러니까 아버지는 이 집나간 아들을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게 여기 핵심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큰아들은 이렇게 합니다. 29절,
큰아들은 나중에 이일을 알고,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동생이라고 말을 안하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그러니까 이 아버지에게 집나간 아들은 포기되었던 아들도 아니고, 아들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집나간 아들입니다.
러분 부모로써 다 아시다시피 아들을 잊을 수있는, 자식을 잊을 수 있는 부모는 없습니다.
이건 그러니까 돌아온 탕자의 얘기가 아니라, 잊지않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버린 아들과의 대조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5장은 3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그 앞의 두 비유가 다 잃어버린 양 찾는 얘기, 잃어버린 드라크마 찾는 얘기입니다.
또 잃어버린 아들 찾은 얘기입니다. 찾는 얘기입니다. 신적 선택, 하나님의 찾으심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잃은 그의 자식들을 찾으러 오셨다 라는 사실로 복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신앙의 아주 그 힘있는 근거들을 확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저질은 범죄,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우리의 배반이고 인간이 저질은 것이고,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신적 찾으심 입니다.
인간의 배반과 하나님의 찾으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찾으심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이게 기독교신앙을 유지하는 그리고 늘 우리가 우리의 못난 것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믿는 믿음의 근거죠.
에베소서 1장에 가보면 이얘기를 바로 이렇게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성경의 요약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이하,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대하여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고 합니다.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하며 그의 영광에 찬송이 되게 하려합니다. 12절에는 그의 영광에 찬송이 되게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전부 하나님이 가지신 이 깊으신 뜻, 신적 의지를 매 매 설명마다 그리스도를 조건으로 삼습니다.
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4절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6절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계속 이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의 기독교신앙이 갖는 의미를 예수님이 내 죄를 속하고 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국한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자주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으니 이제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보답하며 살겠다 이렇게 하면 너무 작아집니다. 그것도 좋은 신앙이지만 너무 작아집니다.
더 크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과 물려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인 목적 그 깊으신 뜻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그 목적이 되는 예수를 보내셨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찾아오심은 예수안에서 확인 된 것같이, 그 육신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에서 보이시듯이 그 아들을 아끼지아니하시고 주신이가 어찌 그아들과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아니하시겠느뇨 라는 로마서8장의 얘기와 맞물려 기독교신앙인들을 소망가운데 있게하고 믿음 가운데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확인하고 여러분들이 가진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오늘의 이 말씀이고 여러분의 신앙생활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고 예수안에서 부르시니 우리가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하나님이 편드는 자를, 예수안에서 구원한 자들을 막겠습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누가 제한 하겠습니까.
오늘 주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예수안에서 목적하셨으니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질줄을 믿습니다.
우리의 삶을 이 믿음으로 주앞에 바치며 순종하는 승리하는 신자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하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의 그 기적, 그 놀라운 운명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충성과 감사로 돌아가는 심령들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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