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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산다! (요한복음 11:25-26)/(고)이중표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1.

죽어야 산다! (요한복음 11:25-26)/(고)이중표 목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부활생명입니다. 기독교는 영혼이 불멸해서 영원히 사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죽음으로 분리되나 육체가 다시 사는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몸이 다시 산다는 부활 신앙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간들과 함께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살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는 부활은 죽어야 산다는 위대한 복음이요, 진리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안죽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 산다는 것입니다. 죽어야만 살고 죽어야 영생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죽는다는 것을 큰 은혜로 받아야 합니다.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죽고 살아야 그 생명이 소중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됩니다. 만약 늙은 몸으로 안죽으면 참으로 저주받은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알았기에 늙지 않고 죽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은 죽고 사는 생명을 원했습니다. 예수님 생명은 부활 생명입니다. 죽고 사는 생명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 오직 예수님만이 죽고 사는 진리를 가르쳤고 그대로 보여준 위대한 스승이요, 참 인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모든 신앙의 핵심이 죽어야 산다는 진리를 일관되어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은 죽어야 사는 길이요, 죽어야 사는 진리요, 죽어야 사는 생명입니다.
탈무드에 "사람이 살려면 죽어야 하고 죽으려면 살아야 한다"는 유대인의 격언이 있습니다.
사실 참으로 사는 생명은 죽음으로 얻는 것이요, 참으로 산 자만이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죽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죽는 죽음에 이르는 자만 사는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만약에 죽지 않는 것이 사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죽지 않고 그대로 계속 살았을 것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부활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죽고 산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부활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자는 무덤에서 나오고 산 자는 홀연히 변화되어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2-44)
우리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소망을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열매로 부활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의 부활의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몸이었습니다. 그는 물질을 초월하는 신령한 몸이었습니다. 떡도 먹고, 생선도 먹었으나 우리와 같은 육체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는 남녀 구별없이 성별이 없는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게 됩니다. 현재의 내가 아닙니다. 신령한 몸으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부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 흠 없고 점 없는 신령한 몸으로 살아야 합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마지막 날 믿는 사람도 부활하고 안믿는 사람도 부활합니다. 그런데 안믿는 사람은 영벌을 받기 위해 부활하고, 믿음으로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으로 부활하는데 생명으로 부활한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영생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나도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고 사는 것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은혜의 진리와 복음을 친히 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가 죽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단순한 부활이 아니고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부활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곧 구원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영생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요 11:25-26) 신앙입니다.
영생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는 말입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은 영생이 그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한 생명 속에 함께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부활신앙이 생명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6-19)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부활 생명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생명을 가진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신앙인의 승리입니다.
구원은 부활 생명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영생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부활 생명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활 생명을 가진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신앙인의 승리입니다.
"죽어도 살겠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떨고, 절망하고,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죽어도 다시 살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담대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추앙을 받는 주기철 목사님께서 평양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주기철 목사님이 계시는 감방에 주양하라는 공산주의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목사님과 함께 며칠동안 지내더니 주목사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죽음에 대하여 초연하십니까?" 그때 주목사님은 "우리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부활 생명을 주셨기에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오. 그래서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주양하는 목사님의 말에 큰 감명을 받고 "내가 일찍이 목사님을 만났더라면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인데 목사님을 너무 늦게 만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대하여 그가 공감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 주목사님은 "지금도 때는 늦지 않았소. 내가 예수를 믿기 전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나도 공산주의자가 되었을지 모르오. 당신의 그 철저한 평등과 사회주의 사상에 내가 세뇌되어 사회 구원, 민족 구원을 외쳤을 것이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잘 믿는다는 것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영생의 말씀을 믿고 그 희망 속에서 날마다 승리자로 사는 것입니다.

둘째, 부활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살아서 믿는 사람들은 현재 예수님의 부활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살아서 부활 생명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나도 예수와 함께 죽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역사적 부활이나 종말적 부활이 아니라 현재적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육체를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로 살아야 합니다.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내 몸에 짊어지고 현재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별세의 부활입니다.
종말적 부활은 마지막에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이 약속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부활 생명으로 날마다 사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부활절은 아침 우리 주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은 2천년 전 사건입니다. 지금 주님은 보좌에 계십니다. 또한 부활 생명으로 우리 안에 사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부활 생명으로 함께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의 몸을 입고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는 제자들에 대하여 실망도 했고, 제자들에 대해서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3년동안 함께 있었지만 전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는 이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저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가난 속에서도 기뻐했고, 감옥에 끌려가면서도 찬송했고, 욕하고 핍박하고 저주하는 자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고, 마지막 죽으면서도 하늘가는 밝은 길을 찬송하면서 죽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별세의 부활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지만 죽었다가 살았기에 세상이 새롭게 바뀐 것입니다. 똑같은 가정과, 직장과, 현세지만 이제는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부활을 가리켜 별세 부활, 실존적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렇게 살자고 믿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황금의 입을 가진 성자'로 불리는 유명한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크리소스톰입니다. 그는 로마시대 기독교 박해 때 황제 앞에 나가 당당히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입니다. 하루는 황제가 크리소스톰을 불러놓고 위협을 했습니다. "네가 만일 예수를 끝까지 믿겠다 하면 너를 멀리 귀양 보내겠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이 다 내 아버지 집인데 어디간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너를 죽여 버리겠다." "나의 생명은 예수님 손에 달려있습니다. 폐하는 저를 죽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네 재산을 모두 빼앗아 버리겠다." "내 재산은 하늘에 있습니다. 빼앗아 가보시지요" 황제는 최후의 위협을 가했습니다. "내가 너를 고독한 곳에 외로이 두겠다." "주님 한 분이 계시니 염려 없습니다." 결국 황제는 그를 포기하고 놓아주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내 속에 부활생명이 임했기에 나의 변화된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부활이지만 현재는 나와 함께 살기 위한 부활이요, 나를 변화시킨 생활의 부활인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나를 현재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살게 하는 부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에 돌아가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부활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부활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는 예수님이 나를 살려주듯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세상을 살려야 합니다.
내가 살아야 남을 살립니다. 죽은 자는 자기도 못살고 남도 못살립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잘못 믿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이 남을 살리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안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죽는 것은 남을 살리기 전에 내가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죽고 자기가 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살리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은 내가 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남을 살리지 못합니다. 남을 죽여야 자기가 사는 줄 압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자기도 죽고 남도 죽입니다. 오직 산 자만 죽은 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살려주는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만나는 자마다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산 자는 가정을 살려야 합니다. 남편을 살려야 합니다. 오늘 이 사회를 살리고 민족을 살려야 합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 할 때 부활 주일을 앞두고 한 자매가 찾아왔습니다. 아주 굳은 얼굴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뵙고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혹시 소문을 들어서 아실지 모르지만 저는 아무개 장로의 딸로 건너 마을에 시집 와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버스로 통학하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했는데 안믿는 집안에 시집을 갔습니다. 저랑 결혼하면 예수 믿겠다고 해서 결혼을 했는데 결혼 후에 마음이 변해서 교회도 안다니고 오히려 교회 다니는 저를 핍박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은 술만 마시면 손찌검하고, 시어머니는 딸만 낳는다고 구박합니다. 그래서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 죽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살자니 너무 괴롭고 그래서 고민입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으니 서울로 떠날까 합니다." "서울에 가서 어떻게 하려고?" "서울에 올라가 가정부라도 하면서 야간 신학을 해서 전도사하고 싶습니다." "가정 버리고, 남편 버리고, 자식 버리고 공부해서 전도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자매여, 예수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오늘부터 40일 동안 같이 새벽 기도를 하십시다."
이 자매가 40일 동안 새벽기도를 하다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그렇다. 내가 죽어야 나도 살고 가정도 사는데 내가 죽지 못했구나' 죽어야 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이 집에 순교자로 들어 왔구나! 이 집을 살려야지." 그 때부터 남편이 때려도, 시어머니가 구박해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에 그 자매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몇 년을 살아도 안 된 일, 1년 동안 내가 죽으니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남편과 시어머니도 변화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죽어야 산다.' 이것이 부활의 진리입니다. 모든 문제는 내가 죽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나를 살립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때 나도 살고, 가정도 살리고, 나라도 살립니다. 예수님의 종말적 부활은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며, 현재적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날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오염되어 가는 이 세상, 어둠으로 빠져 가는 청소년들, 예수 없이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려내야 합니다. 우리가 들어가는 곳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세상을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분열에서 화해로, 분단에서 하나로 살려내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을 살려내는 살림의 사도가 되십시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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