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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사 43:1-3)

by 【고동엽】 2021. 12. 21.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사 43:1,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니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요즘 자살이 유행되고 있습니다. 죽는 사람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죽겠지만 참 불행한 일입니다. 이 자살도 유행을 탑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건듯하면 자살해 버립니다. 살기 어렵다고 죽고 사업에 실패했다고 자살하고 직장 얻기 힘들다고 죽고 사랑에 실패했다고 자살하고 혼자 죽고 아이들과 함께 죽고 투신해서 죽고 그렇습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쉽게 포기합니다. 자신에 대한 값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렇습니다. 살기보다 죽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그렇게 쉽게 삶을 포기하고 헐값이 자신을 버립니까. 죽을힘으로 무슨 일인들 한다면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한생명의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데 그렇게 값없이 포기합니까. 하나님의 온 관심이 인간에게 있음을 모르고 자신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값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값을 모르고 사는 것처럼 불행하고 처량하고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값을 몰랐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몰랐습니다. 모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동경했습니다. 애굽의 나일강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우상까지 동경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하나님이 통탄하십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이방신을 찾아가고 애굽의 문물을 그리워하고 사모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심하고 무지하고 처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처량한 백성들을 보시는 하나님이 더 처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읽은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값을 알라고 가르치고 설명하고 깨우치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1절에서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했습니다. 또 3절에서는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고 했습니다. 요 3: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구속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너 만한 존재가 없어, 고로 내가 너를 비싼 값을 주고 샀다“그 말입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으로 우매하고 한심하고 무지하게 표현되어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누구 모습입니까. 그 모습이 곧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구로 삼아서 우리 자신으로 보고 깨닫고 객관적으로 살펴보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 이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서 나의 자화상을 보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값을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애굽을 속량물로 주고 너를 구속하였다”고 했습니다.

 

3절을 보면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너를 대신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애굽은 당대의 가장 강한 최강국으로 문명이나 문물 그리고 문화가 가장 앞서가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애굽을 과감히 포기하고 대신 너를 건지고 구속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값을 알아야 합니다. 모르니까 하나님이 버린 그 애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경을 합니다. 애굽의 문물을, 유행을, 문화를, 나일강을, 심지어는 애굽의 우상까지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값을 알아야 합니다. 모르면 한심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됩니다. 사람들이 이 값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자살해서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값을 모르는 사람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죽는 일도 편한 방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고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비싼 값을 주고 사고 구속하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대신하여 주었노라.”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구스와 스바도 포기하면서까지 구속했다”고 했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애굽도 포기하시고 구스와 스바도 포기하시고 바벨론도, 앗수르도, 메데와 바사도 로마까지 다 포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아,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 표했다, 이제는 너의 값을 알고 너의 자존심을 지켜라” 그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값을 설명하고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존재입니다. 나는 이렇게 해서 구속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이 값을 모릅니다. 그래서 건듯하면 죽고 싶다, 될 대로 되라, 세상 망해버리고 말합니다. 너무 쉽게 포기하고 목숨을 버립니다. 그래서 하루에 36명씩 자살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고 합니다. 지난해는 13,055명이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죽는 사람은 오죽하면 죽을까 하는 생각도 되지만 그 죽음조차도 문제의 해결방법은 아닙니다. 잠시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자신을 살피면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세상에는 자살을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죽음에의 철학”이라는 책 “자살론”에서 “인간은 신보다 낫다, 신은 자살할 자격도 없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자살할 특권이 있다”고 자살을 미화하고 부추겼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그 말이 진리나 되는 것처럼 알고 죽어갔습니까.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72세까지 다 살고 죽었습니다. 오늘 인터넷에는 자살을 도와주는 사이트까지 생겼습니다. 혼자 죽기 용기가 없고 억울하다 생각되는 사람은 같이 죽으라고 자살중매까지 서 주고 독약까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죽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일을 너무 생각 없이 겁 없이 일순간에 자행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값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모르면 쉽게 버리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애굽도 포기하고 바벨론도 포기하고 메데와 바사도 포기하고 구스와 스바도 포기하고 너를 구속하였느니라.”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값이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를 죽여서까지 구속했다”고 했습니다.

 

요3: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왜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구속을 위해서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애굽도 포기하시고 구스와 스바도 포기하시고 심지어는 예수까지 포기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관통해서 흐르는 사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구속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끊임없이 흐르는 성경의 가징 무게가 있는 중심사상입니다. 이것이 구속사상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단히 힘쓰시는 사상이 구속사상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모두 몇 자인 줄 아십니까. 지금 부질없이 복잡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성경은 모두 두자입니다. “성경“. 두자아닙니까. 이 성경은 모두 66권으로 1,189장, 31,173절, 3,566,490자입니다. 이 많은 글자 속에 들어있는 깊은 사상이 바로 이 구속사상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나 한사람을 구속하기 위해서 펼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그리고 예수의 오심과 오셔서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 승천하심 등 이 모든 내용들이 모두 구속을 위한 목적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나 한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이 말입니다. 그 내용이 이 성경말씀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값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의 값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백성들을 내세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값입니다. 성경은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모르면 우습게 취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업신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귀한 세월을 방탕하고 허비하고 무의미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구속받은 존재인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공처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그렇게 고가의 값을 치루고 구속하였습니까.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증거하는 주인공으로 살게 하시려고 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서를 보면 인간의 제일가는 의무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주인공처럼 살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주인공을 보십시오. 주인공은 언제나 몫이 큽니다. 그리고 죽어도 안 됩니다. 영화를 보십시오. 주인공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나타나서 끝까지 죽지 않습니다. 연속극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은 큰 병에 걸려도 죽지 않습니다. 끝에 가 보면 반드시 낫고 일어섭니다. 처음에 실패했다가도 나중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납니다. 그것이 주인공입니다. 영화나 연속극에서 주인공을 내세우는 목적은 그 주인공의 살아가는 과정에 나타나는 어려움, 난관, 실패, 병듦, 죽을 뻔함 등 그 과정을 보면 어렵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 모습을 시청자들이 보고 그들에게서 나의 삶의 해답을 찾게 합니다. 그것이 연극, 영화, 연속극의 존재이유 입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을 보면 마지막에는 한결같이 모든 난관을 이기고 극복한 후에 웃습니다. 그 모습이 나에게 암시를 주고 격려를 주는 목입니다. 그래서 연속극을 보면서 주인공이 울면 나도 울고 웃으면 나도 웃는 것입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나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저것은 감독이 시켜서 우는 거야”하고 연속극을 본다면 아무 재미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세운 이 세상의 주인공입니다. 그렇게 주인공을 만드시려고 나를 불러내서 구속하여 이렇게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언제나 기죽어 살면 안 됩니다. 언제나 실패했어도 회복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멋진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관객들로부터 박수를 받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고 의무입니다. 우리는 이 삶의 의미나 의무를 모르면 안 됩니다. 모르니까 건듯하면 주인공이 도중하차 하려하고 사라지려하고 죽으려고 합니다. 주인공이 도중에 사라지면 어떻게 합니까.

주인공도 아주 괜찮은 주인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려면 공들여 살아야 합니다. 신앙을 위해서 공들여야 하고 삶을 위해서도 공들여야 합니다. 공들여 사는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도 공을 들여야 향기가 나고 감동을 주고 결과가 좋습니다. 음식하나 만들어도 공들인 음식은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음식점에서 먹는 음식보다 집에서 만든 음식이 맛이 있는 것입니다. 공들여서 그렇습니다. 공들여 끓여놓은 된장찌개가 얼마나 맛이 있습니까.

된장을 끓일 때는 반드시 뜨물로 끓여야 맛이 있습니다. 뜨물도 초벌은 버리고 두벌 씻은 물로 끓여야 맛이 있습니다. 된장국은 뜨물이기에 맛있는 것이 아닙니다. 된장은 풀어놓으면 된장입자가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위는 멀건하고 밑은 가라앉아서 짭니다. 거기에 뜨물을 넣으면 된장의 입자가 가라앉지 않아서 위아래가 똑같이 간이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된장은 뜨물로 끓여야 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 정성이 들어가니까 음식이 맛이 있는 것입니다. 일반음식점에서 그렇게 합니까. 적당히 물 붓고 된장 풀어 조미료 팍팍 쳐서 내 놓습니다. 여러분 정성이 들어가고 최선하다고 공이 들어간 곳에는 보기도 아름답고 향기가 나고 맛이 있습니다.

김치 중에 나박김치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를 얇고 네모반듯하게 크기가 똑같게 썰어 넣고 고춧물 내서 시원하게 맛낸 김치, 그것을 나박김치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나박나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얇고 똑같이 네모반듯하게 썰었다“해서 ”나박나박“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음식은 보기만 해도 향기가 나고 맛이 납니다. 아니고 대충 썰고 물 내서 만든 음식은 보기도 아름다움이 없고 맛도 없습니다. 매사 정성입니다. 정성이 들어간 곳에 맛이 있고 향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세상을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부르셔서 구속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 삶에서 하나님이 묻어나고 표현되고 보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대충 살고 살다가 어렵거든 죽어버리라 그렇게 부르신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적어도 우리를 세상에서 주인공처럼 살라고 불러내시고 구속하여 세워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아무리 값이 있게 구원받고 구속받았다고 해도 존대 받지 못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천박한 신앙인이 됩니다. 삶이 천박해집니다. 삶의 과정도 생각도 삶의 모양도 천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차를 타면 운전도 품위 있게 해야 합니다. 차는 좋은데 운전을 꼭 봉고차 몰듯 하는 운전자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좋은 차를 타고 운전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이면 운전도 막 천박하게 하면 안 됩니다. 신호를 무시하고 무질서하게 다녀도 안 됩니다.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을 태우고 운전하다가 아쉽게 신호등이 바뀌는 바람에 사거리에서 지나가지 못하고 멈추어 섰습니다. 그때 이 집사님이 “아쉽다, 목사님만 안타셨으면 그냥 지나갔는데”하고 말했습니다. 누가 봐서가 아니고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자존심인 것입니다. 나의 고집이고 나의 체면이고 나의 값 때문입니다. 스스로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속담에 “새도 가지를 가려 앉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자의 책에 보면 “원추”(鵷鶵)라는 새가 나옵니다. 이 새는 남해에서 출발해서 북해로 날아가는데 가는 도중에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감로천이 아니면 마시지를 않았다고 했습니다. 새도 하룻밤을 앉아 쉬어 가도 나뭇가지를 가려서 앉고 먹을 것을 가려서 먹는다는데 내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입고 선택을 받고 구속받아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렇게 천박하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구속받은 사람은 그만한 값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누리지 못하면 값이 없고 천박해집니다. 값이 있으면 그만한 책임도 주어지고 의무도 주어지고 높은 질서의식도 있어야 합니다. 값을 알고 살아가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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