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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을 이루는 성서와 현실의 텍스트

by 【고동엽】 2021. 12. 21.

열왕기 40 / 왕하 20:1-6 / 2010.02.14 / 개역개정판

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4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오늘 본문인 열왕기하 20장에는 히스기야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죽을 병에 걸렸고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최후통첩을 받습니다. 죽음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죠.
히스기야는 눈물로 기도하고 응답을 받아 냅니다. 그는 병도 낫고 수명도 15년이나 연장을 받습니다. 이 일은 아마도 유다와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침공을 받은 때하고 시기적으로 겹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히스기야는 29년동안 제위했는데, 지금 오늘 사건에서 15년이 연장됐으니까 그의 제위 14년쯤에 이 병에 걸렸고 이 기도에 응답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히스기야 14년은 앗수르왕 산헤립이 쳐들어와서 유다를 침공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한 때 입니다.
또 그는 21장 1절에 보시면 히스기아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될 때 나이가 12세라고 기록된 바와같이, 그가 수명이 15년 연장되었으니까 이때는 자식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이스라엘 유다의 국가적 위기와 대를 이을 자식이 없는 이 두가지 문제가 현실적으로 시급하고 간절한 문제가 되어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그 응답을 받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보시면 6절에 있는 바와같이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겠다' 하는 그 약속까지도 받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히스기도의 기도와 응답에 가장 큰 특징을 하나님의 그 신속하신 반응으로 촛점할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 있는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라는 본문 표현은 이사야가 궁궐 뜰을 지나가기도 전에 그런 뜻입니다. 궁궐을 벗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히스기야에게 가서 '너 병 낫고 성도 안전할 것이요 네 수명은 십오년 연장되리라' 라는 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크고 중요한 일에 비해서 너무나 신속하고 단호한 응답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응답은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8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면 이 응답의 확실성을 위하여 히스기야가 증표를 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일영봉' 해시계의 그림자가 10도를 물러서는 즉 시간이 후진하는 증표를 보여서 이 약속의 확실성을 그에게 알리십니다.
우리는 물론 이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에 대해서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분이요,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지체하지 않으시고 전력을 기울려 응답하시는 분이라하는 것을 일차적으로 성경이 증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번 언급했습니다만 이 열왕기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궁극적으로 멸망을 기록하고 있고 북왕조 이스라엘과 남왕조 유다가 하나님의 선민이면서도 특별한 하나님의 보호속에 있고 다른 우상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왜 망할 수 밖에 없었느냐 라는 주제를 놓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지금 당시 열왕기서에 일차 독자가 되는, 일차 청중이 되는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으로 중요한 관심사 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역사적으로 아는대로 저들의 포로기간은 70년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민족들에게 유일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출애굽을 허락하신 하나님 약속의 땅으로 저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선민들이 이렇게 맥없이 팔릴 수 있는가 쫓겨날 수 있는가 또 그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앞에 얼마나 많이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나 포로기간이 70년에 이르도록 그 응답이 없었던 현실속에서 히스기야의 이 기도와 그 응답은 사실 그들에게 충격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실적으로도 사실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어떤 이들에게는 당연한 증거이고 어떤이들에게는 충격입니다. 저는 충격파입니다. 충격파라는게 무슨 뜻인지 여러분 아실겁니다. 기도하고 응답받는 사람들만 간증을 하죠. 응답 못 받는 사람들이야 뭐 나서서 떠들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알고보면 다수가 응답을 못 받습니다. 소수가 응답을 받습니다.
그리고 더 길게보면 우리의 신앙인생속에 응답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그리고 없는 쪽이 더 많습니다.
그런 우리의 현실속에서 보자면 히스기야의 기도와 응답은 우리의 하여금 신앙의 기본적인 문제를 처음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계신가,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인가 하는 기본문제에 대하여 도전을 던질 수 있지만 그걸 지나고 나면 도대체 어떤 기도에는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어떤 기도에는 응답하시지않는 그 기준은 뭔가 라는데까지 오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두번째 문제, 어떤 기도에는 응답하시고 어떤 기도에는 응답하시지 않느냐 라는 촛점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 복음 14장 9절로 갑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13절에 주로 붙들려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을 받는다 하는데 우린 붙들려 있죠. 그러나 우리가 언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든가, 히스기야와 같이 간절히 기도하지 않아서 응답을 못받는 것은 우리 경험상 아닙니다.
우리도 정말 뼈가 저리게 기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지만 응답을 받지못하는 때가 허다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그 앞에 있었던 나를 믿는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함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기준으로 삼고 내용으로 삼아 구해야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걸으신 길은 일반 모든 인생과 방불한 이땅에 발을 딛고 험난한 인생을 살은 것입니다. 고단한 삶을 사는 것이죠.
그러나 그 인생은 그 앞에 있었던같이 10절에 보는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말하자면 한 인간과 함께 현실속에서 이루어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기도라는 것을 종종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우리의 소원을 간절히 구하는데까지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또 우리의 짐심에 감동하셔서 결과를 주셔야되는 것으로 종종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해야하는 기도는 우리 인생을 바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인생을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뜻을 하늘에서 정하신 것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구체적인 시공관과 그 시공관을 걸어가는 우리의 존재를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성경과 현실이라는 두개의 텍스터를 가집니다.
이 텍스터라는 것은 우리말로 번역할 때 교과서라 그러기도하고 본문이라고도 하는데 설명을 하면 뜻이 분명해 질 것 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텍스트라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의 약속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의 그건 교과서고 본문입니다. 그럼 현실은 어떻게 텍스트가 되는가.
이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했느냐가 구체적인 삶속에서 실현되고 구체화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실 기독교신앙이라는 것이 아차하면 그 무형의 것이 됩니다.
하나의 관념이 되고 이상이 되고 그리고 무슨 초월이 되고만 말지 그것이 현실화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 물리적으로는 전혀 납득을 안할려고 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의 응답은 현실을 바꿔주는 것, 그렇게만 생각하지 현실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바꾸는 것과 현실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그러니까 구별되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환경과 조건을 바꿔달라는 것이고, 현실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 곤고한 인생을 사는 한 인격과 영혼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현실을 수용하고 극복하고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가 어렵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식은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는 영혼 믿는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에서 가장 좋은 예를 찾을 수 있는데, 다윗이 고백한 이 시는 여러분 잘 아시는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슨 목가적이고 행복한 인생을 산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처절한 인생을 산 사람의 자기 인생에 대한 신앙적 이해입니다. 잘 아시는데로 다윗은 구국영웅이었으나 사울왕의 미움을 사서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 생애의 대부분을 도망다녀야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나중에 정말 도망갈 데가 피할 데가 없어서 적국인 블레셋으로 도망을 갔었습니다. 시글락이라는 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망명한 신분으로 본심이 탄로날까봐 할 수없이 블레셋 군대에 참여하기까지 했습니다. 블레셋 지휘관들이 저 다윗은 믿을 수없으니까 전쟁에 데려 나갈 수없다 돌아가라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죠. 그 몇일 사이 잠깐 몇일 사이에 아말렉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근저지로 삼았던 마을로 들어와서 다 노략하고 그들의 모든 가족들을 포로로 돌아갑니다. 그
래서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그 다윗과 부하들이 더이상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울었고 부하들이 돌을 들어 쳐 죽일려고하는 위급한 상황까지도 갑니다. 다윗은 그 외에도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당하기도하고 그가 밧세바 사건으로 범죄하여 정말 그 영혼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같은 그 회개와 절망의 나락에도 떨어집니다. 시편 40편에 기록한 바와같이 하나님이 나를 기가막힌 웅덩이에서 건지셨습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 이런 삶을 산 사람이 시편 23편을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언제나 푸른 초장으로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선한 목자였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는 결국 예수께서 성육신으로 보여주신 것같이 신자된 인생의 고단함이 그 고단함을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래서 한 인간이기를 극복하는 신앙의 싸움이지 환경과 조건을 변화시켜서 편안하게 가는 싸움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빌립보서 2장 5절이하에서 이 성육신의 이렇게 소개받고 있는데 이 표현들을 좀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순종은 나를 포기하고 나를 하나의 물건같이 하나님의 수중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맹열한 의지를 가지고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의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칠려고 하는 것은, 이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히스기야 그에게 일으난 현실속에서 그 현실을 통하여 히스기야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는 것을 하나님이 요청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히스기야의 요청에 하나님이 현실에 내려오듯이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께서 바치라는 요청이기도하다. 그게 기도가 가지는 깊은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우리를 불러 함께 일하자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은 우리는 결국 기도라는 것을 하나의 주술행위로 밖에 가질 수없게 됩니다. 그러고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집니다.
기독교 신앙의 어려운 점이죠. 기도한 것으로 내 책임이 끝나고 그다음에 기도의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일만 남은 것이 기도가 아니라, 모든 기도는, 제가 여기 어디서 따온 표현을 써자면,
'의지를 총동원하여 동의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물이 아니라 인격으로 바로 서게 된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사셔야 됩니다. 그렇게 산다는 것은 여러분이 처한 현실을 하나님께 바쳐야됩니다.
현실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은 쉽게 우리의 시간중에 어느 시간을 잘라서 기도하고 전도하고가 아니라 24시간이라는 여러분 삶의 현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사십시요!
하나님이 원하는 삶! 섬기는 삶, 인내하는 삶, 신앙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걸맞는 온유와 겸손으로 사는 삶을 사셔야 됩니다.
우리는 고통을 면해야되는것 때문에 기도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 답을 받고 나와야 됩니다.
이 답을 받고 나오지않는다면 우리 할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한복음17장에 가면 아까 봤던 요한복음 14장에 나왔던 말씀이 조금 더 이해하기 좋게 아니면 좀 더깊게 이렇게 소개 됩니다.
요한복음 17장 20절 입니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왜 왔다고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사는 인생을 보러오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성육신의 인생을 살게 되는데 성육신의 인생이란 뭐냐하면 내 인생을 나혼자 살지않고 이 인생을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위하여 삽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룬다는 것은 아주 깊은 의미에서 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우리가 볼 때 볼품없고 사소하고 그기에 무슨 의미있는 일이 있으랴싶은 모든 부정적이고 외면하고싶은 고통의 자리까지도 하나님의 통치로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모든 현실을 하나님이 끌어안으시는 영역으로 하나님에게 바치셔야 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일으나는 인생과 현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걸어라하는 인생이라고 수용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운명론으로 붙잡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난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자리까지 갈 의욕과 소원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한데 이 자리를 채워 넘어가야된다 고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자리는 그것이 어느자리가 더 나은 것이 아니라, 어느 자리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예수그리스도가 그리 사신 것같이 시공을 우리가 걸어나아가서 하나님께 바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차고 넘쳐서 물이 흘러가듯이 우리에겐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채우고 더 나은데로 더 나은데로 더 큰일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예기하는 바와같이 작은일에 충성하는 것이 일차적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따지고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 이만저만한 일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도와줬어라고 예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모시고 살아보면, 신앙인생은 그것은 언제나 시작입니다.
그렇고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을 모시고 어떤 경우, 어떤 상황, 어떤 인생도 걸어가는 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는, 자기를 비우시고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쫒는 길입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모두의 눈앞에 열려 있습니다.
특별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시니까 우리는 어떤 멋진 일, 임무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자랑할만한 어떤 사건.. 그렇게 성경은 예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도 뉴스거리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속에 오셔서 당신이 걸어실 수 있었던 그 제한된 발걸음안에 고정됐지만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걸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어떻게 하나님앞에 받혀질 수 있는가를 보이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능하게 하신 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를 쫓을 것이니라' 라는 명령을 기억합니다. 그 일을 해야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유혹과 위협은 교회내에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저렇게 할말없게 할말없게 증명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이 살아내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요청하신 걸 여러분을 하나님이 요청할 때마다 잊지않으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라는 예수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늘 상기하여 여러분의 인생을 사셔야됩다. 그리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약속과 마찬가지로 나를 믿는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크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의 중요성이고 신앙생활에 핵심되는 본질입니다.
이 승리가 여러분 모두에 책임이요 특권인 것을 기억하는 오늘의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소중함과 귀한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 주를 모시고 가기로 약속합니다. 울어야될 때 울기로, 한숨쉬어야할 때 한숨쉬기로, 그러나 우리의 인생과 현실을 하나님앞에 바치는 것을 외면하고 도망가지 않기로 약속합니다. 우리 마음에 믿음과 순종과 인내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자료바구니(기독)
글쓴이 : 자료바구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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