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기록하는 자가 이깁니다 (신명기 27장 1-10절) < 기록이 기적을 만듭니다 >

by 【고동엽】 2021. 12. 21.

기록하는 자가 이깁니다 (신명기 27장 1-10절)
< 기록이 기적을 만듭니다 >

어느 날, 한 초등학생이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적자생존이 무슨 말이에요? 왜 흑자를 내지 않고 적자를 낸 사람이 생존해요?” 엄마가 잠깐 고민하다가 마침내 말했습니다. “아마 그 말은 ‘적자!’라고 결심하고 열심히 적는 사람이 결국 생존한다는 말일 거야. 그만큼 적는 것이 중요해.” 엉뚱한 해석이지만 그 말 자체는 진리입니다. 적는 자가 결국 승리하고 생존합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록의 힘은 어떤 힘보다 강했습니다.

구 소련 오뎃사 지역에 이리나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끊임없이 무신론 교육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자녀를 오븐에 넣고 구웠다는 한 침례교 여인 얘기를 들려주며 종교를 혐오하게 했고 방송과 신문은 끊임없이 신부와 목사들을 멍청이로 묘사했습니다. 마치 나라 전체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공정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놀 때도 한 친구만 계속 때리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데 왜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을 그렇게 요란하게 때리는지 이상했습니다.

1963년 눈 내리던 어느 날, 선생님은 늘 하던 말을 했습니다. “얘들아! 신은 존재하지 않아. 어리석고 무지한 늙은 여자들이나 신을 믿는 거야.” 그날 이리나는 생각했습니다. “저 말은 거짓말일거야. 왜 어른들은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을 할까. 도깨비나 귀신이 없다고 할 때는 한두 번 말하고 끝내면서 왜 하나님이 없다고는 자꾸 말할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정말 계실 거야. 그런데 아마 어른들이 무서워할 힘센 분일 거야.”

그때 그녀는 창밖에서 내리는 눈을 쳐다보며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안 계시면 이 쓸데없는 수업을 안 해도 될 텐데. 하나님! 하나님은 정말 있죠? 눈이 와도 밖에서 뛰어놀지 못하고 이렇게 교실에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이 있는 탓이에요.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계속 눈이나 내리게 해주세요.” 그것이 그녀가 난생 처음 한 기도였습니다. 마침 그 기도에 응답하듯 오뎃사에 사흘 동안 눈이 내렸습니다. 60년 만의 폭설로 학교는 임시 휴교를 했습니다.

집에서 이리나는 삭막한 공산국가에도 눈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일까? 좋은 분이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도 싫어! 반대로 좋으시긴 한데 전능하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그때부터 그녀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경도 없었고 아무도 하나님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어떤 감동에 이끌려 이런 시를 썼습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을 어떻게 찾을까. 이 소망과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까.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을 찾는다. 그때 하나님은 가장 좋으신 것을 준다.” 몽당연필을 잡고 그 시를 쓸 때 그녀는 어떤 따뜻한 눈길이 어깨 너머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느꼈습니다.

점점 소련 상황은 더 암울해졌습니다. 1967년 브레즈네프가 권력을 잡은 후 전임자 후르시초프의 유화정책은 사라지고 다시 강압통치가 시작되었고 1983년에는 비밀경찰 KGB의 수장 출신인 안드로포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리나의 시가 널리 유포되자 비밀경찰은 그녀의 시를 반혁명 시로 규정해 그녀를 체포했습니다. 그때 28세의 이리나는 7년의 중노동형과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악명 높은 바라세보 노동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수용소의 추위와 굶주림과 고통에서도 그녀의 마음은 항상 따뜻했습니다. 하나님이 평강을 주셨고 자기 마음을 표현한 시와 기록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중노동으로 고통이 커지면 그때마다 시구를 떠올렸고 밤에 그 시구를 작은 종이에 은밀히 기록했습니다. 언젠가 자유를 찾으면 자신의 시와 기록들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침내 서구 기독교인들과 인권단체들이 끊임없이 이리나의 석방을 요구해서 1986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의 정상회담 이틀 전에 그녀는 풀려나 서방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자유를 찾은 이리나가 서방에 와서 발간한 첫 번째 책은 <회색은 희망의 색(Grey is the Color of Hope)>이란 책입니다. 그 책에서 그녀는 수용소 독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얘기를 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다른 기독교인 죄수들도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수용소 독방에서 시를 기록할 때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는 인자한 눈길에 대한 달콤하고 따뜻한 느낌은 그녀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위로였습니다.

또한 이리나는 석방 후 전 세계의 수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석방을 위해 기도해주었음을 알고 이런 글을 썼습니다. “믿어주세요. 종종 이런 일이 있었어요. 독방에서 추운 겨울에 홀로 밤을 샐 때 갑자기 밀려오는 기쁨과 따뜻함! 그리고 사랑의 멜로디! 누군가 저 너머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구나! 내 길을 밝혀준 그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나는 고통을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수용소의 고통을 이기게 해준 것은 누군가의 기도였고 연필로 쓴 기록이었습니다. 그 기도와 기록이 흑암에 처한 거대한 나라를 변화시킨 작은 빛이 된 것입니다.

역사는 기록으로 보존되고 내일의 승리는 기록에서 출발됩니다. 기억보다 기념이 큰 힘이고 기념보다 기록이 큰 힘입니다. 기억은 기록을 따르지 못합니다. 기록하는 사람이 기억하는 사람을 지배합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대개 순간순간 깨달은 것을 기록해 놓는 사람입니다. 갑자기 떠오르는 창조적인 생각들을 기록해놓지 않으면 금방 잊습니다. 반면에 그것을 기록해두면 창조성과 지혜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록이 기적을 만듭니다.

< 기록된 말씀의 중요성 >

성도는 자주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묵상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선택했나? 바른 길을 가고 있나? 하나님이 내게 주신 비전을 따라 살고 있는가?” 그때 어떤 깨달음이 생기고 그것을 기록하고 그 다음에도 틈틈이 그 기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책을 볼 때나 기도할 때나 생활하면서 얻는 깨달음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바로 기록해놓고 수시로 그 기록을 살펴보면 점차 그 사람은 인물로 성장합니다.

성도들은 기도합니다. “하나님! 인물이 되도록 제게 창조성과 지혜를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면서 해야 할 일이 바로 기록하는 일입니다. 생각날 때마다 기록하고 깨달을 때마다 기록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아이디어도 계속 떠오릅니다. 그처럼 어떤 기발한 생각이 들고 어떤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적자!”라고 하는 인생이 결국 성공합니다. 아이큐가 150 넘는 사람이 적는 사람을 따르지 못합니다. 기억이 기록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기발한 생각을 적어두면 반영구적으로 남지만 적지 않으면 몇 시간도 남지 않습니다. 저는 아침에 새벽기도 할 때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면 기도 후에 즉시 기록해 놓습니다. 몇 시간 후에 새벽에 기도할 때 깨달은 것을 생각해내려고 하면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억을 앞세워 사는 사람이 기록을 앞세워 사는 사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언제 가장 행복해집니까? 진리를 깨달을 때입니다. 그 행복을 키우고 지속시키려면 그 깨달은 진리를 기록해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성찰도 하고 미래의 비전도 다듬어야 합니다. 자기가 한 일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을 치매라고 합니다. 기억에만 의지하면 결국 누구나 치매가 됩니다. 그러나 기록해놓으면 치매를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적는 습관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만들고 은혜를 지속시키게 하는 최상의 습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에서 무수히 “기록하라!”고 말씀했고 결국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있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음성들이 들립니다. 그 음성들의 준거 틀이 되는 것이 바로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로고스(Logos)라고 합니다. 로고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로고스는 기록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기록이 없다면 지나온 삶은 의미를 잃습니다. 또한 그 소중한 의미를 후대로 전달하기도 힘듭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를 기록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기록된 말씀이 있기에 이단과 사이비와 사기꾼으로부터 영혼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어떤 신비한 환상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찬란한 비전은 늘 말씀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어린이 책은 그림이 많지만 어른 책은 글자가 많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만화만 좋아하면 안 됩니다. 그처럼 성도가 만화 같은 환상과 기적만 좋아하면서 글로 기록된 말씀을 외면하는 것은 미성숙의 제일 표시입니다. 왜 성경에는 말씀을 기록하라는 명령이 많이 나옵니까? 그래야 은혜를 잊지 않고 말씀 중심적으로 살면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도 기록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 말씀을 돌에 기록하라는 명령 >

신명기는 모세의 3편의 고별설교로 이뤄진 책입니다. 1차 설교(1:6-4:43)는 과거의 역사를 회고하며 은혜를 상기시킨 과거적인 설교이고, 2차 설교(4:44-26:19)는 각종 율법 강해를 통해 율법 준수를 권면한 현재적인 설교입니다. 27-30장에 있는 3차 고별설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말씀을 담은 미래적인 설교입니다.

모세는 3차 고별설교를 하면서 백성들에게 오늘 내리는 명령을 다 지키라고 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고 했습니다(2절). 고대에는 책이 없었기에 큰 돌에 기념비적인 사건이나 법을 기록해 많은 사람들을 보게 했습니다. 왜 돌들에 석회를 바르라고 했습니까? 쉽게 글자를 새기고 새긴 글자가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돌들에 석회를 바른 후 그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면 약속한 대로 가나안 땅에 들이시겠다고 했습니다(3절). 말씀중심적인 삶에 공동체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율법이 기록된 돌비를 에발 산에 세우라고 했습니다(4절). 에발 산은 저주를 선포하도록 선택된 산입니다(13절). 돌비를 그 산에 세우라고 한 것은 말씀에 불순종해서 저주받는 길로 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돌비를 세운 곳에 쇠 연장을 대지 말고 여호와를 위한 돌 제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5절). 율법을 새긴 돌비를 세우라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는 뜻이고 돌 제단을 쌓으라는 것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힘쓰라는 뜻입니다. 또한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말은 자연석 그대로 제단을 쌓음으로 제단의 외형과 미관에 너무 신경을 쓰기보다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더 중시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듬지 않은 돌로 쌓은 제단 위에서 번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6절). 번제는 속죄 및 헌신을 위한 제사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십자가의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번제와 더불어 화목제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먹고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7절). 화목제는 은혜에 대한 감사 및 교제를 위한 제사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부활의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을 겸비하고 눈물과 웃음을 겸비하고 열심히 일하고 잘 놀 줄 아는 삶을 겸비해야 합니다.

그런 명령들을 내린 후 한 번 더 강조해서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하라고 명령합니다(8절). 그처럼 반복하고 강조해서 명령한 것은 돌비에 새겨진 율법을 심비에도 철저히 새겨 지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결론적으로 명령했습니다.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해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하라(9-10절).”

모세는 “잠잠하여 들으라.”고 명령하면서 광야 40년간에 보여준 백성들의 불순종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불순종이 광야 40년을 초래했을까요? 아니면 광야 40년이 너무 힘들어서 불순종했을까요? 어떤 이유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삶은 현저히 달라집니다. 그 선택에서 불순종이 광야 40년을 초래했다는 이유를 선택하고 하나님의 뜻과 조치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새롭게 다짐할 때 거기서부터 복된 미래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 말씀중심적인 삶을 도전하려고 하나님은 돌비와 심비에 말씀을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 기록된 말씀의 영향력 >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 중의 하나는 ‘기록하는 삶’이고 더 나아가 ‘기록을 문서로 남기는 삶’입니다. 어느 공동체든지 문서로 기록을 남기는 서기는 가장 중요한 직책 중의 하나입니다. 각 교단마다 최고 직위인 총회장이 되려면 대개 서기를 거쳐야 합니다. 공동체의 수장이 되려면 전체상황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공산당에서는 서기장이 대통령과 같은 직책입니다.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남긴 사람들도 대개 문서를 남긴 사람들입니다.

모하멧이 계시 받았다는 내용을 엮은 쿠란을 보면 성경의 내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모하멧은 40세에 계시를 받았다고 나서서 메카에서 포교하면서 이단자로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많은 추종자들이 메디나로 피신한 상태에서도 혼자 계속 메카에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마침내 주후 622년에 본인도 메디나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약 2년쯤 후에 메디나 인근에서 메카 군을 처음 격파하고 주후 630년에는 마침내 메카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곧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했지만 바로 이어서 주후 632년에 병으로 죽습니다.

약 20년 동안 사역하고 짧은 기간을 정복군주처럼 지냈기에 역사상 존재했던 다른 대제국들의 황제들에 비하면 세력도 작았고 통치기간도 짧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약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슬람 세력이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까? 모하멧이 계시 받았다는 것을 엮어서 그의 계승자가 쿠란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힘만 내세웠다면 이슬람은 한때 왕성했던 종교 세력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쿠란이란 문서를 남겼기에 그 영향력에 지속성이 생긴 것입니다. 기록의 힘이 무기의 힘보다 강합니다.

예수님은 30세에 사역을 시작하시고 약 3년을 활동하시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다른 역사적인 대 스승들에 비하면 너무 짧은 활동기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향력을 남길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사후에 기록된 문서들의 역할도 컸습니다. 사실 쿠란을 자세히 보면 이슬람교도 몰몬교나 통일교나 안식교나 여호와 증인과 같은 기독교의 한 이단 분파란 느낌이 들 정도로 상당히 기독교의 영향력이 짙게 배여 있습니다.

쿠란을 보면 모하멧은 역사상 수많은 기독교 이단들의 주장처럼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보면서 삼위일체 사상을 내세우는 것을 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처럼 모하멧은 기독교인은 반대했지만 예수님은 지극히 높였습니다. 모하멧은 예수님을 세상을 구할 구세주(메시아, 그리스도)로는 인정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라고 합니다.

쿠란 니싸아 157-158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선지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살해하였다라고 그들이 주장하더라 그러나 그들은 그를 살해하지 아니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했으며 그와 같은 형상을 만들었을 뿐이라 이에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은 의심이며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렇게 추측을 할 뿐 그를 살해하지 아니했노라/ 하나님께서 그를 오르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권능과 지혜로 충만하심이라.” 모하멧은 메시아인 예수님이 보통 인간처럼 십자가에 죽을 수 없기에 산 채로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니싸아 171-172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성서의 백성들이여 너희 종교의 한계를 넘지 말며 하나님에 대한 진실 외에는 말하지 말라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마리아에게 말씀이 있었으니 이는 주님의 영혼이었노라 하나님과 선지자들을 믿되 삼위일체설을 말하지 말라 너희에게 복이 되리라 실로 하나님은 단 한 분이시니 그분에게는 아들이 있을 수 없노라 천지의 삼라만상이 그분의 것이니 보호자는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니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 됨 이상으로 자만하지 아니했으니 가까이 있는 천사들도 그랬노라.”

모하멧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과 삼위일체설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 및 ‘주님’이라고 표현했고 주님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높이는 자만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높인 말들을 보면 신교와 구교는 물론 이슬람교도 예수님의 영향력 아래에서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단 3년의 사역으로 그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실제적인 이유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문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이 담긴 4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한 세대쯤 후에 기록된 문서들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행적을 다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삶과 뜻 그리고 복음을 나타내기에는 충분한 기록입니다. 기록된 글은 놀라운 파워를 가집니다. 더 나아가 기록된 말씀은 더욱 놀라운 파워를 가집니다. 기록된 말씀이 능력의 원천이면서 가장 위대한 영향력의 원천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문서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 성도의 헌신은 기록됩니다 >

기록된 말씀은 영혼을 사탄으로부터 지키는 최상의 도구입니다. 성도의 궁극적인 싸움의 대상은 자기 정욕이나 자기감정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성도의 싸움의 궁극적인 대상은 악의 영입니다. 그 악한 영과의 싸움을 이기게 하는 최대 무기가 바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에서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의 5가지는 방어적인 무기지만 유일한 공격적인 무기는 바로 말씀의 검입니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입니다. 방어만 하면 집니다. 공격도 해야 합니다. 그 영적인 공격 무기가 바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 세 번 모두 “기록되었으되”라고 하며 신명기 말씀을 인용해 그 시험을 이기신 것입니다.

인물이 되길 원하면 열심히 기록하십시오. 더 나아가 기록된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힘써 순종하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도 그의 삶을 다 기록하시고 넘치는 보상을 내려주십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 설 때 2종류의 책이 펴져 있다고 묘사합니다. 한 종류의 책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생명책입니다. 또 한 종류의 책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행위가 기록된 ‘행위 책들’입니다. 행위 책들에는 우리의 행위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어서 이 땅에서 행한 대로 보상과 보응을 받게 됩니다.

어느 날, 한 대학 기숙사에서 선착순으로 온 학생들에게 좋은 방들을 배정하는데 가장 먼저 온 한 학생이 가장 시끄러운 계단 아랫방을 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감이었던 교수가 감동되어 그 학생의 이름을 수첩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멘토가 되어주었습니다. 25년 후 그 학생은 그 대학의 총장이 되었습니다. 헌신적인 태도로 감동을 주어 사람의 수첩에 기록되어도 나중에 큰 축복의 자리로 올라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행위 책들에 기록되면 얼마나 큰 축복과 보상이 예비되겠습니까?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어느 날, 예수님이 70명을 따로 세워서 둘씩 각 동네와 지역으로 전도를 보냈습니다. 전도 후에 그들이 기뻐하며 돌아와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내세우니까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귀신을 내쫓은 일로 흥분하는 제자들에게 진짜 큰 승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려고 말씀했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가장 복된 일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다는 말입니다. 즉 기록이 필요 없는 전지하신 하나님이 기록하신다고 하신 것은 그만큼 우리의 헌신을 반드시 기억해주신다는 뜻입니다. 헌신과 선행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다 알아주시고 행한 대로 넘치게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내일의 축복과 하늘의 상급을 추구하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140126) -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