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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나이! (창세기 47:7-10) /(고)이중표목사

by 【고동엽】 2021. 12. 21.

당신의 나이! (창세기 47:7-10) /(고)이중표목사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요셉입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을 두었으나 그 가운데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양치는 형들의 안부를 물으러 갔다가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안고 아픔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야곱의 마음은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야곱이 요셉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날 때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 애굽 땅에 양식이 많다는 얘기를 들고 야곱이 자기 아들들을 애굽 땅으로 양식을 구하러 보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애굽에 가서 총리대신이 된 요셉을 만납니다. 요셉은 자기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애굽으로 초청합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다는 얘기를 들은 야곱은 너무 너무 기뻐서 모든 권속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요셉은 자기 아버지를 모시고 바로 왕 앞에 인사를 시킵니다. 야곱이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매 바로 왕이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연세가 얼마뇨"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은 평범한 사람인 것 같아도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깊은 신앙을 담아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나이가 얼마뇨" 하고 물을 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이 고백은 인생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이를 더할 때 묻는 말이 있습니다. "몇 살 먹었습니까?" 여기 '살'이라는 말은 '인생살이, 머슴살이, 타향살이, 더부살이, 셋방살이' 할 때 붙이는 말인데 이 말은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살고, 살으니, 살아서, 산다고 할 때 살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러므로 '살'을 나이로 세는 것은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한 살은 하나의 삶을 의미합니다. 두 살은 둘의 삶을 의미합니다. 한 살 한 살의 나이가 인생의 삶을 축적한다는 단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말은 몸밖에 있는 것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는 말로 나의 것으로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먹는 것만 남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옷은 입었다가 벗으면 내 것이 아니지만 먹는 것만은 내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내 것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밥 먹고, 물 먹고, 욕 먹고, 뇌물도 먹는다고 말합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말은 살을 먹는다는 말이고 삶은 곧 내 삶으로 소유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고도 살을 먹은 것이 되지 못하면 그 인생은 비극이 됩니다. 나이를 먹으면 늙는 것이요, 살을 먹으면 삶을 풍성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가는 내용이 삶이요, 그 과정이 살이요, 단위로 표현하면 이게 바로 나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결국 살을 먹는 존재입니다.
살이라는 말은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삶을 쌓아가는 존재요, 살을 먹고 먹어서 풍성하게 된 것이 삶을 더해갔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지구가 태양을 한바퀴 돈 시간을 나이라고 말합니다. 나이는 해를 바꾸었다는 것이요, 365일의 지구가 태양을 한바퀴 돈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계절이 한번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해가 한바퀴 돌았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나이를 계산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세 개의 시간관이 있습니다. 첫째, 불교나 회교의 시간관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돌고 돈다는 윤회적인 시간관입니다. 둘째, 변증법적 시간관입니다. 이것은 정이 있으면 반이 있고 정과 반이 만나는 합이 있는데 삼각형의 관계로 역사를 이끌어 간다는 유물사관의 시간관입니다. 셋째, 기독교 시간관입니다. 이것은 일직선으로 나아갑니다. 시작이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습니다. 계속 지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지구는 돌고 있지만 돌아가고 있을 뿐이지 다시 오는 것은 아닙니다. 봄은 왔지만 그 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반복되지 않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전무후무한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전에 없는 시간이 지금 있는 것이고 또 오지 않는 시간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전무후무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전무후무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은 없었으며 이후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스릴입니다. 너무 소중합니다. 우리의 생애가 마지막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나이가 얼마뇨" 여기에서 나이는 뭘 의미하느냐? 은혜로 살아간 세월을 의미합니다.
나이를 먹는 사람들은 곧 삶을 더해 간 사람들입니다. 삶을 더 해갔다는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먹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몇 살 먹었느냐"는 말은 "당신이 얼마나 은혜를 받고 살았느냐"는 말입니다.

나이는 은혜로 살아간 세월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 우리 조상들에 비하면 얼마 못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여기 '험악한 세월'이라는 말은 시련과 고통의 세월을 말합니다. 부정적인 의미로는 고통을 많이 당했다는 말이지만 긍정적인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말은 은혜를 먹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고생할 때 우리는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을 보면 야곱은 그의 허물이 그에게 전부다 다 은혜가 되었습니다. 단팥죽 한그릇에 형으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습니다. 또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인간적 허물됨을 하나님의 은혜로 바꾸었습니다. 야곱은 그것 때문에 험악한 고난의 길을 걷습니다. 집을 떠나 타향살이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그의 전 생애가 그것 때문에 은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려면 고생을 많이 해야 합니다. 고생을 많이 한다는 말은 '나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전적인 삶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패할 때 실패하는 사람 되지 말고 은혜받는 사람 되어야 합니다. 고생할 때 고생하지 말고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병들 때 병든 것으로 끝나지 말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손해봤을 때 손해된 인생되지 말고 은혜받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은혜를 많이 먹은 인생이 되어야 됩니다. 은혜의 살이 낀 것이 축복입니다. 은혜의 살이 낀 것이 아니라 못된 살이 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집 먹고, 섭섭함 먹고, 원한 먹고 못된 살이 끼어서 불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집은 몹쓸 살이 끼었어" 그러지 않습니까 세월은 갔는데 못쓰게 살이 끼었습니다. 은혜 살이 끼어야 합니다. 예수 살이 끼어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 배를 채우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먹는 신령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가' 스스로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얼마전에 어떤 분이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을 했는데 그 간증은 그의 생에 시련과 역경과 고난을 통해서 받은 은혜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고생을 많이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한 분이 와서 그래요. "아이고 고생 많이 하셨군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참 안되었다. 어떻게 그 사람이 고생한 것만 볼까' 그랬습니다. 그 분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위대한 종이 되었기 때문에 고생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고생할 때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배부를 때는 은혜를 못받습니다. 배부를 때도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람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저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생각해보면 고생한 것이 전부 은혜였습니다.
가난한 시골 교회를 섬길 때 교역자를 모시지 못하니까 두 교회를 섬겼는데 30리 먼 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설교했습니다. 눈보라 치는 겨울에는 추위에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은혜는 더욱 더 넘쳤습니다.
한번은 눈보라가 쳐서 버스가 오지 않으니까 걸어서 30리 길을 갔습니다. 30리 길을 가는데 춥고, 배 고프고, 힘들었습니다. 지친 몸으로 집사님 댁에 들어가면서 "집사님" 하고 부르고 마루에 앉아서 기도를 하는데 그 집사님이 문도 열어보지 않고 고린도후서 11장 26절을 큰소리로 읽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6-27)
그 분이 왜 그 성경구절을 읽어준 줄 아십니까? "이 추위에 여기 오는 것이 뭐 고생입니까 교역자가 되었으면 적어도 이 정도는 견뎌내야지요" 그런 의미로 읽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그 성경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못된 집사! 전도사가 추위에 힘들게 왔으니까 문 열어보고 환영해야지 성경이나 읽어줘?" 하면서 그 집사를 원망할 수도 있는데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춥고, 헐벗고, 수없는 죽을 고비를 넘긴 사도 바울을 생각하면서 이 작은 고달픔이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그때 두 교회를 섬기던 은혜를 받아서 후에 한신교회를 개척하여 신반포 지역 여러 곳에 예배 처소를 만들었고 지금은 서울과 분당 두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사람의 운명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실 때 "너는 본성이 서두르는 사람이니까 서두르는대로 살아라" 그래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뛰어다녔습니다. 나는 가난한 집에 태어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앞서가려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안되겠기에 배로 뛰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도 걸어서 안다니고 뛰어다녔습니다. 뛰면서도 책을 보면서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평생을 간 것입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모두 다 살아온 것이 은혜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쓸개가 빠졌지만 병원에 들어가서 또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편안하게 살았습니까? 그것은 은혜를 덜 받은 것입니다. 어렸을 때 조실부모 했습니까? 원망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받은 것입니다. 배고팠습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였습니다. 주린 배에 하나님의 은혜를 채웠으니까요. 공부를 못했습니까? 직접 성령님께 배우라는 것입니다. 남편으로부터 학대받고 있습니까? 참 신랑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십시오. 부모님에게서 상처를 받고 시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습니까? 우리의 참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은혜가 될 것입니다.

나이는 빚진자의 세월

사람은 살아온 것이 전부 은혜요, 빚진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지나온 세월들이 다 나에게 빚진 것이 됩니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사도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고 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다가 통곡을 했습니다. 하늘을 보니 하나님께 빚진 자요, 땅을 보니 땅에 빚진 자요, 교인들의 얼굴을 보니 교인들에게 빚진 자요, 부모님을 보니 부모님에게 빚진 자요, 아내를 보니 아내에게 빚진 자요, 모두에게 다 빚진 자였습니다. 조국을 생각하니 조국에 빚진 자요, 신학교를 돌아보니 모교에 빚진 자요, 고향 땅을 바라보니 고향에 빚진 자요, 살아온 것이 다 은혜가 되기 때문에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빚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헛되이 나이만 더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 '아! 내가 하나님에게 빚진 자지'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를 회상할 때 원망할 일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것이 생각나야 합니다. 그래야 받은 은혜에 대해 빚진 자의 심정을 갖게 되고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너무 소중해서 내 남은 생애를 헛되이 살 수 없다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은혜를 알면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든 희생이라는 생각이 안들고, 그 은혜 때문에 원망도 사라지고 그 은혜 때문에 모든 과거의 상처도 사라져버립니다.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서 자신이 살아온 봉사의 삶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다고 격찬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희생한 일이 없소.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날마다 가슴 설레이는 감격으로 살아가고 있소. 내게 베푼 평안, 내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성령의 감동이 너무 벅찬데 어찌 이것을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소. 내가 아프리카를 횡단하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많이 넘겼지만 나는 희생한 일이 없소.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오."
저는 사랑하는 성도들과 더불어 오늘 은혜가 빚진 자로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은혜를 먹은 자요, 그래서 은혜를 먹었기 때문에 나는 빚진 살이 낀거에요. 만약에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야곱은 험악한 세월 속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어느 것 하나 빚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나이는 심판 받아야 할 세월

나그네로서의 세월 속에 한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는 돌아가야 할 인생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존재들입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 야곱은 나그네 인생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달려가도 종착점은 같습니다. 우리는 종말을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미국 아담스 대통령이 늙어 지팡이를 짚고 언덕길을 오르다가 숨이 차서 지팡이를 허리에 대고 잠깐 쉬고 있을 때 한 청년이 "각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자네가 보다시피 나는 안녕치 못하네. 내 장막집이 무너지려고 해서 이사갈 준비를 하고 있네." "각하, 어디로 이사 가시려고 합니까?" "내 집이 너무 낡아 지붕도 헐고, 기둥도 흔들리고 있고, 들보도 굽었다네." "각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내 지붕은 머리인데 다 벗겨져서 듬성듬성 몇 가닥의 머리카락만 남아 있고, 창은 눈인데 흐려서 보이지 않고, 기둥은 두 다리인데 힘이 없어서 좌우로 비틀거리고, 들보는 허리인데 쇠하여 구부러졌기에 지팡이로 지금 내가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도 곧 무너지게 되어 나는 지금 이사 갈 준비를 하고 있다네"
우리는 세월이 갈 때 인생의 끝나는 날이 가까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 90:9)
영국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유명한 설교가입니다. 한 후배가 목사님을 찾아가서 "목사님을 일생동안 이끌어 생각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평생 동안에 내 머릿속에 스쳐간 엄숙한 생각은 '나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야 한다.' 이 생각이었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스데반과 같이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스데반같은 존재로 갈 것인가 겨우 천당에나 들어가는 존재로 갈 것인가 스스로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네가 어떻게 살다 왔느냐 무슨 살을 먹고 왔느냐?"라고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하시려는지요.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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