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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서 존귀해지는 은 혜! (고후 6:9-10)

by 【고동엽】 2021. 12. 21.

하나님 안에서 존귀해지는 은혜

 

고후 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

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

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

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오늘 이 시대 가장 화려한 단어는 뭐니 뭐니 해도 성공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성공은 오늘 현대인들의 우상이고 삶의 목적이고 꿈입니다. 성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자신 있게 살아가고 소망 있게 살고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패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병듦도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옛말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했지만 “어머니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실패는 안할 수 있으면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패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참담한 마음을 안겨줍니다. 또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고생하는 것이지 고생안할 수 있으면 안하고 성공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폐일언하고 성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기대하고 바라고 꿈꾸는 성공개념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성공을 말하는데 그 성공을 들어보면 뭔가 잘못되었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그 성공이라는 것을 위해서 너무 출혈이 심하고 안쓰러울 만큼 집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이루어 보아도 별것이 아닌데 그런데도 사람들이 인생을 도박하듯이 내맡기고 성공하려 몸부림을 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속적인 성공과 실패의 기준” 입니다.

 

오늘의 성공개념은 너무 보이는 것에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너무 양으로 따지고 높이로 평가하고 길이로 재고 크기로 화려함으로 평가하려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너무 양으로 크기로 재니까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실패자로 간주해 버립니다. 얼마나 큰 문제입니까. 그래서 가지면 더 가지려 안달하고 적으면 실패자로 간주되어 스스로 낙오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면 심한 상실감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정몽헌씨가 자살한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 중에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상실감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모두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찍이 당해보지 않았던 수모까지 당했습니다. 거기에 결정적인 것은 내일에 대한 근거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허탈감이 보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때 생각되는 것은 죽는 길만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했을 것입니다. 그가 느꼈던 그때의 기분은 보통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느낌입니다. 전 대처 영국수상이 한때 참 화려하게 정치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찾는 이 하나 없이 집에서 외롭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상실감으로 인한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괴로워하면서 은둔생활 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상실감을 알겠습니까. 3성 장군이 전역을 할 때 무슨 기분이겠습니까. 그때 기분이 3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기분이라고 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은 너무 차세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따지는 성공개념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이 제시한 기준”입니다.

 

성경이 제시한 성공의 개념, 만족함, 행복의 기준은 지극히 정신적입니다. 어거스틴은 “우리 인생에서 가치 있고 값지고 귀한 것은 모두 하늘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생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보다 깊고 값지고 소중한 것은 모두 위로부터 온다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것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양적이 아니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참 값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이고 근거이고 권위이고 목적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소망은 위로부터 오는 복입니다. 또 은사입니다. 은사도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얻고 나서 나머지 조건들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것을 얻고 보니 나머지는 전혀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또 사모함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모함, 얼마나 즐거움을 주는 마음상태입니까.

중세의 성자들의 특징을 조사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얼굴에 세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수척함이었습니다. 그 말은 생긴 것이 못생겼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매부리코였습니다. 코는 인물의 상징인데 매부리코란 말은 또한 역시 아름다움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더벅머리였습니다. 정갈함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종합해 보면 한마디로 외형적 모습은 빠졌고 쳐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유난히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리워하며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들은 한결같이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외모는 부족한데 사모함으로 내면의 세계를 가꾼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값은 존귀함에 있습니다. 이 존귀함은 어떤 외형적 자격으로는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외형적 자격이나 조건은 이를테면 좋을 뿐입니다. 높은 자리, 많은 돈은 가지고 있으면 이를테면 좋을 뿐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행복의 기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이왕이면 좋은 것일 뿐 행복이나 만족함이나 존귀함에 절대적인 요소는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못생김의 아름다움이 더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정말 못생겨서 늘 비관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왜 나를 이렇게 못생기게 만드셨습니까?”하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못생긴 대신 150세까지 살게 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겠다 싶어 50세 때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얼굴을 예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다음 해 죽었습니다. 죽어서 그 천사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왜 150세까지 살게 해 주겠다고 하더니 벌써 오라느냐.” 천사가 자세히 보더니 “당신이 그 여자냐, 얼굴이 예뻐져서 모르고 잘못 부른 것 같다“고 하더랍니다.

물론 우수게 이야기지만 행복과 기쁨의 삶은 잘생김이나 넉넉함이나 젊음이나 화려함과는 상관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기왕이면 있으면 좋은 것일 뿐입니다. 진정 행복의 원천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내 마음에 채우고 내 영혼에 채우고 그렇게 채워진 나를 발견할 때 그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값이 있고 멋이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고 만족함이고 기쁨이고 성공한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헛수고로 나의 삶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게 됩니다.

 

세 번째는 “본문에서 바울이 제시한 진정한 값, 소중함, 성공, 승리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진정한 신앙인의 참 만족함, 기쁨, 성공, 승리의 모습을 몇 가지로 정의하였고 그것을 자기의 간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9절을 보면 “세상에서 무명하나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유명은 화려함, 나타남, 보임, 올라감, 누림, 군림 등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이것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한 것은 영적 내면적인 성숙함이고 영적 부요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당시 바울을 볼 때 참 한심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 얼마든지 화려해질 수 있는 조건을 다 가지고 있던 바울이 어느 날 그것들을 다 버리고 초라하게 전도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바울은 바보 같은 사람으로, 한심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뒤에서 쑤군쑤군하는 소리를 듣고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무명하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유명하다“. 여러분은 이 같은 간증의 뜻을 알겠습니까. 이것이 바울이 제시한 소중한 삶의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9절에서 “세상에서는 죽은 자 같으나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있는 자“라고 말한 말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보고 살아있으나 죽은 자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바울은 마치 미친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그 깊은 삶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초라하게 살아가는 바울의 모습을 보고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참 무서운 규정입니다.

오늘 전도자들이 때로 전도자로 살아가다가 이런 경우에 힘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이 전도자로 헌신했다가도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 의기소침하고 때로 주저앉게도 됩니다. 세상이 모두 외형적인 화려함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는데 그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이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사람은 살아있으나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까.

가끔 동창회에 가 보면 모두 화려한 길을 걷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크게 사업을 하는 동창, 그에 비하면 현실적으로 나는 아주 초라하게 전도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화려한 삶이 그렇게 감동적으로 느껴지거나 부럽게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 많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바울도 자신의 조건들을 다 포기하고 이 길을 걷는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듣자니까 사람들이 “이제 바울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하고 말합니다. 너무 초라한 그의 행색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세상적인 이 기준을 신앙적으로 재해석하고 재규정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과감하게 그 규정, 그 기준을 재해석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는 죽은 자 같으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살아 있는 자”다 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결단은 자기부정이 없으면 내릴 수 없는 결단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이 결단을 내리는데 주저하면 세상과 결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자기부정에 무서운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일본의 내촌감삼은 일본이 자랑하는 지성인입니다. 그는 천황숭배시절에 일본 제일고보의 교사였습니다. 고보는 일본에서 일류고입니다. 학교 경축식 날 천황숭배의식이 거행될 때 모두 그 참배에 참여해야 했지만 그는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그 거부는 상당한 용기입니다. 그 시대에 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부정해야만 하는 용기입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에서 매국노라고 침을 뱉었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언론은 연일 타도에 나섰습니다. 마침내 그는 사표 냈습니다. 그것은 이미 각오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으로 떠나 맨해튼 거리에서 음식장사를 했습니다. 아주 초라한 행색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기자들이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왜 이런 초라함을 자초했는가.” 그때 그는 의연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부귀와 영화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명예도 원치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신 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그것을 지금도 믿습니다. 고로 나는 현재의 평안을 위해서 우상에게 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 바울의 고백이 바로 이 고백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죽은 자 같으나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있는 자입니다.” 얼마나 당당한 고백입니까. 이것이 예수 안에서 변화 받은 사람의 가치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또 세 번째는 10절에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쯤 감옥에서 한숨쉬고 고민하고 근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감옥에서 한숨쉬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감옥을 마치 내 안방처럼 더 좋게 조용하게 앉아서 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밖에서는 유대인들이 그를 잡아 죽이지 못해 안달해서 언제나 위험이 상존했는데 감옥 안에서는 안전하게 앉아서 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나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다”라고 말합니다.

또 10절을 보면 “나는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부자들은 너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년에 없던 불경기지만 그럼에도 고가품은 언제나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몇 십억씩 되는 아파트는 불티나게 팔려나갑니다. 부동산 열기가 있는 곳에는 돈 꾸러미를 들고 나타나는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그런데 없는 사람은 또 철저하게 없습니다. 그래서 비관하고 자살해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너무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비교의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가졌으면서도 늘 빈곤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중국의 호적이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동서양의 행복관은 다르다, 괜히 서양문화가 들어와서 갈증만 심화시켰다“.

바울은 가진 것이라고는 전무했습니다. 가정도 없고 집한 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누구보다 만족해했습니다. 그래서 고백한 말이 “나는 가난한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신앙인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영적인 풍부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이 영적 은혜를 입고 보면 이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고상한 인생을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이 영적 은혜를 입고 이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하셨고 우리는 가진 것이 없어도 누구보다도 부하고 다 가진 사람처럼 살게 하셨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언제나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세상에서 무명한자 같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한자를 만드셨고 우리를 이렇게 높이시고 존귀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이 존귀함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이 세상의 가치관은 보이고 높고 길고 큰 것에 이목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모두 유명해지고 크게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그렇게 되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살아갑니까. 그런데 거기서는 만족이나 행복이나 진정한 기쁨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증만 심화됩니다. 진정한 만족함과 즐거움과 기쁨은 영적 신앙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 버리고 포기하고도 가장 부요하고 기뻐하고 만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빌리그램 목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평생 세 번 유혹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공화당에서 상원의원이 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부통령이 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어느 부자가 돈을 들고 와 큰 대학을 설립할 테니 와서 총장 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유혹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평생 전도자로 살다가 죽고 싶다“ 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가장 부요한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고 기쁨이 있는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이 신앙수준까지 올라갔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함께 주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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