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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름을 / 요한복음 17 : 6∼9

by 【고동엽】 2021.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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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이름을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7 : 6∼9


광복 51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으로 SBS가 제작한 `왕도의 비밀'이란 프로그램이 지난달부터 6주간에 걸쳐 방영되었습니다. 방영 시간만 총 6시간에 달했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물적, 인적자원이 투입된 대형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큰 프로그램은, 한 소설가의 조그마한 호기심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소설가 최인호씨는 4년전 어느 날 우연히, 우물 井자 모양의 문양이 새겨진 토기 파편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후에, 그와 같은 모양이 이미 출토된 다른 토기에도 새겨져 있음을 알게 된 최인호씨는 작가의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해, 그때부터 그 문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추적하러 나섰고, SBS 카메라는 최인호씨를 뒤쫓기 시작한 것입니다. 같은 문양이 새겨진 토기는 남한 전역에서 발굴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일본에서 발굴된 토기 중에도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발굴 현장을 일일이 답사, 확인하면서 수많은 관계전문인들을 만난 결과 천신만고 끝에, 우물 井자의 그 문양은, 놀랍게도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상징하는 문장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신라고분에서 출토되어 우리 나라 국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토기중, 광개토대왕이 신라 왕에게 하사한 토기가 있었는데, 바로 그 토기에 새겨진 광개토대왕의 이름 위에 최인호씨가 그토록 알고자 하던 우물 정자의 문양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의 문장이 새겨진 토기가 남한 일대는 물론이요, 일본에서까지 출토된다는 것은 대왕의 통치력이 그만큼 광범위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인호씨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광개토대왕의 주무대였던 지금의 중국으로 건너가 2년 동안 무려 10만 Km를 종횡무진하면서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인들의 족적을 파헤쳤고, 그 전 과정이 금년 광복절을 맞아 특집으로 방영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 대목 때마다, 하얀 천 위에 광개토대왕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앞세우고 중국 대륙을 누비던 고구려인들의 모습이 연출된 영상으로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광개토대왕의 깃발, 그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영상이었습니다.

 

고구려 군사들이 광개토대왕의 깃발을 앞세우고 나아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자신들은 광개토대왕의 군사임을 의미하는 것이요, 자신들은 광개토대왕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요, 광개토대왕의 이름으로 싸우는 자요, 광개토대왕의 이름을 위해 죽는 자요, 광개토대왕의 이름을 위해 사는 자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패하는 것은 대왕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요, 적군에게 승리하는 것은 대왕의 이름을 더 높이는 것임을 아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대왕의 깃발을 앞세우고 중국과 싸워 연전 연승을 기록하였습니다. 중국군들은 그 깃발만 보면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깃발을 본다는 것은, 단순한 천조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위대한 광개토대왕을 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저 중국 대륙 곳곳에서까지 휘날렸을 대왕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연출된 영상으로나마 직접 확인하는 것은 얼마나 가슴 뭉클한 감동입니까? 우리 역사상 우리에게, 대왕의 깃발보다 더 큰 긍지를 안겨다 준 깃발은 찾아 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6주동안, 매 주일밤 10시 50분이 되면 한편으로는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또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는 무상함으로 그 프로그램을 시청해야만 했습니다.

 

그토록 위대했던 광개토대왕의 깃발은, 대왕이 그 깃발을 친히 세운지 불과 20여년 만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대왕이 불과 38세의 나이로 요절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대왕의 죽음과 동시에 고구려군들은 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깃발을 휘날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왕이 점령했던 대륙의 그 광활한 영토는 대왕의 사후, 불과 255년만에 고구려의 패망과 동시에, 영영 남의 땅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우리의 역사는 압록강 이남, 이 조그마한 한반도에 국한되게 되었고, 그나마 지금은 두동강으로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생각할수록 가슴아픈 일입니다.

 

오늘날 중국의 만주 대륙을 여행하는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옛날 그 땅의 주인이었던 우리의 조상들과, 현재 동강난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비교하면서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젖어 드는 동시에, 위대했던 광개토대왕을 새삼 기억하게 합니다. 대왕은 그만큼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걸출한 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이 아무리 위대 했었다한들, 오늘 우리가 대왕의 깃발을 앞세우고 나아간다고 해서 잃었던 영토를 되찾을 수도 없고, 대왕의 이름으로 요구한다고 해서 옛 땅을 중국으로부터 되돌려 받을 수도 없습니다. 대왕의 이름과 깃발은 지금부터 1,583년전 대왕의 죽음과 동시에 그 효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TV 화면에 비쳐진, 우물 정자 문양의 문장이 새겨진 광개토대왕의 깃발이야말로, 크나큰 민족적 긍지의 상징인 동시에, 인생 무상의 표본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그것이 광개토대왕의 깃발 만이겠습니까? 로마제국 전역에서 휘날렸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깃발은 어디로 갔습니까? 몽고에서 구라파 대륙에 이르기까지 온 세계를 뒤덮었던 징기스칸의 깃발은 지금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헬라제국 알렉산더의 깃발, 페르시아제국 다리우스의 깃발은 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의 역사상 인간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의 깃발 치고 영원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운이 좋으면 박물관 한구석에 빛 바랜 모습으로 전시되어 인생무상을 웅변하고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영원한 깃발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코 그 효력과 권능이 쇠하지 않는 영원한 깃발이 있습니다. 에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아말렉족과 일대 결전을 벌리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동안 벽돌이나 굽고 성이나 쌓던 노예로 살아오느라 단 한번도 제대로 군사 교육을 받아 본적이 없었던데 비해, 아말렉 민족은 정규 군대를 보유한 막강한 민족이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전쟁의 승리는 노예출신인 오합지졸 이스라엘에게 돌아갔습니다. 모세가 근처 산 위로 올라가 두손을 들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기도 드린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대신 싸워주시므로 승리케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즉석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그 단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명명하였습니다. 그 말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란 의미였습니다. 무엇을 고백하기 위함이었는가? 이제부터는 여호와만을 나의 깃발로 삼겠다는 것과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죽겠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군병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깃발을 앞세우고 나아가는 한, 그들을 당할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할 자가 그 어디에도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시 교만에 빠져 여호와의 깃발을 내리고 자신들의 깃발을 내 세울 때, 그들은 어김없이 이 민족에게 이리 뜯기고 저 민족에게 저리 뜯기워 여지없이 유린당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깃발을 드높일 때 하나님은 어김없이 그들과 동행해주셨고, 그때마다 주위 민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깃발을 앞세울 때마다, 하나님에 의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3,500년이 지난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광개토대왕의 깃발처럼 여호와의 깃발은 그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박물관의 유물이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경상남북도 만한 이스라엘은 아직까지도 여호와의 깃발을 앞세우고 있고, 그 조그마한 이스라엘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아랍민족들은 이스라엘을 이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깃발의 효력과 권능이, 인간의 깃발처럼 결코 쇠함이 없는 까닭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고 계십니다.

 

(6a)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을 믿으시고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 주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일은 그들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죽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깃발을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주님께서 이렇게 고백하고 계십니다.

 

(6b)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 즉 하나님의 깃발을 내세우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결과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깃발들을 세웠을 때에 주님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가 날마다 드러났기에, 그것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깃발을 내세우는 곳에서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이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만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변화하는 생명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이었던 야곱은,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동시에 속이고 장자의 권리를 중간에서 훔쳐버렸습니다.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안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자, 야곱은 고향을 떠나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야곱은 불의한 방법으로 근 20년에 걸쳐 삼촌의 재산을 태반이나 가로채었습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결국 붙잡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들통이 나자 야곱은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처자식들과 가솔들을 끌고 고향 외에는 마땅히 갈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향이 가까울수록 기쁘기는커녕 두려운 것이 있었으니, 형 에서의 보복이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이 고향으로 되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사람 400명을 고용하여 야곱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야곱이 요단강 얍복 나루에 이르렀을 때, 그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밤이야말로 지난 세월 자신의 깃발만을 내세웠던, 덧없었던 과거에 대한 회개의 밤이요, 이제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의 깃발만을 내세우겠다는 회심의 밤이었습니다. 그날 밤 여호와 닛시 하나님께서는 사기꾼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였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께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져 주셨다는 의미였습니다. 무엇을 강조하기 위함입니까? 아무리 사기꾼처럼 살던 자라 할지라도 여호와의 깃발을 내세우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져 주시고, 그 사람과 동행해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야곱이 여호와 깃발을 내세우리라 결심하던 그날 밤, 그는 다리를 절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의 깃발을 세우겠다 했으면 하나님께서 더 큰 건강을 주시고, 형 에서가 동원한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는 원군을 주셔야지, 왜 엉뚱하게도 야곱의 다리를 절게 하였는가? 이러고서도 하나님의 깃발을 앞세울 가치가 있는가?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깃발을 내세우기로 한 이상 하나님을 원망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곳을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 이라 이름하여,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음을 기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그는 조금도 위장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다리를 절게 하신 그 모습 그대로, 오직 하나님의 깃발만 앞세운 채, 자기를 향해 400명을 거느리고 달려오는 형 에서에게 나아갔습니다. 그 순간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야곱에게 복수하러 달려온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보는 순간, 그를 끌어안고 통곡하며 야곱을 환영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측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야곱의 다리를 꺾지 않으셨다면, 꺾으셨음에도 꺾이지 않은 것처럼 야곱이 위장했더라면, 그래서 야곱이 그 동안 불의한 돈으로 호의호식한 유들유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그는 20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아온 형의 칼에 여지없이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의 눈 앞에 나타난 야곱의 모습은 밤 세워 기도하느라 옷은 구겨지고 몰골은 초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다리를 절고 있었던 것입니다. 20년 고향을 떠날 때는 건장했던 동생이, 한쪽다리를 절룩거리는 가련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에서는 갑자기 복받치는 사랑과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그냥 동생의 목을 끌어안고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서의 마음 속에 응어리졌던 분노와 원한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400명의 칼찬 이는 그날 야곱의 길을 안내하는 호위자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여호와의 깃발을 들어 올렸을 때, 하나님께서 펼치는 구원의 파노라마였습니다. 야곱도, 에서도, 모두 살고, 모두 새로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후로 야곱은 그리스도족보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깃발만 영원합니다. 여호와의 깃발이 날리는 곳에서만 참다운 능력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여호와 닛시, 여호와의 깃발을 세우십시오. 여호와의 깃발을 세웠으매도 불구하고, 나의 건강이, 나의 일터가, 나의 계획이 꺾이었다면 결코 위장하려 하지 마십시오. 속이려 하지도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대역사가 이미 펼쳐지고 있음의 증거입니다. 꺾인 채로 절면서 나아가십시오. 여호와의 깃발을 더 높이 세우십시오, 머지 않아 내 앞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대 역사를 반드시 보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하여 나와 함께 하고 사람이 새로워지고, 변화하는 역사 또한 기필코 일어날 것입니다. 여호와의 깃발은 인간의 깃발과는 달리 영원한 능력의 깃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 - 하나님의 깃발만을 내세웠더니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음을 지금 아버지께 고백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그토록 많은 애를 썼음애도 불구하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닫게 하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나의 깃발만을 내 세웠기에 사람들이 변화될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깃발만을 내세우므로,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 하나님이 없다 부정하던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도와 주시옵서소.

 

우리가 왜 그동안 절망과 탄식의 노예가 되어 왔었습니까?

우리의 깃발만 높혔던 까닭임을 알게 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여호와 닛시가 우리 삶의 고백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서서.

오직 하나님의 깃발을 들고 나아가므로 그 어떤 `에서'가 우리를 향하여 달려온다 할지라도 그것이 은홍의 `에서'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시고,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자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내가 여호와의 깃발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이 꺽이어서 지금 절고 있다면 절망하지 않게 도와 주시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역사하심이 , 내 인생속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힘차게 진군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총의 열매들을 다 거두는 자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로 인하여 우리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이 새 생명을 얻는 구원의 역사가 , 우리 발걸음 닫는 곳마다 일어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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