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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서 구하소서 ; 주기도(사 43:1-7)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0.
악에서 구하소서
이사야 43:1~7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서 여섯 번째 말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하신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를 슬픔에서 건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고통에서 건져 주시옵소서'라고 라고 기도하라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주님은'우리를 마귀에게서 건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악에서 구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악'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체적으로 악의 배후에 있는 이 원흉의 근본을 성경말씀을 통해 찾아보면 사탄은 타락한 천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한번에 한곳에만 존재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위에 살고있는 우리는 마귀를 개인적으로 대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 악한 마귀의 영향권에서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체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에베소서 6:10-12)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 힘, 우리 지식, 우리 경험, 우리 머리 가지고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15절을 읽어보세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이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같은 육신을 입으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권세를 이기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절대로 사탄에 의해서 지배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힘을 무력하고 무능하게 만들므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요한 1서 4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여기서 말하는 저희는 적 그리스도 그러니까 마귀를 말합니다.)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니라"


여러분, 마귀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간교합니다. 사람의 지능지수를 IQ라고 하는데 IQ가 150이상이면 흔히 수재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마귀의 IQ는 1,000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 말은 사람과 마귀는 지능 면에서도 아예 상대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때로는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책임을 우리는 마귀에게 전가시키려고 합니다. 인류의 조상 하와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런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마귀는 그런 식으로 명예와 영광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가르치신 주님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악'이란 말에는 살인, 도둑질, 간음, 사기, 이런 것들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악'이란 말속에는 탐욕, 시기, 중상 같은 복잡한 죄도 포함될 것입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가령 불안한 마음, 열등의식 같은 것도 악에 속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믿음과는 정반대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악이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사랑이 부족할 때도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요한1서 4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사랑이 부족한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자기자신을 존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삶에 침투하는 모든 두려움에서 구원해 주세요'하는 뜻이 있는 기도입니다.


뿐만 아니라,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삶속에 두려움을 주께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여 달라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일 압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일입니다. 자기자신을 존중히 여기도록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여 낙심과 절망 그리고 죄절속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은 모든 일에 자신감이 없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고 용기와 확신을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을 때 우리의 삶과 사회에 심각한 파멸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Peul Tunier라는 스위스의 심리학자는 그의 w서 '내적폭력'이란 책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내부로부터 폭력을 분출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생활 주변에 보면 표면상으로 증오의 불이 타오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심리상태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떨고 있으며, 어떤 위협을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적극적이거나 창조적이 되지 못하고 말이 거칠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고 파괴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을 때는 하나가 될 하나님의 가족을 분열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로 전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앞길을 가로지르며 위대한 계획들을 조용히 사장시켜 버리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나는 할 수 없다'는 콤플렉스를 가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마음은 '그만두자'하는 생각을 부채질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워하는 마음은 위대한 꿈을 가진 사람에게 해로운 말을 속삭이는 영원한 마귀입니다. 이 마귀는 찾아와서 동정 어린 말로 "애,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야. 그것은 할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일이야. 만일에 그래도 한다면 반드시 실패할거야. 실패가 분명한 일을 무엇 때문에 하려고 하는 거야. 실패하면 모든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 아냐?"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외로운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최고의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마음은 무조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게 만드는 마귀입니다.


왜요? 우리는 자기 자신을 너무 무가치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용서와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범죄 하여 그 심령이 더러워진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두려워하는 마음은 의심과 불평과 반항으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어디서 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깁니까?


성경을 읽어보면 두려워하는 마음은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가령 디모데후서 1장 7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를 통해 주신 말씀을 기억하세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고 약속하신 이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두려워하는 마음이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1.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오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를 경멸하는 생각을 하거나 또한 말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두려워하는 씨를 뿌리는 것이며 우리 마음의 밭에 잡초로 우거져 황폐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영양분을 빨아들이도록 기회를 주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멸망의 구덩이를 파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잔디와 잡초)


그러나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니 기도의 발걸음을 내 딛는다면 우리는 두려워하는 마음에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대로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이것이 바로 내 찬송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종교 자체가 두려움이 되어 왔습니다. 소위 미신종교, 무속종교가 모두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귀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종교 행위가 무엇입니까? 귀신들이 노여움을 풀고 이것 먹고 물러가 이 사람을 병에서, 재난에서 놓아주어 평안하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귀신은 사람에게 평안을 w는 것이 아니라 물러가야만 사람이 평안하다고 믿습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이 부적을 부치거나 가슴에 안고 다니는 것이 바로 그 원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도 예외 일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자칫 잘못하면 두려운 마음과 자신감의 결여, 죄의식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불안케 하는 데로 이끌고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어는 누구에게도 죄인이라고 부르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이 엄히 꾸짖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매춘부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요? 율법대로 돌로 쳐죽일까요?"하면서 살기 등등하여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하시고 땅에 무슨 글을 쓰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땅에 글을 쓰셨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해석자는 아마 예수님께서 이 여자와 그 동안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고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살기 등등해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물러가고 이 여인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정죄 하는 자가 없느냐?" "없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일을 몰두하는 사람을 정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고기잡이에 열중하는 어부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 네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비판하신 대상이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그 당시 소위 성공적인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왜 그들을 비판 하셨습니까? 그들이 무슨 악을 행했습니까? 어떤 죄를 범했습니까? 그들은 의를 행한다고 하면서 위장된 악만 행했습니다. 위장된 악만큼 악한 것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에 보면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는 권위를 스스로 부여하면서 그들은 실천도 할 수 없는 규정들을 제정하면서 계속 죄의식만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종교는 잘못된 죄의식과 두려운 마음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만일에 기독교가 인간의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낮추어 버린다면 복음의 메시지는 잘못된 것이고 위험한 가능성 마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불안감을 안고 세상에 태어나 공포의 정글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사랑과 친절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소개해야 합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1-3절 말씀입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려니 대처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여기에 약속된 구원은 우리가 약한 사람이 된다든지 약한 생각에 사로잡힐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부터의 구원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삶의 중심에 들어오십니다. 그때 우리는 다윗과 같이 "여호와가 나의 목자 시니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외칠 수가 있습니다.


불꽃이 어름 위에 떨어지면 곧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스팔트 위나 대리석 위에 떨어 진다해도 마찬가지의 결과 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꽃이 화약 위에 떨어지면 무서운 폭발이 일어 날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악한 생각의 불꽃이 구원받지 못한 심령에 떨어지면 가공할만한 폭발이 일어나서 큰 손해를 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고 주님께서 우리 심령 속에 들어와 계시게 되면 어떤 시험이나 악한 불꽃이 우리 마음에 떨어진다고 해도 물위에 불꽃이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로 악이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17절 15절 이하에 이런 기도의 대목이 나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배는 물위에 있어야만 배의 구실을 바로 할 수가 있습니다.


배가 산꼭대기나 들판에 놓여 있으면 전시품은 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배로서의 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이 아니요 세상에서 사는데 세상에 속해도, 세상에 빠져도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바로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복된 소식, 복음입니까? 구원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실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얻게되면 주님이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큰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부정적인 삶의 자세에서 긍정적인 삶의 자세로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파괴적인 삶에서 건설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두려워 하던 자리에서 강하고 담대한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입니까?


그래서 우리의 삶은 아름다움과 위엄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잠재력을 최고로 발휘시켜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부지런히 행할 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악의 세력에서부터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리는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영도하던 모세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영도력을 가진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이게 그의 뒤를 이어 책임을 지게된 젊은 종 여호수아는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중차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 백성들 중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 말이 여호수아의 귀에 들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모세에 비하면 여호수아는 아직 어리지, 이 백성의 장래가 정말 열려되는데,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을까? 이 백성이 다 흩어지면 어떻게 하지?" 이런 말이 여호수아의 귀에 들릴 때, 여호수아는 주저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약해졌을 것입니다.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을 것입니다. 그 백성이 자기의 지도를 따르지 아니하고 혼란과 분열로 가나안을 향한 전진의 행렬이 중단되는 모습도 상상했을 것입니다.


아마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위대한 종 모세는 가셨습니다. 저에게 이 큰 책임이 맡겨졌습니다. 저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실패해서 하나님께 좋을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여호수아에게 들려왔습니다.


"내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이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너희 평생에 너를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여호수아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 이후로 의심의 기회가 왔지만 그것이 두려움까지 자라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악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주님, 나를 악에서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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