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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아는것 / 요한복음 17 : 1∼5

by 【고동엽】 2021.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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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아는 것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7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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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전 88 올림픽대로가 개통되던 해, 바로 그 도로 위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당한 성도님 부부가 있습니다. 택시를 타고서 올림픽 대로를 달리고 있던 중 맞은편 쪽에서 젊은이가 운전하던 자동차가 중앙선을 너머 성도님이 탄 택시와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올림픽 대로에서 빠른 속도로 달리던 자동차가 서로 마주보고 부딪혔으니 얼마나 큰 사고였겠습니까?

 

사고임을 직감하는 순간, 방금 전까지 성도님의 곁에 앉아 있던 아내가 갑자기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앞쪽을 바라보니 운전석 앞 유리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20여미터 전방 도로변에 쓰러져 있는 아내가 보였습니다. 충돌과 동시에 차안에 앉아 있던 아내가 유리창을 뚫고 날아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사람이 그토록 멀리 날라갔겠습니까? 성도님은 즉시 아내에게 달려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전혀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자동차가 충돌하는 순간, 뒷 트렁크에 있던 LPG 연료 탱크가 칸막이를 부수고 앞쪽으로 튕겨져 나오면서 성도님의 허리를 쳤던 것을, 워낙 창졸간에 당하는 일이라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고로 인해 끝내 완전 실명하게 된 택시기사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운전석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할수없이 성도님이 택시문을 열고 엎드린 채로 땅바닥으로 내려와 아내가 있는 곳을 향해 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병원에서 몇달 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어야 할 정도의 중상을 허리에 입은 몸으로 기다보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내에게 이르기까지 무려 5분이나 소요되었습니다. 졸지에 엄청난 사고를 당한 본인에게는 그 5분이 무척이나 길었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겠습니까? 그런데 쓰러져 있는 아내에게 가까이 다가 갈수록 성도님이 무슨 생각에 골몰했는지 아십니까?

"자동차 유리창을 뚫고 저 정도로 멀리 튕겨나가 저토록 처참하게 쓰러져 있다면 분명 죽었겠구나. 그렇다면 아이도 있고 하니 나 혼자 살 수는 없겠지. 아무래도 재혼을 해야될꺼야. 나와 재혼할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생사가 엇갈리고 그 위급한 순간, 바로 끔찍한 사고 현장에서 제일 먼저 재혼을 생각했다니 얼마나 야무진 꿈입니까? 이 이야기를 하면서, 성도님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옛날 말이 다 맞습디다. 아내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혼자 씩 웃는다 하지 않습니까? 남자들은 다 도둑놈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아내에게 다다른 성도님은 살이 찟어지고 혈관이 터지고 턱이 빠진 채 피투성이가 된 아내의 얼굴을 끌어안고 아내를 불렀습니다. 한참만에 아내가 실날같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재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재혼을 할수 없게 되었다는 아쉬움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 아내는 대수술 끝에 완전하게 건강을 되찾아, 성도님의 재혼 꿈은 완전하게 물건너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동석한 자리에서 이 간증을 마무리하면서 성도님은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남자들은 다 도둑놈들입니다."

 

여 성도님들께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남편이 실은 다 도둑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남편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남편의 실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반대로 남자 성도님들은 또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아내를 정말 알고 있습니까? 그저 여러분들이 안다는 것은, 아직까지 아내의 겉모습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60을 바라보는 한 성도님으로부터, 당신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꼭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였다고 했습니다. 젊어서는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도 여유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종교를 알아야 인생의 의미와 깊이를 바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둘째로는 베품을 알아야 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오직 자신의 성공과 출세만을 위해 진력하기에 남을 생각하지 않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남에게 해를 끼치기가 더 쉽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든 후에는, 이미 사회적인 기반도 닦여 있으므로 베푸는 삶을 알아야 삶이 더 의미로울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그 분이 알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젊을 때는 바깥일에 바빠서 아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기도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매, 아내와 더불어 아름답게 여생을 가꾸기 위해서는 아내를 바로 알 필요성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성도님의 세번째 말은 내게 깊은 감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배우자를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므로 실은 배우자를 전혀 알지 못한 채 한평생 남남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는 결혼하는 젊은 남녀에게 꼭 이런 말을 해주곤 합니다.

"결혼이란 상대를 다 알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하므로써 상대의 실상을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젊은이들마다 상대에 대해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상대에 대해 더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착각은 없습니다. 태어나서 줄곧 함께 살아온 부모님에 대해서도 다 알수 없는 법인데, 심지어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허다한대 어떻게 몇 번, 혹은 몇 십번을 만나고서 상대를 온전히 알 수 있겠습니까? 아는게 있다면 고작 꾸며진 상대의 허상이거나 잘못된 편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상대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상대를 알 수 있는 길을 영영 놓쳐 버리고 맙니다. 그 결과 부부가 한 지붕 아래에서 몸은 함께 살면서도 두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한평생 평행선을 긋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 남녀가 상대에 대하여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결혼함으로, 그래서 함께 살기 시작하므로 시간이 흘러갈수록 태평양보다 더 넓고 깊은 상대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를 서로 바로 알아 상호보완함으로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가는 삶의 희열을 더불어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언제이든 상대를 다 알았다고 판단하는 순간부터 상대를 더 깊이 알 수 있는 길은 봉쇄되고 맙니다. 그것은 상대의 가능성과 자신의 가능성을 동시에 축소시키고 왜곡시키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나 한평생 상대를 다 알지 못한다는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아니할 때, 비로소 상대의 실상을 온전히 알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내를 알아야겠다는 그 성도님으로부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성도님은 내가 만났던 많은 분들 가운데 한평생 아내와 함께 살고서도 아내를 다 알았다고 속단하지 않는 첫 번째 성도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아내를 아직 모른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그 분은 날이 갈수록 아내를 더 깊이 알아, 아내와 더불어 더더욱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을 엮어 갈 것이 분명합니다.

 

부부가 함께 한집에 동거한다고 해서 상대를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함께 동거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모르기가 더 쉽습니다. 부부가 서로 상대를 알기 위해서는 동거 그 자체보다도, 상대를 알려고 하는 마음, 상대를 알고자 하는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없는 부부의 동거는 그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행복과 기쁨일 수는 없습니다. 상대를 알고자 함이 없는 동거란, 실은 괴로운 고통과의 동거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2)

 

주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님을 이 땅위에 보내신 목적, 하나님께서 주님께 이 땅의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 우리에게 영생,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계속 이렇게 고백하고 계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풀이하면 참 하나님과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삶은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이 세상에서 누릴 수도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왜 이처럼 당연한 말을 죽음을 목전에 둔 이 다급한 순간에 거듭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 대한 훈계의 말씀이 아닙니다. 목전에 다가온 죽음을 바라보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드린 마지막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말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하나님을 교육하시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음은, 인간들이 정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 드리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들이 영생을 얻기는 원하면서도 하나님을 알려고는 하지 않으며, 또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저 되는 일이 아님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동사는 `동침한다', `동거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부가 한평생 동침동거할지라도 서로 알려고 하지 아니하면 일생 남남으로 살 수 밖에 없거늘,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마음과 노력없이 어찌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으며, 어찌 그 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초 읽기에 들어간 이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수요일 서울 구치소 과장인 박효진 장로님으로부터 생명에 찬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처음부터 그런 생명의 삶을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이래 만 8년동안 그 분은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주일낮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열심히 봉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중에는 어김없이 생명을 탕진하는 방탕의 삶을 되풀이했습니다.

 

불신자면 모르되 어찌 그리스도인이 그처럼 철저하게 자기를 죽이는 삶을 좇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교회는 다니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도대체 힘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을 다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분이 어떻게 그처럼 생명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였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하나님께서 내안에 거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하면서, 그 분은 죽음의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심을 안 이상, 어떻게 예전의 삶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후 그 분은 기도로, 말씀으로, 힘써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그 분의 삶은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시간관계상 그 분이 못 다한 이야기를 한달 후인 10월 16일 수요일에 다시 오시어 간증해 주실 때에, 영원한 생명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분과 함께 체험하고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화폐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졌던 성도님이 있습니다. 수집하는 화폐의 출처는 주로 무덤이었습니다. 옛날 죽은 자의 관속에 산사람들이 저승에 가는 노자 돈으로 쓰라며 넣어준 화폐를 도굴꾼들이 도굴하여 화폐상을 거쳐 수집가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님은 어느 날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승에 잘 가라며 노자 돈을 넣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체는 한치 앞도 나가지 못한 채 썩어버리고, 오히려 그 노자돈 때문에 신성해야 할 무덤은 도굴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돈은 그 액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코 인간의 죽음 이후를 책임지지 못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 분은 아예 옛날돈 수집하는 취미를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 덧없는 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외칩니까?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어디 그뿐입니까? 성경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여호와를 알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만 바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를 결코 책임져 주지 못하는 돈을 위해서는 한평생을 걸면서도,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영생은 시작됩니다. 힘써 하나님을 아는 자만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누리며, 구가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진리의 삶, 생명의 삶에 부전승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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