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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 넘치는 교회(벧전 5:1-11)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0.
소망이 넘치는 교회
베드로전서 5:1~11


초대교회는 바람이 세차게 부는 때 산불이 난 것처럼 부흥했습니다. 로마 정부는 위협을 느끼게 되고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을 내다보고 엄청난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은 이미 있던 곳에 그래도 있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로 흩어져 생명의 위협을 피하기는 했으나 그 생활을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까지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 하는 회의와 갈등이 생기게 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 사도 베드로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하던지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살자고 격려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전후서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중에 베드로전서 1장 3절을 보세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 또는 사랑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누구나 이 두 낱말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소망은 무엇입니까? 정말 소망이 우리에게 그렇게 필요합니까?


웹스터 사전에 보면 소망이란 '실현의 기대를 가지고 바라는 것' 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한마디로 기대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꿈꾸는 것 이상입니다. 언젠가는 그 바라는 것이 실현될 것에 대한 기대를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 언젠가는 현실로 나타날 것입니다.


소망은 언제나 미래를 바라보며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우리를 밀고 나아가는 힘입니다. 밝은 내일을 약속하기 때문에 오늘이 어두워도 참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없으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죽어버립니다.


소망이란 말의 헬라어도 우리말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기대'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고 몇 주간을 살 수 있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도 며칠은 살수가 있습니다. 산소가 없이 몇 분은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Neil Strait 이란 분이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보십시오. 그를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에게서 목적을 빼앗아 보십시오. 속도를 늦추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소망을 빼앗아 보십시오. 그를 아주 정지시키는 것이 됩니다. 사람이 재물 없이 살아 갈 수가 있고, 목적 없이도 얼마간은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 없이는 우리의 삶을 유지 할 수가 없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구약 잠언 13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은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Duglas Calligan 이란 분은 '마음 상한 자'란 제목의 조사에서 이런 통계를 얻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이 안된 4,500명의 홀아비들의 사망률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이 홀아비들은 같은 연령의 다른 남자들에 비해서 사망률이 40퍼센트나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같은 기사에서 Duglas Colligan은 5년 동안 베트콩에게 포로가 되어 있던 Nalloed Kushnes 소령의 예를 인용했습니다. Kushner 소령은 전재 모포 수용소 포로들 가운데서 이미 2년 동안을 비교적 건강한 상태로 포로 생활을 해온 27세의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럴 이유가 있는데 베트콩 포로 수용소의 소장이 "협조만 잘 하면 풀어 주겠노라"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전에 다른 포로들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해병대 출신 장교 Kushner는 전쟁 포로 중에도 모범수요, 포로수용소 안의 모든 포로들의 의식을 개혁하는 그룹의 선두주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경과하면서 포로수용소 소장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Kushner 소령은 완전히 의욕을 잃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거부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위로의 말도 듣지 않고,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고칠 수 없는 병이 파고든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소망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가 없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일하려는 의욕도 생기지 않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힘도 빠집니다. 소망이 없으면 모두가 다 끝나고 맙니다. 개인도 그렇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어떻게 소망이 넘치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쓴 첫번째 편지를 읽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1세기 교회에 매우 깊이 관여한 사람이기 때문에 반드시 오늘에도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좋은 지침이나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서 우리는 적어도 다섯 가지 현실적인 지침이 잇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하나 하나가 다 교회에서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소망이 넘치는 교회가 되려면,


1. 올바른 지도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 이하를 보세요.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하므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한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 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핍박과 환난을 당하며 순교까지도 할 수밖에 없는 그처럼 어둡고 어려운 때에 지도자들이 늦장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먼저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도자의 가슴에서 소망이 떠나 버렸다면 성도들은 오래지 않아 그 뒤를 따를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말씀을 보세요. 교회의 지도자 이들은 '양무리를 치라'는 강한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목자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강제로가 아니라,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진해서 하라고 하십니다. 더러운 욕심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라고 하십니다. 지배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모법이 되라고 하십니다.


인도의 유명한 정신적인 지도자였던 마하마드 간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도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큽니까? 지도자가 불구덩이로 들어가면 따르는 사람은 이유도 모르고 같이 불구덩이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말고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양떼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목자의 열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양무리는 하나님의 양 무리이지 목사의 양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지도자에 의해서 교회의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생각할 때 지도자의 책임이 막중한 것입니다. 지도자에게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에게 소망이 없을 때는 성도가 처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넘치는 교회는


2. 서로가 겸손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교훈을 계속 들어보세요. 5~6절 말씀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조화입니까?


젊은 세대에게 기성세대의 말을 들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세대간의 존경과 자유로운 의사 소통이 있어야 합니다. 요사이는 급변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어렵고, 형과 동생 사이에도 세대 차를 느끼는 시대입니다. 이 말을 기성세대가 항상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 모두가 같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옷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이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람이 다 입어야 할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옷은 교육을 말하는 서도 아닙니다. 부하게 사는 것들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 옷은 무엇을 말합니까? 겸손의 옷입니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오늘 주신 말씀 6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기서 강한 전쟁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군대를 부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무서운 병기를 부릅니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교만을 얼마나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교만한 사람이 있으면 단체가 화합해서 하나 되는 것을 깨뜨립니다. 가령, 성가대의 찬양이 아름다우려면 각 파트가 다른 소리를 내면서도 옆의 사람의 소리를 의식하면서 내 소리를 내어야 화음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자기 멋대로 큰 소리를 내서 튀게 되면 그 화음은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기록을 남기는 교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소망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겸손해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생활, 존경하기를 먼저 하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크게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되기를 호소하면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소망이 넘치는 교회가 되려면,


3. 우리 마음속에 모든 불안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의 불안을 없애는데 있어서 오늘 주신 말씀 베드로전서 5장 7절보다 더 적절하고 좋은 충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일어 나는 모든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소망을 앗아갑니다.


Edwardes Poldowski 가 쓴 '걱정을 멈추라 그러면 회복된다'는 책에 보면 마음의 고민, 고혈압, 천식, 류머티스, 감기, 갑상선, 기능장애, 관절염, 편두통, 시력장애, 심장병, 위장병 같은 병이 열려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도 염려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무려 550번이나 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염려하는 것이 우리 심령에 얼마나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정신과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염려는 어떤 전염병보다도 더 전염성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염려하는 사람과 늘 만나고 같이 지내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려라는 병이 전염이 된다고 합니다. 염려는 염려하는 사람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된다고 합니다.


"염려"하는 헬라어를 메림나오( )라고 하는데 이 밀은 '갈라버린다'는 말과 '마음'이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염려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인격을 분열시킵니다. 염려하는 사람 치고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자"(약 1:8) 라고 했습니다.


갈라진 마음을 가진 사람의 하는 일은 언제나 흔들립니다. 그는 감정이 불안하고, 생각이 안정되지 못하고, 그의 결정 역시 확고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판단력도 정확하지 못합니다.


염려는 감정을 갈라놓기 때문에 안정이 없습니다. 염려는 이해력을 갈라놓기 때문에 확신이 없습니다. 염려는 의식 능력을 갈라놓기 때문에 관찰력이 부족합니다. 염려는 판단력을 갈라놓기 때문에 태도와 결단력이 흐려집니다. 염려는 결단력을 갈라놓기 때문에 목표를 향해 지속적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염려라는 것은 마음을 상하게 하고, 하는 일이 실패하고, 오해하기를 잘하고, 의심하고, 불행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염려는 인간의 제1의 적입니다. 어떤 병균보다도 무서운 것이 염려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의 인구 증가율은 671퍼센트인데, 같은 기간 동안 저신 질환자의 수는 23,328퍼센트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인구증가율의 35배에 가깝습니다.


염려는 엄격히 말해서 죄입니다. 왜요?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했는데 염려하면 주님의 말씀을 어기니까 죄가 됩니다. 바꿔 말하면,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입니다.


오늘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염려가 있으면 우리의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 마음속에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채워 버려서 모든 불길한 것들을 연상시키게 하므로 우리를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염려하는 사람은 모험을 하지 못합니다.


전진할 생각은 하지 않고 후퇴할 궁리만 합니다. 공격은 하지 못하고 방어할 생각에만 급급합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이 옳은가 하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세상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나 하는 일에 더 관심이 큽니다. 어떤 사람은 만나면 걱정거리 되는 문제만을 털어놓습니다. 5분 동안 말을 듣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저 입만 열면 문제 투성이 입니다. 문제되는 것만 골라가며 보니까 이 사람에게는 근심과 걱정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매일 매일의 생활이 근심과 걱정으로, 염려와 불안으로 가득 차서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근심이 많은 사람들은 짐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가 안고 다닙니다. 그럴수록 즐거움과 감사는 점점 줄어들고 근심과 염려로 가득 차서 예수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한숨만 푹푹 쉬고 다닙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말하자면 독버섯처럼 일어나는 염려와 불안 그리고 근심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대로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염려를 다 맡아 주시마 약속하셨습니다.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세요. 염려 할 일 많은 세상에서 염려하지 않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소망이 넘치는 교회는


4.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8~9절을 보세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근신하라'는 말씀을 '굳세게 하라'는 뜻입니다. '깨어라'는 말씀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 원수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를 의식하지 못해도 마귀는 우리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철저히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교활합니다. 마귀는 영악합니다. 마귀는 노련합니다. 마귀는 능숙합니다. 싸움에 지칠 줄을 모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사람이면 누구나 경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이라도 마귀에 대해서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밖에서의 공격이 주효하지 않으면 안으로부터의 전략을 사양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마귀의 공격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리치라, 대적하라, 믿음을 굳게 하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를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두움의 권세이기 때문에 빛이 비취면 마귀는 도망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역사는 덮어두지 말고 밝게 드러내야 합니다.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의 악랄한 전술을 위락 알고 나면 승리는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소망이 넘치는 교회는


5. 역경을 딛고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11절을 보세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허를 견고케 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믿음의 권속들이 함정 속에 빠져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 어려움을 얼마나 더 견딜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초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통해서 오는 유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잠깐 고난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소망에 넘치는 말씀입니까?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려움이 닥치래 더욱 일어섭니다. 움츠리는 대신에 당당하게 일어섭니다. 잠깐의 고통을 통해서 영원한 이익을 거둘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선원은 강한 바람이 불어닥치면 오히려 역풍을 이용하여 앞을 나아갑니다.


Scott Peck이란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이 그 의미를 갖는 것은 모든 문제를 겪고 해결해 나아가는 과정 있습니다. 문제는 성공과 실패를 구별하는 경계선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용기와 지혜를 구하며, 또한 문제는 우리의 용기와 지혜를 창조합니다."


많은 사람은 문제가 멀리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문제를 피하려고, 잊으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난은 인생의 필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고난은 참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큰 이득이 있고, 우리의 신앙이 한층 더 성숙한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이 소망이 어디 있습니까? 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십니다. 이 소망이 넘치는 교회, 소망이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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