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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말씀 사역자

by 【고동엽】 2021. 12. 19.
예배와 말씀 사역자


글쓴이 : 이광호 목사


1. 서론


이 주제에 관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직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천상에 연결된 언약 공동체이며, 직분은 그 교회를 지상에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교회가 목회자 개인의 능력에 따라 성장여부가 결정되는 듯 인식되고, 교회 가운데 말 잘하는 웅변가가 유능한 설교자로 설정되기 시작한 것은 물량화 된 시대적 세속화의 경향성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서는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느 누구도 소위 기득권을 가지거나 교권을 행사할 수 없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로 제정된 직분에 의해 교회가 새워져 가게 된다. 즉 주님께서는 특정한 개인의 능력을 통해 교회를 세워가시는 것이 아니라 직분에 의해 자신의 교회를 세워가시게 되는 것이다.


우리시대는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점차 허물어져 가는 지극히 안타까운 시대이다. 그것은 직분의 파괴현상과 연관되는 문제이다. 무교회주의 운동과 평신도 교회운동은 그로 인한 한 경향성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지상의 조직 교회가 참 교회다움을 상실하게 되고 교회내에 직분을 기득권으로 오해하는 교권주의자들이 등장함으로써 발생된 문제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교회와 직분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로서 교회의 세움을 받은 목사와 그를 통해 선포되는 공예배에서의 말씀선포 즉 설교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 말씀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를 찬양하는 것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가장 기본되는 신앙행위이다.


목사는 설교를 전담하는 단순한 전문기능인이 아니다. 전문기능인은 연습이나 훈련을 통해서 더 잘 할 수 있지만 설교자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교회적 은사 없이 웅변력을 갖춘 연사처럼 호소력이 있다고 해서 올바른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목사는 설교 전문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를 통해 말씀을 증거하며 선포하도록 교회의 세움을 받은 성도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되풀이 되는 연습이나 경험을 통해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깨달아가는 성숙을 통해 올바르게 설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말씀만을 온전히 증거하며 선포하는 진정한 설교가 있는가? 한국교회의 진정한 설교가 무너지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그릇된 설교역사와 맞물려 있다. 그런데 대다수 목회자들은 그 잘못된 설교방법을 마치 모범인 양 가르치며 배우기를 되풀이 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설교를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경험에만 의존하고 있다면 어쩌면 진정한 설교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신앙생활을 하던 초기부터 줄곧 잘못된 설교만을 배우고 들어 왔다면 설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미 왜곡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진정한 설교가 사라졌다는 말은 전혀 새로운 말이 아니다. 극히 소수의 강단을 제외하고는 성경과 개혁자들(The Reformers)의 표준에 비추어 볼 때 거의 모두가 깊이 병들어 있다고 하든지 아니면 발육부진 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추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불건전한 교회의 시대적 형편에서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냉철한 비판없이 설교를 배우고 익히게 되면 결국 병든 상태의 설교가 퍼져나가 교회를 전체적으로 크게 오염시킬 수 밖에 없음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에 필자는 이 글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 직분 및 말씀선포와 관련된 기본적인 의미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목사직분과 장립(안수)의 의미


목사직분은 무엇인가? 우리가 가장 미리 생각해야할 점은 개인 인간으로서의 목사가 아니라 은사로서 목사 직분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직분은 개인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훈한 은사를 배경으로 한 경륜적 사역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직분의 의미는 결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 목사들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 세상에서의 수명을 다하여 교체 되지만 목사 직분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 가운데 일관성 있게 존재하는 직분이다. 우리가 목사 직분을 교회의 항존직이라고 칭하는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다.


목사직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말씀과 연관된 사역이다. 매주일 마다 있는 공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 전달하며 선포하는 것이 목사의 직무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목사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 매우 많다고 생각한다. 목사는 목회를 위해 행정을 하고 교회정치를 하며 교인들을 돌아보는 일을 한다. 물론 그런 것들은 부분적으로 목사가 감당해야할 중요한 직무에 속한다. 그러나 그런 직무들은 목사직분자가 단독으로 행하는 일이 아니라 장로, 집사 등 다른 직분자들과 공동으로 감당해야할 일들이다. 목회와 교회정치는 장로들과 함께 수행해야할 직무이며 교회행정과 교인들을 돌아보는 일은 장로, 집사들과 더불어 수행해야 하는 직무이다. 그리고 재정에 관한 직무는 집사들이 주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물론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에게 맡겨진 직무들이 마치 두부를 자르듯이 선명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요에 따라 공조하는 가운데 주님의 교회를 섬겨야 할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예배 절차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 사역은 목사 직분자에게 맡겨진 사역이다. 그 직무는 공조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로서 교회가 목사에게 맡긴 은사적 직무인 것이다. 공예배 가운데 있어야 할 목사의 직무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말씀선포이기 때문에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가운데 올바르게 전달함으로써 선포하는 사역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목사 개인에게 설교를 할 수 있는 절대적인 특권이 주어졌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개인의 권한이 아니라 교회적 은사에 속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선포해서는 안된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며 교회를 경영하는 전문경영인이 아니다. 그는 성도들 위에 군림할 수 없으며 단지 주님의 말씀을 맡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doulos)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할 따름이다.


우리는 교회가 목사를 특별히 장립하여 세우는 의미에 대해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반 교인들은 흔히 목사를 ‘기름부음 받은 사역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안수’와 통하는 의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장로교에서는 직분자를 세울 때 장립식을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안수‘와 관련이 있다.


그러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안수’는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구약성경에서 제사장을 비롯한 여러 직분자들을 세우면서 기름을 부은 것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언약과 더불어 개별적 판단에 따라 직분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고백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특별한 권위를 나타내는 표식이라기 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더 짙다. 우리 시대에 직분자를 안수하여 세우는 것은 언약적 측면에서 구약의 기름부음과 어느정도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안수받은 목사는 개인적인 개성이나 취향에 따라 말씀사역을 감당하는 목사의 직분을 수행하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안수’가 상속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 이후에 세워진 교회가 초대교회로부터 중세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사로서 직분들이 이어져 왔다. 직분자 안수는 지상의 교회가 상속되어 가고 있음에 대한 선언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목사가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제사장이 된다는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한국교회의 경우 전도사나 강도사는 구약시대의 제사장을 연상케 하는 특별한 가운을 입지 못하지만 목사가 되면 가운을 입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목사만 특별한 의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현실이 마치 목사가 제사장인 양 생각하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상속’이라는 말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는 우리시대의 교회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상속받은 교회를 잘 보존한다는 의미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에 있어서 가장 큰 폐단 중에 하나는 상속의 진정한 의미를 거의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역사상의 온전한 교회와 단절된 채 시대적 종교 유행에 따라 개인이 추구하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3. 목사와 예배


공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직분자는 목사이다. 그것은 목사가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고 선포되며, 모든 언약적 고백이 그 말씀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개인의 판단에 따라 스스로 그 직무를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장립하여 말씀사역을 맡긴 교회의 의사에 따라 순종하는 사역자이다. 교회에서 목사직분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는 목사에게 가장 큰 권한이 주어졌다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달하고 선포하는 사역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즉 목사 한 사람이 말씀을 잘못 전달하게 되면 그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이 예배에 잘못 참여하게 된다. 설교를 통해 전달되는 말씀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생명의 양식이다. 목사는 성도들을 위한 말씀의 양식을 교회 앞에 진설하여 차려야 하는데, 만일 곰팡이가 피고 부패한 재료로 뒤범벅이 된 음식을 차려 성도들로 하여금 먹게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방부제나 일시적 맛을 내는 몸에 해로운 조미료를 듬뿍 가미하여 말씀을 요리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매번 그렇게 한다면 그 영적 양식을 먹는 성도들은 어떻게 될까?


문제는 신앙이 어린 교인들은 몸에 해롭고 부패한 여부를 생각하기 보다 자기 입맛에 맞는 음식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잘못된 설교자는 교인들의 구미에 맞추어 원래의 말씀에 몸에는 해로우나 달콤한 맛을 내는 온갖 나쁜 재료들을 다 섞음으로써 교인들의 영적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어린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는 채 혀 끝에 살살녹는 음식을 배불리 먹여주는 그 설교자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계속 그곳을 찾지만 그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설교는 성례와 본질적인 연관이 있으며 축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례와 축도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며 거기에는 우주적 교회와 보편교회에 대한 상속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성례와 축도는 전체 성도들이 모인 공예배 시간에 이루어진다. 성례의 시행은 교인들의 권리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성례를 집례하는 직분자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권리도 아니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방편이며 온 교인들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적 직분을 통해 그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예배에는 듣는 예배와 보며 참여하는 예배가 포함된다. 듣는 예배란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며 보며 참여하는 예배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의 찢어짐을 보며 성찬을 나누는 성례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말씀선포와 성례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순전한 말씀선포가 없는 올바른 성례가 있을 수 없으며, 순전한 성찬의 나눔에 대한 의미없이 올바른 말씀선포가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축도(benediction)에 관한 문제이다. 일반 성도들은 물론 상당수 목회자들 마저도 축도가 마치 복을 빌어주는 축복기도인 양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결혼식이나 장례식, 심지어는 개업식에서 마저 축도를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복을 빌어주는 축복기도는 어느 곳에서든지 많이 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개혁주의 교회에서 일컫는 진정한 언약적 축도가 아니다.


나아가 기독교 신앙 모임이나 신학교의 경건회에서 축도를 하는 것도 축도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축도를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 아니냐는 식의 생각을 하는 것은 축도의 언약적 의미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신학교의 경건회나 일상적인 기독교 집회 등은 언약적 의미가 담긴 공예배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공예배 시간에 이루어지는 축도는 말씀을 통해 교회 가운데 확인되는 언약의 선포이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매주일 드려지는 공예배시간 말씀선포가 있는 그곳에 성례가 있으며 또한 축도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상교회에 속한 모든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때 말씀으로 인해 그 모든 특별한 은총들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언약적 공예배가 이루어지는 교회가 아니면 성례나 축도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신학교는 교회가 아니며 두 세사람의 성도들이 모인다고 해서 교회인 것은 아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의 의미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이 교회라는 말은 서로 다르다. 교회는 일시적이거나 한시적인 집회가 아니라 직분자가 있고 남녀노소 구분없이 모든 성도들이 매주 함께 모여 복음의 삶을 나누는 언약과 생명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 교회 가운데서 매주 말씀과 성례, 그리고 축도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상속받은 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공예배와 절차에 포함된 대표기도, 연보, 찬송가 합창 등 모두가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과 연결되며 그 말씀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기도, 연보, 찬송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할 점은 공예배의 모든 절차는 선포되는 말씀에 굳건히 매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개혁주의 교회가 ‘강단중심’의 예배를 신앙의 본질에 두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의미있는 것으로 이해되거나 흥미거리를 제공하는 것들이 있다면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 예배 시간에 설교 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우는 우상의 역할을 하게 된다. 설교시간에는 말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지루하게 생각하고 성가대가 합창을 하거나 교인들이 찬송가를 부를 때는 즐거운 시간처럼 여겨지는 것이 반복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멜로디의 노래 가락이나 찬양대의 매혹적인 음악성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흥미롭게 생각된다면 그것은 문제인 것이다. 나아가 교회당 내부의 감미로운 악기나 화려한 장식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매혹적이라면 그것은 우상이 될 수 있다. 심지어는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한 강대상의 분위기와 설교자의 특별한 의상이 말씀보다 더 관심을 끌만하다면 그것도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 어떤 것도 매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관심을 끌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4. 목사와 ‘설교’


(1) ‘설교’와 ‘설교’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하는 직무는 개인 설교자의 종교적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교회적 사역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통해 설교자인 목사가 마치 특별한 권한을 가진 듯이 설교하거나 청중들 앞에서 개인적 영예를 누리려 해서는 안된다. 설교는 천상( " ?의 교훈을 교회 가운데 전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직무이며 그 일은 교회가 세운 목사 직분에 맡겨진 특별한 직무이다.


우리는 교회 가운데서 ‘설교’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설교’라는 용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불신자들에게도 ‘설교’는 교회와 목사에게 연관되는 용어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설교’는 다 같은 ‘설교’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설교’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성도들의 모임이나 집회에서 목사를 비롯한 목회자가 성경 말씀을 펼쳐두고 담론를 펼치는 광범위한 뜻을 가진다. 그러나 주일 공예배를 제외한 모든 모임에서 행해지는 ‘설교’는 주일 공예배시 교회 앞에 선포되는 ‘설교’와 확연히 구분된다. 주일 공예배에서 성례및 축도와 연관된 설교는 다른 집회에서의 ‘설교’와 차이가 나는 것이다.


공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는 설교는 예언적 성격을 띤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매우 신중하게 잘 이해해야 한다. 이는 곧 설교 자체가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말이 아니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가운데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예언적 기능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설교자 개인에게 주어진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사역인 것이다.


진정한 설교는 교회에 속한 온 성도들이 동일한 말씀을 나눔으로써 삶을 공유하는 것이다. 나이 어리거나 신앙이 어린 성도들도 언약의 백성이라면 성숙한 성도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해야 한다. 설령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교훈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함께 있어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그 어린 성도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 지나치게 의도 하지 않아도 된다. 즉 성도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지나치게 애쓸 것 없이 성경에 기록된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면 된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성도들에게 차등없이 동일한 언어로 주어진 사실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만일 어린 성도들을 위한 특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공예배 시간 이외의 다른 시간을 별도로 할애할 수 있을 것이다.


공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신앙적 성숙도가 다양하다 할지라도 설교자가 말씀을 그대로 드러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신앙의 성숙과 관계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의미를 들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린아이도 성경을 읽어야 하고 노인들도 읽어야 한다.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성도도 성경을 읽어야 하고 공부를 많이 한 철학박사도 읽어야 한다. 이처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들어야 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면 도리어 복음이 변질되어 전달될 우려마저 따른다. 이는 마치 잔치집에 음식을 차리면서 아직 치아가 나지 않은 영아나 아직 나이 어린 아이들이나 장성한 청년이나 연세 많아 치아가 온전치 못한 노인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일한 잔칫집에 초대되어 그 음식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과 유사하다. 동일한 음식을 앞에 두고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서로 음식을 먹으며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설교시간은 목회자의 종교적 신념이나 소신을 밝히는 시간이 아니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한 자기 견해를 밝히고 그것을 교인들에게 강요하는 시간이 아니다. 또한 자기의 신앙적 체험이나 종교적 성공담을 늘어놓아서도 안된다. 설교자는 민족주의자가 되어서도 안되며, 시대의 상황을 해석하는 논평자가 되어서도 안된다. 그런 것을 꼭 말할 필요가 있다면 설교시간이 아니라 공부시간이나 다른 교육의 기회를 통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예배에서 선포되는 설교와 그 이외 모임에서 말씀을 가르치거나 교육하는 것 사이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난다.


또한 공예배에서 목사가 전하는 설교와 강도사, 전도사가 전하는 설교 사이에는 차이가 난다. 그것은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언약적 의미의 차이다. 한국 교회의 특별한 임시직분인 강도사는 목사의 감독없이 설교할 수 있는 직분이라는 말이다. 강도사는 한국교회의 특이한 임시직분으로 이제는 불필요한 직분이다. 목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할 때 일부 교단에서 목사의 감독 없이 독자적으로 말씀을 전할 직분자로서 강도사 제도를 두었으나 지금은 무의미한 직분인 것이다.


목사나 강도사가 있지 않은 미조직 교회에서 전도사가 설교할 때는 원칙적으로 목사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이는 목사와 강도사, 전도사 사이의 직급상 높낮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목사의 입을 통한 말씀선포가 성례 및 축도와 본질적으로 연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개혁주의 교회의 모든 공예배에는 말씀선포와 성례 및 축도가 있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직분상 말씀 선포를 위임받은 목사는 설교와 함께 성례를 집행하며 언약의 축도를 고백적으로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공예배에서의 설교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경 본문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전달하여 선포해야 한다. 설교자는 종교적 목표를 달성할 목적으로 강단에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 설교자는 오로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 가운데서 기록된 말씀을 언약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임무는 자기의 생각이나 체험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며 선포하는 것이어야 한다.
(2) 설교와 성경본문


중세 종교개혁 시대 이후부터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설교자가 본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자 공교회에 의한 페리코프(pericope) 조직이 생겨나게 된다. 이는 일년 동안 설교하게 될 성경 부분을 규정, 설계해 놓고 그에 따라 설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마다 정해진 주일에는 교회력을 기준으로 하여 동일한 본문이 등장한다. 이것이 일부 개혁주의 교회(Reformed Church)에서는 예배학적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 당시 쮜리히(Zurich)의 쯔빙글리(Zwingli)는 연속적 성경본문 설교를 했다. 그는 마태복음, 사도행전, 디모데전서, 갈라디아서, 베드로전서, 히브리서 등 성경 전체에 대해 연속적으로 설교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제네바에서도 채택되었다.


설교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 설교자는 기록된 성경본문을 교회 앞에 그대로 선포하여 드러내야 하며 온 교회는 그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청교도 신학에 있어서는 이점이 매우 강조되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설교는 대개 특정한 상황에서 시작하여 특정한 상황에서 설교의 끝을 맺으려는 경향성이 극도에 달해 있다. 설교자는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야 하며 인간들의 생활의 필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해서는 안된다. 또한 설교자는 어떤 경우에도 성경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설교자가 본문을 자의적으로 선택하는데 따르는 위험성이다. 매주일 마다 여기 저기를 뒤적이며 본문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렇게 되면 환경의 변화나 유행의 추이에 따라 자기 판단을 하며 종교적 목적을 위해 본문을 고르게 될 상당한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본문은 당회가 기도의 삶 가운데서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회의 논의에 따라 구약이나 신약의 한 서책을 선택해 매주 지속적으로 설교함으로써 설교자 개인 중심의 편향을 방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설교자가 자기 개성이나 취향에 따라 본문을 선택하는 것은 중단하는 것이 옳다. 설교자가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매주 본문을 선택하게 되면 목적을 위한 설교를 하게 될 우려가 따르게 된다. 예를 들어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그 일을 잘 진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교를 한다든지, 교회의 행사나 종교적 사업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본문을 선택해 설교하게 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또한 교인들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본문을 선택하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결론을 미리 결정하고 준비하는 설교는 이미 자기의 목적을 향하고 있으므로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우리가 주의깊게 생각해야 할 점은, 동일한 본문을 설교한다면 어느 목사가 설교한다고 해도 그 언약적 의미가 대동소이하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동일한 본문을 선택했다면 전체적으로는 동일한 말씀의 의미가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신약 본문을 설교하면서 구약을 인용하고 구약본문을 설교 하면서 신약을 인용하겠지만 결국 본문의 의미를 교회 앞에 밝히 드러냄으로써 전달하며 선포하는 것이다. 동일한 본문을 설교하면서 설교자들 마다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무관하여 진정한 말씀선포가 될 수 없다.


또한 설교자가 가장 기본적으로 이해해야할 점 가운데 하나는 설교하기에 덜 효과적이거나 부적합한 본문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도리어 그렇게 보이는 본문일수록 더욱 신경을 써서 설교해야 한다. 예를들어 창세기11장 앞부분에서 이름들이 되풀이 되는 본문이라든지, 역사서에서 숫자가 되풀이되는 듯한 본문, 그리고 마태복음 1장의 여러 이름들이 되풀이 되는 듯한 본문 등은 결코 설교하기에 부적합한 본문이 아닌 것이다.


목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가운데 선포하며 설교해야 하는가? 설교자는 결코 교인들의 종교적 심리를 이용하려 해서는 안된다. 나아가 교인들로부터 설교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는 유혹에 빠져서도 안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기 보다 인간적인 인기에 영합하기 십상이다.


설교에 있어서 일반적인 예화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예화를 많이 사용하는 설교자들은, 성경에 비유들이 많은 것처럼 설교자 역시 적절한 예화를 많이 들수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지만 필자는 그에 동의할 수 없다. 성경 속의 비유들은 순전한 계시의 말씀들이다. 설교를 하면서 예화를 사용하다 보면 성경본문의 직접적인 교훈은 사라지고 재미있는 예화만 더욱 생생하게 기억에 남게 될 우려가 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주객이 전도되어 그 예화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우는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설교자의 외형이나 말솜씨가 성도들의 관심을 장악해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 엉뚱한 것들만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은 실제보다 훨씬 작게 머리 속에 남아 있게 된다. 우리는 그런 설교를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선포라 할 수 없다. 물론, 설교의 현장성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며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특별히 명심해야 할 점은 설교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주장을 합리화 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매우 불경한 행위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또한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경륜에 순종하며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설득이 아니라 선포라는 점을 잘 깨달아야 한다. 설득을 강조하게 되면 설득을 위해 설교자의 인본적이며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포는 설교자의 주관이 최대한 배제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하게 된다.


설교자는 자기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재구성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 준비의 명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구성해 보려는 시도는 하나님 보다 더 나은 방법을 강구하려는 심각한 오류에 빠질 우려가 있다. 말씀의 의미를 교회 앞에 잘 드러내기 위해 성경의 다른 본문을 통해 의미를 확인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재구성하여 말씀을 편집해 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성경이 왜 조직신학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즉 각 항목을 정해두고 그에 따라 의미해석을 하는 방식으로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설교는 기록된 말씀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전달함으로써 선포되어야 한다. 그렇게 선포된 말씀을 통해 성도들은 조직적인 깨달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신앙이 어린 성도들에게 특별한 도움이 필요할 경우 교회의 교사들은 공예배 시간 이외 다른 시간을 활용해 정리하여 교육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말씀의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본문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있는 그대로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교회 앞에 말씀의 양식을 진설해야 한다. 장로교의 설교 전통은 바로거기에 기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존 낙스는 성경본문의 한 구절을 읽고 해석하고 또 한 구절 읽고 해석하는 것을 가장 바람직한 설교로 이해했다.


설교자가 자신의 언술을 통해 명설교를 하려고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말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설교자가 자기의 웅변술로써 성도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행위는 올바른 것이 아니다. 설교자는 성도들의 귀를 의식해 미사여구를 사용하려 해서는 안된다. 성경말씀이 현란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설교자 자신의 현란한 언어구사를 통해 성도들에게 진리를 전달하겠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따라서 설교를 연습이나 웅변술을 통해 더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또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교인들을 꾸짖을 수 없다. 설교자가 자기 이름으로 하나님의 성도들 즉 교회를 함부로 책망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설교자 자신은 마치 온전한 듯 행세함으로써 다른 모든 성도들 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인식될 수 밖에 없다. 나아가 설교를 하면서 욕설을 섞거나 비속어를 사용하면서 분위기를 장악하려 해서도 안된다. 또한 설교를 하면서 교인들을 웃기거나 재미있는 만담을 하면서 교인들의 흥미를 북돋우려 해서도 안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교인들은 점차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간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자기 분위기에 맞추어 예배를 이끌어 가려고하여 성경말씀을 빗대어 자의적 해석을 하려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도리어 설교는 기록된 성경 본문말씀만을 전달하며 선포함으로써 일반적인 재미나 즐거움이 배제되어야 한다. 이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면서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던 사실(출12:8; 민9:11)과 더불어 유추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누룩없는 맛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억했던 것이다. 우리는 설교에 대해서도 순전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 가운데 선포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3) 설교와 회중


필자는 회중이라고 할 때 설교자와 구분된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는다. 즉 설교를 듣는 성도들만 회중이 아니라 설교자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 회중이다. 그 회중 가운데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따질 것 없이 설교자를 포함하여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이다. 그 가운데는 부자도 있을 것이며 가난한 성도도 있다. 건강한 육신을 가진 성도가 있는가 하면 병든 성도도 있을 것이다. 많은 지식을 가진 성도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성도들이 있다. 마음이 평안한 성도가 있는가 하면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괴로운 심정을 가진 성도들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의 환경과 조건이 어떠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선 회중은 모두가 차별없는 하나님의 백성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공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회중은 직분자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로서 언약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교회가 가지는 가장 본질인 예배의 의미가 이들 가운데서 이 때 아름답게 드러나는 것이다. 매주일 공예배에 모이는 회중을 통해 주님의 재림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이어지게 된즉 예배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설교는 단편적 의미가 아니라 보편교회 가운데서와 우주적 교회 가운데서 입체적이며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시대는 인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인위적인 예배가 조작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대신 교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설교하는 시대가 되어 있다. 예배의 분위기를 통해 성도들의 종교적 기분을 맞추려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성도들이 자기 구미에 맞는 설교를 듣고자 한다면 그것은 저급한 문화의 반영일 따름이다. 이런 문화가 교회에 지배적이 되면 설교자는 인기있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 청중의 귀에 맞는 말 만들기에 급급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순수한 복음에 세속적 물타기 하는 행위는 불가피하게 된다.


현대교회에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은 설교가 설교자 자신의 권한이라는 생각과 미성숙한 대다수 교인들이 시대적 대중성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내용을 가감없이 전달하며 선포해야 하며 성도들은 그에 온전히 참여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교회를 부흥시키겠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통한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뛰어난 언변이나 전달 기술로써 교회부흥을 가져오려 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그렇게 되면 그런 설교의 중심이 되는 것은 ‘설교자가 드러내는 정도’ 또는 ‘설교자를 통해 역사하고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렇게 되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큰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언변에 따라 조종될 수 있는 범위 속에 축소되고 마는 것이다.


설교자가 교인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되풀이 한다는 것은 성도들이 공예배 중에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을 공적으로 섭취하지 못하게 만드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반 성도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설교자에게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설교를 특정한 방식으로 해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설교가 될 우려가 있다.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교인들은 시대적 종교유행에 따른 설교를 듣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성숙한 성도들은 교회 앞에 선포되는 설교가 기록된 말씀을 올바르게 전달하며 선포하고 있는지 여부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체 회중에게 선포된다는 의미는 특별한 형편에 놓인 성도들을 편향적으로 의식하지 않고 보편 교회 가운데서 공적으로 말씀이 선포된다는 뜻이다. 즉 설교자는 빈부의 차이, 지식의 차이, 연령의 차이, 성별의 차이, 환경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동일한 본문으로 하여 말씀을 선포한다면 누가 설교를 해도 대동소이할 수 밖에 없다. 단지 적용에 있어서 성도들의 현실적 생활여건에 따라 다소간 차이가 날 따름이다. 예를들어 부자에게는 그 부로 인해 세상을 괜찮은 곳으로 생각하거나 교만하지 않도록,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세상의 것의 부족함에 대해 너무 민감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것이 도리어 진정한 복일 수 있음을 적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명심해야 할 바는 설교자가 회중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회중과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목사도 회중 가운데 속한 한 사람의 성도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단순히 교인들을 가르치거나 교훈하는 행위가 아니다. 설교자도 자기 입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는 자여야 한다. 설교자는 성도들과 동일한 위치에서 자신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그 말씀을 경청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설교자가 자기를 제외한 다른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직분을 통해 설교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 그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


설교자는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진설하고 그 생명의 양식을 온 회중과 더불어 함께 먹는다. 이는 목사가 집례하는 성찬식에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목사 자신도 그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목사를 통해 진설된 그 생명의 양식을 온 회중이 함께 섭취함으로써 성도들에게 생명이 공급되며 유지되는 것이다. 주일날 공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는 것은 역사적인 교회의 상속에 참여하고 있음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며 흩어진 보편교회 가운데 속해 있음을 확인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위험한 것은 설교자가 성경을 이용해 자기의 종교적 목적을 이룩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잘못된 설교자는 자기의 종교적 주장을 구체화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한다. 그러나 설교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종교적 신념을 교인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성경을 빗대어 설교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설교자는 자신의 판단과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성경 구절들을 여기 저기서 끌어와 종교적 궤변을 늘어놓게 된다. 결국 성경을 설교시간 앞뒤에 조금 언급하고는 나머지 시간은 자기 주장을 펼치는 시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설교에 앞서 성경 본문을 읽지만 그 말씀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엉뚱한 종교적 자기 주장을 강조하게 되면 결국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우주적 교회와 보편교회에 속한 설교자로서 공인의 위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




6. 결론


교회는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이다. 교회의 가장 소중한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노래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일 공예배를 통해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 날까지 상속되어 가야 할 본질적 내용이다. 그 공예배의 가장 중심에 설교 즉 하나님의 말씀선포가 있으며 그 말씀에 성례와 축도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다음에 기도와 찬송, 연보, 권징사역의 순서가 말씀의 지배아래 놓여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말씀선포는 공예배의 핵심에 놓여 있으며 천상의 교회와 우주적 교회 및 역사적 보편교회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설교자가 가장 유념해야 할 점은 회중 앞에서 남보기에 훌륭한 설교를 하고자 하는 유혹이다. 그렇게 되면 자칫 예배에 참여한 성도들을 마치 관객처럼 오해할 소지가 다분히 있다. 물론 설교를 잘 하려는 자세가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려고 하는 것에 국한된다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훌륭한 설교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일반 교인들로부터 인정 받으려는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배제할 수 없다.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일반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뜻을 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목사는 말을 잘하고 리더십을 갖추었다고 해서 자의적으로 맡을 수 있는 직분이 아니다. 설교는 결코 인간의 언변이나 웅변술을 통해 교인들을 설득시키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는 설득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교회 가운데 그 생명의 양식을 진설하는 거룩한 사역이다. 그러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


설교는 설교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부패한 물결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세상의 풍조에 노출된 자신을 말씀을 통해 돌아보게 해야 한다. 그것은 설교자의 달콤한 언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즉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변천해 가는 세속적 값어치 사이에 발생하는 충돌현상이 설교를 통해 교회 가운데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의 구별된 모습을 확인하는 은혜의 방편이기도 하다.


설교자는 결코 유창한 언변을 통해 성공적인 목회를 하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된다. 목회에는 소위 성공이나 실패라는 단어가 아예 없으며, 올바른 목회와 그릇된 목회가 있을 따름이다. 소위 강해설교를 하는 설교자들도 그것을 통해 성공적인 설교와 목회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잠재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시대와 종교적 유행에 따라 다양한 설교방법들이 등장하는 것은 교회의 세속화에 따른 현상일 따름이다. 칼빈이 강조하는 것처럼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자리로서 강단의 참다운 권위가 온전히 회복될 때 ‘교회 속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 속의 교회’로서 구별된 섬김과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진정한 길을 찾게 될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거짓 설교를 직간접적으로 많이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그 위기에 심히 둔감하다. 우리는 영화속의 소위 명설교를 기억하고 있다. 예를들어 유명한 기독교 영화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서 주기철 목사 역으로 나오는 영화배우는 짧지만 명설교를 한다. 많은 교인들이 그 영화 속의 거짓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또한 불신자가 소위 명설교를 하기도 하며 이단자가 그와 동일한 유의 명설교를 하기도 한다. 나아가 불건전한 신학사상을 가진 자들의 그럴듯한 명설교들도 많다. 지금도 우리는 방송이나 서적들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끊임없이 그런 경험을 하고 있다.


물론 그런 설교들은 거짓 설교일 따름이며 전혀 참다운 설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인들이 그 설교 아닌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어린 교인들은 자기 취향에 맞고 자기 정서에 맞으면 쉽게 그에 반응하면서 종교적 감성에 젖어 들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 감정 여하에 따라 소위 ‘은혜’를 받기도 하며 그와는 정 반대의 형편에 놓이기도 하는 것이다.


강단의 기능이 극도로 약화된 우리 시대의 이러한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달하며 선포하는 설교자가 우리 가운데 많이 나오게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주님, 우리 시대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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