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행복관은
고린도전서 13:1~13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렐레스는 "행복은 인간의 최고의 선(Summum bonum)"이라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인생의 선중의 선이이요 목적중의 목적이요, 욕구중의 욕구입니다.
사람들이 왜 부지런히 일 합니까? 행복하게 살려고, 왜 열심히 돈을 법니까? 행복하게 살려고, 왜 권력을 잡으려고 동분서주합니까? 행복하게 살려고, 왜 사랑을 찾아 헤매입니까? 행복하게 살려고 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합니까? 행복하게 살려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하게 살려고 애쓰지마는 이 세상에는 행복하게 사는 사람보다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 행복하게 사는 사람과 불행하게 사는 사람의 환경과 조건이 달라서 입니까? 아닙니다. 불행한 사람은 잘못된 행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행복을 찾는 방법과 지혜가 부족해서입니다.
사람은 행복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행복을 무시한 철학은 어딘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행복과 상관없는 정치는 올바른 정치가 아닙니다. 행복을 경멸하는 도덕은 창백한 도덕입니다. 행복을 부정하는 문명은 병든 문명입니다. 행복을 망각한 신앙은 그릇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행복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오늘 성도의 행복관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행복과 행운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행복을 영어로 happiness라 하고 행운을 fortune 또는 Luck 이라고 합니다. 행운은 우연히 좋은 운이 굴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을 가다가 복권을 하나 샀는데 그것이 당첨되어 1억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행운입니다. 그것은 우연의 산물이요 요행의 결과입니다. 만에 하나 십만에 하나 있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가서 스러트머신에 1불짜리를 넣고 당겼는데 1만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행운입니다. 이것은 내 노력의 산물도 아니요 지혜와 끈기의 결과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사행심리를 이용한 하나의 사기 행위입니다. 그런 요행, 행운을 따라 다니다가 망한 사업, 망한 가정, 망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행복은 행운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행복은 나의 지혜의 산물이요, 노력의 결과요, 피와 눈물과 땀으로 쌓아 올린 탑입니다. 행복은 우연이나 요행의 산물은 아닙니다. 우리는 행운을 바라듯이 행복을 바래서는 안됩니다. 행복은 내가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요행의 선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을 먼데서 찾아서는 안됩니다.
행복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데 있습니다. 맹자 선생도 '길은 가까운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행복도 가까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행복을 가까운데서 찾으려 하지 않고 아주 먼데 있는 줄로만 압니다. 사실은 언제나 여기 있는데 벨기에의 희곡작가 메테르링크의 명작 '파랑새'에 나오는 주인공의 대사입니다.
두 어린아이가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멀리 멀리 돌아다녔습니다. 여기 있을 것 같아 찾아갔지만 행복이 여기 없었습니다. 저기 있는 것 같아 달려가 보았지만 행복은 거기에도 없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나섰던 이 두 어린아이는 종내 찾지 못하고 실망한 나머지 맥없이 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행복의 파랑새는 바로 내 칩 처마 밑에서 즐겁게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소설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과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을 가까운데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내 나라에서 찾아야 합니다. 행복을 내 교회에서 찾아야 합니다. 내 직장에서 찾아야 합니다. 내 가정에서 찾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복을 큰 궁전에서 찾으려 합니다.
행복을 먼 나라에 가서 찾으려고 합니다. 행복을 높은 지위에서 찾으려 합니다. 값비싼 보석에서 찾으려 합니다. 행복을 남의 화려한 저택에서 찾으려 합니다.
시인 괴테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왕이건 백성이건 자기 가정에서 평화를 발견하는 자가 가장 행복한 인간이다"
물리학자 퀴리 부인은 "가정의 식구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 이 세상에서 유일한 행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행복은 가까운데서 찾아야 한다고 한 말입니다. 사람은 어리석은 데가 있습니다. 남의 것이 내 것보다 더 좋아 보입니다. 남의 집이 내 집보다 더 좋아 보이고, 남의 집 잔디가 내 집 잔디보다 더 푸르고 싱싱해 보입니다.
시인 괴테도 말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언제나 멀리 가려고만 하는가? 보라, 정말 좋은 것은 아주 가까운데 있는걸!"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리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밝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요, 언제나 어두운 날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낮이 가면 밤이 오고 밤이 가면 낮이 오고 순경이 자나면 역경이 오고 역경이 지나면 순경이 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리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다리고 참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어두울 때는 밝을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밝은 때는 어두운 때가 찾아와도 참는 지혜를 준비해야 합니다.
행복은 우리 손이 닿지 않는 피만의 보석이 아닙니다. 행복은 절대로 불가능한 꿈이 아닙니다. 정성과 노력 그리고 끈기의 덕만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행복해 질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평민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결심하는 만큼 행복해 질 수 있다" 얼마나 용감한 말입니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간절한 원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행복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린 것입니다. 부지런하고 참는 사람은 행복해 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행복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흐뭇한 만족감입니다. 부복함이 없는 상태입니다. 행복과 쾌락은 다릅니다. 쾌락은 우리의 감각의 한 부분이 즐거운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쾌락보다는 차원이 높고 그 질이 깊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편안한 의자에 앉으면 몸의 안락한 쾌감을 느낍니다. 쾌감은 감성의 만족이요 행복은 정신적 만족입니다. 그러니까 쾌감이나 쾌락에서는 흐뭇한 만족감 다시 말하면 행복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육신 적인 욕망의 충족은 쾌락이나 쾌감은 줄 수 있어도 행복감을 주지는 못합니다. 행복하려면 깊은 정신적 사랑이 필요합니다.
쾌감이나 쾌락은 당장은 즐거워도 생명에 권태감과 피로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 생명에 피로감이나 권태감을 주지 않고 깊고 흐뭇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아무리 행복의 조건을 갖추어서도 전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면 그는 결코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을 별로 갖춘 것이 없어도 행복감을 느끼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이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복의 조건은 행복의 객관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주관적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그 주어진 행복의 조건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면에 행복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서도 아주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도 많고, 지위도 높고, 명예도 있는데 인생의 행복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란의 철인 스피노자는 인생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했습니다. 제집한칸 없이 평생을 셋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유대교에서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박해를 수 없이 당했습니다. 그는 고독했습니다.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처자 없이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그는 몸이 약했습니다. 20년 가까이 제 병으로 고생했습니다.
가난과 고독과 병고와 박해의 고난 속에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다정한 친구와 제자들 속에서 만족과 기쁨을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분수를 지키면서 인생을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객관적인 행복의 조건은 별로 갖지 못했지만 그는 행복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사실 그리스도를 알고난 후에는 세상 적인 것 자랑할 수 있던 것은 다 분토처럼 여겼습니다. 육신 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당한 고생은 이루 다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서 그가 당한 어려움을 잠깐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고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이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바울은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순간도 없었습니다. 그는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자족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기뻐하는 생활 행복한 생활을 했고 "너희도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아무리 행복의 조건을 구비했다고 하더라도 마음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일기문학의 태두였던 아미엘은 "행복의 진정한 이름은 만족이다"고 했습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만족한 인간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족하는데 행복이 있습니다.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 그리고 문필가들이 『행복론』을 썼습니다. 세네카, 럿셀, 모로와, 아랑, 행복이란 이름은 붙이지 않았지만 톨스토이도, 빠스깔도, 노자도 결국 넒은 의미의 행복론을 썼습니다. 행복은 가장 정다운 말이요, 매력적인 말이요, 제일 많이 쓰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행복이 어디에 있느냐 그 주소를 물어 보면 그 대답은 십인십색이요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이는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행복은 권력 속에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참 행복은 쾌락 속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예술 속에 행복이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사업 속에 있다고 합니다.
참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행복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인생이라는 주어진 소재를 가지고 창작해야하는 작품입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대리석을 가지고 행복이라는 작품을 조각합니다. 행복은 예술과 같습니다. 꼭 같은 재료를 가지고 걸작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졸작을 만드는 이도 있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행복의 걸작을 만드는 이도 있고, 불행의 졸작을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재는 같은데 왜 작품의 우열이 생깁니까? 왜 어떤 사람은 흐뭇한 행복의 집을 짓고 어떤 이는 짜증나는 비극의 집을 짓습니까? 그것은 집을 짓는 사람의 정성과 노력문제입니다. 인생을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아름다운 행복의 집을 짓고, 불성실하게 그저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은 불행의 집을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술가가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피와 눈물의 정성을 쏟는 것처럼 우리는 행복이라는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의 지혜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행복은 인생의 예술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전력투구의 자세로 살고, 공부하고,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재료를 가지고 행복이라는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 제일 많이 걸려 있는 그림중의 하나가 프랑스의 농민화가 프랑소와즈 밀레가 그린 '만종' 일 것입니다. 이 그림은 너무 자주 보기 때문에 그저 평범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깊이 음미해 보면 이 그림 속에는 인생의 위대한 진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는 행복에 관한 근본적 교훈과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미국의 문필가 반다이크는 '만종'을 가리켜 "사람과 믿음과 노동을 그린 인생의 성화"라고 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그림 속에는 행복의 요소인 사랑과 신앙과 창조의 3대 원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어두움의 장막이 조용히 땅을 덮기 시작합니다. 해는 지평선 저쪽으로 사라지고 넓은 벌판은 정적과 암흑과 안식의 옷을 입기 시작합니다. 저 멀리 마음의 교회당 탑에서 저녁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 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매일낮 12시와 저녁 여섯시에 종을 칩니다. 저는 이 '만종'이라는 그림이 그렇게 좋아서 거기서 영감을 얻어 설계했는데 우리 건축위원장님이 이태리에서 500년된 전통 있는 종 회사에 주문해서 기증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 깊은 감화를 받습니다.
예배당 종탑에서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를 들은 젊은 부부는 일하던 손을 멈추고 쟁기를 손에 잡은 채 하루종일 건강한 몸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면서 고요히 머리 숙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는 부부의 진실된 사랑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는 이 젊은 부부 성실한 신앙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 속에는 젊은 부부가 열심히 부지런히 일하는 노동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의 집을 지으려면 그 기초가 무엇이어야 합니까?
사랑과 신앙과 노동의 기초 위에 세워야 합니다. 저는 가정을 돈 위에 세웠다가 무너지는 것, 육신의 정욕 위에 세웠다가 허물어지는 가정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참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에 있습니다.
어린애는 사랑을 받을 때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누구를 사랑하고 싶어합니다. 사랑하고 사랑을 받은 것처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동물이 아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사는 동물입니다. 떡은 육신의 안식이요 사랑은 정신의 양식입니다. 사람은 육체를 가진 정신이요 정신을 가진 육체이기 때문에 떡과 사랑의 두 가지 양식이 다 같이 필요합니다.
떡이 부족하면 우리의 육체는 영양불량의 병에 걸립니다. 그런데 사랑이 부족하면 우리의 정신과 인격이 애정결핍에서 오는 병에 걸리게 됩니다. 사랑이 너무 결핍하면 냉정해지고 이기적이 되고 성격이 비뚤어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사회에 대해서 복수심이 생기고 폭력충동의 노예가 되어 무서운 범죄자가 되기 쉽습니다.
고아가 왜 범죄자가 되기 쉽습니까? 인격의 성장기에 가장 중요한 사랑의 양식을 먹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격에 병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사는 동물입니다. 행복하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철학자 피이테는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물이 우리 몸의 주성분을 이루는 것처럼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을 이룹니다.
소금에서 짠맛을 빼면 소금이 아닙니다. 사탕에서 단맛을 빼면 사탕이 아닙니다. 고추에서 매운맛을 빼면 고추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서 사랑을 빼면 허무해집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향기 없는 꽃과 같고 꽃없는 화원과 같습니다. 인생에서 사랑을 제거하면 풀한 포기 없는 사막처럼 황량해 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늘 주신 말씀에서 "사람이 방언을 말하고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주리와 울리는 괭가리처럼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예언의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산을 옮길 정도의 큰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고,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헌신과 봉사가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고"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사랑하면 관심을 갖습니다.
꽃을 사랑하면 꽃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꽃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소독을 해주고 김을 매주고 꽃과 마주 앉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꽃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사랑과 관심을 정비례합니다.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관심이 크고 사랑이 적으면 적을수록 관심이 적습니다. 관심의 정도가 사랑의 정도를 결정합니다.
더구나 사랑은 책임을 느낍니다.
책임이라는 말을 영어로 responsibility라고 합니다. 이 말은 레스폰드에서 왔는데 '대답한다' 또는 '응답한다'하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책임을 느낀다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부를 때 대답하는 것입니다. 어린애가 몸이 아파서 엄마를 부르면 어머니는 곧 대답합니다. 책임은 부를 때 대답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 깊은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의 건강에 대한 책임, 교육에 대한 책임, 생활에 대한 책임, 결혼에 대한 책임을 느낍니다. 사랑과 책임은 비례합니다. 얼마나 책임을 느끼느냐 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존중히 여깁니다.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자유를 존중하고 인격과 생각과 개성을 존중합니다. 얼마나 상대방을 존중하느냐 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입니다. 내 뜻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기주의가 아니고 이타주의입니다. 사랑은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위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이해하는 마음이 깊어집니다.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집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해심이 부족하고, 이해심이 부족하면 사랑도 부족합니다. 사랑과 이해는 상호작용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아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보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해라는 말은 영어로 understand 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밑에 선다'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 그 사람을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서에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허물이 있어도 사랑으로 보면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끝으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까워하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과 주는 것은 정비례합니다. 사랑하면 주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주는 것이 아깝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 보람이요 축복이요 기쁨입니다. 주면 나는 그만큼 적어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내가 더 풍성해졌다고 느낍니다. 주면 줄수록 기쁘고 행복한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서로 사랑하므로 불행한 세상에 살면서도 행복하게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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