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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 기독론적 신학의 변증법
- 신학에 있어서의 숙명과 이념-
들어가면서
바르트는 본 논문의 도입부에서 신학의 역설적 구조를 설명한다. 그리고 본론에서 철학적 신학의 위험성을 경고한다(I, II에서). 마지막으로 그는 III장에서 신학적 변증법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밝힌다. 아래 발제문에서는 우선 바르트의 신학의 구도를 간략하게 파악할 수 있는 도입부를 따로 떼어서 기술하고, 그리고 나서 철학적 신학의 위험성을 경고한 그의 설명을 살펴볼 것이다.
신학의 역설적 구조: 신학의 대상일 수 없는 그러나 대상이신 하나님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은 학문이다: “신학은 교회적 선포의 대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진리에 대하여 내용적으로 정리해 놓은 연구다”(251).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신학은 한계를 갖고 있다: “하나님 자신(Gott an sich)의 진리에 대한 연구와 가르침은 아니다 ... (신학: 필자 첨가) 그 자체로서는 인간적 지식과 인간적 학문의 대상으로 고려될 수 없다”(251). 여기에서 질문이 제기된다. 왜 그리고 어떻게 신학에서의 이러한 역설적 양면성이 가능한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바르트는 신학의 대상과 자리가 역설적 양면성을 갖게 한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신학은 철저히 교회의 신학이다. 즉 신학의 자리는 교회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정의하는 신학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학은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고 또 선포되어야 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연구와 가르침이다”(251). 다시 말해서 신학은 하나님을 자신의 학문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지만, 대상인 하나님이 자신을 대상으로 내어주신다. 하나님이 스스로 신학의 대상이 되어주시는 것을 바르트는 “선포된 하나님”(252)이라고 명명한다: “신학에서는 선포된, 우리에게 선포된 하나님이 문제된다”(252). 따라서 바르트에게서 교회의 신학이란 교회에서 선포된 하나님, 곧 자신을 신학의 대상으로 내어주신(계시: 필자 주) 분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신학연구에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252). 그래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한다: “신학은 단지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신학으로서만 가능하다”(252).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신학”은 무엇인가?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문이다(252). 다시 말해서 신학자에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 없으면 신학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르트에게서 신학의 주체는 신학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 비록 매우 숨겨진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신학의 주관이 되신다”(253). 그래서 바르트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것을 인정하고 견지하는 신학만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학이요 복음주의 신학이며(251, 253), 신학자도 “계시된 신적인 사유의 증인”(255)이라면 정말로 신학자라고 한다. 신학이 참된 신학이 되고, 신학자가 참 신학자가 되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기적이요, 은혜다(256).
철학적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경고
그에 의하면 신학이 철학적 신학으로 바뀌는 이유는 신학의 한계성 때문이다(254): “신학은 신학이 아무리 신적인 근원과 대상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다른 것(=철학: 필자 주)과 분명하게 신적인 것으로 구별되는 범주를 사용하지 못 한다”(254). 다시 말해서 신학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지만, 사실상 철학적 인식의 방법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신학은 스스로 “신성한 철학 혹은 그리스도교 철학”이라고 자처하기도 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253이하, 특히 255). 그러나 바르트에 의하면 이러한 철학적 신학은 -논문의 제목이 지시하는 것처럼- 신학에서의 숙명과 이념이다. 그러면 바르트가 지적하고 있는 신학이 지닌 숙명과 이념은 무엇인가? 또한 철학적 신학의 방법론으로서 변증법은 무엇이며, 신학적 인식 방법 내지 변증법은 무엇이며 그 차이는 무엇인가?
실재론적 신학의 위험
실재론적 신학의 위험은 첫째로 “하나님이 계시다(=있다: 필자 주)”는 진술에서 빚어진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이 존재에 참여하신다는 것 이외에 다른 무슨 뜻이 있겠는가?”고 반문한다(262). 바르트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신학 내지 하나님 경험에서의 숙명이다(274). 다시 말해서 다른 어떤 중재자나 그 어떤 것 없이 존재론적으로 이미 하나님과 인간이 숙명적으로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를 통한 하나님 인식의 문제를 지적한다. 존재의 유비, 곧 존재자들 사이의 하나님의 유사성(similitudo Dei)(271)을 통한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실재론자들의 확신이다: “그(=실재론자: 필자 주) 확신은 하나님이 주어진 것으로부터 ... 읽혀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실재론자의 가르침의 확연성과 일치되고 있다”(262이하. 특히 263). 이러한 실재론적 확신에서 중요한 것은 “경험(=하나님 인식 혹은 체험: 필자 주)”(263이하, 특히 265)인데, 바르트는 하나님 경험의 내적인 면을 주장하는 신학(경건주의)이든 외적 경험을 주장하는 신학(합리주의)이든 상호 공속했다고 한다(264). 이러한 신학의 실재론적 공속에 대해 바르트는 한 마디로 “모종의 착시에 근거를 둔 집안싸움 이상의 것이 되지 못 한다”고 평가한다(265). 바르트는 실재론적 신학 곧 경험주의 신학이 하나님 경험을 절대의존의 감정에서 찾는 것에서 문제점을 노출한다고 평가한다: “전반적으로는 경험주의가 문제며, 인간에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혹은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발생하여 인간을 너무 강력하게 제어하면서 인간을 사로잡아 절대의존에로 옮겨놓는 숙명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거나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문제다”(265). 둘째로 실재론적 신학의 문제는 “하나님의 계시(啓示)”에서 빚어진다. 바르트에 의하면 실재론적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를 소여성으로 보았다는 것이다(266).
실재론적 신학을 위한 대책: 계시 개념은 소여성이 아니라 기독론적 실현성이다
바르트는 실재론적 신학의 이러한 위험에 대하여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는 하나님을 인간 내면에서 경험가능한가? 라는 것이다(275). 바르트는 단호하게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고 한다(276). 둘째로 하나님을 외적으로 경험함을 부인한다면,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276).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와 존재 개념을 존재의 행동으로 본다. 실재론적 신학이 계시 현실을 정적인 개념으로서 실재성(Realitaet)으로 보았다면, 바르트는 실현성(Aktualitaet)으로 본 것이다(267).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계시 개념을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성육신, 곧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자신의 존재방식 속으로 들어온 것으로 해석한다(266-267). 그래서 바르트에게서 행위는 존재이고, 존재는 행위이다(268). 다시 말해서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계시 존재이고, 그 계시하는 존재는 인간에게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은 인간에게 새로운 것을 알려주고 말씀은 인간에게 어둠 속의 빛으로 온다”(272). 그런데 이 말씀은 죄인인 인간에게 심판하는 은혜요 용서하는 은혜이고(272-273), 이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점에서 자연적이거나 천성적 은혜가 아니라 수용적인 은혜이다(273). 그러므로 바르트는 신학적 실재론과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계시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소여성은, 그래도 그 소여성이 마치 이러이러한 상세한 규정 밑에 어떻게 되든지 자체상 존립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없다”(273-274). “자연으로서의 하나님(Deus sive natura)은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278).
관념론적 신학의 위험
바르트는 관념론적 내지 이념적 신학의 위험을 경고한다(278이하). 그에 의하면 관념론적 사고는 “자연에 대립한 정신의 자기숙고(Selbstbesinnung)를 뜻한다”(279).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 사유의 산물로 하나님을 도출시킨다는 것이다(추상화).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관념론적 신학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은 부정의 방법(via negativa)을 통해서이다(280). 즉 주어진 모든 존재를 위한 가장 필연적 전제를 얻기 위해 매 단계에서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하나님을 순수 존재 내지 순수 활동으로 개념화한 것이다(280).
관념론적 신학을 위한 대책: 계시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신학적 관념론
그러나 바르트는 관념론적 신학도 슐라이어마허의 실재론과 일맥상통하다고 비판한다: “토마스는 숫제 은혜를 통하여 조명되고 계시에 근거를 둔 하나님 인식(이라고 하나: 필자 첨가) ... 오히려 주관 쪽에 더 기울어지고 관심을 가진 슐라이에르마허의 실재론에 대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소여성에 관한 하나의 상응하는 비판적 지식을 부인할 수 없다”(280). 다시 말해서 인간 이성의 자기 인식이라는 점에서 관념론적 신학이나 인간의 내적 경험을 강조하는 신학적 실재론이나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르트는 “하나님의 은폐성과 타종성(他種性)”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280이하). 따라서 바르트는 그리스도교적 신학적 관념론은 “계시의 비판적 이해로서 가능하다”고 한다(284, 287). 그렇다고 해서 관념론이 계시 자체를 비판적으로 다 이해할 수는 없다(신적 로고스와 인간적 로고스를 혼동한 리츨의 오류, 288).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관념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287). 즉 하나님이 단독으로 우리에게 접근할 가능성을 고려하라는 것이다(290).
바르트의 신학적 변증법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학은 -그것이 실재론적이든 관념론적이든- ‘이성 혹은 하나님(ratio sive Deus)이나 자연 혹은 하나님(natura sive Deus)은 말이 안 된다(292). 바르트는 루터의 개념을 수용하여 실재론적 신학과 관념론적 신학에 충고한다. 즉 하나님의 드러내심 안에도 감추임이 있다는 것이다(Deus revelatus in absconditus):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도 드러냄을 지시하는 하나님의 감추임이라는 이점을 숙고하는 것이 분명히 신학에 있어서의 관념론의 관심이다. 그리하여 관념론은 실재론자의 ‘하나님은 현실이다!’라는 주장에 대립하여 ‘하나님은 진리다!’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관념론이 현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284-285). 또한 “...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러한 접근을 하나의 특별한 개별적 발생사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발견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287). 그에 의하면 여기에서 신적 행위와 인간적 행위 사이의 긴장이 있다(290). 그러므로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 인식의 특수성은 수동적이면서 이성을 통한 자발적인 순종이다(291).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언설로서의 신학은 이러한 순종의 표현이다(293). 여기서 이성을 통한 자발적 순종이라 해서 인간적 사유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성에 의한 하나님 말씀의 자발적 수용 규제적 용법이지, 구성적 용법은 아니다(291).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신앙 곧 순종자로 자신을 인식하는 신앙이다(292).
따라서 바르트에게서 헤겔식의 변증법 곧 명제와 반명제 그리고 그것의 지양을 통한 종합명제는 신학적 변증법이 아니다(297). 바르트는 한 마디로 “일자(一者)를 붙잡으려는 시도를 중단하라”고 충고한다: “대립들 위에 일자(一者)를 더 예리하게 더 경건하게 더 은밀하게 붙잡으려는 모든 포촉행위를 중단시킴으로써 신학은 자신을 철학과 구별하여야 한다”(297-298, 302). 왜냐하면 이런 모든 인식행위는 “인간적 사유의 모순”(298)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바르트는 인간적 사유의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모순이 발생해야 함을 주장한다(298). 바르트에게서 철학적 시도는 인간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이르는 행위이고, 신학적 변증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이르는 행위이다(299이하). 이를 위해 바르트는 “신적 위엄의 사색(speculatio divinae majestatis)”이란 말을 루터처럼 반대로 해석하라고 충고한다. 즉 하나님을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루터에 의하면- 공로에 의한 의(義)와 같다는 것이다(300). 바르트는 결론적으로 참된 신학을 기독론적으로 재정의한다: “신학은 그 신학이 전적으로 바로 그리스도론인 경우에 말씀의 신학이고 선택의 신학이고 신앙의 신학이다”(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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