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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신학. 바르트 논문집 1] 3장 성서적 질문, 통찰과 전망 발제

by 【고동엽】 2021. 12. 17.

* 각주까지 있는 발제문은 첨부파일을 참조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인식에 대한 통찰
- 성경적 질문, 통찰과 전망” 발제 -

발제자: 김재진 (2010. 1. 20)

 

I. 신 인식을 통한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

 

바르트는 “성경이 우리에게 세계사를 해석하기 위한(해) 어떤 인식을 제공하는가?”(51)라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신 인식을 제공한다.”(Ibid)고 답변한다. 그리고 그는 ‘신 인식’을 모든 인식의 처음과 나중으로 규정한다.(cf. Ibid)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이 세상 마지막에 오실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일상적 일과 우리의 역사적 시간을 창조자와 구원자이신 하나님 안에서 파악”(Ibid)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 인식’은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인식의 “출발점”이다.(52)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모든 인식은 신 인식에 존(종)속되어 있다.”(52, cf. 55) 이러한 점에서 그에게 있어서 ‘신 인식’은 곧, ‘우리의 인식’이고, 우리의 인식은 곧, ‘신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의 특성을 바르트는 또한 성경에 대한 질문과 관련하여서도 동일하게 기술한다.
바르트는 “성경에 대한 질문은 (곧) 우리에 대한 질문으로 변(하듯).”(53), 바꾸어 말하면, “영이 진리라는 사실을 영이 증거한다”(Ibid)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긍정’에 의해서 인간의 ‘부정’이 극복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 혹은 변화를 가리켜 우리는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이라고 우리는 말 할 수 있다.(cf. 53)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항상 거듭 신神인식을 질문해야 한다는 사실 안에는 이미 우리가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54)라고 반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 통일되어 있고, 뿌리내려져 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망각하지 못할 것이다”(54)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여전히 “신 인식은 다른 인식들과 대립해 있다”(55)고 말한다. 그런데 이 대립의 극복은, 그에게 있어서, 어는 것 하나라도 깊이 인식하게 되면 그 대립이 극복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이 실제로 자신의 자율, 자신의 자유를 의식한다면, 이것은 통일성에 대한 질문, 하나님 질문의 비중을 약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55)라고 그는 말하기 때문이다. 즉 성경이 제공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지혜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지식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cf. 57)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를 때에, 인간의 지식은 폐기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의 가능성을 안고 있지 않는 그런 단호한 긍정이란 없으며, 긍정에 의해 둘러싸이는 가능성이 없는 그러한 부정도 없다. (바꾸어 말하면, 필자 첨부) 버림 받음을 낳을 수 없는 선택받음이란 없으며, 선택받음을 낳을 수 없는 버림도 없다. 영원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이며, 이로부터 나오는 모든 심리적, 역사적 갈등은 시간적이다.(58)

이러한 기술에 의하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한 선택’이나, ‘영원한 버림’은 없다. 그러므로 그는 ‘신 인식’의 문제를 여전히 “인격적인 생활의 영원한 문제”(58)고 확정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신 인식은 우리의 존재의 뿌리면서도, 그렇지 않은 원천이고, 우리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있지 않는 원천”(58)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의 ‘변증법’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변증법’은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 곧 신神 인식과 인간 인식은 서로 분리되면서도, 서로 분리되지 않는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도식화 하면, “신 인식 = 인간 인식” 그리고 동시에 “신인식 ≠ 인간 인식”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진술이 어떻게 극복되는가? 그런데 이러한 모순의 극복이 바로 바르트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의 극복은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한 바와 같이, 신 인식에 의해서 인간 인식이 종속되는 것으로 극복된다. 이점을 바르트는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해 주는가에 대하여 주목함으로써 - 특히 바울의 주목함으로써 - 이점에 대한 답변을 대신한다.

 

II. 성경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통찰

 

바르트에 의하면, 바울, 요한 그리고 누가를 비롯한 12제자뿐만 아니라, 수 없는 이름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 통찰했던 것은, 모든 역사적 인과관계를 뛰어넘는 사건에 대한 통찰이다. 그것은 그뤼네발트Grünewald의 그림처럼, 모든 성경의 증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cf. 63) 즉 “성경에 보도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손(세례요한의 손, 필자 주)이다.”(63f.; 72) 그의 말을 빌리면, “그것(́= 세례요한의 손가락, 필자 주)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고 우리는 덧붙여야 한다. 바로 이분이다!”(73)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성경에 대한 종교학적 심리학적 해석을 거부한다.(참조 64-68) 왜냐하면 그는 “종교의 진리는 그 피안성, 그 세상성, 그 비 역사성”(66)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에 의하면, 성경이 증언하는 기독교는 ‘세상성과 역사성’을 갖는다. 따라서 성경이 증언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67)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선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님, 오로지 홀로 죽지 않으시고, 아무도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이”(69)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성경이 증언하는 내용을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적 구조 속에서 이해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긍정이나 부정 속에 있지 않고, 긍정과 부정의 원천인 시초를 인식하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70) 그래서 그는 “영은 영을 통해 이해된다πνευματικοῖς πνευματικά. 그것은 온통 변증법적이다.”(70)라고 확언한다. 따라서 “성경은 오직 단 하나만의 신학적 관심을 가지고 잇는데, 그것은 순전히 내용적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관심”(70)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의 증언은 철저히 ‘피안성’, ‘비역사성’, ‘세상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고 한다.(cf. 70)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피안성’ 곧 ‘비역사성’과 ‘세상성’이 어떻게 상존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서 칼 바르트는 기독론적 변증법으로 이에 답변을 시도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정과 인간의 부정이 하나로 극복된다.

 

III. 긍정과 부정의 갈등 극복으로서의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

바르트는 세례요한이 가리키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지에 대하여 보다 자세히 기술함으로써, 자신의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적 해석을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먼저 예수는 “죽음으로부터”(73) 부활하신 분이시다. 더 자세히 말하면, “마지막 때의 평화의 왕, 백성들 중에 하나님의 종, 구약성경이 말하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사람의 아들(人子)은 신약성경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바로 그 십자가에 달린 자가 아닐 수 없다.”(75) 그런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라는 말처럼, “세상의 완성consummatio mundi, 모든 기존 현실의 폐기, 모든 생성 과정의 파멸, 이 세계 시간의 소멸”(75f)을 의미한다고 바르는 이해한다. 즉 이 십자가의 사건으로 세상의 긍정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부정으로 변하고, 이 세상의 부정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긍정으로 변한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절규는 인간에 대한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을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신약성경이 하나님, 인간 그리고 세계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모든 긍정은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전혀 고려될 수 없는 가능성과 예외 없이 관련되며, 바로 그렇기에 항상 동시에 새로운 질서에 속하는 가능성보다 철저히 앞서가는 거대한 비판적 부정과도 관련된다(76)

이와 상응하게 그는 아예 “신약성서의 긍정Ja을 부정Nein 안의 긍정Ja으로 이해하지 않는 자는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76)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나왔다”(76)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를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극복되었다고 그는 말한다.(76f) 한 마디로 말하면, 죽음 상황에 처한 인간이 새로운 생명에 이르는 길이 에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순종과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적 죽음으로 인하여 열렸다는 것이다.(참조 77이하)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세워졌다”(78)고 그는 강조한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를 메시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은 시몬 베드로가 아니라, 바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바르트는 증언한다.(cf. 78) 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라고 그는 附言한다.
이제 바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참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다.(cf. 8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에서 “우리 하나님은 사르는 불이시다”(73)라는 것을 인식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마지막 날은 하나님의 첫날이 된다.”(83) 그래서 그는 바울의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일어나고, 그들이 변화될 것이다”(cf. 고전 15:52f)는 말씀을 인용한다. 즉 “부활은 하나님의 통치다”(83)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아주 단호하게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전령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투사요, 하나님의 권능을 부여받은 전권대사다”(83)라고 증언한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는 예수와 전혀 상관이 없다”(83)고 다시금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 보려는 것에 대하여 바르트는 각을 세운다. 즉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에 의해 장악되고, 결정되며, 지배된다”(83)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의 통치가 시간의 의미라고 한다면, 바로 이것(= 부활)은 시간이 아니(기)”(84) 때문이다. 따라서 “부활은 영원이다”라고 그는 단언한다. 이 부활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이미 영원, 곧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그는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새로운 세계의 돌입, 과거에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 올 것의 통치 - 그것이 바로 부활절이다”(85)라고 그는 못 박는다. 즉 “부활은 새로운 세계, 새로이 결정되고, 빚어진 세계”(85) 이며, ‘절적으로Qualiter’ ‘전적으로 다른totaliter aliter’ “새 창조”(Ibid)이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다른 기적들과 철저히 구별되는 “절대적 기적”(86) 이라고 칭한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통찰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극복된 ‘긍정과 부정’을 바르트는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썩어가는 모든 것은 썩지 않을 것의 흐름을 타고 간다”(87)는 말로 결론을 맺는다. 결론적으로 바르트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곧 인간적인 것에 대한 ‘전적인 부정Nein’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정Ja’에 의해서 극복되는 기독론적 역설적 변증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아들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통일되어 있다”(88)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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