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한 하루> 마6:34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짤막한 세 마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이 중 첫 번째 문장은 이해하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입니다.
먼저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내일 일은 내가 염려할 것이거나 다른 사람이 염려할 것이 아니라 "내일" 그 자체가 염려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문자 그대로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염려를 할 수 있는 인격적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시간의 주인, 어제와 오늘과 내일과 모든 시간과 세월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내일 일도 주관하실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내일에 대한 염려는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님을 강조하신 것이라 봅니다.
그 다음의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는 문장은 앞선 말씀들을 뒷받침하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함께 가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문제들에 관해 염려를 하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오늘 하루의 일들에 관한 염려도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내일 일에 관한 염려를 할 겨를과 여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하루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바로 살기도 힘듭니다. 오늘 하루 무사하게 지낸 것도 사실은 내가 잘 해서가 아닙니다. 모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어차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면 내일도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면 되는 것인데, 스스로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것이기도 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는 말씀은 그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정말 염려는 쓸데없는 일입니다. 염려를 아무리 한들 과거를 한 치도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미래에 관한 염려 또한 소용없는 일입니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일을 위한 염려를 제대로 하려면 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일 일어날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내야 하며 그 모든 가능성에 완벽하게 대비해야 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일 홍수가 나면 어떻게 하나? 내일 폭설이 오면 어떻게 하나? 내일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나? 내일 아침 집문을 나설 때 기와장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내일 퇴근할 때 파란 불이 켜져서 길 건너는데 술취한 운전수가 트럭을 몰고 덮치면 어떻게 하나? 전철을 탔는데 뭐가 잘못 되어서 전속력 질주를 하다가 대형충돌로 전복된다면 어떻게 하나? 이런 일 다 생각하면 겁나니까 아예 집안에 드러누워 잠이나 자는 게 좋겠다, 그런데 저 천장이 갑자기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세 딸애들이 학교에 간다고 나갔다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라도 되면 어떻게 하나? 등등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루가 지나고 보면 예상했던 모든 가능성은 가능성으로 그치고 지나간 것이지 실제로 일어난 일은 하나도 없거나 거의 없기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염려는 쓸데없었던 염려로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왜 그런 손해보는 일을 합니까? 왜 그런 염려로 인생을 소진하며 삽니까? 그렇다고 염려를 안 할 수도 없고, 일일이 다 하자니 너무 힘들고, 그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까?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개인에게는 전담경호원을 붙이던가 시설물에 대해서는 안전관리를 책임지는 전문업체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 전문업체에 맡기고 편하게 지내야지 각 개인이나 회사나 기관이 모두 직접 안전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장 완벽한 안전관리자는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모든 안전을 위한 염려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건 돈도 한 푼 안 듭니다. 그 어떤 장비나 시설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계약기간이 무제한입니다. 생명과 행복이 영원히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매일 주어지는 오늘 하루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내일의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4:6-7에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게 좋아도 우리의 삶의 안전을 위한 완벽한 예상과 대비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절대 안전"이라는 것은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 그 어떤 천재적 범죄자의 의도나 계획까지도 꿰뚫어 보시며 그 어떤 천재지변도 다 그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벧전5:7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각자의 장래를 위한 개개인의 당연한 책임으로서의 준비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염려하는 것을 문제삼으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하실 부분을 스스로 하겠다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차지하실 여지를 내드리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하지만 자기의 앞날에 대비할 줄 아는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하지 말고 놀고먹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의 새를 예를 들어 말씀하셨지만 공중의 새가 먹이를 찾느라고 얼마나 열심히 날아다니며 살피는지 모릅니다. 들의 백합화를 또한 예로 드셨지만 꽃이나 나무들도 열심히 일합니다. 나무나 꽃들 보면 늘 햇볓을 따라 움직입니다. 열심히 햇볓을 받아서 탄소동화작용을 해서는 자라기도 하고 꽃도 피우고 열매를 맺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가 자기들의 노력으로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말씀 속에 모든 피조물들이 각각 힘써 일을 해도 그 결실을 얻는 것은 피조물 각자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것에 응답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돌보심의 결과라는 진리가 담겨져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면서도 우리 각자에게는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아니 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다른 염려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4:6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하면서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하는가 하면, 이어서 8-9절에서는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권면하기를 잊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벧전5:7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한 후 이어서 8-9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순종하고 만사를 그의 손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일 우리를 데려가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가 아무리 염려를 해도 부르심을 받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10년 후에나 우리를 불러가려 하신다면 아무리 염려하지 않고 잠들어도 내일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하루로 만족하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성실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족한 하루를 갖는 것은 족한 영원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으면서 내일 일을 잘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33절의 권면, 즉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오늘, 내일이 아닌 오늘, 성실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 말씀에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 것은 단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등 모든 것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오늘도 내일도 언제라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뜻으로 확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가르치셨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오늘 족한 하루를 사는 것이 내일을 염려하지 않으면서도 잘 준비하는 길입니다. 예레미아 애가 3장 22-26절의 말씀을 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주의 성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은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마다 새롭고" "무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잠잠히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시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즉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빼앗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서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그의 공의와 사랑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죄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일들을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주신 세월을 세상적 염려로 낭비하며 사는 불충의 삶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우리를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이끄는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가리키듯 이에 앞선 모든 말씀에 근거한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앞서는 말씀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앞서는 모든 말씀이 도달하는 그 정점은 다름 아닌 오늘 본문 직전의 말씀인 33절의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인 것입니다.
모든 것에 앞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의 주권자이시고 자신의 아버지이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심과 사랑과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그의 자녀들을 돌보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되는 사람입니다. 매일 매일 그 날을 주 안에서 충성되게 살고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족한 하루가 매일 매일 계속됨으로써 일생 복된 삶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내일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매일 매일 하루를 족하게 삶으로써 영원히 복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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