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따르려면
요한복음 21:15~23
우리는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신 부활 후 첫 주일을 맞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슬퍼하는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기쁨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용기를 주셨습니다. 의심하는 도마를 찾아오셔서 확신을 주셨습니다. 실패를 거듭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미리 준비하셨던 조반을 함께 나누시고 베드로를 따로 불러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사랑을 다짐하신 후,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귀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는데,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릴 것인데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해석을 붙인 것처럼 이 말씀은 장차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그러니까 주님과 만찬을 나눌 때 예수님의 품에 기대고 식사하던 사도 요한을 보면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3년 전입니다. 동생 안드레와 같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때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너는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시몬과 안드레가 그들이 타고 다니던 배와 사용하던 그물을 그냥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 후에도 예수님께서는 종종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번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을 향하여 물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그때 제자들은 "어떤 사람은 주님을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도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계시던 주님께서는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만,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그때 본래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얼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만족해 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이 장차 어떻게 고난받으실지에 대해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는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되십니다" 하면서 주님이 고난받으실 것을 만류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단호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생각을 좇는도다"라고 하시면서 둘러서 있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밖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종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7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6절에 보면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가장 자주 하신 말씀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주님이 과연 어떤 지도자시고 어떤 구주신가,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떤 선생님들처럼 "이 길은 옳은 길이고 저 길은 그른 길이다. 그러니까 그른 길은 버리고 옳은 길을 가라"고 단순히 옳은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그런 선생이 아니십니다.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제자들에게 선과 악을 가르치는 선생만은 아닙니다.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앉아서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고 주님 자신이 먼저 앞서 가시면서 "내가 먼저 이 길을 가니, 이 길은 옳은 길이니,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통 지도자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선구자시고, 개척자시고, 실제적인 지도자이십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오셔서 사람 몸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 천한 곳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세상에 나시자마자 애굽으로 피난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동 지역은 평안한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요사이도 피난민의 모습을 보면 비참한데, 2천년 전 피난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우리는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갓난아기 때 피난민 속에 끼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습니다. 어려서는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목수생활을 하면서 가난하게 지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의 가난을 몸소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여러 사람들과 같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전도하러 나서시기 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심으로 굶주림의 괴로움이 어떻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더구나 너무너무 배가 고프실 때 마귀의 시험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방으로 다니시며 피곤한 몸을 쉬실 만한 겨를도 없이 전도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식사할 시간도 없으셨습니다. 주린 사람이 있으면 먹여주셨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에겐 위로해주셨습니다. 병든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한 번도 그냥 돌려보내신 적이 없으십니다. 다 고쳐주셨습니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낫게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도하실 때를 보면, 그를 시험하는 사람들이 졸졸 쫓아다니면서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그들에게 중상과 모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결국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가룟 유다에게 배반당하시고 고난 당하셨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수님도 12명 중에 한 명이 배반했는데 목사야 말해 뭐하겠냐"고 하면서, 열둘의 하나는 배반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목회하면 속이 편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 늦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연상합니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가시던 주님, 지쳐서 쓰러지고 쓰러지면 로마 군인들은 채찍으로 내려 갈기고, 맞으신 데는 피가 나서 흐르던 주님의 그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고 아픕니다. 예수님은 악한 무리에 의해 십자가 위에 못박히시고 보배 피를 흘리시고 사망의 고통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죽어 장사지내게 되고 무덤에 묻히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장사지낸 지 사흘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생의 쓴 길, 단 길, 모든 길을 다 걸었다. 내가 친히 맛보았은즉 너희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 자신이 친히 가보신 길, 주님이 친히 승리하신 길, 주님이 앞서가시면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이것이 진리의 길, 이것이 승리의 길, 이것이 영생의 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따르라."
그러면 "따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시몬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를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고기잡이하던 배를 버렸습니다. 고기 잡던 그물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갈리리 바다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있던 곳을 떠나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엘리사가 소 열두 겨리로 밭을 갈다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부름을 받을 때 소 열 겨리는 내버리고 한 겨리는 잡아서 연장을 불살라서 고기를 구어 다른 사람들과 나눠먹고 그것을 떠나 엘리야를 따라나섰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기 위해서 그가 있던 곳을 떠났습니다.
룻이란 여자는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갈 때, 그녀의 고향인 모압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00여 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민족의 지도자요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을 가기 위해 애굽을 떠났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대아 우르,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대로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이 지시하신다는 약속만 믿고 미련 없이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우선 내가 전에 있던 곳에서 떠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전에는 죄악의 자리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첫 걸음입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떠나야 합니다. 악한 언행에서 떠나야 합니다. 나쁜 습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친구도 떠나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지장이 되는 취미나 오락도 떠나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첫 걸음입니다. 떠나는 것을 성별(聖別)이라고 합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갈라서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먼저 있던 곳에서 떠나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무언가 다른 데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따르는 사람은 같이 갑니다. 따르는 사람은 같이 삽니다. 같이 고통하고, 같이 기뻐합니다. 주님이 가시면 나도 같이 가고, 주님이 서시면 나도 서고, 주님께서 산을 넘으시면 우리도 따라 넘고, 주님께서 물을 건너시면 나도 주와 함께 물을 건너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을 보세요. 나오미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에 가서 살면서 거기서 아들들이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아들 없는 며느리와 같이 있는 것이 거북하고, 며느리가 젊은데 저들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너희는 나를 떠나라. 그리고 새 가정을 이루어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아니하고 끝까지 시어머니 가시는 대로 따라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성경 룻기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오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니이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의 마음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도 그의 선생 엘리야를 따를 때 그렇게 따랐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 때 엘리사더러 "너는 여기 머물러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도 "저는 선생님 가시는 곳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면서 엘리야를 따라나섰습니다. 엘리야가 길갈이란 곳에 가니까 엘리사도 거기까지 따라갔습니다. 여리고로 가니까 거기까지 따라갔습니다. 엘리야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엘리사도 따라갔습니다. 그 결과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엘리사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엘리사는 주저하지 아니하고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능력의 갑절을 받기 원합니다" 했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하면서 그의 입던 겉옷을 엘리사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렇게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을 따라 가버나움에도 같이 갔습니다. 여리고에도 따라갔습니다. 나사렛에도 따라갔습니다. 예루살렘에도 같이 따라 입성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도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비록 멀리서지만, 골고다까지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같이 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집에 있을 때도 주님과 함께 있고, 직장에서 일할 때도 주님과 함께 일하고,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주님과 함께 하고, 저녁에 잠잘 때도 주님과 함께 자는 생활을 합니까?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르면서 시어머니에게서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나오미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본래 룻은 모압 지방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를 시어머니로 모시고 따르면서, 룻은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을 같이 믿게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나오미가 하는 일을 배웠습니다.
엘리사가 그의 스승 엘리야를 따르게 된 것도 그렇습니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엘리야의 열심을 배웠습니다. 엘리야의 온전한 헌신을 배웠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것은 스승의 모든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스승이 누군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술에서도 어느 분의 사사를 받았는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스승의 영향이 제자에게 크기 때문입니다. 가령 피아노를 치는 학생이 실기 시험을 볼 때 심사하는 교수들이 휘장 뒤에서 피아노 소리만 듣는데, 그 소리만 들어도 '아, 이 학생은 어느 교수님의 사사를 받았구나' 하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피아노 치는 기법이 선생님에게서 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이 예수님을 그저 따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상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졌던 요한, 신경질적이었고 폭탄 같은 성격의 소유자 요한이 예수님을 배워서 나중에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 이후에 예루살렘 공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데려다가 공갈을 하고 협박을 하면서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당신들이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렇게 담대해질 수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공회원들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책망하고 내보내면서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 "아, 이 사람들이 본래는 무식한 사람들이었는데 어디서 이런 지혜와 담력을 배우게 되었을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지혜와 예수님의 용기, 겸손과 담력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끝으로,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과 함께 일합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처럼 일합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르면서 함께 일했습니다. 바느질도 같이 했습니다. 밭에 나가서 이삭도 함께 주웠습니다. 타작도 같이 했습니다. 밥도 같이 지었습니다. 떡도 같이 만들었습니다. 언제나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같이 일했습니다.
엘리사도 엘리야 선생님과 함께 일했습니다. 선생님이 시키시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순종해서 일했습니다. 이것이 스승을 따르는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일했습니다. 벳새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과 생선 두 마리로 큰 이적을 행해서 5천명이 넘는 사람이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게 되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일할 때 기적이 일어나고 감격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세 가지입니다.
말씀 전하는 전도사업, 가르치는 교육사업, 불쌍한 사람을 돌보는 봉사사업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 된 우리도 그 사업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의 믿지 않는 이웃을 주님께 초청하는 잔치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수고하셔서 많은 분을 모시고 오셨습니다. 오늘은 불쌍한 사람을 위해 우리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작년에는 우리의 피를 나눠주는 헌혈을 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안구를 앞을 보지 못하는 이웃을 위해 기증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지금 내놓는 것이 아니고 우리 평생 쓸 만큼 다 쓰다가 눈을 감게 될 때, 더 이상 쓸 수 없게 될 때, 안구를 기증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단, 주님과 함께 일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 아닌 나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 보려 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일에 태만하고 있는 사람이 대개 남의 일에 흥미를 느낍니다." 다른 사람 상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이 말씀을 순종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 하나 하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21:15~23
우리는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신 부활 후 첫 주일을 맞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슬퍼하는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기쁨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용기를 주셨습니다. 의심하는 도마를 찾아오셔서 확신을 주셨습니다. 실패를 거듭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미리 준비하셨던 조반을 함께 나누시고 베드로를 따로 불러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사랑을 다짐하신 후,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귀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는데,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릴 것인데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해석을 붙인 것처럼 이 말씀은 장차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그러니까 주님과 만찬을 나눌 때 예수님의 품에 기대고 식사하던 사도 요한을 보면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3년 전입니다. 동생 안드레와 같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때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너는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시몬과 안드레가 그들이 타고 다니던 배와 사용하던 그물을 그냥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 후에도 예수님께서는 종종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번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을 향하여 물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그때 제자들은 "어떤 사람은 주님을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도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계시던 주님께서는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만,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그때 본래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얼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만족해 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이 장차 어떻게 고난받으실지에 대해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는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되십니다" 하면서 주님이 고난받으실 것을 만류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단호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생각을 좇는도다"라고 하시면서 둘러서 있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밖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종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7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6절에 보면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가장 자주 하신 말씀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주님이 과연 어떤 지도자시고 어떤 구주신가,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떤 선생님들처럼 "이 길은 옳은 길이고 저 길은 그른 길이다. 그러니까 그른 길은 버리고 옳은 길을 가라"고 단순히 옳은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그런 선생이 아니십니다.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제자들에게 선과 악을 가르치는 선생만은 아닙니다.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앉아서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고 주님 자신이 먼저 앞서 가시면서 "내가 먼저 이 길을 가니, 이 길은 옳은 길이니,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통 지도자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선구자시고, 개척자시고, 실제적인 지도자이십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오셔서 사람 몸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 천한 곳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세상에 나시자마자 애굽으로 피난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동 지역은 평안한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요사이도 피난민의 모습을 보면 비참한데, 2천년 전 피난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우리는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갓난아기 때 피난민 속에 끼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습니다. 어려서는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목수생활을 하면서 가난하게 지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의 가난을 몸소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여러 사람들과 같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전도하러 나서시기 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심으로 굶주림의 괴로움이 어떻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더구나 너무너무 배가 고프실 때 마귀의 시험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방으로 다니시며 피곤한 몸을 쉬실 만한 겨를도 없이 전도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식사할 시간도 없으셨습니다. 주린 사람이 있으면 먹여주셨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에겐 위로해주셨습니다. 병든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한 번도 그냥 돌려보내신 적이 없으십니다. 다 고쳐주셨습니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낫게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도하실 때를 보면, 그를 시험하는 사람들이 졸졸 쫓아다니면서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그들에게 중상과 모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결국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가룟 유다에게 배반당하시고 고난 당하셨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수님도 12명 중에 한 명이 배반했는데 목사야 말해 뭐하겠냐"고 하면서, 열둘의 하나는 배반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목회하면 속이 편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 늦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연상합니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가시던 주님, 지쳐서 쓰러지고 쓰러지면 로마 군인들은 채찍으로 내려 갈기고, 맞으신 데는 피가 나서 흐르던 주님의 그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고 아픕니다. 예수님은 악한 무리에 의해 십자가 위에 못박히시고 보배 피를 흘리시고 사망의 고통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죽어 장사지내게 되고 무덤에 묻히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장사지낸 지 사흘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생의 쓴 길, 단 길, 모든 길을 다 걸었다. 내가 친히 맛보았은즉 너희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 자신이 친히 가보신 길, 주님이 친히 승리하신 길, 주님이 앞서가시면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이것이 진리의 길, 이것이 승리의 길, 이것이 영생의 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따르라."
그러면 "따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시몬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를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고기잡이하던 배를 버렸습니다. 고기 잡던 그물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갈리리 바다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있던 곳을 떠나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엘리사가 소 열두 겨리로 밭을 갈다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부름을 받을 때 소 열 겨리는 내버리고 한 겨리는 잡아서 연장을 불살라서 고기를 구어 다른 사람들과 나눠먹고 그것을 떠나 엘리야를 따라나섰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기 위해서 그가 있던 곳을 떠났습니다.
룻이란 여자는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갈 때, 그녀의 고향인 모압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00여 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민족의 지도자요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을 가기 위해 애굽을 떠났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대아 우르,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대로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이 지시하신다는 약속만 믿고 미련 없이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우선 내가 전에 있던 곳에서 떠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전에는 죄악의 자리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첫 걸음입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떠나야 합니다. 악한 언행에서 떠나야 합니다. 나쁜 습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친구도 떠나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지장이 되는 취미나 오락도 떠나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첫 걸음입니다. 떠나는 것을 성별(聖別)이라고 합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갈라서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먼저 있던 곳에서 떠나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무언가 다른 데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따르는 사람은 같이 갑니다. 따르는 사람은 같이 삽니다. 같이 고통하고, 같이 기뻐합니다. 주님이 가시면 나도 같이 가고, 주님이 서시면 나도 서고, 주님께서 산을 넘으시면 우리도 따라 넘고, 주님께서 물을 건너시면 나도 주와 함께 물을 건너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을 보세요. 나오미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에 가서 살면서 거기서 아들들이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아들 없는 며느리와 같이 있는 것이 거북하고, 며느리가 젊은데 저들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너희는 나를 떠나라. 그리고 새 가정을 이루어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아니하고 끝까지 시어머니 가시는 대로 따라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성경 룻기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오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니이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의 마음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도 그의 선생 엘리야를 따를 때 그렇게 따랐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 때 엘리사더러 "너는 여기 머물러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도 "저는 선생님 가시는 곳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면서 엘리야를 따라나섰습니다. 엘리야가 길갈이란 곳에 가니까 엘리사도 거기까지 따라갔습니다. 여리고로 가니까 거기까지 따라갔습니다. 엘리야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엘리사도 따라갔습니다. 그 결과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엘리사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엘리사는 주저하지 아니하고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능력의 갑절을 받기 원합니다" 했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하면서 그의 입던 겉옷을 엘리사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렇게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을 따라 가버나움에도 같이 갔습니다. 여리고에도 따라갔습니다. 나사렛에도 따라갔습니다. 예루살렘에도 같이 따라 입성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도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비록 멀리서지만, 골고다까지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같이 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집에 있을 때도 주님과 함께 있고, 직장에서 일할 때도 주님과 함께 일하고,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주님과 함께 하고, 저녁에 잠잘 때도 주님과 함께 자는 생활을 합니까?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르면서 시어머니에게서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나오미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본래 룻은 모압 지방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를 시어머니로 모시고 따르면서, 룻은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을 같이 믿게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나오미가 하는 일을 배웠습니다.
엘리사가 그의 스승 엘리야를 따르게 된 것도 그렇습니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엘리야의 열심을 배웠습니다. 엘리야의 온전한 헌신을 배웠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것은 스승의 모든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스승이 누군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술에서도 어느 분의 사사를 받았는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스승의 영향이 제자에게 크기 때문입니다. 가령 피아노를 치는 학생이 실기 시험을 볼 때 심사하는 교수들이 휘장 뒤에서 피아노 소리만 듣는데, 그 소리만 들어도 '아, 이 학생은 어느 교수님의 사사를 받았구나' 하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피아노 치는 기법이 선생님에게서 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이 예수님을 그저 따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상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졌던 요한, 신경질적이었고 폭탄 같은 성격의 소유자 요한이 예수님을 배워서 나중에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 이후에 예루살렘 공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데려다가 공갈을 하고 협박을 하면서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당신들이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렇게 담대해질 수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공회원들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책망하고 내보내면서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 "아, 이 사람들이 본래는 무식한 사람들이었는데 어디서 이런 지혜와 담력을 배우게 되었을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지혜와 예수님의 용기, 겸손과 담력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끝으로,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과 함께 일합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처럼 일합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르면서 함께 일했습니다. 바느질도 같이 했습니다. 밭에 나가서 이삭도 함께 주웠습니다. 타작도 같이 했습니다. 밥도 같이 지었습니다. 떡도 같이 만들었습니다. 언제나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같이 일했습니다.
엘리사도 엘리야 선생님과 함께 일했습니다. 선생님이 시키시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순종해서 일했습니다. 이것이 스승을 따르는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일했습니다. 벳새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과 생선 두 마리로 큰 이적을 행해서 5천명이 넘는 사람이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게 되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일할 때 기적이 일어나고 감격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세 가지입니다.
말씀 전하는 전도사업, 가르치는 교육사업, 불쌍한 사람을 돌보는 봉사사업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 된 우리도 그 사업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의 믿지 않는 이웃을 주님께 초청하는 잔치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수고하셔서 많은 분을 모시고 오셨습니다. 오늘은 불쌍한 사람을 위해 우리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작년에는 우리의 피를 나눠주는 헌혈을 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안구를 앞을 보지 못하는 이웃을 위해 기증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지금 내놓는 것이 아니고 우리 평생 쓸 만큼 다 쓰다가 눈을 감게 될 때, 더 이상 쓸 수 없게 될 때, 안구를 기증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단, 주님과 함께 일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 아닌 나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 보려 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일에 태만하고 있는 사람이 대개 남의 일에 흥미를 느낍니다." 다른 사람 상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이 말씀을 순종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 하나 하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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