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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구할 것이요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6 : 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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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일부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화폐도안 변경 범국민협의회'가 정식으로 발족되었습니다. 이미 지난 2월달, `현재의 화폐 도안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바 있었던 이 단체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 나라 각종 지폐와 동전에 새겨진 그림이 불교의 상징물들이므로, 종교의 자유가 있는 우리 나라에서 이와 같은 종교적 편향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1만원권의 경우, 다섯 마리의 용과 여섯 송이의 연꽃이 부처를 상징, 불심을 유도하고 있으며, 지폐 가장자리의 문양 역시 사찰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오천원권의 봉황, 5백원짜리 동전의 학, 10원짜리 동전의 다보탑도 모두 불교의 상징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불교에 편항되어 있는 화폐 도안을 관계당국이 변경하도록 1천만명 서명운동과, 전국 시 군별 설명회 및 기도회를 전개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난 4월 초파일, 김영삼 대통령 명의의 연등이 조계사에 걸렸다해서, 아무리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교회 장로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며 교계로부터 대통령을 비난하는 소리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보도들은 참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어느 나라든 자기 나라 문화 유적 역사적 인물을 자기 나라 화폐도안의 기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나라라고 해서 예외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는 거의 불교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만약 우리 나라 화폐에 불교와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도안이 있다면, 그것은 도안자들이 불교를 선전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우리 역사와 문화의 자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우리 나라가 구라파처럼 오랫동안 기독교 국가로 존재해 왔었다면, 우리 화폐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문화와 유적이 도안으로 이용되고 있을 것입니다.
김영삼 현 대통령께서는 분명 교회의 장로님이십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대통령의 잘못을 그냥 덮어두는 것은 대통령을 위한 일도, 나라를 위하는 일도 아닙니다. 비판할 것은 얼마든지 비판하고 또 보다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분이 교회 장로님이라고 해서 기독교인만의 대통령인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입니다. 말하자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위해 봉사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지닌 분입니다. 그렇다면 불교 신자들에게 최대의 경축일인 초파일에 불교인의 대통령이기도 한 대통령이, 대통령의 이름으로 연등을 걸어 축하해 주는 것은, 공인으로써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사실이 이처럼 명약관화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시빗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을 시비 삼아 1천만명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전국적으로 기도회를 개최하며, 반대성명과 사설을 게재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 그 이유를 알려면, 그 사람의 기도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병 낫기를 위해 예수님을 믿는 자의 기도는 언제나 그 핵심이 건강에 있습니다. 자기 가족과 사업을 위해 예수를 믿는 자의 기도는 자기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한사람의 신앙의 수준은, 그 사람의 기도의 내용을 너머 서지 못합니다. 이기적인 내용의 기도만 드리는 자가, 이타적인 삶을 헌신적으로 살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자기 관심이 쏠리는 것만을 위해 기도하고 그 기도의 테두리 내에서만 행동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매일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기도가 자기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이기적인 기도로만 일관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진짜 이유요, 여러분은 화폐도안이나 대통령 명의의 연등을 시비 삼는 이기적인 발상의 소유자들과 실은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런 기도생활, 신앙생활로는 이 세상을 밝히고 살리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의 기도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처럼.
돕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처럼.
주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처럼.
봉사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처럼.
구원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처럼.
주님과 함께 있게 해 주십시오. 스물 네시간 동안.
주님께 도달하게 해 주십시오. 끝까지 낮아지신 고통의 인간-주님의 모습을
되새기면서.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의 내용을 통해, 이 기도를 드린 분이 왜 주님을 믿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원자로 믿고, 오직 주님을 본받아 살기 위해 주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내용의 기도를 드리는 자가, 이처럼 자기를 뛰어 너머 모든 이의 행복을 위해 기도 드리는 자가, 오직 이기심에 사로잡혀 시비 아닌 것을 시비 삼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로 이 기도를 드린 테레사 수녀는,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이므로 나는 인도인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인도화폐에 힌두교의 문양과 상징이 들어 있다고 해서 인도 화폐를 부정하거나 문제시한 적도 없습니다. 이방종교의 나라 인도의 한가운데에서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라면, 국적과 종교, 종파와 사상을 묻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며 헌신을 다해 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인도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밝히고 맑히는 빛과 소금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느냐 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 삶의 질과 가치를 결정하기에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과 가지신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기도에 대해 네번씩이나 언급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25)
여기에서 비사란 비유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쉽게 가르치기 위해 많은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이 땅에 오실 성령님께서 더 이상 비유로 말씀치 않고 모든 것을 영적으로 능히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실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계속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26)
이제껏 까지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해 주었지만, 앞으로는 너희가 직접 하나님께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구약에서부터 계속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 역시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태여 기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책임져 주실 터인데, 기도해야 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이제부터는 너희가 직접 기도하라 명령하고 계십니까?
그 해답을 주님께서 이렇게 밝히십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27)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기도 드려야 할 이유는 더 이상 먹고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기도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 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기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 위함 입니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하고 바른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키 위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28)
주님은 그 근원도 목적지도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 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철저하게 아버지 말씀을 위해 기도하셨고, 아버지의 말씀과 사랑과 생명을 위한 삶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우리의 근원과 목적지 또한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아버지의 뜻을 위해 기도하고 아버지의 그 사랑과 생명의 도구가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삶은 기도의 수준을 너머 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86년 영락교회 전도사 시절, 당시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썼던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버려도 전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낡고 찌그러진 아빠의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하고 슬프기만 했습니다. 내가 이런 비참한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빠가 실직한 이후부터 였습니다. 아빠의 실직 이유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아빠는 그 일로 몹시 괴로워 하셨습니다. 가끔 주무시다가도, 몸을 부르르 떠시던 모습은, 마치 활동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실직하신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아빠는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새로이 입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전 회사와는 전혀 다른 업종의 회사였는지라, 아빠에게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었나 봅니다. 입사하신 지 1개월이 조금 지나, 아빠는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출장근무를 자원하셨고, 회사의 허락을 받은 아버지는 그 후, 늘 출장만 다니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3∼4일 씩이었던 출장이 조금 지나서는 1∼2주씩으로 늘어났고, 요즈음에 와서는 한 달에 한번씩만 겨우 집에 들어오십니다. 아빠가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아빠의 구두는 검정색인지 황토색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아빠는,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거의 매일을 걸어다니심이 분명했습니다. 그나마 그 구두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본래 낡았던 구두가 어느 샌가 뒷굽도 다 닳고, 앞으로는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빠는 그 낡은 구두를 몇 번이나 수선했지만, 끝내 더 이상 수선조차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아빠는 가장 값싼 운동화를 사 신으셨습니다. 우리 남매를 키우시느라, 구두를 살 형편이 되지못했던 것입니다. 그 운동화 역시 한번 출장을 다녀오시자 금방 낡은 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빠의 그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아빠 생신 때에는 반드시 구두를 선물해 드리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용돈을 따로 받아 모을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학교 오갈 때 버스 타는 대신 걸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금새 2천원이 모였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소복이 쌓인 은행잎들을 밟으며, 중앙청 앞길을 걸어 집으로 향해가던 중, 저 앞에 웬 키 작은 남학생 한 명이 낙엽을 터벅터벅 밟으며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바로 중학교 1학년인 남동생이었습니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동생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습니다.
"너 왜 자꾸 누나 말 않듣니? 넌 아직 어려서 걸어다니면 피곤해서 성적 떨어지니까 반드시 버스 타고 다니라고 했잖니!"
동생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럼 난 아빠 구두 값을 어떻게 모으란 말이야?"
나는 동생에게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누나가 다 모을 테니까 넌 걱정하지 말라고 누나가 몇 번이나 말했니?"
갑자기 동생이 표정을 바꾸면서 물었습니다.
"누나, 누난 얼마나 모았어?"
7천 5백원이란 나의 대답을 들은 동생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모은 것과 합치면 웬만한 구두 살 수 있겠다. 누나! 나 그 동안 2천원 모았어. 나 잘했지?"
나는 동생이 너무 대견스러워 하마터면 대로변에서 울음을 터트릴 뻔했습니다. 그 다음 토요일, 동생과 나는 남대문 시장에서 만원 짜리 구두를 샀습니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한 다음 몇 일 남지 않은 아빠의 생신일을 기다렸습니다. 아빠가 그날만큼은 꼭 집에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마침내 아빠의 생신일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먼저 온 동생이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너 왜 그러니? 어디 아프니?"
"아빠가 오늘 못 오신데, 그러니까 구두를 드릴 수도 없잖아!"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 낡아빠진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지금도 어느 도시 어느 길 위엔가를 걷고 계실 아빠를 생각하자, 어느새 내 눈에도 뜨거운 이슬이 한 방울씩 맺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쉬움의 눈물이었을 뿐,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빠께 드릴 새 구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아름다운 염원을 가질 때 중1, 중3 밖에 안된 나 어린 아이들의 삶이 이토록 아름답게 엮어집니다. 하물며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진정 믿는다면 우리가 이 어린 남매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오늘부터 우리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변해야만 합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기원>
박 두 진
정직한 미움을 말하되
거짓된 분노를 말하지 않게 하소서
참된 분노를 말하되
헛된 인내를 말하지 않게 하소서
솔직한 항거를 말하되
비굴한 복종을 말하지 않게 하소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이기보다는
만년을 그냥 있는 의연한 바위로
고여서 오래 썩는 못물보다는
광란의 밀어 치는 노도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 되게
당신의 피흘림이 우리의 피흘림 되게
당신의 찢어짐이 우리의 찢어짐 되게
당신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
당신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되게 하소서
일체 잠든 우리의 양심에
활활 불을 당겨 주옵소서
일체 죽은 우리의 영혼 위에
주님의 사랑을 뜨겁게 불질러 주옵소서
사랑의 주님! 이 시간 이후로 우리의 기도가 본질적으로 새로와지게 하옵소서. 우리 기도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날로 더해지게 하옵소서. 우리 기도가 변화되는 만큼만 우리의 삶이 성숙됨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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