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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प्रवचन पूरा

차든지 뜨겁든지

by 【고동엽】 2021. 12. 16.

계3:14~22

우리 한국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중 한 가지는 ‘병원 가는 것’입니다.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웬만큼 아프지 않으면 잘 안 갑니다. 참기 어려울 정도가 돼야 겨우 갑니다. 그러다 보니까 병을 키우고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왕왕 생깁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건강을 위해 미리 기도하고, 미리 건강 진단을 받습니다. 혹시 병이 생겨도 적절한 처방과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건강도 잘 관리할 수 있고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 미리미리 진단하고 치유해서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영적 상태 진단과 치유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나와 있지만, 특히 요한계시록 2장~3장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거기 보면 주후 1세기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가 나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당시 교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일곱(7)은 완전수입니다. 꼭 카운트해서 7만 의미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대표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당시에 실재하던 일곱 교회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대표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말씀은 오늘 이 사대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 내용이 칭찬과 격려, 그리고 책망과 권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면 영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고, 혹 문제가 있으면 치유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는 편지’입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통해 오늘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영적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열심이 식어진 것’입니다. 식어진 가슴! 그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요 우리교회의 문제요, 저와 여러분의 문제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상고하면서 각자 영적 상태를 진단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혹시 나 자신에게도 이런 문제가 있다면 회개하고, 다시금 신앙의 열심을 회복하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1] 라오디게아 교회의 배경 : 물질의 풍요와 육신의 향락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現 터키)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現 에스키힛살 Eskihissar)
1세기 당시 라오디게아는 교통의 요지요, 상공업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금융업, 양모업, 의약업 등 3대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7 km 지점에 히에라볼리(Hielapolis)라는 온천지대가 있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 온천수는 아주 뜨거운데,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까지 7 km 오는 동안 식어져서 미지근해졌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들인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됩니다.
  라오디게아는 아주 풍요로운 곳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보면 육신의 향락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곳도 그랬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 안타깝게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는 아주 풍요롭고 평안했지만, 영적으로는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병들어 있었습니다.  
[2]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책망 : 차든지 뜨겁든지
  생각할수록 안타까운데, 인간이 참 이상합니다. 풍요롭고 평안해지면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고 더욱 겸손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거꾸로 교만해지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 영국의 평론가·역사학자)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역경을 견뎌 내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번영을 견뎌내는 사람은 한 명에 불과하다.” 정말 이 말처럼 개인을 봐도 그렇고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 중에 신앙을 잘 지키다가도 풍요로워지고 번영하게 되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여러분, 유럽의 역사가 바로 그 증거 아닙니까? 과거 유럽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까? 그 거대한 교회당들이 다 그때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교회당들이 텅텅 비고 관광명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온 땅이 이슬람교도들에게 정복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갈수록 우리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① 영적 상태 진단 : 미지근한 신앙
  예수님은 신적인 통찰력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십니다.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뜨겁지도) 않은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 15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 ” 16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 ” 마치 라오디게아의 ‘식어진 온천수’와 같은 상태입니다. 여기서 차갑다는 것은 아예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불신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뜨겁다는 것은 예수님을 철저히 믿는, 정체성이 분명한 신앙 상태를 가리킵니다. 불행하게도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겉으로는 믿는 신자 같은데, 실제로는 불신자 같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i) 명목상의 신앙  
  이런 신자들을 가리켜 흔히 ‘명목상의 교인’(Nominal Christian)이라 부릅니다. 이런 유의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향락도 좋고,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가면 좋다는 식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 하느니라”
ii) 영적 무지와 교만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전혀 모르고 오히려 자기는 신앙생활을 꽤나 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영적 교만과 무지입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도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실상은 영적으로 피폐해져 있고 엉망인데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영적 소경’이라고 말씀합니다. 요9:41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하신 말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사도 바울도 이런 유의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6: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롬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② 책망과 경고 :
  이런 사람들은 참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15절(하). “ ...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절(하). “ ...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물은 밍밍해서 뱉어버리게 되는 것처럼 버림을 받게 된다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3]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권면 : 회개와 열심의 촉구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예수님은 그들은 완전히 버리지 않습니다. 이런 한심한 상태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라도 그들을 향해 애정 어린 권면의 말씀을 주십니다.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여기서 열심이란 말은 헬라어 ‘제스토스’(ζεστοs ‘뜨거운’)에서 유래합니다. 즉, 회개하고 뜨거운 신앙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열심 있는 뜨거운 신앙은 두 가지를 내포합니다.  
  ① 분명한 신앙의 확립 : 금, 흰옷, 안약을 살 것
  세상에 살면서 신앙의 분명한 정체성을 나타내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성도로서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라는 뜻입니다.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교만하게 만든 3대 산업을 염두에 둔 풍자적 표현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돈이 많으니까 영혼도 풍요로운 줄 아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가난뱅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불로 연단한 금’ 즉 온전한 신앙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게 진짜 부요함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도 보면 부유해서 남 보기 번듯해 보이지만 영적으로 곤고하고 공허한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흰옷’은 비싼 양털 옷을 입고 뽐내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얻은 의의 옷(칭의)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영적으로 벌거벗은 겁니다. 그런 상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안약’은 라오디게아에 의과대학이 있고 거기서 조제하는 안약이 아주 좋았다고 하는데, 이것을 풍자한 표현입니다. 육안이 아무리 밝아도 믿음이 없으면 영적 소경입니다. 그런고로 예수 믿고 영적인 눈을 뜨라는 겁니다. 그리고 영적인 진리를 깨닫고, 천국을 바라보며 살라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에 천만 명 내외의 많은 성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분명한 신앙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게 문제입니다. 교회당에 들락날락거렸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비극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면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결단하고 예수를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교양이 아닙니다. 설교는 교양강좌가 아닙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축복이냐 저주냐를 갈라놓는 기준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란 타이틀은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신을 섬기고 세상 욕심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 백성들을 불러놓고 신앙결단을 촉구합니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이도저도 아닌 양다리 걸치기는 절대 안 된다는 겁니다.
  남북전쟁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군과 북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하니까 어떤 꾀바른 사람이 그 사이에서 살아남으려고 머리를 썼습니다. 상의는 북군 복장, 하의는 남군 복장을 입었습니다. 요리저리 피해 다닐 줄 알았는데, 양편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양 다리 걸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망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늘 걱정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교회 교인들 중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겁니다. 여기저기 다니며 설교하는데, 혹시 내 설교를 듣고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겁니다. 제발 그 걱정이 기우에 그치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예수 십자가 복음 진리를 분명하게 믿으셔서 하나님의 참 백성 되어 이 세상 살 동안 참 복을 누리시고, 이 세상 떠날 때 천국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 열심을 낼 것 :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것  
  예수님이 열심을 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무조건 열심이 아닙니다. 아무 열심이 아닙니다. 세상에도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열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매니아’(mania)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광’(狂)이란 뜻입니다. 영화광, 게임광, 독서광, 바둑광, ... ‘~광’이란 말 앞에 있는 게 좋으면 아주 좋은 겁니다. 반면에 좋지 않은 말이면 큰일 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열심을 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매니아’(Jesus Mania), ‘예수광’이 되라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너무 교회에 깊이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나쁜 데 빠져서 그러지 좋은 데는 푹 빠져야 합니다. 수영할 때 물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평생 수영을 못합니다. 신앙 생활 잘 하시려면 예수에 확 빠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에 빠지는 게 과연 무엇일까요?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서 문은 마음 문을 가리킵니다.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늘 교제하고 동행하며 살라는 겁니다. 이게 예수 매니아입니다.
  윌리엄 홀만 헌트 (William Holman Hunt, 1827- 1910)의 성화 『세상의 빛』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분들이 한번쯤 보셨을 겁니다. 예수님이 문밖에서 등불을 들고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주변에 담쟁이덩굴과 잡초들이 무성합니다. 인간의 마음의 완악함고 죄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그림에는 문고리가 없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강제로 요구하지 않으므로 나 자신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셔야 한다는 겁니다. 나 자신이 예수님께 다가가고, 예수님을 따르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열심을 가리켜 예수님에게 붙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15:4~5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가지인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열심은 포도나무 예수님에게 꽉 붙어있는 겁니다. 그러면 승리합니다.
  이를 위해 말씀 묵상의 열심을 내야 합니다. 시1:2~3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열심이 있으면 날마다 열매를 맺는 풍성한 삶을 사는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한번은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마포에 성인대상 학력인정 초등학교가 있는데, 입학생 중에 88세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 연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게 특이해서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초등학교 입학했는지 물었더니 그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글을 배워서 성경 읽으려고 입학한 겁니다.” 설교를 들을 수 있지만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그 고령에 초등학교 입학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열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의 열심을 내야 합니다. 시81:10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부르짖어 열심히 기도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소곤거리는 식으로 기도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소리치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열심이 있어야 됩니다. 눅22:44 보면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셨으면 땀이 피방울이 됩니까? 그런 열심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참존 화장품 회장 김광석 장로님의 간증을 언젠가 소개해드린 적이 있는데, 그분의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의 비경에는 그분의 기도 생활이 깔려 있습니다. 그렇게 분주하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그는 날마다 새벽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새벽기도회 설교를 메모해서 그 노트를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열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사에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위해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마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어떤 분야애서 일하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그 가운데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인간적으로 아등바등 대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회개하고 열심을 내면 어떻게 해주신다고 했습니까? 21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의 측근’이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세상에서 조금 높은 사람의 측근만 되어도 거들먹거리는데, 예수님의 측근이 된다는 게 얼마나 복된 일이겠습니까? 반드시 세상에서 승리하고, 저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상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전보다 많이 풍요로워지고 유식해졌다고 당연히 신앙도 좋아졌으리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옛날 한국초대교회 성도들은 가난하고 무식했지만 순수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한겨울 추위에도 수십 리, 심지어 수백 리를 걸어서 교회에 갔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핍박과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온 밤을 새우고 금식했습니다. 말씀대로 성결하게 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금연금주 운동을 펼치고, 유혹이 와도 눈앞의 이익 때문에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신앙의 양심을 지켰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겁니다. 그 덕분에 부유해졌고 그 덕분에 유식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부요함과 그 유식함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라오디게아교회 교인들처럼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요? 아니, 이미 그런 가운데 젖어 있는 것은 아닌가요?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유머 작가 루코크의 풍자적 콩트를 소개해드립니다. 그는 『현대판 성령강림 사건』을 다음과 같이 풍자해서 썼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린다는 광고가 나갔다. 적어도 120명은 모였어야 할 예배에 출석한 사람은 겨우 40여 명이었다. 베드로는 최근 가족과 함께 구입한 갈릴리 호수의 별장으로 주말여행을 떠났고, 바돌로매는 집에 손님이 와있기 때문에 예배에 나오지 않았다. 빌립의 가족은 간밤에 늦도록 계속된 파티의 후유증으로 자고 있으며, 안드레는 새 차를 구입하려고 모터쇼에 갔다. 마태는 근무처인 세무서에 시간 외 근무를 나갔고, 요한은 사업 상 골프를 치러 떠났다. 도마는 취직시험이 주일과 겹쳐서 나올 수 없었다. 불길 같은 성령도 망설이다가 다락방 앞에서 되돌아가고 말았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혹시 여기서 우리가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 이것이 혹 오늘 우리의 자화상이라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될 겁니다. 물질은 많아도 행복하지 못했던 사람이 행복해 질 겁니다. 물질이 없다고 비관하던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질 겁니다. 가정이 행복해질 겁니다. 교회가 부흥될 겁니다. 세상이 변화될 겁니다. 아무쪼록 금년에는 지난해보다 조금이라도 예수님께 다가가는 열심을 냅시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출처/홍문수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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