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보는 자의 행복/ 마태 5:8
설교자에게는 성도들이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닫도록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어떤 본문에서는 이것이 의도한 대로 쉽게 풀리지만 어떤 본문에서는 어렵게 고전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는 본문도 설교자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어려운 본문입니다. 저 자신이 이해를 못해서 어렵다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이 말씀을 지금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살아있는 음성으로 받을 수 있도록 바로 전달할까?'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한 주간 동안 내내 씨름하면서 느꼈습니다. 제가 고심을 많이 하고 기도도 했는데, 결국 설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설교를 통해서도 성령께서 여러분 각자의 마음 마음에 '이 말씀의 의미가 이것이고, 이 말씀은 바로 나를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 때 무엇인가를 보면서 삽니다. 그 대상이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눈을 감으나 뜨나 돈을 보고 뜁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지의 미를 추구하는 데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그리고 정치하는 분들은 권력과 명예를 항상 눈앞에 두고 삽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 외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보면서 한 생을 살게 되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이 평생 무엇을 보면서 뛰느냐를 놓고 그 사람의 질을 평가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도 대동소이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똑같이 사회 생활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믿음 좋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고 사는 법은 없잖아요? 따라서 우리 역시 무엇인가 각자 성취하려고 하는 목표를 앞에 놓고 그것을 쳐다보면서 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약에 야곱이라고 하는 위대한 족장을 아시지요? 야곱은 20년 동안 처가에 얹혀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마음에는 항상 꿈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기반 닦아서 독립해 볼까?' 이것이 그의 평생 잊어버릴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0년 동안 야곱은 무엇을 쳐다보고 살았는지 아십니까? 아롱진 양, 알록달록한 염소, 까만 소 등, 흰 것을 제외한 모든 알록달록하거나 검거나, 점이 섞여 있는 짐승만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하얀 것은 다 삼촌 것이지만, 그런 얼룩진 것은 전부 자기 것이 되도록 계약이 되어 있기 때문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부 알록달록한 것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한 살림 톡톡히 차려 가지고 독립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야곱의 그와 같은 태도를 나쁘다고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닙네, 제자훈련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삽네 하면서 자기가 하는 일은 적당히 내버려두고 날마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요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경쟁 사회에서 앞을 내다보고 자신이 세운 목표를 바라보며 집중해서 뛰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일에,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하는 일에, 공무원은 공무원으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로, 앞을 향해서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세운 목표를 바라보고 뛸 지라도 그 목표, 그 원하는 것을 하나님보다는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똑같이 사회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에 비해서 정말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눈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마음의 눈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게 하는 것을 일컬어서 소위 거듭나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느니라.' 이 보는 눈은 어떤 눈을 가리킵니까? 심령의 눈, 마음의 눈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본다는 말은 예수님을 본다는 말이요, 예수님을 본다는 말은 하나님을 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이 눈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멘!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예배를 드리십니까? 설마 저를 보고 예배드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보는 눈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은 복되고 행복하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6절입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그 본다는 눈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눈입니다.
여러분이 다 이해를 하시겠지만,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을 조금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충 알 것 같아도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 자신도 모르는 소리를 하는지 모릅니다.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좀더 보충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본다'라는 것은 거룩하시고 영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인지하고 경험하는 심오한 영적 세계를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가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고, 육신의 눈을 가지고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이 초월적인 존재를 우리가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인지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 '본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할 때 이 '본다'와 거의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가 또 하나 있습니다. '안다'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안다.' 즉, '하나님을 본다'와 '하나님을 안다'는 이 두 말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 예로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사랑하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아침이고 저녁이고 그 차가운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가만히 보면 참 놀라운 말씀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은 이미 예수 믿는 신실한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하나님이여,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허락하셔서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예수님 알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성령을 더 알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밝혀서 보게 해달라는 말이 정상입니까? 알게 해달라는 말이 정상입니까? 눈을 열어서 보게 해달라고 해야 그 말이 앞뒤가 맞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게 해 달라고 하지 않고 더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말이나 '안다'는 말이나 별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다'라는 표현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깊이 인지하고 경험하면 벌써 보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가득히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알게 해 달라는 뜻으로 사용한 용어는 '에피그노세이(epignosei)'라는 헬라어인데 이 말은 굉장히 복잡한 말입니다. 어떤 면에는 차원이 깊은 말입니다. 빈 자리가 없도록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가득하게 채워 달라는 것입니다. 빈 자리가 없도록 하나님을 가득하게 알 수 있게 되는 정도면 '본다'고 하나 '안다'고 하나 차이가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마음의 눈은 더 밝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보게 됩니다. 모르면 모르는 만큼 하나님은 희미하게 보이고 작아 보입니다. 성경 말씀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가득히 담고 있는 사람은 벌써 하나님을 아는 영적 지식을 상당히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하나님을 가까이 보고 크게 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때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를 잘 믿는 에배소 교인을 위해서 하나님을 더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지요. 날마다 날마다 이 기도가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지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려면 꼭 필요한 요건이 또 하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청결하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선 말 그대로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몸에 있는 눈은 하루에 한 2만 5천 번 정도 깜빡거린다고 합니다. 깜빡거리면서 눈물샘에서 나온 깨끗한 액으로 안구를 계속해서 씻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먼지 하나라도 남아 있지 않도록 깨끗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밝게 만물도 보고 사람도 보고 글도 보는 것입니다. 청결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눈을 이런 식으로 닦는 것처럼 깨끗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죄는 마음을 더럽게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남을 미워해 보십시오. 마음이 침침해지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점점 흐릿하게 보입니다. 증오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해 보십시오. 마음이 달라집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 계속 미움의 불길이 타오르면 그 마음의 눈은 어두워집니다. 그럼 누가 안 보입니까?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음욕을 품어 보십시오. 잘 생긴 여자를 볼 때마다 이상한 생각을 해 보십시오. 벌써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안 보입니까?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알고 있어도 더러워지면 안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눈을 갖고 있어도 눈에 무엇인가가 덮이면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거짓말을 함부로 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옆에 두고도 못 봅니다. 마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프랑소아 모리악이라고 하는 문학가는 오래 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평소에 자기 몸 속에서 독사처럼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성적인 욕정 때문에 굉장히 고통을 당하고 산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에서 좀 자유할 수 있도록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참 불행하게도 너무나 강한 욕정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모리악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가 문학적인 재질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런 욕정과의 싸움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사람이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8절을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음의 불결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영적 세계에도 물리적 세계처럼 따라야 하는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더 높은 사랑,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는 데로 나아가려면 정결함은 그 필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사랑의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더러워지면 더러워질수록 하나님은 멀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죄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됩니다.
청결함의 두 번째 의미는 마음이 갈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중적이지 않은 마음, 위선적이지 않은 마음이 청결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로 넘어가면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기든지 해야지 두 사람을 똑같이 섬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그런데 이 말씀 바로 앞의 22,23절을 보면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둡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마음이 갈리면 하나님이 안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조금 주었다가 또 세상에 나와서는 돈에 마음을 주면 마음이 갈립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보아야 될 신령한 영안을 가지고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면 마음이 갈려서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왜냐하면 청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갖고 있으니 그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청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눈을 감으나 뜨나 하나님을 보면서 살기를 원합니까? 청결해야 합니다. 마음이 갈라지면 안됩니다.
오늘 성령께서 사랑하는 형제들의 영혼을 향하여 이렇게 물으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이 있느냐? 하나님을 보고 싶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분을 알고 싶은 거룩한 열망이 너의 마음에 있느냐?' 그런 열망이 있다면 우리 마음을 더럽히는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갈라놓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보는 행복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키에르 케고르는 기독교 철학자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이 사람은 평생 독신으로 있었기 때문에 창녀들의 유혹을 자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그가 마음에 드는 어떤 창녀 때문에 몹시 고통을 당했습니다. 거기에 말려 들어가면 어려워진다는 것을 그도 잘 알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에 자꾸 끌리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몹시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일기장에 이런 말을 써 놓았습니다. '마음의 깨끗함, 진정한 마음의 깨끗함은 오직 한 가지 목적에 몰두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목적에 내가 몰두할 때에 나는 내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으로 가슴이 불 탈 때면 마음이 더러워질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가 상승 작용을 일으킵니다.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불타면 내 마음은 깨끗해집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간단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야고보서 4장 8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이 말은 '하나님을 가까이 가서 보라.'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보기를 원할 때에는 꼭 기억해야 될 중요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마음을 청결케 하여 하나님을 보는 자는 굉장히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이 청결해서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보고 사는 사람만큼 행복한 자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을 감으나 뜨나 하나님만 눈 앞에 보이는 사람,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 가득히 채우고 있는 사람, 세상에 이 사람만큼 만족하고 살만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내 마음에 가득합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좌우하시는 하나님을 밤이고 낮이고 보면서 삽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 가운데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항상 내 눈앞에 계십니다. 우리가 그처럼 하나님의 존전 의식을 가지고 매일 매일 사는 사람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두렵게 할 것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이는 사람을 누가 두렵게 만듭니까?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불만이 쌓일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이 그 눈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데 무엇이 불만입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좌절하고 앉아서 탄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안에는 좌절이 없습니다. 절망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보면서 사는데 그 사람을 누가 끌어 앉혀서 탄식하게 만들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이 '하나님을 보는 자가 복이 있다.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것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솔직히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시는 옛날 부모님들이 날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면서 그 하나님 때문에 세상적인 것은 갖추지 못한 것이 너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만족하고 감사하고 웃고 찬송하고 사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고 할 때, 안다고 할 때에는 한 가지 알아 둘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부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엄청나게 광대하신 분인데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한꺼번에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는 품성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품성, 사랑의 품성, 전지전능하신 품성, 무소부재 하신 품성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이시기 때문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품성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품성을 우리가 다 한꺼번에 볼 수가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 주십시오.' 떼를 쓰고 매달리자 모세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네 요구를 들어주마. 그러나 네 육신의 눈으로 나를 보면 너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네 요구를 들어주마.' 하시고는 모세 앞을 지나시면서 손으로 모세를 잠깐 덮었다가 놓았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등만 살짝 봤다고 했습니다.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본다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의 등만 살짝 보는 것입니다. 품성 중에 하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처한 형편에 따라서 나에게 정말 은혜가 되는 하나님의 일부부만을 알게 되고 보게 되고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가 막힌 약속을 75세에 받았습니다.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마. 그리고 너에게 주는 그 아들을 통해서 전세계 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나이가 75세라면 나이로 봐서는 1, 2년 안에 아들을 주셔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25년 동안 가만히 계셨습니다. 기가 막힌 시련입니다. 자기도 몸이 늙어가고 아내도 몸이 늙어 갑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늙은 몸에 애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신다고 해 놓고는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고 세월만 흐르는 것입니다. 자기들 몸은 자꾸 늙어갑니다. 이럴 때 아브라함이 시도 때도 없이 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로마서 4장 17절을 보면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 아는 하나님'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만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실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만 날마다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다. 성실하신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은 반드시 내게 아들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내가 늙은 몸이 되어 죽은 것 같이 될 지라도 반드시 내 몸에서 생명이 태어나게 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성실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만 25년 동안 쳐다보면서 살다가 드디어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어서 전인류가 구원을 받는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예를 들어 봅시다. 다윗은 정치적 망명생활을 할 때,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600여명이나 되는 추종자들을 데리고 날마다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녀야 했으니, 눈만 뜨면 먹을 것이 없어서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난했는지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다윗이 보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목자처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자기 형편이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찬양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이 신하의 아내를 빼앗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밤마다 눈물로 요를 적시면서 탄식하고 고통할 때, 밤이고 낮이고 눈을 뜨나 감으나 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을 기뻐하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만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백인이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아니한 검은 아프리카 대륙에 홀로 들어가, 복음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닦기 위해서 평생을 그 속에서 살다가 죽은 위대한 선교사 리빙스턴, 그가 검은 대륙을 향해서 들어갈 때 보았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지 아십니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평생토록 그 무서운 정글 속에서 리빙스턴이 바라 본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어떤 하나님을 날마다 보고 사는지 아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치료하시는 하나님, 지혜로우신 하나님, 전부 다 욕심이 납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저 자신이 여러 가지 심적인 고통을 겪을 때가 많았습니다. 여러분을 보면 자꾸 겁이 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제가 잘못하면 여러분의 영혼이 병이 듭니다. 제가 잘못하면 여러분이 엉뚱한 길로 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여러분을 볼 때마다 겁이 나고 제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자주 진통하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보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면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할 때마다, 찬송할 때마다 제 눈앞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이 있어도 '괜찮다.' 하고 등을 두드려 주시는 하나님, 연약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채워 주시는 하나님, 죄를 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악을 악대로 징계하지 아니하시고 오래 오래 참으시면서 항상 저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제 눈에 가득합니다. 제 형편이 그렇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이 제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이 필요합니까? 어떤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까? 날마다 어떤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보면서 살아야 합니까? 각자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 하나님이 눈에 보입니까? 아브라함처럼 눈에 보입니까? 다윗처럼 날마다 그 하나님을 보면서 삽니까? 리빙스턴처럼 그 하나님 때문에 살맛 나는 인생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옥 목사처럼 눈을 감으나 뜨나 그 하나님과 떼어놓을 수 없는 하루 하루를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승리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공합니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이 하나님이라는 주제가 우리에게 크나큰 위안이 된다면서 이렇게 감격적인 말을 한 것이 있습니다. '오!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에는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명상하는 것에는 모든 슬픔을 근절시켜 주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감화력 안에는 모든 아픈 곳을 잊게 해 주는 진통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슬픔을 잊고자 합니까? 여러분의 염려를 잊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신성의 깊고 깊은 바다, 하나님을 보는 깊고 깊은 바다에 잠겨 보십시오. 하나님의 광대함에 몰두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편히 쉬다가 나오는 사람처럼 기운이 나고 생기가 돌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열심히 묵상하는 것 보다 더 영혼에 위로를 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슬픔과 비탄의 굽이치는 파도를 그처럼 진정시키며 시련의 바람들을 평온하게 해 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을 가까이 가서 보는 사람은 마음의 병을 싹 쓸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열정의 연속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자 하는 갈망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왜 창조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왜 살고 있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입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땀 흘려서 가꾸어야 할 보람된 것으로 만들려면 거기에 부응하는 큰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 목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성공해야 되는 이유도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날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보는 것보다 더 높고 숭고하고 매력적인 목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겸허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왜 나는 날마다 비참해지는가? 눈에 누가 안 보이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날마다 힘을 잃고 주저앉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어디 있는가를 찾읍시다.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지 못할지 몰라요. 무엇인가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마음이 갈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여도 희미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보이나마나 입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어떻게 나에게 힘을 줄 수 있고, 나로 하여금 용기를 갖게 하며, 소망을 품게 할 수 있습니까? 희미하게 보이는 하나님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내 가정이 왜 이 모양인가?' 하고 탄식하지만 말고 원인을 찾으십시오. 부부 사이가 왜 이렇게 사나운가 이유를 찾으세요. 내 자식이 왜 저 모양인가 이유를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보고 살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문제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주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보는 자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을 보지 마십시오. 세상에 속습니다.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실망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승리하는 비결이요, 밝게 사는 비결이요, 이 세상 사람 앞에 무언가 보여 줄 수 있는 비결입니다.
범선이 한창 대서양, 태평양을 누비던 시대에 선원이 되겠다고 배에 오른 젊은이를 훈련시킬 때면 배의 꼭대기로 올려 보낸다고 합니다. 10m, 20m되는 돛대 위로 올라가서 돛을 감든지 망을 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정신이 없겠습니까? 배가 흔들리면 바다가 온통 자기에게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고, 현기증이 나서 잘못하면 떨어지는 것 같이 힘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배를 탄 젊은이들은 비명을 지르기도 하면서 야단 법석을 떨었나 봅니다. 그럴 때마다 경험이 많은 선배 선원이 위를 향해서 이렇게 외친다고 합니다. '야, 바다를 보지마. 물을 보지마. 하늘을 봐. 왜 아래를 보니? 위를 봐.' 그렇지 않습니까? 위를 보고 하늘을 보면 아무리 배가 요동 쳐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지럽지 않습니다. 자꾸 물을 보고 배를 보기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날마다 쳐다 보는 사람은 세상이 요동 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멘!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 하나님이 보여도 희미하게 보이느냐 또렷하게 보이느냐, 작게 보이느냐 크게 보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이 아닙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날마다 보고 사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그 사람을 세상이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그 사람을 누가 이기겠느냐? 그 사람이 어떻게 좌절할 수 있겠느냐? 절망할 수 있겠느냐? 불평, 불만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보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강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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