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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왕 / 요한복음 19 : 12~22

by 【고동엽】 2021.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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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왕

말씀: 요한복음 19 : 12~22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의 무죄를 믿었고 또 하나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자처하는 자를 사형시키지 아니하면 로마황제의 충신일 수가 없다는 유대인들의 협박에 굴복하여, 박석위에 설치되어있는 재판석에 앉아 사형을 선고하고 말았습니다.

 

본문16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여기에서 `저희란'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고발한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무리들을, 그리고 좁게는 이제 빌라도의 선고에 따라 예수님에게 십자가 사형을 집행할 로마 군병들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전개되었는지 본문이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 고다) 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새 다 른 두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 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17~18)

 

마침냬 예수님을 못박을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외에 다른 두사람도 같은 현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는바, 그 두사람이란 다른 복음서가 알려주는 바와 같이 강도들이었습니다.

 

자, 이제 이 장면을 머리 속에 한번 그려보십시다. 지금 골고다 언덕 위에 세개의 십자가가 세워져있습니다. 각각의 십자가위에는 남자 1명씩이 못 박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옷을 벗기운채입니다. 세사람 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사람은 지금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부위에서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겉으로 보기에 세사람의 모습은 똑같습니다. 피흘리며 괴로워하는 그 자체로서는 세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좌우 편에 있는 자들은 흉측한 강도들이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강도가운데에서 외관상 강도와 똑같은 모습으로 못박히신채 피 흘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께서는 강도사이에서 강도처럼 못 박히어 강도처럼 죽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고발한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원하고 바라던 바였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대인의 왕이라 자처하는 달동네 나사렛 출신의 빈민 예수는 흉측한 강도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자는 강도와 함께 강도처럼 처형당함이 마땅하다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꾸몄던 대로 모든 상황이 종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19절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 었더라"

 

당시 죄수를 십자가형에 처할 때에는 죄수의 이름, 직책 혹은 죄명을 쓴 패를 십자가위에 부착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팻말은 이례적으로 빌라도가 직접 썼는데, 그 내용은 놀랍게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십자가에 못박힌자의 이름은 나사렛 출신 예수요, 그의 직책과 죄명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다시 말해 여기 못 박힌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요, 또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형에 처해졌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팻말을 본 대제사장들은 그 내용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유대인의 왕일 수 없는 예수님이 스스로 왕임을 자처하기 때문에 기를 쓰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데 반해, 빌라도가 쓴 팻말은 오히려 예수님의 유대인 왕되심을 로마총독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셈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시 빌라도 총독에게 몰려가 예수님의 팻말을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때 빌라도의 반응을 본문이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 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것을 썼다 하니라"(21~22)

 

빌라도 총독은 그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빌라도 총독이 유대인들에 대해 이처럼 단호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협박으로 인해 굴욕적으로 사형을 언도할 수밖에 없었던 빌라도로서는, 대로마제국 총독으로서의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유대인의 압력에 굴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아 버린 유대인들에 대한 빌라도의 복수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 자처하였던데 대해 유대인들이 분개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음을 잘 알고 있는 빌라도이기에, 오히려 예수님의 팻말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명기함으로써 유대인들을 멋지게 골탕 먹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 본인으로서는 로마황제의 충신으로서, 로마황제로부터 인정받지 아니한 유대의 왕을 처단한 것이므로 당연지사일 뿐, 아무런 하자가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혹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유대인의 왕이심을 믿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빌라도 총독에게 그럴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정확한 이유의 규명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빌라도가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빌라도의 복잡미묘한 성격을 도구로 삼아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빌라도가 그 팻말을 쓰고 부착한 것 같으나, 그것은 실은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골고다의 광경을 머리 속에 그려보십시다. 그 언덕 위에 십자가 세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두 강도 가운데에 주님께서 강도와 같은 모습으로 못 박혀 계십니다. 강도와 같이 피를 흘리고 계십니다. 만약 그 팻말이 없었더라면 주님께서는 강도와 함께 강도처럼 운명하시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주님의 십자가 위에 친히 팻말을 붙여 주셨습니다. 이 분은 `유대인의 왕',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만인의 구세주'시라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 골고다 언덕에서 그 팻말의 가치는 측정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본문 20절이 더 놀라운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말로 기록되었더라" 

 

경이롭게도 그 팻말은 3개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아람어였고, 로마어란 정복자 로마제국의 공식용어인 라틴어였고, 헬라어란 로마제국 이전 오랫동안 당시의 세계를 지배했던 헬라제국의 언어로써 그 당시 라틴어보다 더 폭넓게 사용되던 대중언어 였습니다.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 그분이야말로 온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만인의 구세주이심을 만방에 친히 공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팻말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가깝게는 바로 곁에 있는 흉측한 강도로부터 구별되실 수 있었고, 넓게는 자신의 죄로 죽어 가는 모든 인간들과도 구분되실 수 있었고, 죽음을 깨트리고 다시 사실 영원한 부활주이심이 증명될 수도 있었습니다.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 `유대인의 왕'이란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팻말이야말로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선물을 예수님께서 직접 요구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셨을 뿐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길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은총을 베푸셨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본문 17절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 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자, 본문의 장면도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다. 박석 위 재판석에 앉은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에게 십자가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이내 로마군병들이 예수님을 끌고 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깨 위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운 뒤에 골고다 언덕까지 끌고 갑니다. 이것이 본문을 형상화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은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놀랍다는 것은 본문에 나타난 `지셨다'는 동사 bastazo가 수동형이 아닌 능동형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로마군병들이 지워주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메고 간 것이 아니라, 때가 되매 당신 스스로 져야할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지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나오셨다'는 동사 exerkonai 역시 능동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비록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힘이 부쳐 도중에서 넘어지기도 하셨고, 다른 복음서의 증언처럼 구레네 시몬의 도움을 받기는 하셨을 망정, 개 끌려가듯이 어쩔 수 없이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친히 자진하여 죽음의 골고다 언덕으로 나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중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사형을 선고했기 때문에, 로마군병들의 폭력에 굴복하여 어쩔수 없이, 원치 않는 십자가를 억지로 지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이루는 길임을 아시고 하나님의 그 뜻에 순명하시기 위해, 그 참혹한 십자가를 당신 것으로 생각하시고 자발적으로, 기꺼이 지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유대인의 왕'이란 선물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 속에 방치시켜 두시지 않고, 죽음속에서도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이란 부활의 보증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부터 그토록 강조하셨던 바가 예수님 자신에 의해 구체적으로 증명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매일 매일 이 현실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향하여 주님께서 주셨던 가르침의 핵심을 한 구절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마태복음 6장 33절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 에게 더 하시리라"

 

 

사람들은 먼저 자기의 욕망을 구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욕망을 좇고 따릅니다. 그 결과 한 순간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고 잠시 정상을 차지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나, 결국엔 그것때문에 화를 당하고 맙니다. 지금 세상을 온통 뒤흔들고 있는 크고작은 사건들이란, 먼저 자기 욕망을 구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순서를 바꾸라 당부하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 분의 법도를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좇는 결과로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주시는 것만 우리에게 화근이 되지 않고, 그것만 진정한 은총, 참된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한절의 말씀 속에 우리 신앙의 요체가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는 먼저 자기의 욕망을 구할 수 밖에 없고, 먼저 자기 욕망를 좇는 자는 바른 신앙인이 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아시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의 죽음을 자취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책임져 주시사 만인의 왕으로, 영원한 생명의 부활주로 영원히 세워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심을, 십자가 위에서 친히 증명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지난 4월 중 우리의 형제교회로써 창립 2주년을 맞이 한 코스타리카 시온교회를 다녀왔습니다. 그때 심한 독감을 앓고 있었는데 특히 고통스러운 것은 체온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거듭되는 번열증과 한기였습니다. 열이 오르면 식은 땀이 마구 흐르다가 갑자기 체온이 떨어지면서 주체할 수 없는 한기가 몰려 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가방을 챙기면서 비행기 속의 에어콘 냉기에 대비하여 긴소매 쉐타와 소매없는 조끼를 한개씩 넣었습니다. 그러나 들고가는 가방이 작은 휴대용 가방인지라 짐을 줄이기 위해 소매 없는 조끼를 두고 갔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비행기 속에서도 번열증과 한기는 계속 번갈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기가 들때 쉐타를 입으면 오히려 번열증이 일어나고, 그렇다고 벗으면 한기가 그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온도에서 제게 필요한 것은 소매없는 조끼였지만, 집에 두고 왔기에 어쩔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비행기 승무원이 사은품을 주었는데, 그 사은품이 소매없는 조끼였습니다. 집에 두고 온 조끼와 색깔마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조끼 덕분에 무리한 일정에 강행군을 하면서도 체력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코스타리카에 도착하여 첫날 집회를 시작하기 전 숙소에서 면도를 하던 중 면도기의 작동이 그만 멈추어버리고 말았습니다. 1.5V짜리 밧데리 2개를 넣는 초소형 면도기였는데, 밧데리가 다 소진된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코스타리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던 중, 그 곳에서 만난 교우님이 기념품이라며 주었던 조그만 상자가 생각났습니다. 가방 속에서 상자를 찾아 끌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면도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치밀한 예비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코스타리카를 떠나기 전날 밤 그곳 장로님 댁에서 저녁식사가 있었습니다. 젊은 집사님의 차를 타고 장로님의 댁으로 갔는데, 그 차의 뒷 트렁크에는 우리 일행의 여권과 항공권이 든 가방과 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식사를 하려는데 자리에 앉아 있던 또 한 분의 노 장로님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한참 후에 들어온 그 분은 코스타리카에는 잡범들이 많아 혹시나 싶어 그 차 뒷 트렁크에 실려 있던 우리 짐을 집안으로 옮겨 두었다고 했습니다. 식사가 다 끝나고 나갔을 때, 놀랍게도 길 양옆에 세워져 있는 그 많은 차들 중에 유독 우리가 타고 갔던 차의 유리창이 깨어진 채 뒷 트렁크가 열려 있었습니다. 만일 노 장로님이 짐을 집안으로 옮겨놓지 않았더라면, 여권과 항공권을 잃어버린 우리의 일정은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코스타리카에서 L.A.에 도착하던 날 밤, 미국 남가주 주님의 교회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남가주 주님의 교회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학교 강당을 빌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 도착해 보니, 그날의 집회장은 강당이 아닌 체육관이었습니다. 학교 측에서 그날밤 강당을 쓸일이 있어 부득불 체육관을 사용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뒤 교회측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날 집회에 참여한 분이 약 700여명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평소처럼 400명 밖에 수용할 수 없는 강당에서 집회가 열렸더라면 300여명이나 되돌아가야 할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에 따라 미리 취하신 신비스런 조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 비해 정말 부끄러운 삶을 살았던, 형편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보다 나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중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려 애쓸 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책임져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개인의 행복과 평강도, 그리고 사회 정의도 여기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 나를 망치는 화근도 남을 해치는 독소도 아닌, 모두를 살리는 하나님의 참된 은총, 영원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을 더하시 리라"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마음 속에 계시면서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심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우리는 먼저 우리의 욕망을 좇고 구하는 허망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토록 혼란스러움은, 우리 모두가 잘못 구해 왔음의 결과임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구하오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성령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조명아래 바로 거하여 먼저 구해야 할 것을 먼저 분별하고 먼저 실행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한 주님의 십자가가 생명과 구원의 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듯이,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 땅에 성육신케 하옵시고, 그와같은 우리의 삶으로 인해 이 사회가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과 정의로 충만한, 복되고 참된 사회가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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