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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이라는 곳
말씀: 요한복음 19 : 17~22
지난 4월 방문했던 코스타리카에서 창립 2주년을 기념하는 집회는 사흘간 계속되었는데, 마지막 날은 4월 20일 주일이었습니다. 주일 낮 예배가 끝난 뒤, 저녁시간 마지막 집회를 위해 숙소에서 쉬고 있을때였습니다. 갑자기 열린 창 밖으로부터 폭포수 떨어지는 것과 같은 요란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식간에 폭우가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창문을 닫아걸어도 소리는 여전하였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물을 쏟아 붓는 것 같은 굉장한 광경이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그 폭우를 바라보면서, 오늘 저녁 교우님들이 저 폭우를 뚫고 교회를 오려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괜히 저의 마음이 안스러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녁 집회 시작 시간인 5시 30분에 맞추어 우리 일행을 데리러 그곳 장로님이 숙소에 당도할 때에도, 여전히 비는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만난 장로님의 제1성은 `비가 와서 너무 너무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낮에 비가 오는 것이 너무 기뻐 평소에 자던 낮잠도 그날만은 자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숙소 마당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를 가지러 갈 때에도 우산을 쓸 생각을 않고, 그 폭우를 그냥 맞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날의 비는 5개월만에 내리는 비였던 것입니다. 아열대 지방인 코스타리카는 5월부터 11월말까지는 우기, 12월부터 4월까지는 건기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건기가 계속되는 다섯달 동안은 모든 식물들이 다 바짝 바짝 말라 들어갑니다. 급수 사정도 나빠집니다. 온 거리는 먼지투성이가 됩니다. 그러다가 5월에 접어들어 하루 한번씩 정기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모든 생명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 곳을 방문했을 때는 건기의 마지막 무렵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든 식물이든 상관없이 모든 생물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비를 더더욱 절실하게 고대할 때였습니다. 그때야말로 생명이 가장 고갈되는 때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은 5월에 접어들어 첫 비가 내리는 날이 되면 너나할것없이 기뻐하게 되는데, 그날은 예년에 비해 무려 열흘이나 더 빨리 비가 쏟아졌으니 그곳 장로님이 그토록 기뻐했던 것입니다.
교회를 향하여 자동차를 몰면서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첫 비가 오면 이 비를 맞으면서 나무와 잔디들의 색깔이 벌써 새파랗게 변하고 있습니다."
다섯달 동안 뜨거운 햇볕아래에서 얼마나 비에 갈했으면 첫 비를 맞으면서 초목의 색깔이 변하겠습니까? 5시경 교회에 도착하자 언제 그토록 왔느냐는 듯 비가 뚝 그치더니, 하늘이 개이면서 서산에 해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그 햇빛은 3,500평에 달하는 교회 잔디밭을 부드럽게 비추었습니다. 그 잔디밭을 본 순간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장로님의 말대로 정말 잔디밭의 색깔이 달라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일낮 예배를 드릴 때만해도 말라비틀어진 채 먼지만 펄펄 날리던 잔디밭은 온통 누런 색 천지였는데, 그 잔디들이 꼿꼿하게 선 채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초록빛을 머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 만해도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경이로운 광경이었습니다. 저는 잔디밭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참다운 생명은 오직 위로부터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산 증거였습니다. 잊지마십시오. 이 세상에는 참 생명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도리어 생명을 고갈케 할뿐입니다. 모든 생명은, 참된 생명은 언제나 위에서부터 내려옵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는 곳에 나오시니"(17)
마침내 빌라도 총독으로부터 사형이 선고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친히 지신 채 사형이 집행될 장소로 나아가셨는데, 그 장소의 이름이 골고다요, 그 뜻은 `해골'이란 의미였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이 골고다를 가리켜 갈보리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라틴어 Calvaria를 영어화한 것으로 그 뜻 역시 `해골'입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장소의 지명이 왜 골고다, 즉 `해골'이었는지에 대하여는 세 가지의 견해가 유력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의 지형이 마치 해골모양과 흡사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그 장소가 옛날부터 사형 집행장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여기 저기에 해골들이 나뒹굴고 있었던 까닭이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이 오시기 훨씬 이전부터 유대인 사이에 내려오던 전설처럼 바로 그곳에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무덤이 있었고, 그 무덤으로부터 아담의 해골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머나먼 서울에 앉아 있는 우리로써는 그 옛날 그 곳 지명이 왜 `해골'로 명명되었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왜 그 곳 이름이 `해골'이냐를 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넓은 천지에서, 하필이면 `해골'이라 불리우는 골고다에서 못 박히셨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십자가의 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해골이라 불리우는 곳 위에 세워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번 그려보십시오. 그 자체로서 얼마나 위대한 메시지입니까? 해골이란 바로 죽음의 결과인 동시에 십자가란 참 생명의 표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넒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유독 해골이라 이름지어 진 곳에 세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아무리 죽음이 난무하여 백골만 남아 있다 할지라도 그 곳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만 임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지기만 하면 바로 그곳에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임함을, 바로 그 해골의 땅에서 새로운 생명의 열매가 맺힐 수 있음을 만방에 보이시기 위해서는 골고다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해골 위에 세워진 십자가, 그 십자가에서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타고 위로부터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그 생명의 보혈에 의해 생명이 회복되고 소생하는 해골들 ― 세상에 이보다 더 극적인 생명의 역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니, 성경의 핵심을 어찌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본문 속의 골고다란 예루살렘성 밖의 특정한 한 지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이 세상 전체를 뜻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치고 죽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헬쓰클럽에서 체력을 단련하고 고급 화장품으로 가꾼다 한들 그 육체가 썩어 끝내 해골이 되지 않을 자가 있습니까? 이 세상 살아 있는 자란 너나 할 것 없이 실은, 모두 미래의 해골에 불과합니다. 우리라고 해서 예외인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이 온통 골고다, 우리 각자 각자가 곧 해골 언덕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골고다인 이 세상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골 언덕인 우리의 심령 속에 갈보리의 십자가를 높이 세우라는 것이 오늘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 때 십자가의 보혈을 타고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해골 같은 이 세상을, 골고다 같은 내 심령을, 마치 코스타리카 교회의 잔디처럼 파릇파릇 소생케 하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은 옆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옆으로부터 오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생명을 미혹케 할뿐입니다. 참된 생명은 아래로 부터 오지 않습니다. 아래로 부터 오는것은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고갈시킵니다. 참된 생명은 언제나 위로부터만,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흘러내립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의 질문이 제기됩니다.
첫째,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나무로 십자가를 엮어서 아무데고 세우기만 하면 그 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내리느냐는 것이 첫째 질문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누구에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시하고 증거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나무 십자가 위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세우기만 하면, 그 나무가 위로부터 내리는 생명의 통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천년 전 골고다 위에 세워졌던 십자가가 중요하다면 그것이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십자가 위에 해골같이 사망에 처한 인간들을 살리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분의 그 희생이 위로부터 임하는 참 생명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해골 같은 인간을 살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무로 만들어지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겐가 십자가를 제시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아무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그의 생명을 위하여 어떤 희생이나 헌신도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희생과 헌신이 없는 곳에서는 결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속에서 갓난 아이의 생명이 자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자기 희생만이 위로부터 임하는 생명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골고다 위에 세워졌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둘러보십시오.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전국이 십자가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는 곳마다 십자가 천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날이 갈수록 생명의 빛을 상실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나무나 아크릴로 만들어진 모조 십자가 세우는 일에만 열심일 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헌신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참 십자가 세우는 일에는 전혀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정녕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나무 십자가의 제조자나 공급자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희생의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써 치루어야 할 헌신과 희생을 주저치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우는 것이요,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길입니다.
영국 런던 교외인 줴라드 크로스(Gerrads Cross)란 곳에 WEC International, 즉 국제복음선교회가 있습니다. 몇해전 그곳을 다녀온 강윤식집사님의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WEC International은 20년간의 선교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C.T. Studd란 분이 1913년, 다시 20년간의 아프리카 선교를 새로이 떠나기에 앞서 설립한 단체입니다. 그 분은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인기 절정의 크리켓(Cricket) 국가대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그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와 중국으로 떠납니다. 우리로 치면 마치 선동열 선수가 어느 날 갑자기 캄보디아 선교를 간다며 선수생활을 정리하고 출국해 버리는 것과 같은 신선한 충격을, 그 분은 영국민들에게 주었습니다. 다시 아프리카로 떠났던 그 분은 끝내 아프리카에서 뼈를 묻습니다. 아프리카에 머물던 20년동안 그 분은 영국에 남겨 둔 가족을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는 그만큼 먼 나라였습니다. 그 분이 아프리카에서 순교한 뒤, 그 분의 부인은 남편의 뜻을 받들어 WEC를 오늘의 모습으로 일구어 놓았습니다. 그 WEC 본부의 지하실에 내려가면 수 십개가 넘는 가방들이 바닥과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된 채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임지로 떠나는 선교사님들이 임기를 마친 뒤 귀국 길에 찾아가겠노라고 남겨둔 가방들입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선교사님들의 가방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남아있는 가방들 - 바로 그 가방들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위한, 타인을 위한 자기 희생, 자기 헌신의 표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방의 주인들이 어느 곳에서 생을 마감했건, 그들이 있었던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 주기에 합당한 참된 십자가의 증인들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남긴 가방은 단순한 가방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또다른 형태의 십자가요 이 땅이 남겨진 참 생명의 흔적인 것입니다. 서구 선진사회의 자산이란 바로 이런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란 결국 삶이란 하나의 가방으로 남게됩니다. 지금껏 여러분들께서 꾸려온 가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기 희생과 헌신의 표적입니까, 아니면 자기 욕망과 이기심의 결정체입니까?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위로 부터의 생명과 부활입니까, 아니면 아래로부터의 죽음과 해골입니까?
우리가 해골 언덕과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이 골고다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 이 땅을 살리기 위해, 공동 묘지 같은 이 세상 위에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를 세우기 위함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인생은 위로부터 임한 생명이 충만한 가방이 되어 이 세상에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인지 아십니까? 이와같이 생명이 충만한 가방이 많이 남겨진 나라- 그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지금 이 사회에는 이기심과 욕망의 다툼만 있을 뿐, 자기 희생 자기 헌신을 행하려는 자는 지극히 드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희생의 삶이 배제된 나무 십자가만을 양산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 헌신과 자기 희생 없이 십자가는 있을 수 없고, 십자가 없는 곳에 생명의 역사는 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이 사회를 위하여,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지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으로 해골같은 이 땅위에 십자가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모두 이 땅을 골고다 언덕으로 만들어 가던 죽음의 삶에 분명한 종지부를 찍게 하옵소서. 오직 위로부터 임하는 생명의 통로가 되어, 갈보리 같은 이 사회를 바로 세우는 십자가의 실천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단순한 십자가의 전파자가 아니라, 변함없는 십자가의 실천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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