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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석에 앉았더라

by 【고동엽】 2021.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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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석에 앉았더라

 

 

저녁을 먹으면서 셋째 아이가 수수께끼를 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통한 도술을 행하는 도사를 만나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도사님, 이제껏 저는 늘 엑스트라 아니면 졸개로 살아 왔습니다. 제발 부탁드리오니 저를 위대한 스타인 동시에 왕의 자리에 앉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도사가 그 사람의 청을 즉석에서 들어주었는데, 과연 그 사람이 무엇이 되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태껏 아이들의 수수께끼에 답을 맞혀 본 적이 없는 저였기에, 그날도 셋째에게 답을 물었습니다. 답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스타킹'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원했던 대로 스타와 킹(king), 즉 왕이 동시에 된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에 식사하던 온 식구들이 웃었습니다. 저도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박장대소를 하는 제 마음 속으로부터 이런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맞다 맞다, 넘볼 수 없는 자리를 넘보거나 차지하면 아무것도 안된다."

60년대 말경에 이런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 의자에

 

주인이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이지."

 

당시 자고 일어나면,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아무 자리나 마구 차지하는 세태를 풍자, 비판하는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까 어떻습디까? 어느 자리이건 아무나 앉기만 하면, 정말 그 사람이 그 자리의 주인이 됩디까? 앉아 있는 동안 주인이라 불리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자리에 앉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일때, 혹은 자신의 자리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일 때, 그 자리에서 제대로 되어 지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리에 앉아 있는 장본인은 물론이요,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다는 것이 과거가 주는 교훈입니다.

 

근래에 들어와서 조선왕조의 제 26대 왕인 고종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시도되고 있습니다. 즉 고종이 무능하게만 전해지는 것은 일제에 의한 조작이요, 실제로는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여러모로 애썼던 기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 왕치고 자기 나라와 자기 왕권이 망하는 것을 달가와 할 왕이 있겠습니까? 그런 경우엔 누구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쓸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는 것과 나라를 지킬 능력을 갖추고 실제로 나라를 지켜 낸다는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 대원군과 왕비 민비 그리고 외척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왕권 한번 제대로 행사해 보지 못한 채 망국의 발판만을 제공했던 고종은, 그 격동의 시기에 왕의 자리에 앉을 만한 적격의 인물이 었다고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가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왕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왕의 자리에 앉았을 때, 왕의 자리에 앉은 후에도 왕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그것은 고종 한 개인이 독살 당하는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온 민족이 나라를 송두리째 잃고 오랜 기간 동안 식민통치의 고통을 겪어야 했고, 그 후유증은 광복 5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각 방면에 걸쳐 남아 있습니다. 인간과 자리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무릇 살아 있는 사람이란 다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게도 죽은 자를 위한 자리가 있기 마련인데, 어찌 산 사람에게 산 사람으로서의 자리가 없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어떤 자리이든, 여하튼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입니다. 그 자리가 높은 자리일 수도 있고 낮은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큰 자리일 수도 있고 작은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의 자리일 수도 있고 사회 속에서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의 모양은 다 다를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들이 앉아 있는 모든 자리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 13절 상반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도대체 빌라도가 누구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습니까? 1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유대인들이 고발한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 총독이 그 분의 죄없음을 거듭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풀어 주려고 하자, 유대인들이 일제히 `스스로 왕이라 참칭한 반역자를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가이사, 즉 로마황제의 충신일 수가 없다'고 소리쳐 외쳤습니다. 그것은, 이미 지난 4월 둘째 주일날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왕을 자처한 자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아니하면, 반역자를 풀어 준 당신을 로마황제에게 고발하겠다는 무서운 협박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귀가 얇은 사람인지라 온 로마에 모함이 횡행하고 있음을 유대인들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 그 협박의 함성을 들은 빌라도가 무엇을 했는지 본문 13절 중반절이 이렇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박석이란, 넓고 얇게 뜬 돌을 모자이크형으로 깔아 포장한 장소를 가리키는데, 빌라도는 바로 그 곳으로 예수님을 다시 끌고 오게 했습니다. 그 이유를 13절 하반절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판석에 앉았더라"

 

바로 그 곳 한 쪽 높은 단위에 재판석이 있었습니다. 그 재판석에 빌라도 총독이 앉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는 빌라도 총독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총독의 자리란 백성를 재판하는 자리였습니다. 따라서 빌라도의 착석 여부에 상관없이 그것은 빌라도만의 자리였고, 그렇기에 빌라도가 서 있을 때에도 그는 실은 재판석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라도는 조금도 거리낌없이 자기 자리인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성경 원문은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본래 헬라어에는 `자리에 앉는다'는 의미의 동사가 여러개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kathizo란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동사의 특징은 다른 동사들과는 달리 자동사인 동시에 타동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동사를 자동사로 볼 때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해 스스로 재판석에 앉았다는 의미가 되지만, 타동사로 간주할 때에는 빌라도 자신이 재판을 받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재판석에 앉혔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석에 앉혔다고 해석하는 일부 주경가들의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얼마나 놀라운 메시지입니까? 빌라도는 지금 예수님에게 최후의 선고를 내리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리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어떤 선고이든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석에 앉아 있는 빌라도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 분은 바로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겉으로만 보면, 지금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하여 자기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두껑을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정반대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 대해 얼마나 능력을 갖추고, 얼마나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다하고 있는지, 주님의 재판을 받기 위해 주님의 재판석 앞에 자기 자신을 앉혀 두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빌라도가 이 놀라운 사실을 알았더라면 빌라도의 판결은 분명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중요한 사실을 알지도 알려 하지도 않았기에, 그 자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8절), 더우기 예수님을 직접 심문했던 자로서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그 순간 목전의 여론이었던 사악한 유대인들의 협박에 못 이겨 진리이신 주님게 사형을 선고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을 고발했던 목전의 유대인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았을 것입니다. 소위 그들로부터 압도적인 여론의 지지를 한수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갈채의 순간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뒤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라도는 진리를 못박아 죽인 중죄인으로 오늘도 사도신경에 의해 정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개인은 물론이요 자기 가문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그와 타협했던 유대인들의 비극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그 날 빌라도의 법정에서 정작 재판을 받았던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빌라도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주어진 자기 자리에 대한 바른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데 대한, 주님의 공의로운 재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앉아 있는 우리 자리의 모양과 형태는 다 틀린다 할지라도, 그 모든 자리가 갖는 하나의 공통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든, 그것은 실은 내가 내 자신을 주님 앞에 앉혀 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앉아 있는 우리의 자리란 곧 주님의 재판정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가 요구하는 능력을, 그리고 책임과 의무를 얼마나 갖추고 다하느냐에 따라 사도바울처럼 주님의 상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빌라도처럼 수치와 모멸속에서 끝나 버릴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자신의 능력으로 넘볼 수 없는 자리를 단지 욕심으로 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자리에 대해 나태하거나 태만할 수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자리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재판정이기 때문입니다.

 

95년 말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었을 때, 그해 12월 첫째 주일 당부 드린 바가 있지만, 우리 대통령이신 김영삼 장로님을 위해 우리 모두 더욱 간절히 기도 드립시다. 우리 손으로 선출한 대통령이시기 이전에, 같은 그리스도인이기에 그 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다.

 

그 분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대통령으로 하나님 앞에 앉혀 두고 있음을, 그 분이 앉아 있는 청와대가 곧 그 자리를 맡기신 하나님의 재판정임을, 사람이 누구를 무엇으로 헤아리던 바로 그 헤아림으로 자기 자신이 헤아림을 받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임을, 사람이 무엇을 심든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진실에 대한 참된 평가는 순간적인 여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떠난 내일의 역사 곧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판가름됨을, 그 분이 깊이 깨달아 남아 있는 당신의 임기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장로님으로 후회함이 없이 잘 마무리하실 수 있도록, 그래서 오늘의 혼란이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날마다 그 분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만에 하나라도 그 분에게 끝내 불행한 결과가 초래된다면, 그것은 우리 국민 모두의 불행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대통령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기에, 우리 자신과 자리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법정 역시 하늘 위에 산 너머 바다 건너 멀리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우리의 자리가 곧 하나님의 재판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결국은 빌라도 일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자리는 실은 선택의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정치인이나 공직자의 자리를 선택할 수도 있고, 기업인이나 교육가의 자리를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남편이나 아내의 자리 그리고 부모의 자리도 따지고 보면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 자리를 원치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결코 인간 선택의 대상이 아닌 자리, 아무도 선택할 수 없는 자리가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식의 자리입니다. 자식의 자리만큼은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식으로서의 자기 자리를 선택할 권리를 갖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자식이란 자리는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자리인 것입니다.

 

나머지 모든 자리에 대해서는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식의 자리만큼은 친히 결정해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리 중에 자식의 자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부모님에 대하여 자식으로서의 자리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내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짓인 동시에, 부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중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첫 번째 계명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명령하시는 이유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판하시는 첫 번째 재판정은 그 어떤 자리보다도 우리가 앉아 있는 자식의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부모공경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진정으로 공경할 수 있는 자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버이 주일을 맞는 이 아침, 내가 자식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나 자신을 자식의 신분으로 하나님의 재판정 앞에 세우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은 부모 공경에도 예외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진리라(출 20:12)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어떤 자리에 앉아 있든 실은,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재판정임을 잊지 말게 하소서. 그 자리를 맡은 청지기로서 갖추어야 할 능력과 자질을 배양하기에 최선을 다하게 하시고, 그 자리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게 하시므로,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덧없는 나의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날마다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선택의 여지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자식의 자리를 잘 감당케 하여 주시옵소서.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바르게 공경할 수 있는 사람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충심으로 섬길 수 있으며, 그 사람만이 부모의 자리를, 남편의 자리를, 아내의 자리를, 사회인으로서의 자리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리를 바르게 지킬 수 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특별히 이 시간 우리의 대통령이신 김영삼 장로님을 위하여 기도드립니다. 지금 은, 대통령인 자신을 하나님의 재판정 앞에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사, 노련한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은 임기를 잘 마무리할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조변석개하는 여론이 아니라, 내일의 역사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선택할 수 있도록 대통령께 은총을 베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오늘의 이 모든 혼란이 보다 건실하고 정의로운 내일을 건설하기 위한 생산적인 진통으로, 긍정적인 발판으로 승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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