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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울어도 되는 데! (요 20:1-18)

by 【고동엽】 2021. 12. 11.
안 울어도 되는 데 (요 20:1-18)
  우리는 종종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근심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울지 않아도 될 때 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 번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는 데 심판의 잘못으로 금메달을 놓친 빙상 선수가 있습니다. 김 동성입니다. 금메달을 강탈 당하였다고 세계가 아우성이었습니다. 나중에 비디오로 우리 비전문가인 우리가 보아도 분명히 1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김 동성은 물론 온 세계가 아우성치고 김 동성은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뒤에 김 동성은 더 좋은 웃을 일만 생겼습니다.
1. 온 세계가 김 동성 편이었습니다.
2. 우리나라에서는 금메달 딴 것으로 인정하고 연금을 더 많이 책정하여 주었습니다.
3. 그 후 김 동성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여 광고수입만도 수 억에 달하였습니다. 이제 김 동성은 세계의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종종 아파서 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울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더 좋게 될 것을 공연히 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금심중에 40%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30%는 이미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12%는 근거가 없는 공연한 건강에 대한 근심이었습니다. 10%는 잡다한 문제에 대한 쓸 데 없는 근심이었습니다.
이같이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근심이 얼마나 많은 지요? 오늘 본문에서 마리가 울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울 필요가 없는 금심이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셨습니다. 돌무덤에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다음 날은 안식일이라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주일 새벽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이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일찍 무덤으로 달렸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신 것이 너무나 슬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돌무덤이 열려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돌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천사가 마리아를 보고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고 뒤를 보니 누가 서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알지 못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착각하였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 때 예수님이 다정히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마리아는 그 때서야 비로서 그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랍오니여!>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너무 반가워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한 것같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부활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이야기입니다.
마리아는 안 울어 되는 데 울었습니다. 우리도 종종 울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울 때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울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1. 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운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에 운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울지 않아도 될 때 울었습니다. 기뻐하여야 할 때 울었습니다. 흥분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는 데 알지 못 하고 운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요셉이 짐승에 물려 주었다고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아들들은 요셉이 살아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속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안 우셔도 되는 데...... 사실은 요셉이 죽지 않았는 데....." 좀 지나서 보니 요셉은 죽은 것이 아니라 애급의 국무총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울지 않아도 될 때 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데 슬퍼할 때가 있습니다. 좀 크게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49살에 돌아 가셨습니다. 어머니를 땅속으로 하관할 때 지금 파나이섬에 가서 선교하고 있는 동생은 같이 묻히겠다고 오열을 하면서 무덤으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이 죽은 개를 끌 듯이 끌어 내고 흙을 덮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길게 놓고 보면 우리는 다 죽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 더 기쁜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좀 크게 생각하며 그리 울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에 천국에 만남을 생각한다고 웃음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울어도 그리 슬피 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리아가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지만 그 뒤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여 서계셨습니다. 울 필요가 없는 데 울었습니다.


2.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울 필요가 없는 데 울 경우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사실은 결코 울 일이 아니었습니다. 금요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는 펑펑 울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 날 온 종일 슬픔속에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로 모두 능력있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더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순간에 마리아는 그것도 모르고 울었습니다. 그 사건은 울 사건이 아니라 축하하고 좋아 하여야 할 사건인 경우인데 멋도 모르고 울 때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소위 전화 위복(轉禍爲福)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가 되는 것같았는 데 결과적으로 복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언급한 요셉이 그랬습니다. 요셉을 팔았기에 요셉은 팔려 가서 애급의 국무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모합을 받았기에 감옥에 가게 되었고 감옥에 가게 되었기에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모두 아슬아슬한 전화위복의 생애였습니다. 아버지 야곱도, 형제들도 요셉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없었고 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모든 화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슬픔이나 아픔속에서도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알면 그리 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나는 기독교 방송에서 이런 감명깊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군 형무소에 두 명의 사형수가 같이 사형집행 날을 피마르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총기난동을 부려서 죄없는 민간인을 죽였습니다.
한 사람은 월남 전쟁에서 동료를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전방에서 사고를 일으킨 사형수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식욕이 왕성하여 고기나 싫컷 먹고 싶어 하였습니다. 곰곰히 생각하던 그는 기발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간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모 의과대학에 자기 몸을 해부실험용으로 사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실험용 시체가 모자라는 때라 일금 10만원에 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형당하면 시체를 가지고 가기로 계약서를 썼습니다.그는 10만원으로 닭을 사서 매일 먹었습니다. 옆 친구에게는 조금도 주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아까워서였습니다. 군침을 흘리던 옆 사형수가 물었습니다. <맛있니?> 그는 <배야 부르지만 내 살을 뜯어 먹는 데 맛있을 리가 있겠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약 3만원정도를 사용하여 고기를 먹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주머니에는 7만원이 남아 있었습니다. 한편 다른 사형수 주머니에는 15,000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있는 이였습니다.그는 <내가 죽기전에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고 죽어야 겠다>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친구가 닭고기를 먹을 때마다 자기도 같이 한 마리 사먹고 싶었던 돈이었습니다.그러나 그는 혀를 굳게 깨물었습니다. 죽기 전에 한 가지 보람있는 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침 어떤 교회 성가단이 위문차 교도소에 와서 찬양을 하였습니다. 천사같이 보였습니다. 이 돈을 그들에게 주어서 하나님을 위하여 쓰도록 하자고 생각하고 책임자 전도사님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드렸습니다.
마침 교도소에 새로 지은 교회에 강대상이 없었습니다. 그 헌금을 드리기로 정한 전도사님은 강대상을 사드는 데 보태라고 헌금하였습니다. 물론 사형수가 마지막 드리는 헌금이라고도 말했습니다.
교회 봉헌식을 하는 데 목사님이 강대상은 한 사형수가 가지고 있었던 헌금이 들어 있음을 알렸습니다. 마침 그 때 신문기자가 취재차 왔다가 감동을 받고 그 이야기를 보도하였습니다.
이 신문을 대통령이 읽었습니다. 대통령은 이런 사형수는 살려 주어도 좋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무기징역으로 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형수는 지금도 살아 전도하며 교도소지만 기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3. 결론이 좋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돌아 가셨다고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울었습니다. 무덤앞에서 그는 허탈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알고 보니 돌아 가셔야 마리아에게 좋은 것이었고, 시신이 없어져야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을 때 시신이 그대로 있었다면 마리아나 우리 모두에게는 불행한 것이었습니다. 시신이 있는 무덤으로 우리에게 소망이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시신이 사라진 무덤이야 말로 온 인류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 인류 최대의 선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결과론적으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 잘 돌아 가셨습니다." "주님! 시신이 없어진 것은 너무나 잘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을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알지 못 하고 울고 있는 것이 우리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지난 주간에 미국 텍사스 달라스에서 성막 쎄미나 171기를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에서 4년간 일하시던 전 송자 전도사님을 만났습니다. 호텔보다 더 좋은 집이었습니다. 호텔비가 하루에 123불이었습니다. 그래서 싼 모텔로 나가려는 데 그럴 바에는 그 집에서 머믈자고 하여 그 집에서 5일을 머믈렀습니다. 식사비까지 하여 그 교회에 1,000불 가량을 아껴 준 셈입니다.
그 때 김 대중이라는 분과 같이 그 집에서 머믈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여러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주 독특한 분이었습니다. 몸에 암이 6가지나 있어서 6번 수술을 하였습니다.
달라스에서 10시간 정도 거리인 뉴올리언스에 살고 계신 분인 데 달라스에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 치료 받으러 와서 이 집에서 머믈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한국 정계에서, 그리고 미국 정계에서 알아 주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습니다. 지금도 죽을 고비를 순간 순간 넘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 주시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홍제동에서 가난할 때 그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 때 산기슭에 무허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브럭크로 교회를 세울 때 그는 수 주를 모든 일을 전폐하고 현장에서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 때의 열정이 가끔 그리워진다는 말씀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죽을 둥 살 둥 수없이 많은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 때 교회를 세운 공로를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지금의 위기를 이기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심으면 미래에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그 때 나는 너무나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울 필요가 없는 데 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좀 더 깊이 보고, 좀 더 길게 보고, 좀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울 필요가 없습니다.
1. 알고 보면 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2. 알고 보면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알고 보면 결론이 좋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 오후 4시에 국방대학원 김 홍태 목사님 은퇴 찬하 예배가 있었습니다. 만 70세로 은퇴하는 예배였는 데 앞 자리에는 모두 별을 단 장성들만 수두룩 모였습니다.
김 목사님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독신으로 홀로 사셨습니다. 44년 목회하시고 은퇴하시는 자리입니다. 평생 <하나님을 기쁘시게 성도들을 유익하게>라는 말씀의 족자를 걸어 놓으시고 살아 오신 분입니다.
참으로 성대한 예배였습니다.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습니다. 3년전에 그 교회에서 부흥회할 때 목사님과 깊이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목사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은퇴하시면 저 족자를 저 주세요. 저도 평생 저대로 살고 싶어요" 목사님은 너무 좋아 하시면서 "그래! 강 목사에게 저 족자를 물려 준다면 나는 더 이상 기쁨이 없겠네, 은퇴후 가지고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전에 전화가 왔습니다. "강 목사! 내 은퇴 예배에 아서 축사하고 그 족자가 가지고 가!" 나는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은퇴예배에는 꼭 가겠습니다. 그러나 축사는 사양하겠습니다" 목사님은 "축사를 안 하면 안 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축사를 하였습니다. 나는 정말 감격속에서 축사를 드렸습니다. 김 목사님은 은퇴하시면서 감회어린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로 지난 날을 되돌이키면서 답사하셨습니다.
" 나는 어거스틴의 말 하나를 인용합니다. 과거는 아름다운 인상속에 남아 있고, 미래는 소망속에 남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과거는 정말 아름다운 인상으로 내게 남아 있습니다. 폐병 하면 죽을 때 8개월간 폐병과 투병생활을 하면서 병에서 고쳐 주시면 평생을 독신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후 독신으로 사는 데 어느 때는 결혼하고 싶어서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대상에 올라가 몸부림 치는 기도를 하면서 이겨 나갔습니다.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사람들은 내 의지가 강하여 독신으로 70세까지 견디었다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인상으로 과거를 되돌이켜 보니 독심의 장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1. 독신으로 살다 보니 주님만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2..독신으로 살다 보니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독신으로 살다 보니 기도에게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독신으로 살다 보니 헌금을 많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 독신으로 살다 보니 남에게 많이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6. 독신으로 살다 보니 세계 여행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7. 독신으로 살다 보니 하나님의 사랑으 많이 체험하였습니다.
8. 독신으로 살다 보니 성도들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성도들의 사랑을 더욱 많이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9. 독신으로 살다 보니 테니스를 잘 칠 수 있게 하여 주셨습니다.
10. 독신으로 살다 보니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셨습니다.
김 목사님은 정말 아름다운 분이었습니다. 혼자 살면서 많이 울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혼자 사니까 이렇게 좋은 점도 많았지만 두 가지 독신으로 아플 때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맛있는 음식 먹을 때 혼자 먹으면 맛이 덜 하였고, 여행 갈 때 혼자 쓸쓸히 다니니까 다른 사람들은 부부가 앉아 있는 데 너무나 외로움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너무 많이 울었지만 이제는 웃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울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곁에 계십니다" 그의 답사는 또 많은 사람을 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본 삼포능자가 쓴 빙점 이야기의 요오꼬의 고백을 말씀드림으로 바치려고 합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내가 하나님이라고 하여도 삼포능자를 축복할 것입니다.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부족하여 구멍가게 하나를 냈습니다. 운영의 묘를 잘 살려 최선을 다 하였더니 구멍가게가 슈퍼로 바뀌었습니다. 점점 대형화되었습니다. 남편도 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남편도 슈퍼 경영자로 매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앞에 구멍가게가 문을 닫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모습으 보면서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가게가 잘 된다는 사실이 옆 가게가 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좀 줄입시다. 없는 물건이 있게 하십시다. 옆 가게로도 일부러 손님을 보내 십시다" 이렇게 말하며 실제로 실천하였습니다. 옆 가게에 있는 물건 중 몇 개를 일부러 없게 하였습니다. 다 잘 살기를 바랐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남아 돌았습니다. 그 때 빙점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일약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가는 빙점의 내용을 너무나 좋아 합니다. 요오꼬라는 여자를 등장시켰습니다. 거두 절미하고 핵심만 말씀드립니다. 원수를 갚아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 원수가 어린 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원수를 갚아야 하는 데 죽어 버렸으니 끝이 아니라 그 딸 요오꼬를 데려다가 기르면서 구박하는 것이 최대의 복수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구박하며 기릅니다.
요오꼬은 펑펑 울면서 자랍니다. 자기가 데려다가 기르는 자녀임을 몰랐다가 자라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관계도 알게 됩니다. 그 때 요오꼬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나를 울리려는 환경 앞에서 울지 않고 웃겠다. 나를 울리려고 할 때 우는 것은 실패요, 나를 울리려는 환경앞에서 웃는 것이 성공이기 때문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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