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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왜 제때 안 주시나? 출17:1~7

by 【고동엽】 2021. 12. 11.

물을 왜 제때 안 주시나? 출17:1~7 06.08.20 설교 일부, 스크랩, 출처

 

▲홍해는 가르셨는데, 마실 물은 왜 제때 안 주시나?

본문 출17장은, 물이 없어서 다툰 사건으로서,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행진하던 도중,

백성들이 목이 말라서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백성들의 불평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아니,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의 장자를 치신 큰 능력을 베푸신 하나님이

왜 물은 제때 안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학비나 병원비가 필요할 때, 백 만 원은 아낌없이 내시던 아버지가,

용돈이 필요해서 1만원 달라니까.. 안 주신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그 큰 기적과 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셨는데,

왜 삶의 작은 문제, 내 현실적인 문제에는 왜 침묵하시는가요?...

 

오늘 우리 삶에 적용해보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큰 은혜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는데..

왜 나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엔 개입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나요? ←문제 제기

 

(아래 설교문은, 이 질문에 ‘모든 해답’을 주지는 않지만,

중요한 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내 현실 문제/기도제목에 묵묵부답 하신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광야 길에서

내 생각에는 일상의 필요에 턱없이 부족한 결핍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 하시냐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라.”라고만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제목’에 대해서는.. 보통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험에 들어서, 헌신이 싸늘하게 식어버립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신앙적인 헌신, 교회봉사는 어디서 나오죠?

‘일상의 필요를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나는 그 응답으로 주님을 위하여 내 한 인생 바치오리다...’ 아닙니까?

 

‘주여 제게 건강을 주십시오. 주여 제게 지식을 주십시오. 사회적 지위를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주를 위하여,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거래를 안 하신다.. 말입니다. 우리 속이 마구 상하지요.

 

▲나는 하나님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쓸모 있길 바라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요구하질 않고, 즉, 쓸모 있는 유능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고

나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 이걸 요구하십니다.

 

나를 목적하여 전 세계와 역사를 동원하시고,

나를 목적하고 나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

나를 써서 세상에서 큰 역사를 일으키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알아들으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목적이 되는 것’ 그것보다 더 훌륭하고 싶으십니까?

 

▲신앙이 미숙했던 시절 에피소드

예전에 제 신학교 동기생 중에 한 사람은

우리는 박정희 정권 때 신학을 했으니깐

그때 아주 영향력 있던 권력자의 따님을, 자기 아내로 달라고 기도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왜 그랬겠어요?

이 나라 백성들을 예수 믿게 하는 데는, ‘권력이 최고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 권력자의 사위가 되어서, 이 나라 이 백성을 예수 믿게 하려고 그 기도를 드렸는데..

당연히 하나님은 응답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참 황당한 이야기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신학적으로 너무 순수(무지)해서

너무 유아적으로 미숙하게 예수를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업적, 성과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것, 즉 순종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뭘 하는 것이 아니라, doing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세상의 것을 채워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만 채워짐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being입니다.

 

마25장에 가보십시다. 마25:31절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리고 너희가 이렇게, 이렇게 나에게 했다라고 칭찬을 하십니다.

그러니깐 의인들이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리고 영벌을 받을 자들에게 똑같이 말씀 하십니다.

너희가 내가 이렇고, 이럴 때 돌보지 않았다.

“우리가 언제 주께서 그런걸 보고, 안 돌봤습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아니한 것이 내게 아니한 것이니라.”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한 일, 또는 지극히 작은 일’이 <최후의 심판>의 기준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양과 염소가 나눠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의 판결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관장, 총장, 대장, 회장이 되어서

언론에 날 만한 거창한 일을 하거나/안 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 (그 일은 보통 지극히 작은 일입니다.)

그것을 했느냐/안 했느냐.. 의 차이인 것입니다.

 

꼭 기관장이 되지 않아도, 달동네 할머니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자기보다 더 형편이 어려운 할머니가 있거든요. 영적으로/물질적으로..

 

▲자, 신앙의 싸움은 이런 겁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건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만나 사건에서 보는 거죠. 하루를 바치는 겁니다.

하루 하루를.. 연속되고 반복되는 매 하루 하루를..

하나님께 바치는냐/마는냐의 싸움이며,

 

그 하루에 주어진 공간/환경/사람 앞에서

성도냐/아니냐의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지극히 작은 일입니다.

 

무슨 권력자의 사위가 되어서 큰 일을 해라는 것이 아니요,

무슨 빌 게이츠가 되어서 다 먹여 살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되어도 나쁠 건 없지만..

 

다만 빌 게이츠가 되어서 뭘 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오늘 하루하루를, 지극히 작은 자에게 선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문제 제기 하기를,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면서도, 왜 내 작은 기도는 안 들어주시나?’이었습니다.

 

그 대답은,

내가 구하는 것들이.. 다 내 욕심이요.. 야망이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빌 게이츠가 되어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네 주위의 작은 사람을 돌보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5달란트 남긴 자나, 2달란트 남긴 자나.. 칭찬이 똑 같았나요?)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으로 사랑하시지, 네 모습 그 자체로 나는 너를 사랑해!

‘성과/업적/수단’으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이건↙ 아니란 얘기죠.

‘하나님, 십년만 저를 기다려 주십시오.

그럼 제가 보란 듯이 성공해서, 그 다음에 주를 위하여 남은 인생 바치겠습니다.’

 

주를 위하여.. 무엇을 가지거나, 뭣을 준비해야 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갖추어야할 조건이 없습니다.

 

▲중간 정리하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조건이

내가 드러나지 않고/발언권이 없고/주목받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나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모세 같고 엘리야 같고 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지금 처한 형편에서,

여러분이 지금 불평하고 있고,

‘이게 하나님이 정말 나에게 대해서 관심이 있긴 있는 건가?’하고

의심하고 불평하는 그 환경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너는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라!’ 하는 장소라 이겁니다.

 

신앙생활이란, 평생 이 싸움을 하는 겁니다.

 

▲한국 교회는요 말하자면 지금 턱없이 간이 부어있습니다.

교세가 크고/ 교인 수가 늘고/ 우리가 무슨 전 세계를 책임져야 하고..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통해서 크게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 저도 아멘이올시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얘기한 이것과, 정 반대되는 원리와 기초 위에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세상적 가치관이고, 자기 생각이지요.

 

우리가 힘을 가지고.. 그 힘이 무슨 숫자라든지.. 물질이든지..

또는 이 사회에서 기독교가 가지는 어떤 영향력이라든지.. 예를 들면 ‘표’

이런 것으로 자신감을 가진다면.. 한국교회는 전혀 길을 잘못 접어든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만약 이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 속한 교인들 모두가, 이 분위기에 전염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 모두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가 작은 일에 충성에 대해선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영향력있는 발언권을 갖도록

세상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 볼만한 조건을 만들어 주셔야

내가 뭘 하고, 하나님의 자녀 노릇을 할 것 아니냐?

 

라는 이런 잘못된 불평 때문에

 

여러분의 삶에

지금 실제로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계시지만,

하나님의 주권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시작하시고/이끄시고/완성할 노정에 있으나..

 

도리어

‘하나님이 살아계시기나 한 건가? 나를 사랑하시는 것 맞나?’ 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내가 정말 주님의 자녀 맞나? 그런데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안 풀려?’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평생 불만족하며 지낸다면.. 그건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일이죠.

자신의 신자 노릇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죠.

 

▲자, 올바른 영적 싸움으로 돌아가십시다.

여러분이 경제적으로/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제가 다 알 길이 없습니다마는.. 온갖 계층이 다 계실 겁니다.

 

가난하고 무식할 수 있고,

좀 더 부유하고 유식할 수도 있고,

여러분의 사회적 신분이 낮을 수도 있고/ 높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곳이나 이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달동네에 살든/ 해 동네에 살든/ 별 동네를 살든.. *빈촌과 부촌

그 동네에 혼자 살고 있진 않을 것 아닙니까?

 

그들과 동일한 삶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

여러분은 가치관과 사는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란 말입니다. 뭘 크게 된 후에,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면

달동네에서 별동네로.. 별동네에서 해동네로..

그렇게 ‘진급’한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어느 동네에 사시든지

거기서 ‘하나님의 자녀’ 노릇을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우리가 얻은 구원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는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에, 감사와 기쁨과 위로가 있지.. 불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셔서

여러분이 늘 고통스러워하고 불평하는 바로 그 환경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친히 손잡고 지금 인도하여 내신 자리요,

사실상 중요한 과정이요/ 현실이요/ 책임의 자리란 것을 인식한다면

여러분에게 남은 것은, 올바른 신앙적 반응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옳으셨습니다!’ 라고 반드시 고백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내가 불평하고, 내 처지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서 뒤돌아보면, 하나님이 나를 옳게, 최선으로 인도하셨음을

기쁨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제일 소중한 자리이고,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제일 소중한 사람이고,

지금 내가 보내는 시간이.. 가장 소중한 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관련설교 보기 : 조조와 모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영적성장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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